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연예인 1호 ‘하리수’에 대한 몇 가지 단상

by 김정대 posted Apr 30, 2005
[칼럼 - 2001. 5.29 <시사펀치> 32호]

                    트랜스젠더 연예인 1호 ‘하리수’에 대한 몇 가지 단상
                                                                          마이너리티 계급의 투쟁과 사랑


'Hot Issue'로 떠오른 트랜스젠더
성전환 연예인 하리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본명인 ‘이수’라는 이름에 ‘HOT’이라는 접두사를 성으로 붙여서 말 그대로 ‘핫이슈’가 된 그녀, 아니 그인가? 방년 22세(1979년생)에, 168cm, 48kg, 35-24-35의 몸매를 가진 어엿한 아니, 섹시한 처녀의 몸을 가진 자궁 없는 여자, 성기를 자른 남자가 바로 그이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 자신의 몸과는 다른 반대 이성의 삶을 자각하고 살게 된, 사는 사람들의 성적 명칭이다. 그 중에서도 목숨을 건 성전환수술 -하긴 안전한 수술이란 없겠지만- 까지 받아 외모를 완전히 바꾼 케이스를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로 세분하기도 한다. 하리수가 바로 그 케이스이다.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해야 다음 단계의 자기계발도, 자아실현으로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정말 불리하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숱한 고민과 번민, 눈물과 회한을 삼켰어야 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이성애자들의 편견과 냉대, 배척과 차별에 맞서서 자신을 인지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명백한 성적 소수자에 속하는 트랜스젠더, 또는 동성애자들에겐 이성애자 중심의 우리 사회에서의 성공을 향한 길은 태생적으로 형벌과 같은 족쇄를 몸에 달고 뛰어야 하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하리수는 행복한 여자이다.
얼마 전 연예정보사이트 ㈜이피지(www.epg.co.kr), 하이텔(www.hitel.net) 등지에서 벌인 설문조사에서는 참가자 중 50% 이상이 그의 성별을 ‘당연히 여성’이라 답한 반면, ‘남성’이라 한 경우는 불과 16%에 불과했다. 시기와 조건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사실 그 어떤 무명 모델보다도 그는 쉽고 빠르게 자신의 이름과 상품성을 부각시키는 행운을 잡았다. ‘거짓말’(도도화장품)처럼 말이다.

어쨌건 그는 연예인으로서도 일단 성공적인, 매우 성공적인 데뷔를 치룬 것이고, 덩달아 트랜스젠더로서의 성적 정체성도 인정받은 것이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볼 때, ‘여자, 그리고 트랜스젠더’라는 기호가 입력된 상태로 대하게 되어있다. 이런 그를 매스미디어와 시장이 여자로, 잘 팔리는 상품으로 포장해주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연예인이자 트렌스젠더로서 행복한 출발이다. 용기 있고 솔직했던 ‘커밍아웃’의 결과로 잘나가던 일자리를 잃어버린 홍석천 같은 동성애자(게이)에 비해서, 그는 반대로 사회적 직업을 당당하게 얻게 된 것 아닌가.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들....
동성애자(Gay, Lesbian). 같은 성별을 가진 이에게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느끼는, 성적지향(Sexual orientation)이 동성에게 있는 사람들. 남자는 게이(Gay), 여자는 레즈비언(Lesbian)으로 불린다. 이들 또한 이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무시되고 배척받는 성적 소수자(Sexual Minority)들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세상에는 오직 두 개의 性!, 남성과 여성만이 전부인양 알고, 우기며 살아왔다. 이성애자, 그 중에서도 남근을 가진 자들만이 일상과 정치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권력을 쥐고,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다른, 소수의 무리들은 모두 정신병자요, 장애인으로 취급해 오는 세월들이 이어져 왔다. 그 속에는 다른 하나의 性인 여성계급의 운명도 순종과 차별 속에서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과거에 흔히 착각하며 불렀던 ‘호모(Homo-sexual)’라는 호칭에서도 그런 차별의 극단적 상징 기호를 읽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헝가리의 ‘마리아 벤커트’란 의사가 만들어 냈다는 이 말에는 동성애자들을 同性에게 오직 성적욕망만을 지닌 사람으로 -남성의 항문에만 관심이 있는- 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모라는 호칭의 이면(裏面)에는 그저 별종 성도착증 환자로 치료와 감시, 통제의 영역으로 내몰렸던 동성애자들의 아픈 과거가 있는 것이다.

