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 사람들]임 감독과의 만남! 기사!(펌)

by 在民 posted Feb 26, 2005
임상수 감독 “‘박정희 사회’ 깨고 싶었다”
조선· 동아· 판사 모두 박정희 사고방식 접근 ‘씁쓸’
‘그때 그 사람들’ 임 감독 시민단체와 만남
  

작성날짜: 2005/02/25
최문주기자







    
“그날 하루의 얘기만으로도 부패 권력의 만연이 얼마나 한심하고 우스운 일인가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부패권력과 함께 우리 모두가 18년 간 살았고, 박정희를 정신적 아버지로 삼은 전두환, 노태우 시절까지 합해서 30년을 살았다. 그에 대항해 어떤 이들은 반대를 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광화문 거리에 나와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했다. 영화 앞 뒤의 다큐는 영화의 지평을 넓히는 의미가 있었다. 다큐가 잘림으로 해서 그런 지평이 확연히 줄어든 느낌이다. 판사를 대신해 여러분들께 사과드린다.”





법원의 일부 삭제 판결 뒤 논란 속에 개봉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감독 임상수씨가 시민단체 회원, 일반 시민들과 만났다.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가 마련한 공개 토론회 자리였다. 본격적인 행사에 앞서 참석자들은 일반상영에서 무지 처리된 영화의 앞뒤 3분 분량의 다큐를 비디오로 감상했다.





임상수 감독은 “오랜만에 보니 정말 아름답게 믹스된 장면 같다, 다큐 사진 찾아내고, 고르고, 편집하고, 컬러를 흑백으로 바꾸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분위기에 변화주고, 내레이션도 고심해서 쓰고, 김윤아씨를 두 번이나 불러 내레이션도 다시 읽게 하고, 음악 배치하고, 데모 장면 소리도 공들여 세심히 작업한건데”라고 아쉬움을 달래며 “필름을 자른 것은 정말 야만적 행위”라고 사법부의 판결에 유감을 표했다.





              


              24일 저녁 민족문제연구소가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임상수감독을 초청해 서울 정동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공개토론회를 갖고 있다. 양계탁 기자 gaetak@ngotimes.net


  


임상수 감독은 “영화는 10.26 하루 중 약 12시간 가량을 100여분에 담았지만, 사실 박정희 시대 18년의 공기, 사고방식을 담으려는 야심이 있었다”며 “박정희식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 작은 권력조직 내에 여전히 출몰 횡행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박정희에 대해 대중적으로 말하기 시작해야한다”며 영화를 만든 취지를 밝혔다.





그는 또 영화 흥행실적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 “조동에서 (영화에 대해) 살벌한 비유들을 썼는데, 그 위력도 새삼 실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은 참석자들과의 임감독의 대화.





-고등학생인 조카와 함께 봤는데, 당시 정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할지도 난감했다. 그런 점에서 주변 인물들이 너무 희화된 것 아닌가 싶은데.





△ 그런 얘기들 많이 듣는데, 난 희화화하지 않았다. 영화는 디테일한 부분에서 실제 사건과 같은 부분이 많다. 유명한 역사적 사건인데 우리가 그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영화와 실제가 어떻게 다른지도 정리해 볼 시간이 있길 원했는데, 아직 그럴 기회가 없는 것 같다. 실제 김재규가 보안사 지하실에 끌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뒤가 잘려진 고무신을 신고 보안사 소령들에게 심문당한 것도 사실이다. 심문 과정에서 한방 맞자 김재규가 발딱 일어나 차려 자세를 취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심지어 보안사쪽에서 김재규를 데리고 한강변 쪽으로 가다가 잠수교쪽에서 마이크로버스가 뒤집히는 사건도 있었고. 박흥주 대령은 사실 육본에서 체포돼 무장해제 됐었다. 그런데 화장실 간다고 하고 창문으로 도망가 다음날까지 차 몰고 계속 돌아다니다 후에 전두환 소장의 연락으로 되돌아갔다. 그 정도로 사건 주변이 어수룩했다는 것, 그걸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나는 김재규가 민주주의 혁명적 투사인지 과대망상주의적 돈키호테인지 잘 모르겠다. 박흥주 대령의 경우 실제 아주 청렴하고 야전에 있었다면 정말 군인이었을 그런 인물인데, 결국 단심 끝에 총살당해 죽었다. 그가 총살당하면서 ‘대한민국 만세’라고 부른 것도 사실이다. 나중에 내레이션 부분에서 윤여정씨가 “대한민국 만세, X까라, 철딱서니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철딱서니’ 부분에서 고민을 좀 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실존에 대해선 연민을 느끼지만 그는 어쨌든 총질해서 군인들을 죽였고 서슬퍼런 중정의 주요요직에 있던 사람이었다. 미망인의 입장에선, 얘들 남겨두고 그런 일에 휘말리다니하며 ‘철딱서니’의 존재가 됐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인물들이 희화화됐다고 느낀 것은 피상적 영화보기가 아니었나 싶다. 나는 희화화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게 웃겼다면 그 사람들이 정말 웃겼던 것이다.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것 같은데, 왜 박정희를 소재로 한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는지.





