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

by 정창수 posted Aug 08, 2005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도시는 어디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남아의 어느 도시를 이야기하거나 파리나 로마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메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13억 이슬람의 한결같은 소원은 일생에 한번 메카순례를 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할 실천규범이 있다. 신앙고백, 예배 희사, 라마단이라 부르는 30일간의 단식, 그리고 성지인 메카순례다. 일 년에 한번 라마단의 2개월 후인 두울하지의 달에 ‘하지’라고 하는 정규적 순례를 행한다. 메카에 있는 아브라함이 지었다는 카바신전주위를 돌고 ‘검은 돌’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되는 순례는 과거에 에덴동산이었다는 아라파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이슬람에게는 이순간이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이슬람의 중심 사우디아라비아

올해에도 어김없이 3백50만 여명이 메카를 향해 대이동을 했다. 메카순례는 15세기에 걸친 이슬람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통합의 구실을 했다. 매주 모여 예배를 하는 기독교만큼이나 똑같은 복장을 한 순례자들이 빈부귀천, 인종에 상관없이 무슬림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년 수백에서 수천 명이 각종사고로 사망해도 끊임없이 메카를 향해 행진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슬람의 중심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에 속해 있다. 어찌되었던 매일 수차례 메카를 향해 13억 이슬람이 절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사우디는 이슬람의 중심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우디의 정치상황은 이슬람 신도들에게는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있다.

그런데 사우디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1924년에야 비로소 이 왕국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슬람세계가 12세기 옴미아드 왕조가 멸망한 후부터는 사실상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영도하는 칼리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은 관계로 사우디는 투르크 족 등 많은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우디의 정체성 - 와하브

그러다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투르크의 패전으로 공백이 된 상황에서 메카를 거점으로 하는 하쉼가(家), 하일을 중심으로 하는 라쉬드가, 리야드를 본거지로 하는 사우드가의 대립이 팽팽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당연히 메카를 장악하고 있는 하쉼가의 발언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스만터키의 술탄의 후계자를 자처하기도 하고 자식들을 요르단의 왕과 이라크의 왕으로 등극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야심찬 사우드가의 ‘압드 알 아지즈’는 라쉬드가를 병합하고 복고적 개혁운동의 기치를 내건 무슬림형제단을 이끌고 메카를 점령하여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1932년에 비로소 독립을 선언한다. 그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가 리야드인 이유도 대도시이기도 하지만 그들 왕국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수도 메카가 수도가 아닌 이유가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라는 것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우디가는 이념적으로 와하브주의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와하브운동은 오스만통치에 반대하고 이슬람의 근본을 찾자는 종교개혁운동의 일환이다. 1745년 ‘무하마드 이븐 알 와하브’가 이슬람의 외적형식주의와 근대주의를 탈피하고 코란에 밀착하는 교리엄수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와하브운동은 당시의 사우디 왕이었던 무하마드 이븐 사우드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떨치게 된다.

사우디가 아라비아를 통일한 배경은 이들이 단순한 지방 왕국이 아니라 전체 이슬람의 통일성에 대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년개혁세력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메카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던 콤플렉스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딜레마에 빠진 사우디

이번에 죽은 사우디의 왕 파드는 통일왕국을 건설한 아지즈의 4번째 아들로 3번째 왕이다. 나름대로 국가체제 수립에 대한 노력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와하브운동에 의해 사회가 지나치게 경직되었고 한편으로는 미국에 의존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냉전시절에는 그나마 이것이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왕정을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석유의 60%를 미국과 영국의 석유재벌이 소유하고 있고 그나마 1만 불 가량의 국민소득에도 불구하고 평균수면이 56세일정도로 사회의 복지는 매우 열악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인구의 10%가 넘는 왕족을 비롯한 특권층이 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주둔은 이슬람의 중심 메카를 가지고 있는 사우디인의 자부심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라빈을 비롯한 알카에다 구성원들의 다수가 사우디 출신이라는 것은 이를 반영한다. 왕정유지를 위한 종교국가로서의 지배이데올로기를 활용했던 그들이 이제 역으로 그 부메랑을 맞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사우디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종교적 폐쇄성을 약화시키고 민주정을 시행 하자니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교리를 강화한 지금의 와하브 노선을 계속 고집할 경우 급진적인 세력에 의한 점증하는 테러나 체제위협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평화의 또 하나의 불안요소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