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변혁’ 정치의 지평을 열며

by 조민 posted Apr 15, 2014


‘중도 변혁’ 정치의 지평을 열며


                                                                   2014. 3.28. 조 민


1. 중도(中道) 정치는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공자는 정치를 ‘바룬다’ 즉, ‘바르게 하는 것’으로 갈파했다(政者正也). 이처럼 정치의 요체가 ‘바르게 한다.’는 데에 있다면, 이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 뿐만 아니라 기울어진 것을 평평하게 하여 적절히 균형을 맞추거나 공정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여기서 정(正)은 사(邪)의 반대편에 자리 잡는 정태적 개념이라기보다는 균(均)을 지향하는 ‘저울추(衡)’의 역할을 하는 동태적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높고 많은 데서 덜고, 낮고 적은 데에 보태는 ‘덜고 보태는’, 이른바 형평(衡平)을 추구하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치는 어느 면에서는 ‘막힌 데를 통하게 한다.’는 통색(通塞)의 의미로도 이해된다. 1980년대 초 당시 고려대학교 김상협 총장이 총리 제의를 수락하면서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것은 편다.”는 연설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정치의 고유한 역할을 매우 쉽게 표현한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정치가 ‘바루는’ 일이라면, ‘바룸’의 규준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치우치지 않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바로 여기서 중도 또는 중용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우선 중도(中道)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바른 길’을 말한다. 중도는 사실 불교 철학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한데 이 경우, 극단적인 견해나 수행 방식을 지양하는 불교 철학의 기본적 입장을 뜻한다. 즉, 중도는 불가에서 추구하는 진리의 존재 방식을 뜻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찾는 수행자의 수행 방식도 양극단을 회피하는 중도적 수행을 존중한다는 말이다. 정치 영역에서 중도는 이처럼 양극단을 지양한다는 의미에서 ‘중도 정치’라는 말로 활용되었다.

중도는 종종 유가(儒家) 정치사상의 핵심 원리인 중용(中庸)과 유사한 의미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정치적 의미에서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사고와 행동 규범’의 차원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중도 보다는 유가적 중용의 의미가 더욱 적실하다.

중용은 한마디로 ‘과불급(過不及) 없는’ 상태이다. 정치적 중용은 동태적 균형과 건설적 타협과정에서 창출되기 때문에 그 위치가 반드시 산술적 중간일 수 없다.1) 중도도 마찬가지다. 즉, 중도 또는 중용은 양극단의 ‘중간에 자리 잡은 상태’(於中間)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대립하는 양극단의 산술적 평균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정치적 경험 세계에서 중도와 중용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판단(=사고)과 선택(=결단)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진리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진리의 불가지론의 회의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반드시 하나가 아니며, 누구도 진리 해석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선(善)과 악(惡), 정(正)과 사(邪)의 양극단에 다양한 가능성과 선택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류는 서구 중세의 보편주의적 종교의 도그마나 근현대의 보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도그마에 의해 선악과 정사 양극단의 논리와 선택을 강요받아 왔다.2)

서양 기독교는 원리주의에 터한 정통과 이단과의 기나긴 싸움의 역사였고, 근대 이데올로기는 인류사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과의 공존 불가능한 투쟁의 역사로 바라보았다. 계급투쟁의 무기였던 이데올로기 시대는 사회주의의 몰락과 냉전체제의 붕괴로 인류 역사 저편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선악 구도의 근본주의적 절대화의 시대는 사라졌지만 진리와 가치의 다양한 상대화의 시대는 아직 자리 잡지 못했다. 특히, 아직도 한국 정치는 독특한 이념과 지역으로 갈라진 분열 구조 위에서 이분법적 양극단의 정치적 논리와 갈등 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를 기대하지만, 보수우파의 일부는 특권적 기득권 구조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부도덕하고 부패한 ‘꼴통 보수’로, 진보좌파의 일부는 합리적 현실 인식에 기반한 대안 제시나 정치적 실천 역량의 차원에서 거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깡통 진보’로 비판받고 있다.

