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중에 재미있는 전쟁이 하나 있는데, 바로 새똥 때문에 생긴 전쟁이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전쟁으로 많은 나라들의 운명이 바뀌고 세계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연의 역사 구아노
사연은 이렇다. 남미 페루의 태평양연안에서 조금 떨어진 친차(Chincha)군도라는 작은 섬들이 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인도였고 그렇기 때문에 가마우지나 펠리컨, 그리고 모든 새들의 낙원이 되어 있었다. 새들의 배설물 덩어리인 구아노(guano)가 수백 미터 높이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수 만년 동안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처음에 이곳을 식민지로 개척한 스페인 사람들은 구아노, 즉 이 새똥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페루지역에서 원래 살던 잉카제국의 원주민들은 구아노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높은 농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새똥은 이들에게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생활양식 자체를 우습게 여기는 풍토였고 그나마도 대부분 죽었거나 산속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구아노의 존재는 점차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난다. 당시까지 유럽에는 화학비료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하자 질산 등을 이용한 새로운 경작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소농중심의 집약적인 농업에서 대규모 영농으로 바뀌고 있던 때였다. 더구나 인구와 소비의 증대로 인하여 농업생산성이 증대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페루 친차군도의 거대한 새똥들 즉 구아노였다.
돈벼락 그리고 똥벼락을 맞은 폐루
무려 3백년이 지난 다음에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구아노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1840년대부터는 증기선이 개발되어 먼 곳의 구아노를 유럽으로 대량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금융자본 특히 영국의 자본은 무려 100만 파운드나 투자하면서 구아노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당시 오랜 내전으로 나라가 조각나 있었던 페루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똥벼락, 즉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더구나 이 구아노는 개발자금도 거의 들지 않는다. 땅에 산처럼 쌓인 새똥을 퍼서 실어보내면 그뿐이다.
덕분에 페루는 순식간에 국가 채무를 갚아버리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금융자본은 근대화를 위한다면서 폐루에 거액을 빌려주면서 경제정책을 컨설팅하게 된다. 이에 따라 페루는 당시 근대화의 상징인 대규모의 설탕플랜테이션에 투자했다. 더구나 구아노를 담보로 마구 돈을 빌렸다. 아마도 새똥으로 외채를 빌려 쓴 거의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단일 작물에 의한 플랜테이션은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구아노의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영국 금융자본의 음모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페루는 잠시 동안의 풍족한 시간을 지나 남아메리카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다. 진짜 똥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1876년에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구아노 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아마도 외채를 갚지 못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세계를 뒤흔든 채무불이행’이라고 부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은 충격과 분노로 진동한다. 돈도 돈이지만 구아노의 통제권을 잃게 되면 이미 증대된 농업생산력이 유지하지 못하고 유럽농업에 심각한 타격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구아노를 몇 십 년 동안 사용한 결과 농업의 생산양식이 바뀐 것이다. 당연히 유럽은 구아노를 포기할 수도 없었고 돈을 더 지불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유럽은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고 드디어 페루 영토지만 칠레와의 국경 가까운 곳에서 친차군도보다 훨씬 많은 구아노를 찾아냈다.
그리고 구아노의 저주 태평양전쟁
페루는 다시 한 번 횡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비극을 부르는 서곡이었다. 이 구아노로 인하여 태평양전쟁(1879~1883)이 발발한 것이다. 땅을 지키려는 폐루와 이 부근에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의 연합군, 그리고 땅을 빼앗으려는 칠레 간에 5년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금융자본의 주축세력이었던 영국은 칠레의 해군을, 프랑스는 육군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미국까지 참여해서 막대한 전쟁비용과 무기를 지원했다. 그래서 겉모습은 페루와 칠레의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페루와 영국의 전쟁이었다. 페루의 채무불이행에 대한 응징과 국유화로 인한 구아노의 통제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해서 영국으로 대표로 한 유럽 및 미국 연합국이 일으킨 최초의 국제적인 자원전쟁이었다. 여기서 칠레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용병역할을 한 것이다.
