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술을 마시는 국민으로 알려져 왔다. 물론 통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런 인상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주로 알코올 도수가 높은 독주를 마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1인당 소주ㆍ위스키 등 고알코올 증류주 소비량은 2002년을 기준으로 세계 4위에 이른다. 알코올 도수가 20%가 넘는 독주의 상징은 소주이다. 그리고 소주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다.
삼국사기 중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가 연못가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술문화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시대에는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의 군중 대회에서 밤낮으로 식음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도 신라에 와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갔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우리 술은 탁주인 막걸리가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소주는 고려시대 때 들어와서 서서히 상류층을 중심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1차로 거른 술을 증류해서 만드는 만큼 소주는 곡식이 더 많이 들어가게 마련이고 가격도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소주라고 하기도 했고 인삼분말을 넣어 만든 일종의 인삼주도 많이 애용했다. 당시 조선은 거의 드물게 술에 대해 세금을 전혀 물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300종의 술이 만들어 졌고 12만호가 넘는 주조장이 있었다. 지금의 공덕동에 있었던 공덕옹막이라는 곳에 1백여 호가 모여 삼해주라는 소주만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역전된 것은 일제시대에 들어서 부터다. 일제는 기존의 지세에 주세와 연초세를 추가했다. 그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허가 받은 곳에서만 술을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1934년에는 합법적으로 집에서 술을 만드는 곳은 한군데도 남지 않았고 술은 허가받은 양조업자들만이 만들 수 있게 되었다.그 결과 조선총독부의 주세 징수액이 1909년에 비해 1915년에는 40여 배가 넘게 늘어난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걷은 세금으로 조선을 통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연초세와 함께 주세가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양조장을 운영하는 일본자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밀주를 만드는 조선인들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되어야만 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일제시대의 주세법은 그대로 이어져, 세금을 무겁게 징수하고 쌀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약주나 증류소주는 사라지고 서민층은 알코올과 물을 섞은 희석식소주를 먹고 부유층은 맥주와 양주를 먹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더군다나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소주를 주로 애용하던 북부지방 사람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소주가 대중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정책이 술 문화를 바꾼 것이다.
얼마 전 단순히 조세체계의 문제일 수 있었던 소주세 인상 논의가 결국 여론에 밀려 또다시 중단되었다. 서민들이 애용하는 소주 만큼은 부담없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마치 쌀 개방 하나 막아놓고 한국농업을 지키는 양 이미지를 만드는 것처럼 소주의 주세를 올리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마치 다른 세금은 문제가 없는 것처럼 오도하는 의도가 숨겨진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 위스키에 대한 주세인상도 좌절되어 양주소비억제를 위한 시도마저 실패한 꼴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뿐이다.
정창수(유라시아분과장, 함께하는 시민행동 전문위원)
삼국사기 중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가 연못가에서 하백의 딸 유화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인연을 맺어 주몽을 낳았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술문화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삼한시대에는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의 군중 대회에서 밤낮으로 식음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도 신라에 와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갔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우리 술은 탁주인 막걸리가 대표적이었다. 그리고 소주는 고려시대 때 들어와서 서서히 상류층을 중심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1차로 거른 술을 증류해서 만드는 만큼 소주는 곡식이 더 많이 들어가게 마련이고 가격도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소주라고 하기도 했고 인삼분말을 넣어 만든 일종의 인삼주도 많이 애용했다. 당시 조선은 거의 드물게 술에 대해 세금을 전혀 물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300종의 술이 만들어 졌고 12만호가 넘는 주조장이 있었다. 지금의 공덕동에 있었던 공덕옹막이라는 곳에 1백여 호가 모여 삼해주라는 소주만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역전된 것은 일제시대에 들어서 부터다. 일제는 기존의 지세에 주세와 연초세를 추가했다. 그리고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허가 받은 곳에서만 술을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1934년에는 합법적으로 집에서 술을 만드는 곳은 한군데도 남지 않았고 술은 허가받은 양조업자들만이 만들 수 있게 되었다.그 결과 조선총독부의 주세 징수액이 1909년에 비해 1915년에는 40여 배가 넘게 늘어난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걷은 세금으로 조선을 통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연초세와 함께 주세가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양조장을 운영하는 일본자본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밀주를 만드는 조선인들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되어야만 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일제시대의 주세법은 그대로 이어져, 세금을 무겁게 징수하고 쌀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약주나 증류소주는 사라지고 서민층은 알코올과 물을 섞은 희석식소주를 먹고 부유층은 맥주와 양주를 먹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더군다나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소주를 주로 애용하던 북부지방 사람들이 대거 남하하면서 소주가 대중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정책이 술 문화를 바꾼 것이다.
얼마 전 단순히 조세체계의 문제일 수 있었던 소주세 인상 논의가 결국 여론에 밀려 또다시 중단되었다. 서민들이 애용하는 소주 만큼은 부담없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우려스러운 것은 마치 쌀 개방 하나 막아놓고 한국농업을 지키는 양 이미지를 만드는 것처럼 소주의 주세를 올리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마치 다른 세금은 문제가 없는 것처럼 오도하는 의도가 숨겨진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 와중에 위스키에 대한 주세인상도 좌절되어 양주소비억제를 위한 시도마저 실패한 꼴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뿐이다.
정창수(유라시아분과장, 함께하는 시민행동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