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코리아글로브 연구위원 淸境 김운회 인사드립니다.
지난 개천절 포항MBC와 나눈 이야기를 올립니다.
부디 반만년 역사공동체가 공존공영의 아시아를
되살리는 길잡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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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절 기념 ---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운회 교수
http://www.phmbc.co.kr/radio/open_world/listen?idx=213028&mode=view
♤ 10월 1일, 첫째 날> 20분
10월 3일은 개천절입니다.
‘하늘이 열린 날’이란 뜻이지요.
기원전 2333년, 지금으로부터 4345년 전 이날,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는 이날을 우리민족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에는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군은 누구일까요?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며, 고조선을 세운 단군...
단군은 누구이며 고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새로운 견해로
학계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김운회 교수를 모시고
우리 민족의 원류인 단군신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개천절을 맞아 다시 돌아보는 단군신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단군신화는 무엇입니까?
단군신화는 원나라 지배 시대에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신화소들이 나타납니다. 즉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원형질이 보존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 태백산 신단수, 곰과 호랑이의 민족과의 투쟁과 융합 등의 과정이 알기 쉬운 민담이나 신화의 형태로 전승된 것이죠.
일단 신화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우리는 다른 지역에서 이동한 민족이고 곰토템을 가진 부족과의 융합을 통해서 단군족 즉 코리안들이 형성되었다는 의미로 파악됩니다.
특히 이 민족들의 융합에서 단군족이 나타나면서 아사달이라는 도읍이 나타나고 이 도읍의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된 것인데 이것은 고대에 일반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 그러면 이 신화 속에서 우리 민족의 원형을 파악할 요소들은 없나요?
있습니다. 바로 아사달이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사달은 중앙아시아 말로 태양이 비치는 얕은 언덕 또는 '도읍지' 또는 '신성한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사달은 우리 민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도읍이자 나라이름이지만 아직도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문헌적인 연계가 발견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알타이 지방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원래 이 말은 알타이어로는 아스(아사)는 밝게비치는(불타는) 타라(타르)는 약간의 언덕지역 또는 낮은 산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현재 카자흐스탄에의 현재 수도인 아스타나와도 같은 뜻입니다.
제가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는 아스타나다.”라고 합니다. 아스타나 자체가 수도라는 의미인데 “한국의 서울은 서울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아사달이라는 말과 알타이는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즉 황금의 산, 태양이 비치는 밝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울(Seoul)도 ㅣ나벌 > 서라벌> 서울 등으로 그 뜻은 역시 아사달과 같습니다.
동카자흐스탄은 서몽골, 알타이 지역으로 이 지역민들의 두개골 구조와 한국인과 가장 유사하다는 연구가 있어 주목됩니다.
두개골의 구조는 인간의 기원과 동계(同系)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주요한 대상입니다. 두개골 구조와 관련된 조사항목은 60여개입니다. 예를 들면 머리뼈의 봉합선이라든가, 구멍의 유무 등으로 두개골 연결부에 있는 구멍은 한국인들 75%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통해보면
- 카자흐민족(카자흐스탄)과 거의 동일하고
- 다음으로는 몽골, 부리야트(몽골의 바이칼 호수 인근에 거주) 등의 민족과 유사합니다.
동카자흐스탄이나 알타이 지역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콩쥐팥쥐, 우렁각시, 혹부리영감, 금와왕(부여관련),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인근 바이칼지역) 등의 원산지입니다.
그리고 곰토템의 부족의 거주지는 알타이에서부터 북만주, 동만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단군 신화는 중앙아시아와 알타이 지역의 유목민들, 흔히 흉노로 알려져 있는 민족의 일부가 시베리아와 대싱안링 산맥을 거쳐 한반도로 이동해온 과정을 설화나 신화의 형태로 묘사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서자(庶子)로 묘사하고 있고요.
▷ 우리 민족이 흉노와 관련이 깊다니 전혀 뜻밖입니다.
알타이는 '황금산'이라는 의미인데 황금은 흉노의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흉노는 중국어로는 匈奴 즉 입심좋은 노예라는 의미이지만 현지 말로는 훙드스(궁드스)로 '태양' 또는 '하늘'의 의미입니다. 즉 천손족을 뜻하는 말. 하늘의 아들,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만주인, 몽골인은 대표적인 천손족 들입니다. 흉노는 특정 민족이 아니라 알타이 주변의 유목민의 통칭입니다.
황금산은 아침이면 밝게 타오르는 산을 형상화. 금은 바로 태양의 상징. 한국인들의 제 1 모산(母山), 제 2 모산은 백두산(태백산, 장백산)입니다.
황금은 지하의 태양을 상징합니다. 유목민들은 태양이 땅에서 오르는 것으로 생각하였지요. 황금은 유목민의 중요한 산업의 일부입니다. 이들의 주산업은 금은 세공업과 중개무역입니다. 즉 금은 세공 기술 전문가지요. 이것은 요즘으로 치면, IT BT 산업입니다.
금은 세공은 가벼운데다 당시로서는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산업이었습니다. 청동기를 동아시아에 전래한 것도 이들입니다. 그것이 <사기> 의 치우천황에 대한 신화로 나타나고 있지요.
한국사에서 신라계는 특히 황금에 과도한 집착.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 진출한 흉노(훈족)에 강하게 나타남. 즉 서기 4세기경에 훈제국의 아띨라에게 동로마황제가 나라를 유지시켜주는 댓가로 황금을 준다고 했다가 약속을 안지키자 열배에 해당하는 금을 내놓으라고 하였고 결국 털어갔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아는 고조선은 단군신화가 거의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란 나라는 실체가 아니라 신화 속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말도 나오는데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많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을 기존의 사학계가 애써 외면하다보니 단군신화가 유일한 듯하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고조선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삼국지>의 기록인 “과거 기자 이후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하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는 기록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조선왕 부가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물론 선진시대에는 단어가 파편처럼 단편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는 고대 수필집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가지고 역사적 증거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그 말이 옳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이규태 코너>로 한국현대사를 바라볼 수는 없지요.
그러나 눈을 돌려보면,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습니다.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 · 916~1125) 나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정사 『진서(晉書)』에는 우리가 오랑캐로만 알고 있는 선비족의 군주 모용외가 조선공(朝鮮公), 즉 조선왕으로 봉해졌고 그의 아들인 모용황이 이를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용황이 건국한 나라가 전연(前燕)입니다. 당시 모용황의 통치지역은 현재의 베이징(北京)에서 랴오허(遼河) 지역에 이르기까지 과거 고조선 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북연(北燕)의 군주 모용운(慕容雲)도 고구려 출신으로 나옵니다.
역시 우리가 항상 오랑캐로 부르던 거란족의 나라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에도 “요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고 같은 책「지리지」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고 합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랴오양(遼陽)시로 비정됩니다. 선비족(동호의 후예)이 조선왕이고, 요나라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일 것입니다.
이렇듯 기록이 많은데 이것을 한국의 사학계가 굳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죠.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고조선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에서 서북만주 일대를 지배영역으로 둔 강대국으로 전국시대의 연나라와도 힘을 겨루는 국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럼 우리의 역사에서 단군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삼국사기』나 고려 충숙왕 때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왕검(王儉)’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檀君)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지만 기록만으로 보면, ‘선인왕검’은 단지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帝王韻紀)』입니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죠.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죠.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정복은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했고 정약용 선생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단군신화를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재야사학자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보수 사학자들조차도 수필집인 『삼국유사』나 시집인 『제왕운기』를 신뢰할만한 사료로 인식하고 논지를 전개하는데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조선일보의 인기 수필 코너인 『이규태 코너』로 한국 현대사를 서술할 수는 없고 김동환 시인의 『국경의 밤』으로 1930년대의 한국의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는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증하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 현재는 소실)』에서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삼한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한 것입니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체제가 전반적으로 자리잡히면서 단군은 기자에 밀려 바로 찬밥신세로 전락하여 민간신앙의 일부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중화 국수주의적 유학인 성리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습니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죠. 단군의 몰락은 중화민족주의 유학인 성리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기자 숭배의 열풍 속에서 당연히 단군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조선 태종 때 단군은 국가 제사의 반열에 잠시 올랐지만(1412) 기자보다는 서열이 낮았습니다. 『동국통감(1484)』은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췄습니다.
▷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면 단군신화는 역사적 증거가 없는 하나의 설화에 불과합니까?
단군신화가 역사적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민간에 쉽게 뿌리를 내렸을까? 역사적 근거보다도 더 강한 민족적 신앙이 그 이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기록한 차원으로 보면 됩니다. 원나라 당시에 <게세르칸>의 신화가 크게 유행하는데 이 긴 장편 서사시인 <게세르칸> 류의 신화와 민간 신앙을 결합하여 축약한 것이 바로 단군신화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게세르칸>의 신화는 중앙시아 3대 영웅서사시에 속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한국에서는 철저히 은폐되었습니다. 아마 정치적 원인인 듯합니다. 이 신화는 <삼국유사> 이전에 지금부터 약 1천년전부터 티벳 몽골, 시베리아 등지에서 크게 유행했던 신화입니다.
