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을 지배하는 40개 가문

by 정창수 posted Jun 21, 2005
현재까지 최초의 세계일주는 마젤란의 함대가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마젤란은 필리핀에서 원주민과의 사소한 충돌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래서 어찌 보면 탐험가 마젤란이 죽지 않고 살아서 세계일주를 완성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약간의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그런 낭만적인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트갈은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는 초기 제국주의적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때였다. 스페인은 당시 이미 인도로 가는 항로를 장악한 포르트갈에 밀려 아메리카 대륙쪽으로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알렉산더6세가 중재에 나서서 대서양 한가운데 섬인 아조레스섬과 카보베르데섬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양국의 지배범위를 갈랐다. 그것이 양국의 세계국경선이 된 것이다. 그 안에 살던 수억이 넘는 사람들의 의사는 물어 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포르트갈은 이미 인도를 돌아 계속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는데 자신들은 그나마 발견한 신대륙이 아시아대륙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차에 등장한 것이 마젤란이다. 따라서 마젤란의 원래 목적은 향료를 얻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콜럼버스처럼 벤처업체에 투자한 효과로 일확천금을 누린 터라 이번에는 큰 고민없이 투자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필리핀

마젤란은 투자받은 5척의 배를 가지고 아메리카 남단의 해협을 통과하면서 마젤란 해협이라 이름 짓고 계속 전진하였다. 그런데 그만 향료를 생산하는 인도네시아쪽으로 가지 못하고 북쪽으로 잘못 길을 들어 필리핀의 세부섬에 2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세부섬에서 마젤란은 이곳을 스페인영토라고 선언하고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불행하게도 그는 곧이어 스페인 군대의 힘을 새로 개종한 원주민들에게 과시하고자 제멋대로 행동하는 원주민들이 사는 근처에 있는 막딴 섬을 공격했다. 그러자 의혹을 품게 된 세부섬의 추장인 라뿌-라뿌(Lapu-Lapu)는 마젤란을 죽여버렸다. 그래서 부랴부랴 도망을 간 그의 부하들은 향료를 구해 싣고는 겨우 한척의 배만이 출발한지 3년만인 1522년에 스페인으로 귀환한다.

물론 얼마 후에 미겔 데 레가스삐(Miguel de Legaspi)가 이끄는 스페인의 군대가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은 세부섬을 습격하고 식민지를 만들어 버린다. 필리핀이라는 이름은 스페인의 필립 2세의 이름에서 연유했다. 최초의 영구 정착지를 만든 1565년까지는 그저 그런대로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1571년 스페인은 식민본부를 세부에서 마닐라로 옮겼으며, 점차적으로 필리핀 전역에 통제권을 확보해 나갔다.

그런데 필리핀은 7천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그래서 어느 시기에도 전국적인 통치체가 존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주의자들은 이들 지역토호인 ‘다뚜’(라뿌 라뿌도 다뚜이다)에게 위임통치를 시키고 이들 사이에서 혼혈인들을 낳았고 이들 40개 가문이 현재 토지를 포함하여 필리핀의 부를 90%이상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사실상의 지배연합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필리핀은 2개의 계급만이 존재한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상류계급과 하류계급만이 존재하고 중간이 없는 것이다. 상류계급은 성처럼 철조망과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중세의 영주처럼 생활하고 있으며 어떤 변화나 개혁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독립운동도 개혁운동도 방해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선거에서도 표를 사거나 지주의 입장에서 종속된 사람들에게 투표를 강요하게 된다. 5백년 가까이 동안 누려온 이들의 권력은 아마 이들을 비호하는 미국이 물러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빈민들은 절대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필리핀의 NGO들은 우리처럼 사회참여보다는 대부분 원조기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국토를 차지해버린 40개 가문

더군다나 산업경제에 있어서도 15개 주요 제조업을 모두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독점 혹은 확고한 시장지배를 통해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종속하고 있는 미국과의 관계해결 없는 경제개혁은 불가능하다. 민족산업은 경공업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이런 경제구조는 세계경제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커피나 고무 등 대규모 플랜테이션사업이 무너지면서 경제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따라서 모든 통치자는 토지개혁을 중심슬로건을 내세우고 집권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이 주요가문 출신이었다. 처음으로 독재자 마르코스가 이에 속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토지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극에 달하여 상당수의 필리핀인들은 후크(항일인민군의 약자)반란군을 지지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개혁을 기치로 내건 막사이사이가 등장하였지만 그마져도 지배연합의 붕괴를 우려하여 토지개혁을 단행하지 못했다. 그 결과 마르코스가 기대를 등에 업고 당선되었지만 그는 모두 빼앗아 자기 집안의 것으로 하는 또 다른 지배계급을 만드는 개혁을 추구했을 뿐이다.

그래서 초기 독립 후 동양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불리우며 일본 다음으로 경제적 성공을 이루었던 필리핀은 토지분배와 종속적인 산업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아시아의 병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하여 이런 경제적 불균형은 정치까지도 이들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그래서 개인적인 인기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가 진행되었다. 개인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필리핀을 계속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소수 각성된 사람들은 현실정치에서 희망을 못 느끼고 반군에 가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필리핀은 극심한 갈등에 휩싸여 있다. 현 아로요대통령의 무능과 부정이 드러나 퇴진위기에 몰린 것이다. 역시 이 주요가문 출신인 아로요는 집권초기 자신의 재산을 내놓겠다고 공언하면서까지 개혁 의지를 표명했고 경제학박사라는 자신의 이력을 내세우면서 경제성장을 약속했다. 당시 그가 내놓은 땅은 3백만 평에 달하는 것이었다.

토지개혁, 머나먼 미래

하지만 그 역시 토지개혁은 손도 못대고 대미종속적인 경제구조를 개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친족의 부정비리까지 드러나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아마도 아로요도 또다시 과거 지도자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비극적인 악순환의 고리는 언제쯤 끊기게 될까. 그렇다면 한국의 토지문제는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과연 필리핀에서만 볼 수 있는 슬픈 열대의 이야기일 뿐인가?

보통 우리들은 열대지방의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일을 할 땅이 없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민족주의적이고 평등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찾기가 어렵다. 부족별로 자연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일할 땅도 없는 사람들에게 게을러서 못산다고 하면 정말 억울한 노릇일게다.

우리도 100여년 전에는 그렇게 게으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문명화되고 발전할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방문 후에 남긴 기록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부지런한데 이는 타고난 민족성은 없다는 말이 아닌가하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중에 비숍여사가 쓴 기록을 보면 나라를 벗어나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그렇게 부지런하고 부와 실력을 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민족인가를 의심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조선의 부패와 무능에서 찾았다고 한다. 일해 봐야 빼앗기기만 하고 열심히 일해 봤자 소용없으니 말이다.

필리핀도 마찬가지이다. 필리핀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이고 한때 우리나라에 기술지도를 하고 식량 등 물자를 원조했던 적도 있었던 나라이지만 지금은 그때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역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게으른 것이야 어디나 있는 것이지만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필리핀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수십만 명 이상이 해외로 이주노동을 한다. 그래서 ‘아시아의 최대의 식모수출국’이라는 오명까지 듣기도 했다. 필리핀에는 이들을 담당하는 독립된 행정기관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들이 정말로 게으르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가난하게 살아봐서 그들의 마음을 알기에 그들의 고달픈 현실이 하루빨리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1%가 전체 토지의 45%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10%로 범위를 넓히면 73%에 달한다. 주택으로보면 더 심각하다. 그러니 토지문제가 필리핀의 문제만은 아닌듯하다. 토지문제 해결없이 경제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