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니]'우리의 소원'을 만든 사람. 夕影 안석주

by KG posted May 30, 2005
얼마 전 애국가가 화제에 올랐었다.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유족이 그 동안 보유하고 있던 저작권을 우리나라 국가 소유로 넘겨준 일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설령 애국가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이제 안익태 선생을 모르는 일은 없게 되었다.

애국가만큼이나 대한민국 국민이면 한번쯤 불러보지 않은 적이 없을 노래가 있다. ‘우리의 소원’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혹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우리의 소원’의 작곡가는 안병원(安丙元79)씨다. 현재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복지재단 토론토 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1년에 한두번씩은 반드시 한국에 들어와 업무를 보고 간다. 그는 동요작곡가이기도 하지만 화가이기도 해서 2003년에는 북한어린이돕기 자선전인 ‘안병원유화전’도 열었다. 이 해 안병원씨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반 ‘우리의 소원’을 CD로 엮어 냈다. 여기에는 그가 작곡한 동요 27곡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의 소원’을 비롯해 ‘구슬비’, ‘학교 앞 문구점’, ‘가을바람’, ‘봄노래’, ‘통일의 기쁨’ 등이다. 윤석중, 어효선, 강소천 등의 동시에 곡을 붙였다. 그런데 그중 ‘우리의 소원’의 작사가만 유독 ‘안석주’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안석주. 그는 안병원씨의 아버지다.



무소불위의 재인, 안석주

서설(序說)이 길었다. 사실 이 글은 소리없이 묻혀버린 재인(才人) ‘안석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석주(安碩柱)의 호는 석영(夕影), 1901년 태어나 1950년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로 숨졌다. 그의 직업은 하도 많아서 뭐라 한 가지로 규정할 수가 없다. 시인·소설가·서양화가·미술평론가·기자·시나리오 작가·영화감독·배우·가수·무대장치미술가. 그를 두고 당대 사람들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재인(才人)’이라고 했다. 일제시대 안석주는 이광수에 버금갈 만큼 유명했다. 게다가 매끄러운 생김새 덕분에 여학생들이 팬레터를 쓰고 그를 보러 신문사로 찾아올 정도였다.

‘우리의 소원’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하던 1920년대 후반이나 1930년대 초반쯤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안석주가 이 시를 지었을 때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었다. 해방과 전쟁을 겪고 난 후 안병원씨가 곡을 붙이면서 ‘독립’을 ‘통일’로 자연스럽게 바꾼 것이다.

안석주가 첫 발을 내디딘 분야는 그림이었다. 1916년 휘문고보에 입학한 안석주는 재학중 ‘고려화회’를 조직하고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양화 수업을 받았다. 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혼고(本鄕)양화연구소에서 수학했으나 몸이 쇠약해져 도중에 귀국했다. 1921년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에서 노수현, 이상범 등과 함께 서양화를 배운 뒤 휘문고보에서 도화강사(미술교사)로 재직, 동아일보에 신진작가 나도향의 ‘환희’에 삽화를 그려넣은 것이 그의 첫 작품이다. 노수현, 이상범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미술기자로 활동한 것처럼 당시는 요즘과 달리 신문 삽화는 화가들의 몫이었다.

안석주는 홍사용·이상화·박영희·나도향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23년에는 토월회(土月會)를 이끌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 역을 맡아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후 동아일보, 시대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학예부(현 문화부) 기자로 삽화를 담당하게 된다. 이때 소설 ‘인간궤도’를 집필했다.



만문만화의 새 장르 개척

1928년 조선일보 학예부장 안석주는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를 찾아간다. 신문에 연재할 소설을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편집국장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의 ‘무정(無情)’을 내세워 독자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홍명희는 달갑지 않았으나 안석주의 삼고초려에 넘어갔다. ‘임꺽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홍명희가 유치장에 갇혀서도 원고를 쓰자 안석주는 사동을 시키지 않고 직접 가서 받아왔다. 그렇게 ‘임꺽정’은 6년간 “벽초 글·석영 그림”으로 연재됐다. 이광수가 조선일보로 적을 옮겨 ‘유정’을 쓸 때는 “춘원 소설에 석영 삽화”란 말이 생겨났다.  

‘만문만화(漫文漫畵)’라는 장르를 개척한 주인공도 안석주였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에 짤막한 글을 붙여 ‘만문만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주로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일본을 통해 서양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모던’ 열풍에 휩쓸린 젊은이들의 왜곡된 문화관에 비판을 가했다. 경성의 뒷골목, 번쩍거리는 백화점, 극장가의 모던뽀이·모던껄, 카페와 딴스홀(댄스홀), ‘사나희와 여편네’ 등 조선 사회의 모든 이들이 묘사 대상이었다. 그 후 신춘문예 모집에 시·소설 외에 ‘만문만화’도 포함됐다. 그의 만문만화가 비로소 학계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2003년 연세대 신명직 교수가 논문과 함께 책 ‘모던뽀(ㅃ=ㅅ+ㅂ)이 경성을 거닐다’를 펴낸 것이 거의 유일한 연구물이다.

그림 이후 그는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학예부장으로 극장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다보니 영화 마니아가 된 것이다. 마침 1934년 자신이 쓴 소설 ‘춘풍(春風)’을 박기채 감독이 영화로 만드는 것을 보고 안석주는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맡기로 결심, 첫 영화 ‘심청전’을 만든다. 그러나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했다가 총독부로부터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영화를 만들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역임한 뒤 전조선문필가협회, 조선극작가협회 등에 참여했고 ‘문화시보’를 창간, 문교부 예술위원까지 지냈다. 1950년 2월 24일 안석주의 장례식은 장충체육관에서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다.

도무지 무슨 직업으로 규정해야 할지 모를 이 예술인에게, 일제시대를 한 집에서 보낸 그의 처제 고(故) 김갑순(金甲順·전 이대교수) 여사는 생전에 “그래도 ‘삽화가’가 가장 제격이겠다”고 회고했었다. 아들 안병원씨는 “삽화가면 어떻고 시인이면 어떻겠냐”며 “다만 아버지의 자취가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불과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던 안석주는 그러나 지금 화가도 시인도 그 무엇도 아닌 채로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의 소원’을 만든 사람’만으로도 기억될 가치는 충분할 것 같은데 말이다.

유나니(회원. 주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