이 땅에 마물(악신)들이 세상을 지배하자 널리 인간을 구하기 위해 하늘의 신이 아들인 게세르 칸에게 몇 가지의 신기(神器)를 주어 인간을 구원하는 신화입니다. 이 게세르칸의 현신(現身)이 칭기즈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멍케칸은 “하늘에는 하느님이 있고 땅에는 칭키즈칸이 있다”라고 합니다. 아직 연구가 미진하지만, 신라의 거서간도 이 게세르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桓雄)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수조신화란 곰, 호랑이 등의 거대 짐승들이 자기의 조상이라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습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죠.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 그러니까 설령 단군신화는 신화로서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는 아니라 할 지라도 그보다 더 큰 차원의 민간신앙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러면 하늘의 천손족이 유목민이라면 대부분 우리 국민이 되는 곰 토템족과는 관련성을 알 수 있는 것은 없나요?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습니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입니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이는데,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들은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곰 → 홈 → 옴 → 옴마(엄마)’가 된다는 말이죠.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도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라고 합니다. 즉 하늘 천 다지 하듯이 공격할 경을 ‘고마 경’으로 읽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고마 즉 곰이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입니다.
결국 단군신화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고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 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죠.
이 점은 단군신화를 보다 큰 차원에서 이해하고 한국인의 민족 범위를 확장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한국인의 범주를 좁은 한반도에만 국한 시키지 말고 더 넓은 알타이로 시베리아로 만주로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 개천절 기념 ---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운회 교수
http://www.phmbc.co.kr/radio/open_world/listen?idx=213040&mode=view
♤ 10월 2일, 둘째 날> 15분
개천절을 앞두고 단군신화를 다시 돌아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어제와 같이 김운회 교수님, 모셨습니다.
어제는 지금까지 하나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단군신화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는데요.
오늘은 고조선과 단군, 더 나아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좀 더 실증적인 접근을 해보겠습니다.
▷ 어제가 고조선의 시작이었다면, 오늘은 고조선의 실제 모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삼국지>에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연과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죠.
중요한 사실은 연(燕)이 왕을 칭하자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입니다. 연나라가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인 BC 330년 경이죠. 이 때부터 고조선 왕국이 시작된 것이죠. 즉 BC 4세기 초부터 독립적인 고대국가로서 고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 경에 이르러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입니다.
진시황은 전국 7개국을 모두 멸망시켰으나 고조선을 멸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삼국지』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국체를 유지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고조선의 국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진나라의 입장에서도 멀리 떨어진 고조선을 굳이 공격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적절한 외교적 균형이 유지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깁니다. 고조선은 춘추전국 시대에는 연나라와 겨루는 강국이었고 BC 4세기경에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 그러면 고조선은 어떻게 끝나게 되었습니까?
고조선의 멸망과 관련된 문제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위만의 조선이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는 점 등이죠.
과거 연나라 지역에서 BC 190년을 전후로 (위)만(滿)이 고조선으로 넘어와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 (위)만이 문제죠.
만(滿)이 나타나는 최초 기록인 『사기』에는 위(衛)라는 중국식 성이 붙지 않았고 그냥 ‘만(滿)’이라고 썼습니다. 만(滿)의 복장도 전형적 동이의 모습이었고, 또 고조선의 준왕은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만큼 만(滿)을 신임했습니다. 만(滿)은 왕이 된 뒤 국호를 그대로 고조선(조선)으로 불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만(滿)의 정체성은 ‘(고)조선인’에 가깝죠.
문제는 사기보다 300~400년 늦게 씌어진 『삼국지』,『후한서』 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 사서에서 ‘만(滿)’으로만 알려진 이름에 당시 동북에 흔한 중국 성(姓)인 ‘위(衛)’를 붙여 위만(衛滿)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를 왜곡한 중화주의 사서의 영향으로 이후 ‘위만의 조선’이란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망(BC 226)시키고 위만이 이 지역을 떠나는 시기(BC 190년경) 이 지역은 북방인과 한족의 완충지대로 국적을 단정하기도 곤란합니다. 비유하자면 만주사변(1931)에서 해방(1945)까지 시기의 연변 조선족과 유사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儉).”는 기록인데 그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也).”라고 하는데, 창려는 현재 베이징 동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고조선 왕 만(滿)이 왕검성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할 당시 한나라는 국내 사정이 매우 혼란했습니다. 한 황제 유방(劉邦)은 32만 대군을 끌고 북방 정벌에 나섰지만 평성(平城 : 현재의 따둥, 大同)에서 포위되어 뇌물을 바쳐 겨우 탈출했고, 이후 엄청난 곡식과 비단․솜을 공물로 바쳐 흉노를 무마하였습니다. 전란의 피로에 겹쳐 유방은 고향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이후 나타나는 고조선(만조선)의 정체성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한나라와의 투쟁도 더욱 심화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을 대부분 장악했고 고조선은 한나라와 흉노의 완충지대에 있었기 때문이죠. 고조선은 이런 지정학적 요소를 이용해 한과는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흉노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한서』에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고조선 왕 만(滿)이 중국인이라면 고조선은 흉노보다는 한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겠지만 고조선은 오히려 흉노와 더 가까웠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도 만(滿)은 중국인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BC 2세기는 고조선이 저력을 보여주는 시기였습니다. 춘추 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이 멸망해 사라졌지만 고조선만은 의연히 존재하면서 한나라와 흉노의 세력관계를 적절히 이용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해 거의 한 세기를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기회만 노리던 한나라는 BC 129~119년 북방을 공격했고 흉노세력이 약화되자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침공합니다.
그로부터 11년 후 한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던 고조선은 BC 108년 결국 한(漢)에 의해 무너졌지만 『사기』에 나타나는 고조선과 한의 전쟁기록은 고조선의 전쟁수행 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줍니다. 『사기』에 한나라가 육·해군을 동원해 1년 동안 공격하였으나 자중지란으로 계속 실패하자 ‘한족의 전매특허’인 이간계(離間計)로 조선을 정벌합니다. 이로써 한민족 최초의 왕국 고조선이 멸망합니다.
▷ BC 108년 고조선은 멸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유민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아가 고조선의 후예들은 어떻게 계승하였나?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한 갈래는 고구려 건설에 나섭니다. ‘추(騶)’라는 이름의 선조를 중심으로 베이징~선양 사이에서 용틀임이 시작됩니다. 다른 한 갈래는 일정한 국체를 이루지 못하고 선비라는 이름으로 잡거하게 되었고 이들이 후일 북위, 요나라 등을 건설합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집니다.
먼저 고구려를 봅시다. 현재의 요하 하류 지역에서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이라 했습니다.
고조선이 무너지고 100여 년 뒤인 AD 1세기 초까지도 고구려는 건국되지 않고 한나라의 자치현(自治縣)과 같은 형태로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서』의 기록으로 보면 당시 중국의 권력자인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게 명령하자 추가 그 명령을 거부하니 그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그의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고구려 자치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으며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입니다. 이 ‘추(騶)’가 후일 ‘주몽’의 이름을 빌려 신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 기원 전후로 추(騶)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에 해당되는 어떤 실존 인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몽․추모(鄒牟) 등은 ‘추(騶)’의 전음으로 추정됩니다.
『양서(梁書)』에는 서기 32년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했다고 나오므로 바로 이 시기가 고구려의 건국 시기로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삼국사기>나 기타의 기록에는 BC 1세기 이전부터 고구려 건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지만 그것은 한나라의 자치현으로 독립국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다음으로 다른 한 갈래는 과거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 등으로 불리며 할거했습니다. 이를 그대로 선비족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선비족은 뚜렷한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니고 그저 선비산 근처에 살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 고조선 지역의 북서부에 주로 거주하던 사람들이죠.
선비오환부는 다시 지역에 따라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拔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나눠집니다.
서기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 습격으로 수천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합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흉노가 약화되자 이들이 오르도스(현재 내몽골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합니다.
고조선은 2세기경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되는데 이 때의 영웅이 바로 텡스궤이 즉 단석괴입니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키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합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약화됩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遼河)를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 경에 선비족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납니다. 『진서』에 모용외가 조선공(朝鮮公 : 조선왕)이 되었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죠.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하고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 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죠.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역시 고조선의 후예인 탁발씨가 대두하여 건설한 국가는 북위(北魏 : 386∼534)입니다. 북위와 고구려는 때로는 결혼으로 연합하면서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합니다.