△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 박정희 정권이 어떤 정권인가에 대해 대중적으로 토론된 적이 없다. 전두환, 노태우 시절 12년 까지 합하면 우리는 통틀어 30년간 박정희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죽은 지 25년이 됐고, 박정희식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한 것은 30년이다. 그래도 지금은 거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보는데, 왜 자꾸 뭐가 삐걱거리고 안되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중 하나가 박정희식 사고방식이 지금, 여기에 출몰 횡횡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박정희식의 사고방식은 이것이다. 남이 알아주든지 말든지, 내가 출세하든지 말든지, 나만의 진실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하고 아름다운지의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고, 그것을 널리 퍼뜨린 것이 박정희다. 또한 그는 개인의 양심을 지키고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가치를 철저하게 배반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철저히 기회주의적인 것이었고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일반 시민들은 양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 시절 고위관료들도 물론 권력에 붙어 출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국가권력이 일반 시민의 양심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은 권력들이 있어서, 그 내에서 조직운영 방식으로 조직원의 양심을 자꾸 컨트롤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번 재판에 재판관도 분명 양심적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판결을 내렸다. 그것이야 말로 박정희식 사고방식이다. 조선일보 기자도 자기 양심에 따라 기사를 쓰지 않았다. 데스크가 원하는 기사를 썼다. 소조직들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일어난다는 게 박정희식 사고방식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박정희가 누구인지를 말해야한다.





-영화 만들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 유족들은 만났었는지, 외압 같은 건 없었는지 궁금하다.





△ 유족은 만나지 않았다. 보통 영화 만들 때 사전 취재를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 작품의 경우 철저히 인터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자료에만 의존했다. 누군가 만난다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았다. 영화 완성한 직후 김계원씨의 아들에게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한번 왔었는데, 부친이 억울하게 당한 측면이 있다 명예회복 하고 싶다는 요지였다. 이미 영화도 만들어놨고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아 거절했다. 그런데 영화 보면 상처를 좀 받으셨을 것 같다. 연관되는 이들이 생존해 있는 이들이 있음을 감안할 때, 영화 만들면서 그런 점이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





영화를 기획하고 자료조사를 시작할 때는 전작인 ‘바람난 가족’을 찍기 전이었다. 그때가 대선 전이었는데, 이회창이 이기면 이 영화를 못찍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촬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표 찍었다. 노무현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화 찍어야하기 때문이었다.(웃음)





비공개 제작을 원칙으로 했지만 사실 공식 공개되기 전에도 이미 영화기자들이나 많은 이들이 영화 제작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나라당에서도 알고 있었는데 박근혜 의원 반대파라고 하는 이재오 의원이 자꾸 끼어들려고 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국정원에서도 전화 한번 왔었다. 사무실 직원과 모 호텔에서 한번 만나긴 했는데, 별말은 없었다고 한다. 옛날 같으면 전화 한 통화로 영화 못 찍는 일이 될 수 있는데, 이제 법으로 대응하지 않나. 세상 많이 좋아진거라 하더라. 비로소 법치가 실현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일수록 사법부의 질이 높아져야한다고 본다.





-박정희 세대가 아닌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걸 느꼈으면 했나.





△ 10, 20대가 어떻게 볼 것인가 고민 많이 했다. 그러나 역사의식 없어도 영화를 그냥 정보부 직원들이 대통령 경호원 사이를 뚫고 들어가서 암살을 실행하는 장르적 서스펜스 스릴러로서 정치적 배경 없이도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력했다.





- 흥행실적이 저조한데, 중간에 배급사가 바뀌면서 흥행에 타격이 온 것인가.





△ 박정희는 혼자만의 박정희가 아니다. 그때 부를 축적하고 파워를 키워온 언론 재벌들, 기업들, 부동산 정보 등을 갖고 강남에 자리잡은 고위 관료들 등 한국의 추잡한 것들과 같이 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이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CJ나 조선일보도 그런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다. 그렇지만 그냥 영화 배급사로서의 CJ의 나름의 전략적 판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화씨 9.11의 경우, 처음 디즈니가 배급하려다가 손을 놓은 이유도 그렇지 않나.





사실 사회에 제출된 영화는 이미 사회의 몫이다. 굳이 감독의 입으로 얘기를 하자면 CJ가 배급을 놓음으로써 타격도 있었을 것이고 영화가 잘렸다는 점도 타격이 됐을 것이다. 또 조동에서 살벌한 비유들을 썼는데, 실제 영화를 본 분들 중에 조동에서 말하는 거 보고 생각했던 것만큼 영화가 그렇게 세지 않다는 반응들을 듣고 그 위력도 새삼 실감했다. 영화가 정치판 100분 토론식으로 논쟁이 진행된 것도 많은 사람들을 식상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 이후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중인데,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명예훼손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개인의 명예가 표현의 자유 때문에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상충가치의 조화점을 찾아나가는 게 사회적 합의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법적으로 악의적 명예훼손이 전혀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원 판단이 악의적 명예훼손을 했다면, 배상액 때리면 된다. 그러면 지불용의가 있다. 일이 그런 식으로 처리됐어야 됐다. 필름 잘라도 된다는 발상이 문제다.





표현의 자유가 지고지순한 가치라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의 발전, 역사의 진실, 공적 부분의 가치를 위하여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것들이 침해받아도 된다는 데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냉정히 봐야한다. 싸구려 영화로 개인의 명예를 악의적으로 훼손하려는 영화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명예훼손 여부를 판단하는 사법부의 질이 중요해 지는 시기라고 본다.





최문주 기자 cmjoo@ngotimes.net

추신:위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에서 주최한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님과의 만남'  취재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