중도주의는 우파와 좌파 혹은 보수와 혁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정책을 추진하자는 이념이다. 중도주의 정치세력은 흔히 ‘중도파’라고 하며, 정치이념은 자유주의적 입장에 기반하게 된다. 유신체제 아래서 야당 당수가 ‘중도통합론’을 제기했던 적이 있는데, 이는 사실 당시 반독재투쟁의 시대정신을 부정하고 유신독재체제에의 야합에 불과했던 논리로 당내 비판뿐만 아니라 대중적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당시의 ‘중도통합론’은 참된 중도와 전혀 무관한 기회주의적 타협론에 불과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중도통합’이라는 말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대명사처럼 되어 중도통합의 진정한 의미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2. 한국 현대정치사에서의 중도정치

2-1. 해방정국의 중도 : 안재홍(安在鴻)의 순정우익(純正右翼)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의 민정장관을 역임했던 안재홍은 스스로의 정치노선을 ‘순정우익’으로 불렀다. 당시의 정치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몽양(夢陽) 여운형이 중간 좌파라면, 민세(民世)는 중간 우파로 여길 수 있다.

안재홍은 해방을 맞이한 들뜬 분위기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잃은 혼미한 대중 앞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목표로 삼는 통일국가 건설을 역설하였다.3) 이 논문에서 그는 조선의 전통적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조선 독자(獨自)의 신민족주의’ 위에서 어느 한 쪽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는 ‘초계급적인 통합민족국가’를 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으로 요청했다. 나아가 그는 통합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좌파와 우파 간의 협동의 당위를 강조했고, 좌우합작운동을 실천에 옮기면서 사실상 중간파라고 할 수 있는 순정우익의 결집을 호소했다.

<중도파의 정당성>

「순정우익의 결집」이라는 글에서 민족해방과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은 조선민족 현하의 지상명령이요 또 반드시 되어야 할 역사적 과업이라고 하였다.4) 그는 ‘진정한(眞正)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순정우익세력의 강대화가 시대적 요청임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5)

첫째, 민족해방의 완성은 진정 민주주의 노선에서 계급대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전민족 최대다수가 집결 귀합하여 민족으로서의 완전 해방을 요청하는 것이며, 민족독립국가의 완성은 외국에 의존 없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가 되게 함이 목표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첫째, 계급대립은 균등경제(均等經濟)와 평권정치(平權政治)에서 지양(止揚) 회통(會通)하며, 둘째로 외국(미국)의 원조는 필요하지만 주권국가 체제는 손상 받지 않는다.

둘째, 좌우파가 중간(中間)의 설(說)을 배격하고 우리를 ‘중간파’ 혹 ‘중간당’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경멸적인 매도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산계급독재를 전제로 자유와 사유재산제를 무시하는 공산주의를 강요하는 좌파를 반대하며, 봉건적․대지주적․자본벌(資本閥)적 특권계급지배의 극우 국가를 배격한다.

셋째, 조선에서 좌익의 무산계급 독재는 실현될 수 없으며, 특권계급의 유지를 바라는 우익은 계급투쟁을 도발시켜 사회혁명을 막을 수 없게 됨으로써 필경 제3국(강대국)의 간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좌우익 모두 깊은 자기성찰을 요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세는 그리하여 극우는 조만간 자기 수정을 해야 하며, “진정한 민주주의 노선만이 순정한 우익이며, 순정우익이 진보적인 순정 민족주의”라고 갈파했다. 나아가 민족의 이름으로 무산계급의 이익이니 특권계급의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 노선에서만 진정한 민족주의가 성립되는 것으로, 이는 곧 순정우익”이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안재홍은 순정우익의 강대한 육성만이 안으로는 민족독립국가의 완성 및 발전을 가능케 하고, 밖으로는 국제협조로써 평화와 공존을 기대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우리 민족의 완전독립 없이 국제화란(國際禍亂)은 결코 그칠 수가 없다고 하여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통일이야말로 동아시아 평화의 초석임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민세는 계급지배의 이념이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미․소 분할점령의 한반도와 미군 점령아래의 남한 정국 구도에서 좌익혁명은 불가하다는 현실인식에서 보수우익이 전면에 나서고 좌익이 뒷선에 물러서는 형태의 중도노선을 주장했다. 이에 미 점령하의 현실 정세에 비추어보아 좌우 양측 세력은 정치협상으로 좌우합작을 이루어 건국대업에 합류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종용하였다.

독립운동가 안재홍 이미지
김규식
아시아 여러 나라가 독

<냉전구조와 중도정치의 좌절>

해방정국에서 안재홍,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우파 또는 중도좌파의 이른바 ‘중도주의, 중도정치, 중도파’의 노력과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아니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예정된 실패였다. 이는 구조적 요인(structure)과 함께 중도정치에 대한 정치가(agent)의 의지와 역량의 문제로도 이해된다.