북위 헌문제(獻文帝 : 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개로왕의 국서(472)에 대하여 오히려 꾸짖으면서 장수왕을 두둔하였고, 효문제(孝文帝 : 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 : 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입니다. 문소황태후의 소생인 선무제가 등극하여 황족들의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와 진압하여 북위 조정을 장악하였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訃音)을 듣고 예복을 갖추어 거애(擧哀)하였습니다. 이 같은 효문제의 행동은 천자(天子)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정도의 애도(哀悼)의 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고조선의 후예들인 우문부의 후예입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습니다.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발상지가 요택(遼澤)이라고 하는데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고 고구려의 건국지에 속하는 곳입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주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되었습니다. BC 4세기경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습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습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ㆍ거란(요)ㆍ금ㆍ고려ㆍ청 등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 교수님은 우리가 오랑캐로 알고 있는 선비족들이 고조선의 후예라고 하는데 정사의 기록 말고도 또 다른 역사적 근거들이 있나요?
선비족의 건국신화를 보면, 고구려계의 원형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신화가 있는 『삼국사기』에 유화 부인이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고,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라고 했습니다.
이 신화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懷妊)’과 ‘금와왕(金蛙王)’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죠.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합니다. 유화 부인의 이야기의 원형으로 완전히 일치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단석괴는 선비족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습니다. 고구려 신화는 단석괴의 일대기를 마치 주몽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왕망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고구려왕 추를 초대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단석괴와 동일시한 것 같습니다.
둘째, 고구려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입니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죠.
고구려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과 관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우렁각시』,『나무꾼과 선녀』,『혹부리 영감』,『심청전』 등의 원산지죠.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입니다.
▷ 그렇다면 이들 선비족이나 만주족의 역사도 고조선의 후예들의 역사라고 보는데 일각에서는 중국의 금과 청의 역사까지 우리 역사로 끌어들이는 것은 마치 중국이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를 빼앗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관은 학문 논리보다 민족 대결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우려와 비판을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주장들이 기존 사학계의 주장들입니다. 대부분 보수 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들은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빼앗으려니 우리도 금나라․청나라의 역사를 빼앗자는 것이 아니라 보다 실증적이고 큰 차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살펴보니, 만주와 한반도 시베리아 지역의 역사는 한족(漢族)의 역사와는 분명히 다르니 이를 다시 제대로 검정해보자는 것인데 이것을 일면만 보고 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고대사 패러다임의 문제를 지적해왔습니까? 그만큼 현재의 한국 고대사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점을 먼저 보지 못하고 이 같은 연구들을 마치 극도의 국수주의적인 시도로 간주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많은 기록들을 이들을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라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오랑캐라는 것이죠.
그러면 고조선도 우리 역사가 아니죠. <삼국유사>는 수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증거가 되지 못하죠? 이씨 조선은 명백히 고조선과는 무관하게 중국이 신하인 기자조선의 후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고조선과 무관하지요. 그런데 요나라는 분명히 고조선의 옛 땅에서 고조선의 전통을 바탕으로 건국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명백합니다. 고조선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것이죠. 이것이 바로 자가당착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학계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 당장 교과서를 보세요. 역사부도를 보면 고조선의 유물들의 대부분이 모여 있는 곳이 과거 요나라 지역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폐기해야 마땅합니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학계는 철저히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이죠. 한국인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고구려와 발해 등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됩니다.
▷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겠네요. 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좁혀 묶어두려고 하고 있습니까?
성리학이 조선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면서부터 가급적이면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린 결과입니다.
‘조선’이란 국호도 ‘중국이 봉한 기자조선의 후예’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 점은 정약용 선생도 예외는 아니니 다른 유학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 조선은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칭한 용어이며 고조선의 원이름인데 그 뜻은 버렸습니다. 스스로 뿌리를 부정한 것이죠.
그 후 조선 중후기에 ‘소중화 의식’이 사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한족과 한국인 외에는 모두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력한 패러다임을 형성한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조선 유학의 성인으로 칭송 받았던 송시열은 중국의 은혜를 입어 비로소 우리 동쪽 오랑캐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지배한 것이 조선 후기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시기에는 굳이 이런 식의 사관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지배계급이 오히려 자기모순을 위장하기 위해 더욱더 소중화 사상을 강화시킵니다.
마치 현재 북한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 자기들만 강성대국이고 자기들만 소중화라는 것입니다. 이제 명나라가 사라졌으니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해괴한 사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사고 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개천절 기념 ---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운회 교수
♤ 10월 3일, 마지막 날> 15분
http://www.phmbc.co.kr/radio/open_world/listen?idx=213057&mode=view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을 맞아 우리의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하는 마지막 시간인데요.
그 사이, 단군과 고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나의 신화, 이야기로만 알았던 단군신화에 녹아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는데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우리 역사의 지평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개천절을 맞아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하는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개천절에 대한 의미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단군신화와 단군신화의 민족사적 의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김운회 교수님 모십니다.
▷ 우리에게 개천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천절은 단순히 단군신화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는 날입니다. 뿌리를 모르는 민족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는 없지요.
▷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는 역사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어떠해야 하는가?
중국은 점점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화패권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지고 있고, 특히 한국에 대하여서는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을 넘어 탐원공정과 요하문명론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역사공동체의 뿌리마저 뒤흔들고 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그들의 선전․선동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베이징발 역사도발의 배경에 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불붙고 있는 역사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역사공동체의 유래와 흐름을 제대로 복원하고 이를 인류 사회가 공지의 사실(史實)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일이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습니다.
한족(漢族)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일관된 논리는 중화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동북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면 안됩니다.
중화주의의 본질은 한족(漢族)에 의한 세계의 지배라는 것입니다. 중국인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중화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세계 인민은 중화민족에 복종하고 있거나 앞으로 복종해야할 민족들로 분류됩니다.
중국의 역사전쟁은 한반도에 거치지 않고 범 알타이인(알타이, 몽골, 만주, 한국인)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몽골 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중국의 역사왜곡은 그 동안 중국 정부가 흔히 써오던 방법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은 자기의 입지가 흔들리자 역사문제로 돌파구를 열기 위해 쓰더니,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민주화․빈부격차로 위기가 오자 역사문제로 이를 돌파하려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이징에서 불과 2시간 거리에 있는 빠다링(八達嶺)에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644년 명나라가 만든 것입니다. 즉 청나라 이전의 한족들이 생각했던 자신의 영역은 바로 만리장성까지였던 것입니다.
중국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거의 모든 나라를 장기적인 복속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은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던 센카쿠(尖閣) 열도만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키나와(沖繩)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전체도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1950년대부터도 필리핀도 중국이 회복해야할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한반도는 참으로 위태롭군요.
최근 중국은 발해를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발해도독부로, 당나라의 침입을 막은 박작성(泊灼城)을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둔갑시켜 만리장성 동단으로(그러면 결국 한반도 북부는 중국령이 되겠죠),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한족(漢族)이 발전시켜 한반도와 일본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가 대두한 것을 저는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 패권주의를 넘어서 동아시아 공존공영의 질서를 새로이 짜나갈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 교수님은 우리 민족을 만주 한반도 시베리아 등지에 걸쳐서 확장된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을 어떻게 부르고 이해 해야 하나요?
한국인을 의미하는 용어로 가장 오래 남아있는 말이 조선과 고려입니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고려(고구려)보다는 포괄적이죠.『구당서』나 『진서』, 고자(高慈)의 묘비명 등에서 보이듯이 고구려인이나 동호인도 조선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사서를 통해보면, 수천년에 걸쳐 현재의 허베이-요동․만주-한반도 등에 사는 민족을 한역(漢譯)하여 조선이나 숙신으로 불렀고, 숙신은 다시 식신(息愼), 직신(稷愼), 제신(諸申), 여진(女眞), 주신(珠申) 등으로 불렀습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조선, 제신, 주선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 발음들은 조금씩 차이는 있고 ‘쥬신’이나 ‘쨔오션(朝鮮)’, ‘쑤션(肅愼)’, ‘쥬션(珠申)’, ‘주히신’, ‘지신(稷愼)’, ‘쥐신’ 등에 가까운 말이지만 그동안 관습적으로 쥬신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쥬신으로 부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봅니다.
