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에서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찾아본다면 단연 인도네시아라고 할 수 있다. 무려 17,508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리핀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나 7천여 개에 불과하다. 이 안에 300여 종족이 583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당연한 결과로 인도네시아가 국가라는 개념을 갖게 된 것은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띄는 것은 쟈바인들 때문이다. 전체 면적의 6%에 불과한 쟈바섬에 전체 인구의 56%에 달하는 1억 2,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이들과 나머지 지역의 소수민족은 사실상 제국과 식민지와의 관계처럼 여겨지게 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의 서쪽 끝 아체 지역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곳이다. 이슬람교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져서 ‘서람비 메카’(메카의 베란다)라고 불리는 이곳은 인도네시아 이슬람화의 시원이기도 하다. 현재 진행되는 아체분쟁의 핵심은 바로 내부식민지의 문제와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문제이다.

메카의 베란다 그리고 점령당하지 않는 아체
십 수년 전 이념논란이 거셀 때 많은 사람들은 개인이 체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아체를 보면 그런 이상은 바로 그들 공동체의 체제를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이미 13세기 이전에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 전역에 이슬람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이 등장했을 때도 강력한 해상국가로서 무력으로 말라카 해협을 지켜냈다. 그래서 이들은 1800년대 까지도 무역을 통한 강력한 부를 건설하고 말라카 해협의 무역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세계 후추 생산량의 절반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후추 생산국가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상의 제품들이었다. 원래 서구세력이 동아시아를 개척하려 했던 이유 중에 후추가 큰 역할을 했으므로 이 지역은 일찍이 주목 받았다. 그래서 1824년 런던조약에서도 아체의 독립보장을 전제하면서 서로 견제했다. 그리고 서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체 왕국은 힘을 기르고 네덜란드와 대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영국과 이권을 주고 받는 영국-네덜란드 조약을 1871년 체결하고 2년 후에는 1만 명의 병력으로 아체를 향해 진격했다. 이 싸움은 30년이나 진행된다.
애초에 돕기로 했던 프랑스와 미국 등의 침묵과 거부 속에서도 그들은 처절히 항전했다. 이 전쟁에 ‘트조엔 엔작 디엔’이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30년을 저항군의 지도자로 싸우면서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딸을 잃고 마침내는 눈과 귀까지 먼 상태에서 네덜란드군에 체포되어 죽었다. 아체인들은 ‘이브 페브루’(여왕)라고 그녀를 부르며 저항의 의지를 다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네덜란드 왕국군에는 1만 6천명의 유럽인은 물론이고 대부분이 쟈바인인 2만 6천명의 인도네시아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이들에게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서로의 운명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참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하튼 아체는 사실상 한번도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은 상태로 네덜란드와 싸운 인도네시아의 독립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던 셈이다.
내부식민지와 불안한 평화
아체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뼈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쟁 후에도 아체는 게릴라전을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리고 1947년 일본군에게 밀려났던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 전역을 점령했을 때도 아체 만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아체는 한 때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카르토 대통령에 호응해서 귀금속까지 팔아 비행기를 장만해주기까지 했다. 그 결과 이곳은 독립 후 주로 승격되고 1959년에는 내전을 벌여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지역' 이라고 명명하여 국가내의 또 다른 이슬람국가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의 구심도 되었다.
그러나 1966년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서는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하자 하산 띠로를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내부에서는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문민정권이 들어서서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했지만 이들은 독립의 요구를 꺾지 않고 있다. 은혜를 배신으로 돌려받은 셈이니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독립의 전망은 밝지 않다. 동티모르처럼 카톨릭 신자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국제사회는 관심이 없고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전체 GDP의 15%를 기여하는데다가 이슬람세력의 구심 역할을 하는 이곳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후추 때문에, 이제는 내부 식민지로서 자원 때문에 이들은 계속 공동체의 자결을 위해 싸워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번 헬싱키에서의 평화협정은 조금씩 평화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시도이다. 45%로 전부를 차지하려는 쟈바인의 양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아체인의 슬픔을 달래 줄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국가들처럼 식민지시대에 그은 선으로 국가라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버린 사실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인도네시아가 국가라는 개념을 갖게 된 것은 채 백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띄는 것은 쟈바인들 때문이다. 전체 면적의 6%에 불과한 쟈바섬에 전체 인구의 56%에 달하는 1억 2,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이들과 나머지 지역의 소수민족은 사실상 제국과 식민지와의 관계처럼 여겨지게 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의 서쪽 끝 아체 지역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곳이다. 이슬람교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져서 ‘서람비 메카’(메카의 베란다)라고 불리는 이곳은 인도네시아 이슬람화의 시원이기도 하다. 현재 진행되는 아체분쟁의 핵심은 바로 내부식민지의 문제와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문제이다.

