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이제 독립영화라는 말은 낯설지 않다. 달라졌다. 많이 달라졌다. 뒤돌아보는 짓도 그만큼 했으면 됐건만, 지금의 독립영화는 기어코 뒤를 돌아보게 한다. 돌아보기 편한 10년 전과 비교해도 독립영화의 강산은 몇 번이나 변했다. 좋다. 아주 좋다. 그런데 이런 희희낙락을 마뜩찮게 생각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있다. 군부정권? 독재정권? 알다시피 요즘 그런 거 없다.(써놓고 보니 저 말도 참 오랜만에 해본다). 그럼, 그들이 누구냐고? 그들은 영화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다.
2000년이 넘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은 우리를 ‘독립영화(인)’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독립영화를 한다고 말하기엔 스스로 생각해도 쪽팔려서 단편영화라는 이상한 은신처에 숨어있던 우리들에게 ‘너넨 독립영화야!’라며 사람들은 독립영화라는 투쟁의 예술, 그 치열한 삶의 광장으로 우리를 기어코 끌어냈다. 지금 우리는 그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광장의 주인이 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 광장에서 광장공포증과 폐쇄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70년대 실험영화, 소형영화로부터 80년대의 작은영화, 열린영화, 민족영화, 민중영화. 그리고 그것들을 아울렀던 단편영화, 비제도권영화라는 상업영화권 밖의 영화들과 독립영화는 지금껏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우리 탓이다. 그 때 우리들은 영화를 한다면서 영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저항으로 모든 것이 통했던 80년대, 그 후진 문화는 그것을 용서했다. 우리였던 그들에게 독립영화는 개념의 영화, 이념의 영화, 투쟁의 영화일 뿐이다. 이에 비해 전혀 ‘독립’하고 싶지 않은 디지털세대라는 10대와 20대 영화인들의 독립영화는 클릭의 영화, 댓글의 영화, 펌의 영화일 뿐이다. 이 두 영화(인)가 지금 ‘독립영화’라는 광장의 중심에서 트렌드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색하게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추억
지금 한국영화는, 80년대 대학생이었던 이들이 주도적인 세력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다(논란이 되고 있는 대기업과 이동통신업체의 거대자본 진영 문제는 별개로 한다). 80년대 그들은 반충무로와 반할리우드를 외쳤다. 짱돌 대신 카메라를 들었던 그들은 지금 한국 상업영화의 자본과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반충무로와 반할리우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간다...
독립영화권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다. 상업영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독립영화권의 핵심세력은 한 해 수백 편에서 천 편 가까이 만들어지는 단편 및 디지털 영화 작가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만한 권력이 생겼다. 이들에겐 80년대 싸움을 통해 얻어낸 논리가 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독립영화’ 개념을 수립할 만큼 투쟁의 이론으로 무장된 이들에게 말과 글로써 이길 수 있는 세력이 이들 이전 세대나 이들 이후 세대에는 없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권의 주도 세력은 80년대의 저항을 향수하며 ‘80년대-대학(생)-이념-투쟁’을 공유한다. 이것은 제도권 및 상업영화의 반대편에 서야할 독립영화권이 오히려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배경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진영에서 각각 한국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이들 두 세력이 어느새 그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권력이 되었고 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독립영화로!
80년대, 우리의 소망은 카메라였다. 카메라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우리의 소망은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두어 달 아르바이트만 하면 캠코더를 구입할 수 있게 된 90년대 들어오면서 달라졌다. 영화 만드는 제작비, 즉 돈이 우리의 소망이 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혼자서도 여럿의 일을 해낼 수 있는 디지털 장비 덕택에 십만원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2000년이 되자 또 달라졌다. 제도권을 향해 제작비 지원은 물론 극장에서 상영까지 대신 해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애원을 했다. 그런데 이 바람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 우리는 무엇을 소망할 것인가? 만들라는 영화는 만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언제까지 변명만 지어낼 것인가? 언제까지 떼만 쓸 것인가?
돌아와야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야 한다. 쪽팔리게 상업영화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그들이 먹다 남긴 떡고물이나 챙겨 먹으려거든 독립영화 때려 쳐야 한다. 우리는 저들에게 대놓고 욕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랑스러운 독립영화인이지 저들에게 동정이나 욕을 얻어먹을 대상이 아니다.
독립영화는 권력에 치인 세계 인민들의 휴식처이자 희망이었고 상업영화의 교과서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독립영화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계인민들의 고단한 삶과 황폐한 영혼을 외면한 채 상업영화를 교과서 삼아 권력의 달콤한 품안으로 들어가려는 부르주아 나르시시스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방가르드, 아나키즘 그래서 독립영화
독립영화는 보기 좋은 음식이 아니라 먹기 좋은, 몸에 좋은 음식이다.
영화라는 날것을, 꾸미지 않고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독립영화다.
거대한 권력을 단번에 베어 없애는 칼사위를 볼 수 있는 것이 독립영화다.
독립영화는 그래서 생경하고 그래서 섬뜩하며 그래서 전복을 꿈꾼다.
그 독립영화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영화는 가시밭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 스스로 이 길에 들어섰다.
앞선 우리의 가시밭길이 삶에 찌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만하다면 독립영화- 할만하다.