즉 쥬신(Jüsin)은 조선과 숙신과 관련된 여러 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발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신채호 선생께서도 지적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쥬신이란 용어를 가장 오래 쓴 사람들은 만주족과 한국인으로, 이들은 이것을 국호로 삼았다. 한반도의 조선과 칭기즈칸의 천명을 받은 청 태종이 제위에 올라 이룩한 청나라의 초기 공식명이 ‘대쥬신제국(Yeke Jüsin Ulus)’이었습니다. 이 말을 한역하면 대조선제국, 대숙신제국, 대주신제국(大珠申帝國) 또는 대제신제국(大諸申帝國)이 됩니다. 이와 달리 안타까운 것은 한반도의 조선은 발음은 쥬신의 형태를 띠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중화패권주의에 복속하기 위해 ‘기자쥬신’ 즉 ‘기자조선’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대로, 조선이라는 말의 근원은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아사달을 기점으로 하여 이 말이 현재까지 견고히 살아있는 일본어와 고구려어의 남은 자취들을 토대로 하여 아사달과 관련된 많은 원(原) 알타이어나 만주 퉁구스어들을 조사함으로써 실질적인 추적이 가능합니다.
원 알타이어나 만주 퉁구스어, 일본어 등을 살펴보면 아사달, 아스탈라, 아사다께, 아사타라, 아이신, 달 등이 ‘아사달’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서 아이신은 청나라 황족의 성으로 한역하면 김씨가 되고 달이 바로 배달입니다.
우리를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것도 아사달과 같은 개념입니다. 즉 아사달족, 아스탈라 족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한자말로 하면 조선족이 됩니다.
즉 아스탈ㄹ라, 아사다께 등의 말들이 당시의 국제어인 한자 말로 기록되면서 조선, 숙신, 식신 등으로 기록되었고, 이들의 대표 발음이 쥬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몽골 - 만주 - 한국 - 일본 등의 주류 민족은 아사달, 아시밝, 아사타라, 알타이, 밝달(배달) 등과 관련하여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쥬신이라는 말이 긴 세월 동안 정착되었기 때문에 쥬신으로 부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동안 대부분 역사가들은 『사기집해』, 『색은』,『국조보감』등을 토대로 조선이 지명(地名)에서 유래된 말로 보지만, 이 견해로는 조선과 관련된 수많은 말들을 해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고유어들이 있다가 당시 국제어인 한자 말로 기록되면서 조선 또는 숙신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말은 다시 여러 형태로 확장되었지만 그 대표 발음이 쥬신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쥬신에는 몽골쥬신, 만주쥬신, 반도쥬신(한국), 열도쥬신(일본)이 있고 이들을 합해 범쥬신 또는 대쥬신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 쥬신,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이군요. 동북아 문명의 원류를 이끌었던 쥬신이 구체적으로 개천절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원형질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있는 지 구체적인 예시를 해주실 수 있나요?
쥬신의 뜻은 ‘태양의 나라’, ‘황금의 산’, ‘알타이 산(金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즉 쥬신은 궁극적으로 알타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사달과 의미상으로 다르지 않죠.
아사달을 표현하는 말로 朝山(뜻), 紅山(뜻), 보르항산(붉은산), 긴힌산(長白山), 등이 있고 이 뜻은 (태양이 비치는) ‘붉은 산’입니다.
쥬신을 의미하는 발(發)이나 밝달(달)도 밝(밝게 비치는) + 달(산)으로 아사달과 같은 의미로 ‘배달’ 또는 ‘바타르’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산입니까?
산에 대한 깊은 신앙은 쥬신족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죠. 유목민에게 산을 매우 중요합니다. 지역의 위치를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넓은 평원에서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많은 영웅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산으로 피신하여 힘을 길러 세계를 정벌하기도 하였습니다.
������구당서������ 나 ������신당서������ 에 신라인들이 산신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고 하고, ������후한서������ 와 ������삼국지������에서는 예족(濊族)은 산천을 중시하여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수서������와 ������북사������에서는 “그 산을 매우 공경하고 무서워하여 사람들이 산 위에서 대소변을 보지 못하고, 그 산을 지나는 사람은 (각종 오물들을) 물건에다 담아 가지고 간다.”고 기록하고 있죠.
산신신앙은 한국인이 가장 강할 것이다. 위사람을 ‘모신다(崇拜한다)’는 말도 ‘뫼(山)신다’에서 나온 말로 보고있습니다.
성산(聖山)에 대한 숭배가 가장 강한 대상은 범한국인의 제2발상지인 백두산으로 예맥, 숙신, 동호가 따로 없이 쥬신의 공통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죠.
즉 숙신계인 금나라는 백두산을 ‘흥왕의 땅(興王之地)’으로 높여 왕으로 봉하여 사당을 세웠고(������금사������), 동호계인 요나라는 백두산을 황실(皇室)의 수호신으로 삼았습니다.
▷ 역사란 과거를 통해서 오늘과 내일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쥬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결국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수님, 그러면 쥬신에 대한 새로운 역사관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국 청소년 개발원’이 한․중․일 3개국 청소년 2939명을 대상으로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앞장서 싸우겠다.”는 응답은 일본이 41.4%로 가장 높았고, 중국은 14.4% 인데 반하여 한국의 경우는 10.2%에 그쳤습니다.
또 ‘전쟁이 나면 외국으로 출국하겠다.’는 응답은 한국이 10.4%로 가장 높았고, 중국은 2.3% 일본은 1.7%였습니다. 국가적 자긍심도 중국이 가장 높고 다음은 한국, 일본의 순이었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이 없는 것이죠. 특히 이 부분은 고대사 인식이 중요합니다. 동아시아의 고대사 문제는 고대사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대의 문제입니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임나일본부’를 핑계로 식민지 지배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습니다.
현대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오쩌둥이 정치적 돌파구를 역사에서 찾았듯 현대 중국 공산당도 중국 내부 문제의 돌파구를 역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연고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왜곡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사 왜곡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민족 소멸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 민족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아 우리의 정체성을 보존해가자는 말이죠.
실제로 만주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한국어 말살보다 보다 더 심각한 탄압이죠. 만주족의 정체성도 사라져 갑니다. 몽골인들의 대부분은 기약없이 내몽골에 묶여있습니다.
중국은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집어 삼키려 하는데 한국은 제대로 대응도 안합니다. 그저 중국의 동향이나 파악하면서 돈을 물쓰듯 쓰고 있습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國猶形史猶魂)’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혼을 말살하려는데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개천절을 맞아 단군신화에서부터 우리 역사를 돌아다본 ‘라디오 열린 세상’의 대장정도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이제 고조선의 역사를 좀 더 시야를 넓혀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고대 선조들이 어떤 모습으로 세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분화(分化)되고 새로운 나라들을 건설하였는지를 나아가 그들의 후예들의 역사들은 어떠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역사들을 제대로 밝혀 한편으로는 중국의 역사도발에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재발견을 통한 보다 큰 차원의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구현할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 세대가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선물이 될 것입니다.
지난 개천절 포항MBC와 나눈 이야기를 올립니다.
부디 반만년 역사공동체가 공존공영의 아시아를
되살리는 길잡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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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절 기념 ---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운회 교수
http://www.phmbc.co.kr/radio/open_world/listen?idx=213028&mode=view

♤ 10월 1일, 첫째 날> 20분
10월 3일은 개천절입니다.
‘하늘이 열린 날’이란 뜻이지요.
기원전 2333년, 지금으로부터 4345년 전 이날,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는 이날을 우리민족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에는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군은 누구일까요?
환웅과 웅녀의 아들이며, 고조선을 세운 단군...
단군은 누구이며 고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새로운 견해로
학계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김운회 교수를 모시고
우리 민족의 원류인 단군신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개천절을 맞아 다시 돌아보는 단군신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단군신화는 무엇입니까?
단군신화는 원나라 지배 시대에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신화소들이 나타납니다. 즉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원형질이 보존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내려온 민족, 태백산 신단수, 곰과 호랑이의 민족과의 투쟁과 융합 등의 과정이 알기 쉬운 민담이나 신화의 형태로 전승된 것이죠.
일단 신화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우리는 다른 지역에서 이동한 민족이고 곰토템을 가진 부족과의 융합을 통해서 단군족 즉 코리안들이 형성되었다는 의미로 파악됩니다.
특히 이 민족들의 융합에서 단군족이 나타나면서 아사달이라는 도읍이 나타나고 이 도읍의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된 것인데 이것은 고대에 일반적인 과정이기도 합니다.
▷ 그러면 이 신화 속에서 우리 민족의 원형을 파악할 요소들은 없나요?
있습니다. 바로 아사달이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사달은 중앙아시아 말로 태양이 비치는 얕은 언덕 또는 '도읍지' 또는 '신성한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사달은 우리 민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도읍이자 나라이름이지만 아직도 <삼국유사>를 제외하고는 문헌적인 연계가 발견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알타이 지방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원래 이 말은 알타이어로는 아스(아사)는 밝게비치는(불타는) 타라(타르)는 약간의 언덕지역 또는 낮은 산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현재 카자흐스탄에의 현재 수도인 아스타나와도 같은 뜻입니다.