하리수는 말한다. ‘자신은 다른 몸으로 태어났지만, 분명 여자임을 자각하고 여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 호소는 이제 분명 이 사회 과반수이상의 암묵적 지지와 인정을 끌어낼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리수는 말한다. '대중매체에서 트랜스젠더를 오직 여성성에만 과잉 집중시킴으로서 획일화된 시각으로만 비추게 되어서 안타깝다’고. 바로 이 지점이 '트랜스젠더 1호 연예인 하리수’와 우리가 더불어서 고민할 부분이다.

일찍이 일반인(?)들과 다른 모습(Minority)의 몇 몇 뛰어난 藝人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서 주위를 환기시키고,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적은 종종 있었다. 물론 정치적, 문화적 억압과 통제가 극심했던 속에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등의 파격적 발탁이 있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인순이’, ‘윤수일’에서 지금의 ‘소냐’ 등으로 이어진 혼혈 가수들의 출현은 단일 혈통주의를 내세우는 우리 사회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미국계 혼혈인들의 존재를 알렸었다.

피의 순수성을 쓰잘데기 없이 강조했던 우리 사회의 꼴통 보수주의 앞에서, 더욱이 피지배 매춘의 결과가 다수를 이룬 혼혈인들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차별의 고통은, 지금의 정체성이 다른 성애자들 만큼이나 극심했다. 지금도 크게 좋아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과거에 비해 최소한 인식의 변화정도는 이루어지고 있다. 또 그 지점에 혼혈 대중 연예인들의 활약이 있었다.


하리수, 연예계 이슈를 넘어선, 소수자들의 핫이슈로 성장하기를
지금 하리수의 등장을 과거 혼혈 가수들의 활약과 결부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혼혈인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진 소수자들과 비교할 수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하리수가 언급했던 획일화 된 성적인 시선을 고민해보자.
그녀가 언급하고 안타까워한, 트랜스젠더에 대한 주류사회의 일방적 시선은 그 화제성과는 무관하게 ‘트레스젠더를 획일화된 여성성의 과잉으로만 치장한 매스미디어와 사회적 분위기가 그들이 지향하는 女性과는 또 다른 부류로 선을 긋기에, 결국 같은 사회적 성차별에 대한 여성운동과의 연대 지점을 형성하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주류(다수)가 비주류, 소수를 보는 편협한 시선이 소수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과 연대보다는 또 다른 경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랜서젠더들이 ‘우리도 여성(또는 남성)이다’를 주장하던, 동성애자나 혼혈아, 장애우, 여성 또는 이 땅의 모든 소외 받고 억압 당하는 소수자들이 ‘우리도 사람이다’를 주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 같다.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출발해야 할 인식의 경계들이 성적으로, 혈통으로, 장애의 정도 등으로 계속 수많은 경계에 갇혀서 사고한다면, 내 몸에 대한 사랑이 남과의 이해와 연대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사회의 이런 저런 수많은 소수자들은 계속 ‘다름의 아름다움’을 내세우지 못하고 차별 속에 위치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세상은 점점 피와 성적 절대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은 벗어난, 적어도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주류사회는 그들을 예전처럼 장애인이나 정신병자로 내몰지 않을 뿐, 털끝만큼의 대책이나 대안도, 같이 살려는 의지의 발로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술집 접대부, 클럽의 쇼걸 등을 비롯한 음지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하는 많은 소수자들의 처지를 반전시켜 보여줄 수 있는 위치가 대중 연예인인 것이다.

성문화평론가 이명구씨는 하리수의 등장을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어떤 새들이 머리로 종을 치고 죽는 희생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그렇다. 우선은 그렇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견고한 틀은 깨어질 틈조차 보여줄리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누구도 자신의 대중적 활동을 사회적 운동의 의미로 해석하고 억압 받는 소수자들의 대변자로 나선 것은 아니다. 또 나설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실력이 출중한 한 개인(혼혈가수)으로서, 또는 ‘여자보다 예쁜’ 모델이자 배우(트랜스젠더)로서 마침 운과 때가 잘 맞아서 사회적 용인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측면이 강하다.

하리수 그가 훌륭한 연기를 하고, 멋진 춤을 추는 가수가 되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이 사회에 만연한 또 하나의 터부를 멋지게 깨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그 ‘여자’ 연예인에게 바라는 것은 그의 성공이 한 개인의 유별남으로 인한 성공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제 나아가 동류의 소수자들이 주류 성계급이 가진 이 엉뚱한 차별을 연대해 극복해나가는 모범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낸 보람은 자신의 생으로 인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확인에 있지 않을까. 하리수의 데뷔와 이어질 대중 활동이 닫힌 시각의 우리사회를 부수고 나갈 수 있는 사랑과 투쟁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