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보다 더 심각한 日 역사의식 빈곤

by 양승태 posted Mar 02, 2014
[조선일보 시론]
역사 왜곡보다 더 심각한 日 역사의식 빈곤


                                  양승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코리아글로브 고문

아베 언행은 終戰체제 부정…
제국주의 흉내내다 망한 뒤 戰後 질서로 이룬 번영 망각
동아시아 대승적 협력하려면 일본 우익,
뒤틀린 인식 벗고 문명사적 발전 추구해야





현재의 동아시아 정세는 미묘하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자국과 중국 관계를 전쟁 직전 상태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러한 발설에 부응이라도 하듯 국제정치의 석학이라는 인물 또한 1차 대전 직전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진단까지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의 일차적 책임은 비(非)외교적 언행의 주체인 아베 총리가 대표하는 일본 우익 정부에 있음은 분명하다. 아울러 그의 언행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수용한 종전(終戰)체제에 대한 도전과 부정이고, 그러한 자기부정적 행위의 근본 바탕에는 일본 우익의 빈곤한 역사의식이 있다는 사실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역사 왜곡과 역사의식의 빈곤은 구분된다.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조작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다. 역사의식의 빈곤은 역사적 흐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한 측면에 집착할 때 드러난다. 후자는 헛된 국가적 우월감의 바탕이 되고 정치적 상상력을 고갈시키기 때문에 전자보다 더 위험하다.

현재 일본의 번영은 메이지유신과 샌프란시스코조약이라는 두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전자를 통해 일본은 서구적 근대화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수행한 국가가 되었고, 후자를 통해 성립된 종전체제를 토대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차원의 발전을 넘어 새로운 도약을 이루게 되었다. 패전이라는 국가적 참사가 의회민주주의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이룬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 근현대사의 대(大)역설이 있다. 자국민뿐 아니라 타국의 수많은 죄 없는 인간을 비참한 불행으로 내몬 역사의 비극을 통해 새로운 화려한 역사의 무대가 창출된 것이다. 일본 우익의 역사의식 문제는 이런 역사의 흐름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다.

메이지유신의 성공은 중화 질서의 변방이었던 일본에 유례없는 역사적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비록 운명의 요소도 작동한 결과지만 그 영광의 바탕에는 정치 지도자들의 희생정신, 고양된 국민적 감정, 강대국들과의 건곤일척(乾坤一擲) 승부도 불사하는 국가적 기백, 노회하고 치밀한 외교 전략 등이 있었다. 그것들이 일본을 국가 재조(再造) 이후 50년도 되지 않아 세계적 열강이자 세계사적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이다.

일본의 영광은 분명히 동아시아의 자존심이었다.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일본은 그러했다. 그러나 국가적 영광에의 도취는 곧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에 대한 흉내 내기로 변질되었고,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패망으로 이끈 군국주의 일본의 본질이다.

지금 일본 우익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역사의식의 핵심은 스스로를 패망으로 이끈 제국주의 흉내를 국가적 영광의 전부로 여기면서 새로운 국가적 도약의 전제조건이었던 전후(戰後) 질서를 부정함에 있다. 그것은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실질적인 파기이자 현재 누리고 있는 국가 생활의 근거에 대한 부정이며, 현재 상황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역사의식의 빈곤인 것이다.

제국주의 흉내를 국가적 영광으로 믿는 수준의 역사의식에서는 미래의 국가 전략을 제대로 설정하고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 나타날 수 없다. 안중근 의사가 '살인범'일 뿐이라는 일본 관방장관의 언명은 그러한 예이다. 그것은 1909년의 의거 당시나 종전 질서의 태동까지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용인될 수도 있다. 그러나 100여년이 지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그것도 인접한 국가의 국민적 영웅에 대해서, 종전 질서의 성립을 통해 과거의 침략전쟁이 국제법적으로 단죄된 상태에서, 그리고 안 의사가 제기한 '동양평화론'이 한·중·일의 번영 속에 구현되어 가고 있는 동아시아의 상황에서 나온 그러한 논평은 정치적 상상력 빈곤의 표현이자 후안무치의 정치적 언어이다.

식민지 지배, 전쟁, 내전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역사 전개는 비록 비극적이지만 나름대로 세계사적 필연성이 있었다. 그러나 전방위적인 상호 교류 및 의존성이 심화되고 있는 현재 한·중·일의 관계에 전쟁 직전의 상황이 전개될 필연성은 없다. 특정 집단의 뒤틀린 역사의식이 그러한 사태 전개의 개연성을 높일 뿐이다. 이제 동아시아 삼국은 상호 공유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서구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세계 질서 및 문명의 창조를 위해 대승적으로 협력할 때이다. 그러한 세계사적 과업의 수행은 일본 우익의 빈곤한 역사의식의 청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일본은 여러 면에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나라이다.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국민은 한국인뿐이라는 말도 여러 면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현재의 우익 정권이 대변하는 일본은 안타까움의 대상일 뿐이다. 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서양 문명사의 퇴물에 대한 모방을 국가적 영광으로 복원하려는 시대착오에서 벗어나 너무나 부럽고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간직한 일본을 문명사적 발전 맥락에서 한 차원 높게 새롭게 건설할 역사적 의무 및 명예가 일본의 진정한 우익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