제가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는 아스타나다.”라고 합니다. 아스타나 자체가 수도라는 의미인데 “한국의 서울은 서울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아사달이라는 말과 알타이는 사실상 같은 의미입니다. 즉 황금의 산, 태양이 비치는 밝은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울(Seoul)도 ㅣ나벌 > 서라벌> 서울 등으로 그 뜻은 역시 아사달과 같습니다.
동카자흐스탄은 서몽골, 알타이 지역으로 이 지역민들의 두개골 구조와 한국인과 가장 유사하다는 연구가 있어 주목됩니다.
두개골의 구조는 인간의 기원과 동계(同系)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주요한 대상입니다. 두개골 구조와 관련된 조사항목은 60여개입니다. 예를 들면 머리뼈의 봉합선이라든가, 구멍의 유무 등으로 두개골 연결부에 있는 구멍은 한국인들 75%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통해보면
- 카자흐민족(카자흐스탄)과 거의 동일하고
- 다음으로는 몽골, 부리야트(몽골의 바이칼 호수 인근에 거주) 등의 민족과 유사합니다.
동카자흐스탄이나 알타이 지역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콩쥐팥쥐, 우렁각시, 혹부리영감, 금와왕(부여관련),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인근 바이칼지역) 등의 원산지입니다.
그리고 곰토템의 부족의 거주지는 알타이에서부터 북만주, 동만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단군 신화는 중앙아시아와 알타이 지역의 유목민들, 흔히 흉노로 알려져 있는 민족의 일부가 시베리아와 대싱안링 산맥을 거쳐 한반도로 이동해온 과정을 설화나 신화의 형태로 묘사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를 서자(庶子)로 묘사하고 있고요.
▷ 우리 민족이 흉노와 관련이 깊다니 전혀 뜻밖입니다.
알타이는 '황금산'이라는 의미인데 황금은 흉노의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흉노는 중국어로는 匈奴 즉 입심좋은 노예라는 의미이지만 현지 말로는 훙드스(궁드스)로 '태양' 또는 '하늘'의 의미입니다. 즉 천손족을 뜻하는 말. 하늘의 아들,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만주인, 몽골인은 대표적인 천손족 들입니다. 흉노는 특정 민족이 아니라 알타이 주변의 유목민의 통칭입니다.
황금산은 아침이면 밝게 타오르는 산을 형상화. 금은 바로 태양의 상징. 한국인들의 제 1 모산(母山), 제 2 모산은 백두산(태백산, 장백산)입니다.
황금은 지하의 태양을 상징합니다. 유목민들은 태양이 땅에서 오르는 것으로 생각하였지요. 황금은 유목민의 중요한 산업의 일부입니다. 이들의 주산업은 금은 세공업과 중개무역입니다. 즉 금은 세공 기술 전문가지요. 이것은 요즘으로 치면, IT BT 산업입니다.
금은 세공은 가벼운데다 당시로서는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산업이었습니다. 청동기를 동아시아에 전래한 것도 이들입니다. 그것이 <사기> 의 치우천황에 대한 신화로 나타나고 있지요.
한국사에서 신라계는 특히 황금에 과도한 집착.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 진출한 흉노(훈족)에 강하게 나타남. 즉 서기 4세기경에 훈제국의 아띨라에게 동로마황제가 나라를 유지시켜주는 댓가로 황금을 준다고 했다가 약속을 안지키자 열배에 해당하는 금을 내놓으라고 하였고 결국 털어갔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아는 고조선은 단군신화가 거의 유일합니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란 나라는 실체가 아니라 신화 속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말도 나오는데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많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습니다. 이것을 기존의 사학계가 애써 외면하다보니 단군신화가 유일한 듯하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고조선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삼국지>의 기록인 “과거 기자 이후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하자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는 기록과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조선왕 부가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물론 선진시대에는 단어가 파편처럼 단편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는 고대 수필집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가지고 역사적 증거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그 말이 옳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이규태 코너>로 한국현대사를 바라볼 수는 없지요.
그러나 눈을 돌려보면,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많습니다.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 · 916~1125) 나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진나라의 정사 『진서(晉書)』에는 우리가 오랑캐로만 알고 있는 선비족의 군주 모용외가 조선공(朝鮮公), 즉 조선왕으로 봉해졌고 그의 아들인 모용황이 이를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이 모용황이 건국한 나라가 전연(前燕)입니다. 당시 모용황의 통치지역은 현재의 베이징(北京)에서 랴오허(遼河) 지역에 이르기까지 과거 고조선 지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북연(北燕)의 군주 모용운(慕容雲)도 고구려 출신으로 나옵니다.
역시 우리가 항상 오랑캐로 부르던 거란족의 나라 요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遼史)』에도 “요나라는 고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하고 같은 책「지리지」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고 합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랴오양(遼陽)시로 비정됩니다. 선비족(동호의 후예)이 조선왕이고, 요나라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일 것입니다.
이렇듯 기록이 많은데 이것을 한국의 사학계가 굳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죠.
이상의 기록으로 보면 고조선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에서 서북만주 일대를 지배영역으로 둔 강대국으로 전국시대의 연나라와도 힘을 겨루는 국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럼 우리의 역사에서 단군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삼국사기』나 고려 충숙왕 때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왕검(王儉)’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檀君)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지만 기록만으로 보면, ‘선인왕검’은 단지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帝王韻紀)』입니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죠.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죠.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안정복은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했고 정약용 선생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단군신화를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재야사학자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보수 사학자들조차도 수필집인 『삼국유사』나 시집인 『제왕운기』를 신뢰할만한 사료로 인식하고 논지를 전개하는데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조선일보의 인기 수필 코너인 『이규태 코너』로 한국 현대사를 서술할 수는 없고 김동환 시인의 『국경의 밤』으로 1930년대의 한국의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는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보증하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 현재는 소실)』에서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삼한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한 것입니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체제가 전반적으로 자리잡히면서 단군은 기자에 밀려 바로 찬밥신세로 전락하여 민간신앙의 일부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중화 국수주의적 유학인 성리학을 국학으로 채택하여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습니다.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죠. 단군의 몰락은 중화민족주의 유학인 성리학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기자 숭배의 열풍 속에서 당연히 단군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조선 태종 때 단군은 국가 제사의 반열에 잠시 올랐지만(1412) 기자보다는 서열이 낮았습니다. 『동국통감(1484)』은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신라 등을 높이고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낮췄습니다.
▷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면 단군신화는 역사적 증거가 없는 하나의 설화에 불과합니까?
단군신화가 역사적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민간에 쉽게 뿌리를 내렸을까? 역사적 근거보다도 더 강한 민족적 신앙이 그 이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기록한 차원으로 보면 됩니다. 원나라 당시에 <게세르칸>의 신화가 크게 유행하는데 이 긴 장편 서사시인 <게세르칸> 류의 신화와 민간 신앙을 결합하여 축약한 것이 바로 단군신화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게세르칸>의 신화는 중앙시아 3대 영웅서사시에 속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한국에서는 철저히 은폐되었습니다. 아마 정치적 원인인 듯합니다. 이 신화는 <삼국유사> 이전에 지금부터 약 1천년전부터 티벳 몽골, 시베리아 등지에서 크게 유행했던 신화입니다.
이 땅에 마물(악신)들이 세상을 지배하자 널리 인간을 구하기 위해 하늘의 신이 아들인 게세르 칸에게 몇 가지의 신기(神器)를 주어 인간을 구원하는 신화입니다. 이 게세르칸의 현신(現身)이 칭기즈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멍케칸은 “하늘에는 하느님이 있고 땅에는 칭키즈칸이 있다”라고 합니다. 아직 연구가 미진하지만, 신라의 거서간도 이 게세르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桓雄)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수조신화란 곰, 호랑이 등의 거대 짐승들이 자기의 조상이라고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습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죠.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됩니다.
▷ 그러니까 설령 단군신화는 신화로서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는 아니라 할 지라도 그보다 더 큰 차원의 민간신앙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러면 하늘의 천손족이 유목민이라면 대부분 우리 국민이 되는 곰 토템족과는 관련성을 알 수 있는 것은 없나요?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습니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입니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이는데,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들은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곰 → 홈 → 옴 → 옴마(엄마)’가 된다는 말이죠.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도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라고 합니다. 즉 하늘 천 다지 하듯이 공격할 경을 ‘고마 경’으로 읽는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고마 즉 곰이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입니다.
결국 단군신화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고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 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죠.
이 점은 단군신화를 보다 큰 차원에서 이해하고 한국인의 민족 범위를 확장할 수 밖에 없는 사회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한국인의 범주를 좁은 한반도에만 국한 시키지 말고 더 넓은 알타이로 시베리아로 만주로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 개천절 기념 ---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운회 교수
http://www.phmbc.co.kr/radio/open_world/listen?idx=213040&mode=view

♤ 10월 2일, 둘째 날> 15분
개천절을 앞두고 단군신화를 다시 돌아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어제와 같이 김운회 교수님, 모셨습니다.