우선 중도정치의 좌절은 구조적 요인으로 냉전체제와 더불어 분단 상황에서 중도주의가 전혀 허용될 수 없었던 데에 기인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중도’는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남한사회에서는 강력한 극우 진영의 원심력으로 인해 점차 약화․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도정치는 유럽, 특히 독일 정치에서 제대로 구현되었다. 이는 독일의 우익 독재와 좌파 폭력혁명의 위협으로부터 ‘제3의 길’을 찾는 중도노선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의 소산이었다. 독일은 국내정치 차원에서 한편으로는 제국독일의 카이저의 압제와 극단적 우익집단인 나치즘의 광기,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좌파혁명세력의 위협 앞에서 고통을 겪은 후 비로소 양극단이 배제된 중도이념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기반한 사회민주당(SPD)과 중도온건세력인 기독교민주당(CDP)이 대중정당으로서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해방 정국에서 극좌와 극우는 국내정치 차원이 아닌 양극단의 이념에 기반한 국가 차원의 전쟁을 치렀고, 그 후 냉전체제 아래서 남한에는 극우 정치, 북한에는 극좌 정치만 존재 가능했다. 남북한 국내정치의 차원에서 북한은 경쟁으로써의 정치 자체는 완전히 사라졌고, 남한은 극우 반공이념 체제 아래서 중도이념, 중도정치, 중도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말았다.

다른 한편, 중도정치의 좌절에 대해 중도파의 정치적 의지와 역량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세 안재홍, 몽양 여운형, 우사(尤史) 김규식 등 ‘중간파’는 스스로의 정치적 가치를 반드시 실현시키고 말겠다는 정치적 의지 즉, 권력의지가 매우 박약했다. 이들 중간파는 면면이 조선 선비의 전형으로 학자적 또는 지사적(志士的) 풍모를 지녔다. 선비적 몸가짐, 지사적 풍모가 권력정치에서 자산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미군정이 한때 ‘중간파’ 김규식이나 안재홍을 정부 수립의 대안으로 고려했던 정황도 검증되고 있다. 더욱이 이들 ‘중간파’가 미군정의 호의 아래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건국 상황을 주도할 수 있었던 짤막하지만 ‘열린 공간’도 있었다. 그러나 중간파에게는 권력의지가 없었다. 해방정국에서 비타협적 좌파헤게모니에 집착한 박헌영이나, 권력의지(권력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과의 노선이나 권력투쟁 자체를 생각조차 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권력의지의 부재는 역사적 책임의식, 실천적 소명의식의 망각에서 기인한다. 한마디로 ‘정치적 깡다구’가 없었다.

2-2. 중도주의․중도정치의 ‘열린 공간’

한국 정치사에서 중도주의․중도정치는 긴 동면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 후 1980년대 민주화투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쟁취한 ‘1987년 체제’가 형성된 이래 보수우파 일변도의 헤게모니 구도는 상당히 허물어졌으며, 과거에 비해 진보좌파의 정치사회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여기서 정치 현실에서 중도와 중용이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말이라는 점을 전제로, 중용 연구의 석학인 최상용 교수가 중용을 정치적 정의의 실천적 규범으로 보면서 ‘중용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Mean)’를 설파한 해석을 주목하고 싶다. 최 교수는 "서구 정치철학사에서 최초의 정의론인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서도 정의는 중용이며, 그 정의의 유교적 표현인 인의(仁義)의 핵심내용도 역시 중용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은 중용의 정의(中道義)를 기준으로 하고 있고, 다산 정약용의 정의는 중용의 핵심인 시중(時中)의 정의(時中之義)에 다름아니다.“고 해석하고 있다.6)

다시 중용과 관련된 중도정치를 특정 시대 정치사회적 역학관계 속에서 선택적 결단 즉, 정치적 실천의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80년대 민주화시대에 중용적 정치 또는 중도정치는 군부독재와 민주화투쟁 가운데의 중간적 입장 즉,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야말로 중간적인(於中間)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하겠다. 중도․중용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정의와 불가분적 관련을 지닌 태도와 실천으로, 1980년대의 민주화투쟁 자체가 그 시대의 중도․중용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중도․중용은 독재와 민주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자본가)과 노동(노동계급), 흑과 백 등의 상호 대립물의 물리적 중간에 자리 잡는 절충적이거나 산술평균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느 쪽이야!’ 아직도...>

