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버마의 망명객인 저를 난민으로 받아주셔서 고맙고,
코리아글로브에서는 공식신분이 난민인 저를 이사로까지 불러주셨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 아웅산수지 대표 모신다고 정신이 없지만,
월요일 주간조선의 인터뷰를 감히 KG칼럼에 올립니다.
코리아글로브 동지들이 영원히
버마와 미얀마의 벗이 되리라 믿습니다.
“버마 민주화 겨우 10%
수지 대통령 될 때까지 싸운다”
방한 수지 맞는 미얀마 망명객들
“지금의 ‘버마’는 한국의 노태우 정권 때와 비슷합니다. 아직 버마의 민주화는 10%밖에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한국으로 망명한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 조모아(40)씨에게 “1월 28일 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위원회 초대로 방한하는 아웅산 수치가 이제 자유의 몸이 됐고, 미얀마의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뤄진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1월 23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점에서 만난 조씨는 한국말이 유창했다.

▲ 민주화 운동 단기 앞의 내툰나잉 NLD 한국지부 회장.
조모아씨는 미얀마(Myanmar)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버마(Burma)라는 옛 국가 이름을 계속 썼다. 미얀마는 1988년 민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군부 정권이 독단적으로 바꾼 이름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미얀마 야당 지도자 수치 의원의 방한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조씨에 따르면, 한국에 있는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은 2월 1일 수치 의원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다. 수치 의원은 1월 29일 한국 방문 기자회견 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만날 예정이다.
한국 본받으려 한국 망명 택해
조모아씨는 현재 한국에는 미얀마 망명객이 100여명 살고 있다고 했다. 모두 1988년 민주항쟁 이후 온 사람들이다. 망명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100여명이고, 이보다 더 많은 미얀마인들이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해 놓은 상태라고 한다.
2011년 말 기준 338명이 난민 신청을 해 이 중 112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작년 말 이들 난민을 포함해 국내 체류 미얀마인은 모두 9218명으로 이 중 1280명이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은 1988년 군부의 민주항쟁 탄압 이후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미얀마 내에서는 지속적인 민주화 항쟁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선택한 망명지 중에서는 한국이 우선순위에 올랐다. 미얀마 민주화운동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합(NLD) 한국지부 회장 내툰나잉(43)씨는 이런 말을 했다.
“버마는 50년 정도의 군부체제 아래 모든 것이 후퇴했습니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사회적 상황 때문에 국민 화합도 멀고, 국민이 인정하는 헌법도 없습니다. 한국은 과거의 독재정치를 극복하고 민주화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국가제도와 기반이 잘 마련되어 있고, 국민의 높은 의식 수준은 계속 진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경제 발전까지 성공한 한국을 본받기 위해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NLD는 1988년 수치 의원이 조직한 대표적인 미얀마 민주화활동 단체. 1999년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한국에는 NLD 외에도 ‘버마 행동’ ‘카렌 청소년 단체’ 등 미얀마 민주화 단체들이 활동 중이다. NLD는 이들 미얀마 단체들과 함께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매주 ‘프리 버마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번 수치 의원의 방한은 역사적인 이벤트다. 내툰나잉 회장은 고조된 목소리로 “23년 만에 수치 여사를 만난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수치 여사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다니, 우리는 너무나 감격스럽고 행복합니다. 우리는 수치 여사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치 여사의 지도 아래 전 국민이 화합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수치 여사의 방문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도 변화의 바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수치 여사를 만나면 우리가 응원하고 있으니 힘내달라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불법체류자 취급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은 군부가 통치하는 미얀마의 정치 상황을 타개하고 수치 의원 같은 민주 인사들이 자유롭게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NLD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08년까지 미얀마의 군사정권은 헌법 없이 통치를 했다. 2008년 헌법을 만들어 발표하긴 했지만 그것도 군부를 위한 것이었다. 현 헌법에 따르면 미얀마 국민은 국회의원 총선거만 참여할 수 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무조건 군부에서 나와야 하고, 상·하원 25%의 의석 또한 군부가 차지한다. 수치 의원이 이끄는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이 지난해 4·1 보궐선거에 참여해 후보를 낸 44개의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면서 일약 제1야당으로 부상했지만 현재 하원 의원 수의 6%를 차지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5년으로 예정돼 있는 총선은 미얀마 민주화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총선에서 NLD와 민주화 세력들이 75%의 의석을 차지한다면 개헌을 할 수 있고, 수치 의원의 대통령 당선도 가능하다고 본다. 내툰나잉 회장은 “만약 버마에서 국민이 원하는 대로 국가지도자를 직접 선출할 수 있다면 수치 여사가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우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국가지도자입니다. 버마는 한국처럼 단일민족이 아니라 100개 이상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버마 국민은 화해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가 수치 여사입니다.”