어제는 지금까지 하나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단군신화의
역사적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는데요.
오늘은 고조선과 단군, 더 나아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좀 더 실증적인 접근을 해보겠습니다.
▷ 어제가 고조선의 시작이었다면, 오늘은 고조선의 실제 모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삼국지>에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연과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죠.
중요한 사실은 연(燕)이 왕을 칭하자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입니다. 연나라가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인 BC 330년 경이죠. 이 때부터 고조선 왕국이 시작된 것이죠. 즉 BC 4세기 초부터 독립적인 고대국가로서 고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 경에 이르러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입니다.
진시황은 전국 7개국을 모두 멸망시켰으나 고조선을 멸망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삼국지』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국체를 유지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고조선의 국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진나라의 입장에서도 멀리 떨어진 고조선을 굳이 공격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적절한 외교적 균형이 유지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깁니다. 고조선은 춘추전국 시대에는 연나라와 겨루는 강국이었고 BC 4세기경에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습니다.
▷ 그러면 고조선은 어떻게 끝나게 되었습니까?
고조선의 멸망과 관련된 문제에는 두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위만의 조선이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다는 점 등이죠.
과거 연나라 지역에서 BC 190년을 전후로 (위)만(滿)이 고조선으로 넘어와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 (위)만이 문제죠.
만(滿)이 나타나는 최초 기록인 『사기』에는 위(衛)라는 중국식 성이 붙지 않았고 그냥 ‘만(滿)’이라고 썼습니다. 만(滿)의 복장도 전형적 동이의 모습이었고, 또 고조선의 준왕은 국경수비대장을 맡길 만큼 만(滿)을 신임했습니다. 만(滿)은 왕이 된 뒤 국호를 그대로 고조선(조선)으로 불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만(滿)의 정체성은 ‘(고)조선인’에 가깝죠.
문제는 사기보다 300~400년 늦게 씌어진 『삼국지』,『후한서』 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들 사서에서 ‘만(滿)’으로만 알려진 이름에 당시 동북에 흔한 중국 성(姓)인 ‘위(衛)’를 붙여 위만(衛滿)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거를 왜곡한 중화주의 사서의 영향으로 이후 ‘위만의 조선’이란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망(BC 226)시키고 위만이 이 지역을 떠나는 시기(BC 190년경) 이 지역은 북방인과 한족의 완충지대로 국적을 단정하기도 곤란합니다. 비유하자면 만주사변(1931)에서 해방(1945)까지 시기의 연변 조선족과 유사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고조선이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都王儉).”는 기록인데 그 주석에 “창려(昌黎)에는 험독현이 있다(昌黎有險瀆也).”라고 하는데, 창려는 현재 베이징 동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고조선 왕 만(滿)이 왕검성을 도읍으로 하여 건국할 당시 한나라는 국내 사정이 매우 혼란했습니다. 한 황제 유방(劉邦)은 32만 대군을 끌고 북방 정벌에 나섰지만 평성(平城 : 현재의 따둥, 大同)에서 포위되어 뇌물을 바쳐 겨우 탈출했고, 이후 엄청난 곡식과 비단․솜을 공물로 바쳐 흉노를 무마하였습니다. 전란의 피로에 겹쳐 유방은 고향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이후 나타나는 고조선(만조선)의 정체성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고 한나라와의 투쟁도 더욱 심화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BC 2세기 한나라 초기에 흉노는 만리장성 이북을 대부분 장악했고 고조선은 한나라와 흉노의 완충지대에 있었기 때문이죠. 고조선은 이런 지정학적 요소를 이용해 한과는 중개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흉노와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한서』에 “(한무제는) 동으로는 조선(朝鮮)을 정벌해 현도군과 낙랑군을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잘랐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중국이 흉노와 고조선을 동일 계열의 민족으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만약 고조선 왕 만(滿)이 중국인이라면 고조선은 흉노보다는 한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했겠지만 고조선은 오히려 흉노와 더 가까웠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도 만(滿)은 중국인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BC 2세기는 고조선이 저력을 보여주는 시기였습니다. 춘추 전국시대의 수많은 제후국이 멸망해 사라졌지만 고조선만은 의연히 존재하면서 한나라와 흉노의 세력관계를 적절히 이용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해 거의 한 세기를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기회만 노리던 한나라는 BC 129~119년 북방을 공격했고 흉노세력이 약화되자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침공합니다.
그로부터 11년 후 한나라와 장기간 대치하던 고조선은 BC 108년 결국 한(漢)에 의해 무너졌지만 『사기』에 나타나는 고조선과 한의 전쟁기록은 고조선의 전쟁수행 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줍니다. 『사기』에 한나라가 육·해군을 동원해 1년 동안 공격하였으나 자중지란으로 계속 실패하자 ‘한족의 전매특허’인 이간계(離間計)로 조선을 정벌합니다. 이로써 한민족 최초의 왕국 고조선이 멸망합니다.
▷ BC 108년 고조선은 멸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유민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아가 고조선의 후예들은 어떻게 계승하였나?
흉노와 더불어 만리장성 이북을 지배했던 고조선의 붕괴는 거대한 유민의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한 갈래는 고구려 건설에 나섭니다. ‘추(騶)’라는 이름의 선조를 중심으로 베이징~선양 사이에서 용틀임이 시작됩니다. 다른 한 갈래는 일정한 국체를 이루지 못하고 선비라는 이름으로 잡거하게 되었고 이들이 후일 북위, 요나라 등을 건설합니다. 크게 보면 고조선 후예들은 고구려부(高句麗部)와 선비오환부(鮮卑烏桓部)로 나눠집니다.
먼저 고구려를 봅시다. 현재의 요하 하류 지역에서 고조선 옛터에 남은 사람들은 부여에서 유입된 세력들과 함께 고구려를 태동시켰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 “예와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가 옛 조선 지역”이라 했습니다.
고조선이 무너지고 100여 년 뒤인 AD 1세기 초까지도 고구려는 건국되지 않고 한나라의 자치현(自治縣)과 같은 형태로 있으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서』의 기록으로 보면 당시 중국의 권력자인 왕망이 흉노 정벌을 위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게 명령하자 추가 그 명령을 거부하니 그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그의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고구려 자치현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으며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입니다. 이 ‘추(騶)’가 후일 ‘주몽’의 이름을 빌려 신격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 기원 전후로 추(騶)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에 해당되는 어떤 실존 인물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몽․추모(鄒牟) 등은 ‘추(騶)’의 전음으로 추정됩니다.
『양서(梁書)』에는 서기 32년 대무신왕 12년경에 왕을 칭했다고 나오므로 바로 이 시기가 고구려의 건국 시기로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봐야합니다. <삼국사기>나 기타의 기록에는 BC 1세기 이전부터 고구려 건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지만 그것은 한나라의 자치현으로 독립국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다음으로 다른 한 갈래는 과거 고조선 북부에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비나 오환 등으로 불리며 할거했습니다. 이를 그대로 선비족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만 선비족은 뚜렷한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니고 그저 선비산 근처에 살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 고조선 지역의 북서부에 주로 거주하던 사람들이죠.
선비오환부는 다시 지역에 따라 모용부(慕容部), 탁발부(拓拔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나눠집니다.
서기 46년을 전후해 북방 일대는 메뚜기 습격으로 수천리가 붉게 변하고 초목이 말라죽어 황무지가 되는 등 천재지변이 발생합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흉노가 약화되자 이들이 오르도스(현재 내몽골 바우터우 인근)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합니다.
고조선은 2세기경 선비족을 중심으로 재통합되는데 이 때의 영웅이 바로 텡스궤이 즉 단석괴입니다. 옛 고조선의 북부인 요서 지역에서 단석괴(檀石槐)는 후일 칭키즈칸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합니다.
단석괴 사후 2세기 말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약화됩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고구려는 옛 고조선 남부 지역인 요하(遼河)를 벗어나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 경에 선비족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다시 나타납니다. 『진서』에 모용외가 조선공(朝鮮公 : 조선왕)이 되었고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조선의 이름이 고구려 아닌 모용황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고조선이 멸망 450여년 만에 더욱 강력하게 부활한 것이죠. 조선왕 모용황은 기존의 고조선 영역뿐만 아니라 훨씬 더 남하해 북중국 주요부를 대부분 장악하고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국호를 연(燕, 전국시대 연과는 다름)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고조선의 후예들이 중국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죠.
모용씨 세력이 약화된 뒤, 역시 고조선의 후예인 탁발씨가 대두하여 건설한 국가는 북위(北魏 : 386∼534)입니다. 북위와 고구려는 때로는 결혼으로 연합하면서 때로는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합니다.