20세기가 저물어가던 1990년 즈음 사회주의국가의 붕괴와 냉전체제의 해체로 바야흐로 이데올로기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함께 사회주의/자본주의의 진영 논리는 더 이상 비현실적인 인식 구도로 정치현실에서 완전히 해소될 것으로 보았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역사의 한 장(章)으로 넘어갔고, 비로소 중도주의․중도정치의 공간이 열리는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1987년 체제’ 형성 이후 4반세기 동안 한국사회의 헤게모니와 정치세력은 상호 갈등적인 집단, 새로운 논리, 서로 다른 지지기반을 중심으로 투쟁 구도가 구축되었다. 이는 영남지역을 지지기반으로 삼는 산업화세력이 중심이 된 보수우파와 호남지역을 지지기반으로 삼는 민주화세력이 중심이 된 진보좌파 간의 양대 갈등구조는 마침내 한국사회가 크게 두 편으로 나눠진 ‘진영 간 대결구도’로 드러났다. 아직도 ‘어느 쪽이야!’를 강요받는 현실은 끝나지 않았다.

<우파기회주의 / 좌파기회주의>

중도정치․중도파는 인기가 없다. ‘영남/호남’, ‘산업화/민주화’, ‘친일․친미/반외세 자주’, ‘꼴통 수구/깡통 진보’ 등 선악 이분법 구도로 나눠 상대를 매도․타도 대상으로 몰아 부치는 선동성이나 정치적 열정을 뿜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대중적 인기가 없고,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가 무척 어렵다. 더욱이 중도파는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로 나눠진 대립 구도의 어느 한쪽에 서지 않고 양쪽을 모두 비판하는 입장이므로 흔히 좌파 우파 양쪽으로부터 기회주의적 입장과 노선으로 매도당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 한국 정치에서 중도파는 결코 기회주의가 아니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중도정치․중도파에게 돌아온 권력이나 금력의 ‘기회’는 기대할 수 없었다. 이는 중도파 스스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기회주의는 오히려 정치, 사회활동, 학문, 언론, 문화예술 분야에서 자기편이 집권을 하면 권력 주변에서 한 자리하거나 적어도 이권을 챙길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내편, 네편’을 나눠 싸워온 측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기회주의는 ‘우파기회주의’와 ‘좌파기회주의’만 존재했다. 실제 이들은 각각 당시의 집권을 통해 소망을 이루었고 지금도 그런 입장과 행태에서는 거의 변함이 없다. 집단세력의 배경으로 내편이 있어야 기댈 데가 있고, 그런 입장에서 상대편에 대한 비난과 매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킴으로써 ‘밥과 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지금, ‘깡다구 있는 중도’가 시대정신이다!

한반도는 남북 두 나라로 나눠져 있고, 한국은 두 국민으로 찢겨져 있다. 즉, '한 민족, 두 국가(one nation, two states)'의 분단구조 위에, ‘한 나라, 두 국민(one country, two people)’의 분열 상태가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 지역, 계층, 세대 간 대립과 갈등이 두 편으로 나눠진 현실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그럼에도 나는 ‘87년 체제’아래 정권 경쟁의 핵심적인 요인은 이념이 아닌 ‘지역’ 요인이었으며, ‘지역 짝짓기’(영남+α vs 호남+α)가 지금까지 6번의 정권교체의 키워드였다고 생각한다. 대선 게임은 대개 ‘51 : 49’의 승부 구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 결과 패배한 측의 결과에 대한 참된 승복과 지지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러한 현상은 반복되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왜곡된 ‘좋고, 나쁨(선악)’ ‘옳고, 그름(正邪)’의 이분법적 입장에서 ‘내편/네편’으로 갈라져 대립․갈등의 정치구도를 형성했다.

<신자유주의와 북한 문제>

다시 중도주의․중도정치․중도파의 ‘중도’로 돌아와 보자. 현재 한국 정치의 이념 차원에서의 균열점은 신자유주의와 북한 문제에서 갈라진다. 신자유주의로 한국사회는 ‘10 : 90’ 의 양극화사회로 가파르게 나아가고 있으며, 동반성장은커녕 중산층의 급격한 몰락 속에 동반자살이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참담한 현실에 맞닥뜨렸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문제는 불가피한 이념이라기보다 모두가 극복대상으로 여긴다. 여기서 경제민주화, 복지 등의 문제가 담론 수준에서 활발하게 나타났다. 물론 진보와 보수 간 문제 인식과 해결 방식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상호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영역이 없지는 않다.

