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25일 첫 헌정사기행으로부터 인연을 맺은
코리아글로브에 안중근 장군은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어른이다.
그의 거룩한 삶, 참으로 빼어난 身言書判,
동양평화론으로 대표되는 지구보다 더 큰 꿈은
오늘 통일대한민국을 앞둔 우리가 이어야 할,
백두산 천지와도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하여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내셨던 이태진 선생님의 글을
허락을 얻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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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하얼빈 의거의 역사적 의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
1. 머리말
2. 안중근의 독립전쟁론과 하얼빈 의거
3. 일본정부의 사건 처리 대책과 옥중 투쟁
4. 하얼빈 의거와 국군의 전통 수립 방향
5. 맺음말
1. 머리말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무렵에 단행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한국 항일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빛날 역사이다. 그런데 우리 후손들이 과연 이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는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의거 후 100년이 지나도록 의거의 경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그가 부르짖은 동양평화론이 세계 평화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자리매김이 근자에 와서야 비로소 맥락을 잡는 실정이다.(참고문헌 9. 25~27면) 더욱이 그에 대한 민족적 차원의 현창 사업은 유해 발굴 하나에 매달려 그가 사력을 기울여 활동했던 지역 어느 곳에서도 변변한 기념탑 하나 세워지지 못한 실정이다. 실로 개탄을 금치 못할 실정이다. 그리고 그의 유족 후손들에 대한 보훈의 조치는 말 그대로 방치 상태이다.(11) 뒤늦게나마 100주년을 맞아 관계 기관 및 연구자들이 심기일전의 반성과 분발이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안중근에 의해 이루어진 하얼빈 의거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그가 취조나 법정 변론에서 주장했듯이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의거가 아니라 대한의군(大韓義軍)의 작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한의군의 실체가 실제로 블리디보스톡 소재의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에 대한 일본 측의 탐문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때 시작된 독립운동세력의 개인 또는 조직에 대한 탐문, 감시 및 통제는 이후 일본 측의 항일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조사와 대책의 근원을 이루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측의 탐문 보고는 조직적인 저항의 중심이 바로 서울의 고종황제라고 지적한 점이다.(13)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1919년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세시위를 배경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뜻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한 사실을 상기하면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국군사의 전사(前史)로서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안중근이란 위인, 영웅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근현대 한국의 국군사의 시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안중근은 1910년 2
코리아글로브에 안중근 장군은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어른이다.
그의 거룩한 삶, 참으로 빼어난 身言書判,
동양평화론으로 대표되는 지구보다 더 큰 꿈은
오늘 통일대한민국을 앞둔 우리가 이어야 할,
백두산 천지와도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하여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내셨던 이태진 선생님의 글을
허락을 얻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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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
1. 머리말
2. 안중근의 독립전쟁론과 하얼빈 의거
3. 일본정부의 사건 처리 대책과 옥중 투쟁
4. 하얼빈 의거와 국군의 전통 수립 방향
5. 맺음말
1. 머리말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무렵에 단행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한국 항일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빛날 역사이다. 그런데 우리 후손들이 과연 이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는지는 적이 의심스럽다. 의거 후 100년이 지나도록 의거의 경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그가 부르짖은 동양평화론이 세계 평화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자리매김이 근자에 와서야 비로소 맥락을 잡는 실정이다.(참고문헌 9. 25~27면) 더욱이 그에 대한 민족적 차원의 현창 사업은 유해 발굴 하나에 매달려 그가 사력을 기울여 활동했던 지역 어느 곳에서도 변변한 기념탑 하나 세워지지 못한 실정이다. 실로 개탄을 금치 못할 실정이다. 그리고 그의 유족 후손들에 대한 보훈의 조치는 말 그대로 방치 상태이다.(11) 뒤늦게나마 100주년을 맞아 관계 기관 및 연구자들이 심기일전의 반성과 분발이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안중근에 의해 이루어진 하얼빈 의거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그가 취조나 법정 변론에서 주장했듯이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의거가 아니라 대한의군(大韓義軍)의 작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대한의군의 실체가 실제로 블리디보스톡 소재의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에 대한 일본 측의 탐문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때 시작된 독립운동세력의 개인 또는 조직에 대한 탐문, 감시 및 통제는 이후 일본 측의 항일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조사와 대책의 근원을 이루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측의 탐문 보고는 조직적인 저항의 중심이 바로 서울의 고종황제라고 지적한 점이다.(13)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1919년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세시위를 배경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뜻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한 사실을 상기하면 이 사건은 대한민국 국군사의 전사(前史)로서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안중근이란 위인, 영웅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근현대 한국의 국군사의 시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안중근은 1910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