“헌법정신의 뿌리를 찾아”

by KG posted Sep 11, 2012
코리아글로브에서 만 세 해 앞서
8차 헌정사기행 때 쓴 글에서 뽑아 올립니다.
이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은, 지난 세 해
한 발짝도 나아가진 못했지만 대신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름입니다.

임진년 18대 대선이 끝난 뒤 그리 머쟎아
'통일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코리아글로브 님들께서 이 글을 뛰어넘는
통찰과 혜안으로 공화국의 앞날을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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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정신의 뿌리를 찾아”


                                                       090829 경술국치 99주년을 맞이하여


이명박 실용정부에 들어와 헌법정신의 논란이 뜨겁다. 현 정부를 독재라 일컫는 쪽에서는 민주주의 후퇴와 남북관계의 경색책임을 물어 심지어는 헌법파괴의 혐의까지 거론하고 있다. 하기야 정부가 인기가 없기는 하다. 전임 정부 때 대통령 놀리기가 국민스포츠가 되었다고 누가 말했었는데 이 정부 들어서는 그 대열에 꼬마들까지 가세했으니 말이다.

헌법은 선동의 소재가 아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 주장에는 심각한 논리의 비약도 주저 않는 선동의 혐의가 보인다. 상식수준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말한다면 선거부정이라든지 아니면 누가 보아도 명백한 언론탄압 등을 들 수 있다. 만약 미세한 후퇴가 있다면 그를 걸러내는 장치가 선거다. 그러나 선거부정은 둘째 치고 언론탄압이 과연 있었느냐 따지면 동의하기 어렵다. 다소 경직된 법적용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도 딱히 위법이나 탈법의 사례를 찾지 못하지 않는가. 이는 법안의 제정과 심의의 권능을 가진 의회를 야당 스스로 수시로 박차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시위대가 작년에 불특정다수에게 강요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언술의 요체는 법치를 부정하는 길거리정치의 선동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불과 한 세대의 민주화운동 끝에 두 번의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선진 민주주의국가인데 이를 하위법률로 국민주권을 제한한 3공과 5공에 비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또한 헌법을 들먹이며 엄연히 살아있는 법치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역행하는 헌법파괴행위이다.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사례로 남북관계의 경색을 드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십년을 한결같이 햇볕정책을 펼치고 화해협력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지금 평양의 정권은 명백히 적화통일을 추진하고 있는 반헌법 세력이자 반국가 세력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폴리바기닝(유죄협상제도, Plea bargaining)에 범법자가 적극 협조했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형의 경감일 뿐이지 곧바로 사면복권이나 더 나아가 정당성의 부여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현 정부가 남북관계에서도 갈팡질팡하면서 빈축을 산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는 정책을 둘러싼 논란으로 그쳐야지 정부의 성격에 관한 규탄으로 이어지는 것 또한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저급한 길거리정치일 뿐이다.

이상의 글은 서론이다. 다소 길지만 그 까닭은 분명하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들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여당을 애초부터 인정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길거리 정치세력과 그저 조용히 지켜보다 수시로 있는 선거에서 등골이 서늘하도록 매섭게 민의를 표출하는 유권자들을 확연히 분리해서 접근해야 제대로 논의의 본질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하는 공복이 사라졌다

그런데 길거리 정치세력과 별도로 유권자들도 적잖은 불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해소되지 않는 불만이 혼란한 정국의 불쏘시개로 계속 공급되고 있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법치’이지 ‘각박하고 경직된 법치’가 아니다. 작년 소고기 파동을 예로 들어보자. 정부의 행위에 무슨 범법이 있었는가. 그러나 국민들은 분노했다. 유럽의 GMO 논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먹고 마시는 것에 민감하다는 것은 곧 높은 민도를 말하는 것이다. PD수첩의 악의의 선동을 차치하더라도 왜 하필 모든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그 문제를 그리 가볍게 다루었는지 대목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용산 사태는 또 어떠한가. 매우 뒤떨어진 일괄 재개발에 의해 자영업자들은 언제든 권리금을 날리고 빈민화 될 처지에 처해있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어루만지는 정치는 사라지고 그저 엄정한 공권력의 집행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정치의 실종과 그를 대신한 법치만이 남아있을 때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실감할 수 없다. 정치는 무한대의 봉사(service)며 정치인은 그를 실행하는 공복(公僕)이다. 예를 들어보자. 소고기 파동의 광장에서 나(유권자)는 길거리 정치세력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분명하고도 사려 깊은 즉, 내 염려를 해소해줄 수 있는 정부의 언술과 정책을 너무도 당연히 제공받아야 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를 못하는 상황에서 나와 상관없는 길거리 정치세력이 법집행의 대상이 되면 나 또한 심한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고 박왕자 여사의 원혼마저 달래지 못하는 정부가 시대착오의 친평양(親平壤)세력에게 반통일 세력이라고 욕을 얻어먹어도 나는 굳이 그 공복을 앞장서서 두호해줄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길거리 정치세력은 다수 유권자의 그 불편한 심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나(유권자)는 깡패 같은 길거리 정치세력을 싫어 하지만 말귀 못 알아듣고 일 제대로 못하는 공복, 다음 채용 시기(선거) 때까지 싫어도 데리고 다녀야 하는 미련곰탱이가 그 깡패에게 몇 대 얻어터질 때까지는 모른 척한다. 물론 죽도록 얻어맞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난 정부의 탄핵사태처럼 말이다. 왜 전임대통령의 장례행렬에 그리도 많은 민심이 모였을까. 민주주의의 열망과 서민의 풍모를 추앙해서… 일부는 몰라도 다수는 결코 아니다. 민심은 탄핵 이후 네 해 내내 영패를 안겨줬으며 지금 추종자연(追從者然)하는 이들도 그와 결별하려 그리 야멸치게 악다구니를 퍼붓지 않았는가. 결국 그 원인은 정치실종에 대한 분노다. 뭐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 것도 못 하는 공복보다 그래도 일하는 내내 이야깃거리라도 만들어낸 지난 공복이 당연히 그리운 법이다.