좌우 대립은 북한 문제에서 매우 비타협적으로 드러난다. 북한 문제에 대한 이념적․정치적(정책적) 대립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인식과 접근 방법에서 메우기 힘든 간극으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우리 국민은 신자유주의의 가치와 논리를 향유하는 기득권 보수우파의 몰염치와 부패․특권을 혐오하고 거부한다. 우리 국민은 북한 주민의 고통과 한(조선)민족의 미래를 가로막고 문명사회를 조롱하는 북한체제를 싫어하며, 북한체제에 관용적으로 보이는 진보좌파의 불합리한 주장과 행태를 거부한다.

우리 국민은 기득권적 보수우파의 거짓과 추한 몰골에, 진보좌파의 독선과 편견에 모두 지쳤다. 그럼에도 국민 대다수는 지역이데올로기의 볼모가 되어 정략적 정치인들의 농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민은 양극단 논리에서 해방되고자 하는데, 정치인(=정당)은 양극단의 논리, 사실은 지역구도 논리에 불과한 정치게임에 매몰되어 국민을 두 편으로 갈라놓는 논리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지역주의와 낡은 이념에 기생하는 정치가 사회통합과 통일을 가로막는 주범이다.

진보좌파도 보수우파도 아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가치와 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중도’는 크게 열려 있다. 나는 “중도는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7)이라는 데에 적극 동의한다. 중도는 ‘상식, 정상, 정통(正統)’의 입장에 기반한 정치적 입장과 선택이라고 하겠다. 지금 이 공간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깡다구 있는 중도’가 새정치이다!>

‘중도’의 지평은 크게 열려 있다. 이제 양극단의 논리와 입장으로 미래를 열어갈 수 없다. 공동체 내파 상황에 대한 해결을 둘러싼 이념적 대립은 무의미하다. 북한 문제에 보다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서 보다 합리적이고 민족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사회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독자적인 소임은 더 이상 기대할 필요가 없다.

정치적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입장을 바꾸거나, 새정치의 기치를 내세웠는데도 지지도가 높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극복대상인 기존 정치세력과 타협하는 노선은 이 시대의 참된 중도가 아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대안이념은 중도주의에, 대안세력은 힘있는 중도파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중도’는 국내 정치 차원에서는 ‘신자유주의 극복’,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의 접근 방식에서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냉정하고 합리적인 대북인식에 기반한 ‘미래지향적 통일관’을 제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중도정치와 중도파가 세상을 바꾼다. 이미 ‘중도’ 속에 한국과 한반도 주민 모두가 함께 가야할 방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만 강력한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 굳건한 변혁의 지위에 결코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가가 요청된다. 묵사발이 되더라도 ‘깡다구 있게’ 밀고 나가는 정치인과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



1) 최상용, "왜 중용(中庸)인가,“『중용의 정치』(나남출판, 2004), p. 17~19.
2) 서양 사상에서 중도(中道)나 중용(中庸)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golden mean)에서 보듯이, 중도․중용을 서양의 핵심적 사유로 보기는 힘들다. 플라톤과 기독교의 사유의 특징은 이분법적 사유체계라는데 있다.
3)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9.22.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편,『민세안재홍선집』2(지식산업사, 1983), pp. 15~60.
4) 《한성》1947.10.『민세안재홍선집』2, pp. 208~213.
5) 정윤재,『다사리공동체를 향하여 민세안재홍 평전』(한울, 2002), pp.
6) 최상용,『중용의 정치사상』(까치, 2012), pp. 10~11.
7) 김기협, “우리 사회, 진짜 중도가 필요하다,”『해방일기』, 2012. 8.
8) 우리 국민은 ‘깡다구 있는’ 정치인을 대망하고 있다. 참된 정치는 ‘중도’에서, ‘중도’는 '깡다구‘ 정치에서 시작된다.
8)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정치적 덕목인 ‘비르투(virtu)’를 나는 한국정치에서 ‘정치적 깡다구’로 해석하고 싶다. 여기서 정치적 ‘깡다구’는 이런저런 위협이나 회유에 굴복하지 않거나 또는 매우 힘든 정치적 상황에도 정치적 소신을 버리지 않고 일관된 노선을 뚝심 있게 밀고나가는 정치적인 태도와 입장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