아무튼 근대화된 군대와 거대 금융자본의 도움으로 돈 걱정 없이 전쟁하는 칠레에게 페루는 완패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 즉 이 새똥전쟁으로 페루는 황폐화되고 영토를 빼앗겼고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잃게 되어 지금과 같이 내륙국이 되고 만다. 구아노로 인한 저주를 받은 것이다.
반복되는 구아노의 저주를 받은 칠레, 그리고 다시 가난해진 그들
페루는 뜻하지 않게 횡제를 한 셈이지만 그들 역시 구아노의 저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갑자기 부유해진 칠레는 페루가 했던 것처럼 유럽자본의 조언대로 산업화와 근대화를 진행했지만, 전쟁 때의 지원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는 그대로 외채가 되고 역시 5년 후에 칠레의 경제는 파탄 나고 재정위기에 몰린 칠레정부는 1888년 구아노의 국유화를 진행했다.
그런데 곧이어 칠레는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구아노의 통제권을 잃어버릴 수 없었던 미국과 영국은 페루와 마찬가지로 칠레의 경제개혁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지원하는 반군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에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미국의 무기산업이 최초로 본격적인 개입을 한 때이기도 하다. 아무튼 민족주의적인 정권을 몰아내고 반군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구아노는 다시 미국과 영국의 것이 되었다. 20세기의 석유전쟁이 있다면 19세기에는 새똥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페루는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거운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칠레는 페루보다는 사정이 조금 더 낫지만 부채문제는 여전하고 더군다나 당시에 형성된 제국주의와 군부와의 관계가 이념문제를 구실로 이어져 쿠데타가 발생하고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는 등 기나긴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가게 된다. 이들에게는 남아메리카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점도 있었지만 최초의 자원전쟁의 희생자로서의 문제점이 더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이 중동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유목문화를 포함하여 독특한 생활양식을 유지하던 그들에게 석유라는 돈벼락이 떨어졌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중동에 개입한다. 그래서 중동 내에서 분쟁이 격화되고 영국과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도 거세졌다. 지금이야 돈벼락 때문에 그나마 현재의 상황을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석유가 떨어졌을 때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아마도 구아노를 잃어버린 페루의 운명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할 수 있다.
자연의 역사 구아노
사연은 이렇다. 남미 페루의 태평양연안에서 조금 떨어진 친차(Chincha)군도라는 작은 섬들이 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인도였고 그렇기 때문에 가마우지나 펠리컨, 그리고 모든 새들의 낙원이 되어 있었다. 새들의 배설물 덩어리인 구아노(guano)가 수백 미터 높이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수 만년 동안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처음에 이곳을 식민지로 개척한 스페인 사람들은 구아노, 즉 이 새똥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페루지역에서 원래 살던 잉카제국의 원주민들은 구아노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높은 농업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새똥은 이들에게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원주민의 생활양식 자체를 우습게 여기는 풍토였고 그나마도 대부분 죽었거나 산속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구아노의 존재는 점차 잊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에서 농업혁명이 일어난다. 당시까지 유럽에는 화학비료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달하자 질산 등을 이용한 새로운 경작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소농중심의 집약적인 농업에서 대규모 영농으로 바뀌고 있던 때였다. 더구나 인구와 소비의 증대로 인하여 농업생산성이 증대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페루 친차군도의 거대한 새똥들 즉 구아노였다.
돈벼락 그리고 똥벼락을 맞은 폐루
무려 3백년이 지난 다음에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구아노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1840년대부터는 증기선이 개발되어 먼 곳의 구아노를 유럽으로 대량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의 금융자본 특히 영국의 자본은 무려 100만 파운드나 투자하면서 구아노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당시 오랜 내전으로 나라가 조각나 있었던 페루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똥벼락, 즉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더구나 이 구아노는 개발자금도 거의 들지 않는다. 땅에 산처럼 쌓인 새똥을 퍼서 실어보내면 그뿐이다.