헌법정신을 원점에서 살펴보자

그렇다면 오늘의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역사가 비롯된 처음부터 하늘자손의 긍지를 지닌 무등(無等)의 인류 집단으로서 홍익인간의 무한봉사를 당연하게 생각해온 인신(人神)의 문명을 이어왔으며 그 공감대 위에서 일찍이 고구려연맹과 부여연맹 같은 다민족의 용광로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대륙과 해양을 아우른 그 복합문명의 길을 놓치고 난 뒤에는 어쩔 수 없이 세계 최고의 불가(佛家)와 유학을 꽃피우며 또 다른 보편의 문명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야만의 식민시대에 스스로 닦아왔던 근대화의 길을 앗기고 난 뒤에는 독립운동을 통한 근대화를 줄기차게 일구어왔으며 그 절정이 곧 식민시대의 종언을 고한 3.1운동이었다. 분단과 6.25국제전의 절망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과 ‘민주주의의 신화’는 이미 그 때 예고된 것이었으며 그 하나 된 마음으로 통일의 길 또한 활짝 열 것이다. 오늘 대한국민 국민들은 다시금 조상들의 긍지를 물려받아 지구촌 인류사회에 홍익인간의 무한봉사를 하고자 하며 그를 위해 스스로 작은 지구촌, 작은 인류사회가 되어 공존공영의 길을 먼저 실현하고자 한다. 대한국민들은 세계와 오로지 누가 그 아름답고 거룩한 일을 잘 하는지 경쟁하고자 하며 스스로 그 국적이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요약한 전문은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앞서의 글과 비교해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하나는 반만년 동안 대한민국의 뿌리가 얼마나 자랑스러우며 그 자손들인 국민들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래서 소명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인류문명과 직결하느냐 세 가지를 다루었으며 또 하나는 오로지 20세기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고 국민들에게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을 잔뜩 적시해놓고 있다. 그야말로 역사인식의 천박함과 시야의 협소함을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건국 전야에서는 감동이었는지 몰라도 이미 선진국 국민들이 되었으며 그럼에도 끝없는 역사와 정치에의 갈증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60여 년 전의 헌법전문은 이제 원점에서 재고해봐야 할 문제가 되었다.

헌법정신의 뿌리는 반만년 역사공동체다

아울러 이 정도의 얘기를 할 수 있는 공복들의 집단이 나와야 한다. 80년대 이념운동 식의 사고방식을 그리 뛰어넘지 못한 분들과 ‘경쟁과 효율의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분들이라면 앞으로 누가 집권해도 대한민국 유권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글로벌시대의 글로벌국가가 된 대한민국에서 그 엄청난 국민들에게 60여 년 전의 헌법전문으로 한쪽에서는 철 지난 평등으로 선동하고 한쪽에서는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는 이야기만 늘어놓으면 주인의 입장에서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가 없겠는가. 그렇다고 그 두 가지를 짬뽕으로 아우른 실용으로 선회한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콧대 높은 유권자들은 차라리 한 쪽으로라도 제대로 가는 공복을 원한다. 그래야 반이라도 건지지 않겠는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낡은 헌법 가지고 더 이상 논란을 벌이지 말자 그리고 새로운 헌법정신을 제시할 수 있는 즉, 반만년 코리아 역사공동체의 정수를 이으며 그 안목과 시야부터 인류문명을 논할 수 있는 공복의 집단을 만들어야 다시금 세상 누구보다 거만한 유권자들에게 하늘자손의 긍지와 소명을 잇게 하고 오늘의 지구촌에서 누구도 이르지 못한 다음세대의 민주주의와 사회구성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헌법정신의 뿌리는 20세기가 아니라 반만년 우리 역사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