이제 독립영화라는 말은 낯설지 않다. 달라졌다. 많이 달라졌다. 뒤돌아보는 짓도 그만큼 했으면 됐건만, 지금의 독립영화는 기어코 뒤를 돌아보게 한다. 돌아보기 편한 10년 전과 비교해도 독립영화의 강산은 몇 번이나 변했다. 좋다. 아주 좋다. 그런데 이런 희희낙락을 마뜩찮게 생각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있다. 군부정권? 독재정권? 알다시피 요즘 그런 거 없다.(써놓고 보니 저 말도 참 오랜만에 해본다). 그럼, 그들이 누구냐고? 그들은 영화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들이다.
2000년이 넘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은 우리를 ‘독립영화(인)’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독립영화를 한다고 말하기엔 스스로 생각해도 쪽팔려서 단편영화라는 이상한 은신처에 숨어있던 우리들에게 ‘너넨 독립영화야!’라며 사람들은 독립영화라는 투쟁의 예술, 그 치열한 삶의 광장으로 우리를 기어코 끌어냈다. 지금 우리는 그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광장의 주인이 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이 광장에서 광장공포증과 폐쇄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가?
70년대 실험영화, 소형영화로부터 80년대의 작은영화, 열린영화, 민족영화, 민중영화. 그리고 그것들을 아울렀던 단편영화, 비제도권영화라는 상업영화권 밖의 영화들과 독립영화는 지금껏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우리 탓이다. 그 때 우리들은 영화를 한다면서 영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저항으로 모든 것이 통했던 80년대, 그 후진 문화는 그것을 용서했다. 우리였던 그들에게 독립영화는 개념의 영화, 이념의 영화, 투쟁의 영화일 뿐이다. 이에 비해 전혀 ‘독립’하고 싶지 않은 디지털세대라는 10대와 20대 영화인들의 독립영화는 클릭의 영화, 댓글의 영화, 펌의 영화일 뿐이다. 이 두 영화(인)가 지금 ‘독립영화’라는 광장의 중심에서 트렌드에 열광하는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색하게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영화는, 80년대 대학생이었던 이들이 주도적인 세력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다(논란이 되고 있는 대기업과 이동통신업체의 거대자본 진영 문제는 별개로 한다). 80년대 그들은 반충무로와 반할리우드를 외쳤다. 짱돌 대신 카메라를 들었던 그들은 지금 한국 상업영화의 자본과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반충무로와 반할리우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간다...
독립영화권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다. 상업영화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독립영화권의 핵심세력은 한 해 수백 편에서 천 편 가까이 만들어지는 단편 및 디지털 영화 작가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만한 권력이 생겼다. 이들에겐 80년대 싸움을 통해 얻어낸 논리가 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독립영화’ 개념을 수립할 만큼 투쟁의 이론으로 무장된 이들에게 말과 글로써 이길 수 있는 세력이 이들 이전 세대나 이들 이후 세대에는 없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권의 주도 세력은 80년대의 저항을 향수하며 ‘80년대-대학(생)-이념-투쟁’을 공유한다. 이것은 제도권 및 상업영화의 반대편에 서야할 독립영화권이 오히려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배경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진영에서 각각 한국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이들 두 세력이 어느새 그들이 그토록 미워했던 권력이 되었고 체제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독립영화로!
80년대, 우리의 소망은 카메라였다. 카메라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우리의 소망은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두어 달 아르바이트만 하면 캠코더를 구입할 수 있게 된 90년대 들어오면서 달라졌다. 영화 만드는 제작비, 즉 돈이 우리의 소망이 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혼자서도 여럿의 일을 해낼 수 있는 디지털 장비 덕택에 십만원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2000년이 되자 또 달라졌다. 제도권을 향해 제작비 지원은 물론 극장에서 상영까지 대신 해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애원을 했다. 그런데 이 바람도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다음 우리는 무엇을 소망할 것인가? 만들라는 영화는 만들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언제까지 변명만 지어낼 것인가? 언제까지 떼만 쓸 것인가?
돌아와야 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야 한다. 쪽팔리게 상업영화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그들이 먹다 남긴 떡고물이나 챙겨 먹으려거든 독립영화 때려 쳐야 한다. 우리는 저들에게 대놓고 욕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랑스러운 독립영화인이지 저들에게 동정이나 욕을 얻어먹을 대상이 아니다.
독립영화는 권력에 치인 세계 인민들의 휴식처이자 희망이었고 상업영화의 교과서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독립영화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계인민들의 고단한 삶과 황폐한 영혼을 외면한 채 상업영화를 교과서 삼아 권력의 달콤한 품안으로 들어가려는 부르주아 나르시시스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방가르드, 아나키즘 그래서 독립영화
독립영화는 보기 좋은 음식이 아니라 먹기 좋은, 몸에 좋은 음식이다.
영화라는 날것을, 꾸미지 않고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독립영화다.
거대한 권력을 단번에 베어 없애는 칼사위를 볼 수 있는 것이 독립영화다.
독립영화는 그래서 생경하고 그래서 섬뜩하며 그래서 전복을 꿈꾼다.
그 독립영화를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독립영화는 가시밭길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 스스로 이 길에 들어섰다.
앞선 우리의 가시밭길이 삶에 찌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만하다면 독립영화-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