한국 내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1988년 이후 처음 한국에 발을 디뎠을 당시의 상황은 너무 가혹했다고 한다. 큰 기대를 안고 들어왔지만 불법체류자로 오랜 시간 지내야 했다. 이들도 한국 정부도 ‘난민’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난민’은 참정권을 제외한 기본권을 인정받는 외국 망명객들을 일컫는다.
“시민단체의 권유로 난민 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신청을 하고 승인을 받기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우리 동지들 중에는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던 중에 불법체류자로 걸려서 추방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버마로 돌아가면 그 친구들이 큰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태국에서 간신히 빼냈던 기억이 납니다.”(조모아씨)

▲ 늘 후원해주시는 안병직 선생님께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난 뒤
신촌에서 조모아-이이문-조평화 가족 2012년 6월22일
“민주화 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것”
어렵게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난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한국인의 관심도 적기 때문이다. 내툰나잉 회장은 “선진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되면 딱 세 가지만 받는다”며 “3년마다 갱신받아야 하는 외국인등록증, 의료보험증, 난민인정증명서다. 이걸 제외하면 불법체류자나 난민이나 똑같다”고 지적했다.
이들에게는 한국 NGO 단체들의 지원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 역시 턱없이 부족해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월급도 평범한 외국인 노동자 수준으로 받는다. 월급을 받아도 통장 하나 만들기도 어렵다고 한다.
한국에 오래 머문 미얀마 난민들은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한다. 조모아씨는 “한국에서는 당연히 한국인으로 인정 안 해줍니다. 하지만 버마로 돌아가면 버마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라면서 “우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현실은 각박하지만 민주화 투쟁에 대한 이들의 열망만큼은 뜨겁다. 조모아씨의 경우는 현재 미얀마 청소년 민주화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NLD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소개하는 책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며 미얀마 민주화운동 이야기를 담은 ‘버마 민주화의 길’도 오는 8월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버마의 민주화가 이룩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냐”는 물음에 조씨는 “당연히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떠날 때가 되면 많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정이 들었거든요.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시민단체로부터 도움도 계속 받았습니다. 버마 하나의 힘으로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의지가 되어줬던 한국이라 버마에 돌아가게 된다면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버마의 망명객인 저를 난민으로 받아주셔서 고맙고,
코리아글로브에서는 공식신분이 난민인 저를 이사로까지 불러주셨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 아웅산수지 대표 모신다고 정신이 없지만,
월요일 주간조선의 인터뷰를 감히 KG칼럼에 올립니다.
코리아글로브 동지들이 영원히
버마와 미얀마의 벗이 되리라 믿습니다.
수지 대통령 될 때까지 싸운다”
방한 수지 맞는 미얀마 망명객들
“지금의 ‘버마’는 한국의 노태우 정권 때와 비슷합니다. 아직 버마의 민주화는 10%밖에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994년 한국으로 망명한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 조모아(40)씨에게 “1월 28일 2013년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위원회 초대로 방한하는 아웅산 수치가 이제 자유의 몸이 됐고, 미얀마의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뤄진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1월 23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점에서 만난 조씨는 한국말이 유창했다.

▲ 민주화 운동 단기 앞의 내툰나잉 NLD 한국지부 회장.
조모아씨는 미얀마(Myanmar)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버마(Burma)라는 옛 국가 이름을 계속 썼다. 미얀마는 1988년 민주항쟁을 짓밟고 들어선 군부 정권이 독단적으로 바꾼 이름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 망명한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미얀마 야당 지도자 수치 의원의 방한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조씨에 따르면, 한국에 있는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은 2월 1일 수치 의원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다. 수치 의원은 1월 29일 한국 방문 기자회견 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만날 예정이다.
한국 본받으려 한국 망명 택해
조모아씨는 현재 한국에는 미얀마 망명객이 100여명 살고 있다고 했다. 모두 1988년 민주항쟁 이후 온 사람들이다. 망명을 정식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100여명이고, 이보다 더 많은 미얀마인들이 한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해 놓은 상태라고 한다.
2011년 말 기준 338명이 난민 신청을 해 이 중 112명이 난민으로 인정을 받았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작년 말 이들 난민을 포함해 국내 체류 미얀마인은 모두 9218명으로 이 중 1280명이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은 1988년 군부의 민주항쟁 탄압 이후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미얀마 내에서는 지속적인 민주화 항쟁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선택한 망명지 중에서는 한국이 우선순위에 올랐다. 미얀마 민주화운동 단체인 국민민주주의연합(NLD) 한국지부 회장 내툰나잉(43)씨는 이런 말을 했다.