북위 헌문제(獻文帝 : 454∼476)는 고구려를 정벌해달라는 개로왕의 국서(472)에 대하여 오히려 꾸짖으면서 장수왕을 두둔하였고, 효문제(孝文帝 : 471~499) 탁발굉은 고구려 왕족 고조용(高照容 : 469-519)을 황후로 맞았는데, 그녀가 유명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입니다. 문소황태후의 소생인 선무제가 등극하여 황족들의 일부가 반발하자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조(高肇)가 대군을 몰고와 진압하여 북위 조정을 장악하였고 남조 송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기도 했습니다(502).
491년 장수왕이 서거하자, 북위의 효문제가 부음(訃音)을 듣고 예복을 갖추어 거애(擧哀)하였습니다. 이 같은 효문제의 행동은 천자(天子)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가 서거한 듯한 정도의 애도(哀悼)의 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10세기 번성했던 거란(요나라 중심세력)은 고조선의 후예들인 우문부의 후예입니다. 우문부는 모용부에 의해 궤멸된 후 남은 사람들로 후에 거란으로 불렸습니다.
『요사(遼史)』는 요나라는 발상지가 요택(遼澤)이라고 하는데 이 요택(요하의 삼각주 유역)은 대릉하~요하 유역의 세계 최대 습지로 전국시대에는 고조선 땅이었고 고구려의 건국지에 속하는 곳입니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주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되었습니다. BC 4세기경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습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습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ㆍ거란(요)ㆍ금ㆍ고려ㆍ청 등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 교수님은 우리가 오랑캐로 알고 있는 선비족들이 고조선의 후예라고 하는데 정사의 기록 말고도 또 다른 역사적 근거들이 있나요?
선비족의 건국신화를 보면, 고구려계의 원형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신화가 있는 『삼국사기』에 유화 부인이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고,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라고 했습니다.
이 신화에는 ‘햇빛에 의한 회임(懷妊)’과 ‘금와왕(金蛙王)’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코드가 숨겨져 있죠.
첫째, ‘햇빛에 의한 회임’과 관련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실존 인물은 기록상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가 유일합니다. 유화 부인의 이야기의 원형으로 완전히 일치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단석괴는 선비족의 영웅으로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습니다. 고구려 신화는 단석괴의 일대기를 마치 주몽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왕망에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고구려왕 추를 초대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단석괴와 동일시한 것 같습니다.
둘째, 고구려의 원뿌리가 되는 나라의 왕을 금와왕(金蛙王)이라고 한 부분입니다. 금와왕(금개구리왕)은 알타이인의 시조죠.
고구려의 기원이 바로 알타이 지역과 관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타이 지역의 민담과 설화는 1940년대 러시아 민속학자 가르프와 쿠치약 등에 의해 집중적으로 채록되었는데, 알타이 지역은 『콩쥐팥쥐』,『우렁각시』,『나무꾼과 선녀』,『혹부리 영감』,『심청전』 등의 원산지죠.
이 가운데 『나무꾼과 선녀』는 만주족의 건국신화입니다.
▷ 그렇다면 이들 선비족이나 만주족의 역사도 고조선의 후예들의 역사라고 보는데 일각에서는 중국의 금과 청의 역사까지 우리 역사로 끌어들이는 것은 마치 중국이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를 빼앗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관은 학문 논리보다 민족 대결을 부추기는 면이 있다고 우려와 비판을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주장들이 기존 사학계의 주장들입니다. 대부분 보수 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들은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빼앗으려니 우리도 금나라․청나라의 역사를 빼앗자는 것이 아니라 보다 실증적이고 큰 차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살펴보니, 만주와 한반도 시베리아 지역의 역사는 한족(漢族)의 역사와는 분명히 다르니 이를 다시 제대로 검정해보자는 것인데 이것을 일면만 보고 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고대사 패러다임의 문제를 지적해왔습니까? 그만큼 현재의 한국 고대사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점을 먼저 보지 못하고 이 같은 연구들을 마치 극도의 국수주의적인 시도로 간주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많은 기록들을 이들을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라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요. 한마디로 오랑캐라는 것이죠.
그러면 고조선도 우리 역사가 아니죠. <삼국유사>는 수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증거가 되지 못하죠? 이씨 조선은 명백히 고조선과는 무관하게 중국이 신하인 기자조선의 후예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고조선과 무관하지요. 그런데 요나라는 분명히 고조선의 옛 땅에서 고조선의 전통을 바탕으로 건국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명백합니다. 고조선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것이죠. 이것이 바로 자가당착입니다. 이것이 한국 사학계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 당장 교과서를 보세요. 역사부도를 보면 고조선의 유물들의 대부분이 모여 있는 곳이 과거 요나라 지역입니다. 그러면 그것도 폐기해야 마땅합니다.
기본적으로 한국 사학계는 철저히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이죠. 한국인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고구려와 발해 등의 역사는 중국 역사가 됩니다.
▷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겠네요. 왜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로 좁혀 묶어두려고 하고 있습니까?
성리학이 조선의 정치이데올로기가 되면서부터 가급적이면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린 결과입니다.
‘조선’이란 국호도 ‘중국이 봉한 기자조선의 후예’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 점은 정약용 선생도 예외는 아니니 다른 유학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 조선은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을 지칭한 용어이며 고조선의 원이름인데 그 뜻은 버렸습니다. 스스로 뿌리를 부정한 것이죠.
그 후 조선 중후기에 ‘소중화 의식’이 사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한족과 한국인 외에는 모두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력한 패러다임을 형성한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조선 유학의 성인으로 칭송 받았던 송시열은 중국의 은혜를 입어 비로소 우리 동쪽 오랑캐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지배한 것이 조선 후기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시기에는 굳이 이런 식의 사관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지배계급이 오히려 자기모순을 위장하기 위해 더욱더 소중화 사상을 강화시킵니다.
마치 현재 북한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데 자기들만 강성대국이고 자기들만 소중화라는 것입니다. 이제 명나라가 사라졌으니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해괴한 사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사고 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맙니다.
▶ 개천절 기념 ---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한다. / 김운회 교수
♤ 10월 3일, 마지막 날> 15분
http://www.phmbc.co.kr/radio/open_world/listen?idx=213057&mode=view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개천절을 맞아 우리의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하는 마지막 시간인데요.
그 사이, 단군과 고조선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나의 신화, 이야기로만 알았던 단군신화에 녹아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는데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우리 역사의 지평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도 느꼈습니다.
개천절을 맞아 단군신화를 다시 생각하는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개천절에 대한 의미와 우리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단군신화와 단군신화의 민족사적 의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김운회 교수님 모십니다.
▷ 우리에게 개천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개천절은 단순히 단군신화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는 날입니다. 뿌리를 모르는 민족이 미래에 살아남을 수는 없지요.
▷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는 역사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다. 중국 동북공정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우리의 대처는 어떠해야 하는가?
중국은 점점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화패권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렬해지고 있고, 특히 한국에 대하여서는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을 넘어 탐원공정과 요하문명론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역사공동체의 뿌리마저 뒤흔들고 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그들의 선전․선동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은 베이징발 역사도발의 배경에 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불붙고 있는 역사전쟁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역사공동체의 유래와 흐름을 제대로 복원하고 이를 인류 사회가 공지의 사실(史實)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일이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습니다.
한족(漢族)의 중국 공산당 정부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일관된 논리는 중화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동북아 나아가서는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면 안됩니다.
중화주의의 본질은 한족(漢族)에 의한 세계의 지배라는 것입니다. 중국인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중화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세계 인민은 중화민족에 복종하고 있거나 앞으로 복종해야할 민족들로 분류됩니다.
중국의 역사전쟁은 한반도에 거치지 않고 범 알타이인(알타이, 몽골, 만주, 한국인)들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몽골 제국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중국의 역사왜곡은 그 동안 중국 정부가 흔히 써오던 방법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은 자기의 입지가 흔들리자 역사문제로 돌파구를 열기 위해 쓰더니,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민주화․빈부격차로 위기가 오자 역사문제로 이를 돌파하려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베이징에서 불과 2시간 거리에 있는 빠다링(八達嶺)에 있는 만리장성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644년 명나라가 만든 것입니다. 즉 청나라 이전의 한족들이 생각했던 자신의 영역은 바로 만리장성까지였던 것입니다.
중국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거의 모든 나라를 장기적인 복속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은 중일 분쟁의 초점이 되고 있던 센카쿠(尖閣) 열도만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키나와(沖繩)를 포함한 140여개 류큐(瑠球) 전체도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1950년대부터도 필리핀도 중국이 회복해야할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한반도는 참으로 위태롭군요.