메카의 베란다 그리고 점령당하지 않는 아체
십 수년 전 이념논란이 거셀 때 많은 사람들은 개인이 체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아체를 보면 그런 이상은 바로 그들 공동체의 체제를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이미 13세기 이전에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 전역에 이슬람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이 등장했을 때도 강력한 해상국가로서 무력으로 말라카 해협을 지켜냈다. 그래서 이들은 1800년대 까지도 무역을 통한 강력한 부를 건설하고 말라카 해협의 무역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세계 후추 생산량의 절반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후추 생산국가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상의 제품들이었다. 원래 서구세력이 동아시아를 개척하려 했던 이유 중에 후추가 큰 역할을 했으므로 이 지역은 일찍이 주목 받았다. 그래서 1824년 런던조약에서도 아체의 독립보장을 전제하면서 서로 견제했다. 그리고 서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체 왕국은 힘을 기르고 네덜란드와 대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영국과 이권을 주고 받는 영국-네덜란드 조약을 1871년 체결하고 2년 후에는 1만 명의 병력으로 아체를 향해 진격했다. 이 싸움은 30년이나 진행된다.
애초에 돕기로 했던 프랑스와 미국 등의 침묵과 거부 속에서도 그들은 처절히 항전했다. 이 전쟁에 ‘트조엔 엔작 디엔’이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30년을 저항군의 지도자로 싸우면서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딸을 잃고 마침내는 눈과 귀까지 먼 상태에서 네덜란드군에 체포되어 죽었다. 아체인들은 ‘이브 페브루’(여왕)라고 그녀를 부르며 저항의 의지를 다졌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 네덜란드 왕국군에는 1만 6천명의 유럽인은 물론이고 대부분이 쟈바인인 2만 6천명의 인도네시아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이들에게는 민족개념도 없었고 서로의 운명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에 참전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하튼 아체는 사실상 한번도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은 상태로 네덜란드와 싸운 인도네시아의 독립의 상징으로 되어 있었던 셈이다.
내부식민지와 불안한 평화
아체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 뼈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쟁 후에도 아체는 게릴라전을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리고 1947년 일본군에게 밀려났던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 전역을 점령했을 때도 아체 만은 그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아체는 한 때 인도네시아의 임시수도가 되기도 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카르토 대통령에 호응해서 귀금속까지 팔아 비행기를 장만해주기까지 했다. 그 결과 이곳은 독립 후 주로 승격되고 1959년에는 내전을 벌여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지역' 이라고 명명하여 국가내의 또 다른 이슬람국가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의 구심도 되었다.
그러나 1966년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서는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하자 하산 띠로를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내부에서는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문민정권이 들어서서 폭넓은 자치권을 보장했지만 이들은 독립의 요구를 꺾지 않고 있다. 은혜를 배신으로 돌려받은 셈이니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독립의 전망은 밝지 않다. 동티모르처럼 카톨릭 신자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국제사회는 관심이 없고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전체 GDP의 15%를 기여하는데다가 이슬람세력의 구심 역할을 하는 이곳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후추 때문에, 이제는 내부 식민지로서 자원 때문에 이들은 계속 공동체의 자결을 위해 싸워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이번 헬싱키에서의 평화협정은 조금씩 평화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시도이다. 45%로 전부를 차지하려는 쟈바인의 양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고 아체인의 슬픔을 달래 줄 방안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식민지의 경험을 가진 국가들처럼 식민지시대에 그은 선으로 국가라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버린 사실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