“버마는 50년 정도의 군부체제 아래 모든 것이 후퇴했습니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사회적 상황 때문에 국민 화합도 멀고, 국민이 인정하는 헌법도 없습니다. 한국은 과거의 독재정치를 극복하고 민주화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국가제도와 기반이 잘 마련되어 있고, 국민의 높은 의식 수준은 계속 진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룩하고 경제 발전까지 성공한 한국을 본받기 위해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NLD는 1988년 수치 의원이 조직한 대표적인 미얀마 민주화활동 단체. 1999년 한국지부를 설립했다. 한국에는 NLD 외에도 ‘버마 행동’ ‘카렌 청소년 단체’ 등 미얀마 민주화 단체들이 활동 중이다. NLD는 이들 미얀마 단체들과 함께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매주 ‘프리 버마 캠페인’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번 수치 의원의 방한은 역사적인 이벤트다. 내툰나잉 회장은 고조된 목소리로 “23년 만에 수치 여사를 만난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수치 여사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다니, 우리는 너무나 감격스럽고 행복합니다. 우리는 수치 여사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치 여사의 지도 아래 전 국민이 화합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수치 여사의 방문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에도 변화의 바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수치 여사를 만나면 우리가 응원하고 있으니 힘내달라는 메시지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불법체류자 취급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은 군부가 통치하는 미얀마의 정치 상황을 타개하고 수치 의원 같은 민주 인사들이 자유롭게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NLD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08년까지 미얀마의 군사정권은 헌법 없이 통치를 했다. 2008년 헌법을 만들어 발표하긴 했지만 그것도 군부를 위한 것이었다. 현 헌법에 따르면 미얀마 국민은 국회의원 총선거만 참여할 수 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무조건 군부에서 나와야 하고, 상·하원 25%의 의석 또한 군부가 차지한다. 수치 의원이 이끄는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이 지난해 4·1 보궐선거에 참여해 후보를 낸 44개의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면서 일약 제1야당으로 부상했지만 현재 하원 의원 수의 6%를 차지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5년으로 예정돼 있는 총선은 미얀마 민주화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총선에서 NLD와 민주화 세력들이 75%의 의석을 차지한다면 개헌을 할 수 있고, 수치 의원의 대통령 당선도 가능하다고 본다. 내툰나잉 회장은 “만약 버마에서 국민이 원하는 대로 국가지도자를 직접 선출할 수 있다면 수치 여사가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우리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국가지도자입니다. 버마는 한국처럼 단일민족이 아니라 100개 이상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버마 국민은 화해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가 수치 여사입니다.”
한국 내 미얀마 민주화 활동가들이 1988년 이후 처음 한국에 발을 디뎠을 당시의 상황은 너무 가혹했다고 한다. 큰 기대를 안고 들어왔지만 불법체류자로 오랜 시간 지내야 했다. 이들도 한국 정부도 ‘난민’이라는 개념을 몰랐다. ‘난민’은 참정권을 제외한 기본권을 인정받는 외국 망명객들을 일컫는다.
“시민단체의 권유로 난민 신청을 하게 됐습니다. 신청을 하고 승인을 받기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우리 동지들 중에는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던 중에 불법체류자로 걸려서 추방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버마로 돌아가면 그 친구들이 큰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태국에서 간신히 빼냈던 기억이 납니다.”(조모아씨)

▲ 늘 후원해주시는 안병직 선생님께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고난 뒤
신촌에서 조모아-이이문-조평화 가족 2012년 6월22일
“민주화 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것”
어렵게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생활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난민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한국인의 관심도 적기 때문이다. 내툰나잉 회장은 “선진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대학 교육까지 받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되면 딱 세 가지만 받는다”며 “3년마다 갱신받아야 하는 외국인등록증, 의료보험증, 난민인정증명서다. 이걸 제외하면 불법체류자나 난민이나 똑같다”고 지적했다.
이들에게는 한국 NGO 단체들의 지원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 역시 턱없이 부족해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월급도 평범한 외국인 노동자 수준으로 받는다. 월급을 받아도 통장 하나 만들기도 어렵다고 한다.
한국에 오래 머문 미얀마 난민들은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도 한다. 조모아씨는 “한국에서는 당연히 한국인으로 인정 안 해줍니다. 하지만 버마로 돌아가면 버마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라면서 “우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현실은 각박하지만 민주화 투쟁에 대한 이들의 열망만큼은 뜨겁다. 조모아씨의 경우는 현재 미얀마 청소년 민주화 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NLD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소개하는 책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준비 중이며 미얀마 민주화운동 이야기를 담은 ‘버마 민주화의 길’도 오는 8월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버마의 민주화가 이룩되면 조국으로 돌아갈 것이냐”는 물음에 조씨는 “당연히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떠날 때가 되면 많이 아쉬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정이 들었거든요.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시민단체로부터 도움도 계속 받았습니다. 버마 하나의 힘으로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의지가 되어줬던 한국이라 버마에 돌아가게 된다면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