최근 중국은 발해를 독립된 국가가 아니라 발해도독부로, 당나라의 침입을 막은 박작성(泊灼城)을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둔갑시켜 만리장성 동단으로(그러면 결국 한반도 북부는 중국령이 되겠죠), 고조선의 대표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한족(漢族)이 발전시켜 한반도와 일본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가 대두한 것을 저는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 패권주의를 넘어서 동아시아 공존공영의 질서를 새로이 짜나갈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 교수님은 우리 민족을 만주 한반도 시베리아 등지에 걸쳐서 확장된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을 어떻게 부르고 이해 해야 하나요?
한국인을 의미하는 용어로 가장 오래 남아있는 말이 조선과 고려입니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고려(고구려)보다는 포괄적이죠.『구당서』나 『진서』, 고자(高慈)의 묘비명 등에서 보이듯이 고구려인이나 동호인도 조선인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사서를 통해보면, 수천년에 걸쳐 현재의 허베이-요동․만주-한반도 등에 사는 민족을 한역(漢譯)하여 조선이나 숙신으로 불렀고, 숙신은 다시 식신(息愼), 직신(稷愼), 제신(諸申), 여진(女眞), 주신(珠申) 등으로 불렀습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조선, 제신, 주선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 발음들은 조금씩 차이는 있고 ‘쥬신’이나 ‘쨔오션(朝鮮)’, ‘쑤션(肅愼)’, ‘쥬션(珠申)’, ‘주히신’, ‘지신(稷愼)’, ‘쥐신’ 등에 가까운 말이지만 그동안 관습적으로 쥬신으로 사용해왔기 때문에 쥬신으로 부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봅니다.
즉 쥬신(Jüsin)은 조선과 숙신과 관련된 여러 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발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신채호 선생께서도 지적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쥬신이란 용어를 가장 오래 쓴 사람들은 만주족과 한국인으로, 이들은 이것을 국호로 삼았다. 한반도의 조선과 칭기즈칸의 천명을 받은 청 태종이 제위에 올라 이룩한 청나라의 초기 공식명이 ‘대쥬신제국(Yeke Jüsin Ulus)’이었습니다. 이 말을 한역하면 대조선제국, 대숙신제국, 대주신제국(大珠申帝國) 또는 대제신제국(大諸申帝國)이 됩니다. 이와 달리 안타까운 것은 한반도의 조선은 발음은 쥬신의 형태를 띠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중화패권주의에 복속하기 위해 ‘기자쥬신’ 즉 ‘기자조선’의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대로, 조선이라는 말의 근원은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아사달을 기점으로 하여 이 말이 현재까지 견고히 살아있는 일본어와 고구려어의 남은 자취들을 토대로 하여 아사달과 관련된 많은 원(原) 알타이어나 만주 퉁구스어들을 조사함으로써 실질적인 추적이 가능합니다.
원 알타이어나 만주 퉁구스어, 일본어 등을 살펴보면 아사달, 아스탈라, 아사다께, 아사타라, 아이신, 달 등이 ‘아사달’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서 아이신은 청나라 황족의 성으로 한역하면 김씨가 되고 달이 바로 배달입니다.
우리를 배달민족이라고 하는 것도 아사달과 같은 개념입니다. 즉 아사달족, 아스탈라 족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을 한자말로 하면 조선족이 됩니다.
즉 아스탈ㄹ라, 아사다께 등의 말들이 당시의 국제어인 한자 말로 기록되면서 조선, 숙신, 식신 등으로 기록되었고, 이들의 대표 발음이 쥬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몽골 - 만주 - 한국 - 일본 등의 주류 민족은 아사달, 아시밝, 아사타라, 알타이, 밝달(배달) 등과 관련하여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쥬신이라는 말이 긴 세월 동안 정착되었기 때문에 쥬신으로 부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동안 대부분 역사가들은 『사기집해』, 『색은』,『국조보감』등을 토대로 조선이 지명(地名)에서 유래된 말로 보지만, 이 견해로는 조선과 관련된 수많은 말들을 해명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고유어들이 있다가 당시 국제어인 한자 말로 기록되면서 조선 또는 숙신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이 말은 다시 여러 형태로 확장되었지만 그 대표 발음이 쥬신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쥬신에는 몽골쥬신, 만주쥬신, 반도쥬신(한국), 열도쥬신(일본)이 있고 이들을 합해 범쥬신 또는 대쥬신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 쥬신,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이름이군요. 동북아 문명의 원류를 이끌었던 쥬신이 구체적으로 개천절을 맞이하여 우리 민족의 원형질과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있는 지 구체적인 예시를 해주실 수 있나요?
쥬신의 뜻은 ‘태양의 나라’, ‘황금의 산’, ‘알타이 산(金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즉 쥬신은 궁극적으로 알타이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사달과 의미상으로 다르지 않죠.
아사달을 표현하는 말로 朝山(뜻), 紅山(뜻), 보르항산(붉은산), 긴힌산(長白山), 등이 있고 이 뜻은 (태양이 비치는) ‘붉은 산’입니다.
쥬신을 의미하는 발(發)이나 밝달(달)도 밝(밝게 비치는) + 달(산)으로 아사달과 같은 의미로 ‘배달’ 또는 ‘바타르’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산입니까?
산에 대한 깊은 신앙은 쥬신족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죠. 유목민에게 산을 매우 중요합니다. 지역의 위치를 파악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넓은 평원에서 유일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많은 영웅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산으로 피신하여 힘을 길러 세계를 정벌하기도 하였습니다.
������구당서������ 나 ������신당서������ 에 신라인들이 산신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고 하고, ������후한서������ 와 ������삼국지������에서는 예족(濊族)은 산천을 중시하여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수서������와 ������북사������에서는 “그 산을 매우 공경하고 무서워하여 사람들이 산 위에서 대소변을 보지 못하고, 그 산을 지나는 사람은 (각종 오물들을) 물건에다 담아 가지고 간다.”고 기록하고 있죠.
산신신앙은 한국인이 가장 강할 것이다. 위사람을 ‘모신다(崇拜한다)’는 말도 ‘뫼(山)신다’에서 나온 말로 보고있습니다.
성산(聖山)에 대한 숭배가 가장 강한 대상은 범한국인의 제2발상지인 백두산으로 예맥, 숙신, 동호가 따로 없이 쥬신의 공통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죠.
즉 숙신계인 금나라는 백두산을 ‘흥왕의 땅(興王之地)’으로 높여 왕으로 봉하여 사당을 세웠고(������금사������), 동호계인 요나라는 백두산을 황실(皇室)의 수호신으로 삼았습니다.
▷ 역사란 과거를 통해서 오늘과 내일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입니다. 쥬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결국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수님, 그러면 쥬신에 대한 새로운 역사관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국 청소년 개발원’이 한․중․일 3개국 청소년 2939명을 대상으로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설문조사를 한 결과, “앞장서 싸우겠다.”는 응답은 일본이 41.4%로 가장 높았고, 중국은 14.4% 인데 반하여 한국의 경우는 10.2%에 그쳤습니다.
또 ‘전쟁이 나면 외국으로 출국하겠다.’는 응답은 한국이 10.4%로 가장 높았고, 중국은 2.3% 일본은 1.7%였습니다. 국가적 자긍심도 중국이 가장 높고 다음은 한국, 일본의 순이었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이 없는 것이죠. 특히 이 부분은 고대사 인식이 중요합니다. 동아시아의 고대사 문제는 고대사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대의 문제입니다.
과거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임나일본부’를 핑계로 식민지 지배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삼았습니다.
현대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오쩌둥이 정치적 돌파구를 역사에서 찾았듯 현대 중국 공산당도 중국 내부 문제의 돌파구를 역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연고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왜곡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사 왜곡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민족 소멸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 민족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아 우리의 정체성을 보존해가자는 말이죠.
실제로 만주어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한국어 말살보다 보다 더 심각한 탄압이죠. 만주족의 정체성도 사라져 갑니다. 몽골인들의 대부분은 기약없이 내몽골에 묶여있습니다.
중국은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집어 삼키려 하는데 한국은 제대로 대응도 안합니다. 그저 중국의 동향이나 파악하면서 돈을 물쓰듯 쓰고 있습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암 선생은 ‘나라는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國猶形史猶魂)’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혼을 말살하려는데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으니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개천절을 맞아 단군신화에서부터 우리 역사를 돌아다본 ‘라디오 열린 세상’의 대장정도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이제 고조선의 역사를 좀 더 시야를 넓혀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고대 선조들이 어떤 모습으로 세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분화(分化)되고 새로운 나라들을 건설하였는지를 나아가 그들의 후예들의 역사들은 어떠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역사들을 제대로 밝혀 한편으로는 중국의 역사도발에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재발견을 통한 보다 큰 차원의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구현할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 세대가 후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선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