덕분에 페루는 순식간에 국가 채무를 갚아버리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금융자본은 근대화를 위한다면서 폐루에 거액을 빌려주면서 경제정책을 컨설팅하게 된다. 이에 따라 페루는 당시 근대화의 상징인 대규모의 설탕플랜테이션에 투자했다. 더구나 구아노를 담보로 마구 돈을 빌렸다. 아마도 새똥으로 외채를 빌려 쓴 거의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단일 작물에 의한 플랜테이션은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구아노의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영국 금융자본의 음모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페루는 잠시 동안의 풍족한 시간을 지나 남아메리카 최대의 채무국이 되었다. 진짜 똥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1876년에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구아노 산업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아마도 외채를 갚지 못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세계를 뒤흔든 채무불이행’이라고 부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은 충격과 분노로 진동한다. 돈도 돈이지만 구아노의 통제권을 잃게 되면 이미 증대된 농업생산력이 유지하지 못하고 유럽농업에 심각한 타격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구아노를 몇 십 년 동안 사용한 결과 농업의 생산양식이 바뀐 것이다. 당연히 유럽은 구아노를 포기할 수도 없었고 돈을 더 지불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유럽은 대체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고 드디어 페루 영토지만 칠레와의 국경 가까운 곳에서 친차군도보다 훨씬 많은 구아노를 찾아냈다.

그리고 구아노의 저주 태평양전쟁
페루는 다시 한 번 횡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비극을 부르는 서곡이었다. 이 구아노로 인하여 태평양전쟁(1879~1883)이 발발한 것이다. 땅을 지키려는 폐루와 이 부근에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의 연합군, 그리고 땅을 빼앗으려는 칠레 간에 5년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당시 금융자본의 주축세력이었던 영국은 칠레의 해군을, 프랑스는 육군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미국까지 참여해서 막대한 전쟁비용과 무기를 지원했다. 그래서 겉모습은 페루와 칠레의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페루와 영국의 전쟁이었다. 페루의 채무불이행에 대한 응징과 국유화로 인한 구아노의 통제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해서 영국으로 대표로 한 유럽 및 미국 연합국이 일으킨 최초의 국제적인 자원전쟁이었다. 여기서 칠레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용병역할을 한 것이다.
아무튼 근대화된 군대와 거대 금융자본의 도움으로 돈 걱정 없이 전쟁하는 칠레에게 페루는 완패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 즉 이 새똥전쟁으로 페루는 황폐화되고 영토를 빼앗겼고 볼리비아는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잃게 되어 지금과 같이 내륙국이 되고 만다. 구아노로 인한 저주를 받은 것이다.
반복되는 구아노의 저주를 받은 칠레, 그리고 다시 가난해진 그들
페루는 뜻하지 않게 횡제를 한 셈이지만 그들 역시 구아노의 저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갑자기 부유해진 칠레는 페루가 했던 것처럼 유럽자본의 조언대로 산업화와 근대화를 진행했지만, 전쟁 때의 지원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는 그대로 외채가 되고 역시 5년 후에 칠레의 경제는 파탄 나고 재정위기에 몰린 칠레정부는 1888년 구아노의 국유화를 진행했다.
그런데 곧이어 칠레는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구아노의 통제권을 잃어버릴 수 없었던 미국과 영국은 페루와 마찬가지로 칠레의 경제개혁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지원하는 반군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때에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미국의 무기산업이 최초로 본격적인 개입을 한 때이기도 하다. 아무튼 민족주의적인 정권을 몰아내고 반군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 구아노는 다시 미국과 영국의 것이 되었다. 20세기의 석유전쟁이 있다면 19세기에는 새똥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페루는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무거운 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칠레는 페루보다는 사정이 조금 더 낫지만 부채문제는 여전하고 더군다나 당시에 형성된 제국주의와 군부와의 관계가 이념문제를 구실로 이어져 쿠데타가 발생하고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는 등 기나긴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가게 된다. 이들에게는 남아메리카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점도 있었지만 최초의 자원전쟁의 희생자로서의 문제점이 더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이 중동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유목문화를 포함하여 독특한 생활양식을 유지하던 그들에게 석유라는 돈벼락이 떨어졌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중동에 개입한다. 그래서 중동 내에서 분쟁이 격화되고 영국과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도 거세졌다. 지금이야 돈벼락 때문에 그나마 현재의 상황을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석유가 떨어졌을 때 그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아마도 구아노를 잃어버린 페루의 운명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