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아시아민주주의 지원기관' 만들 때 됐다

by KG posted Oct 15, 2007
아시아 민주화를 위한 세계포럼, 그리고 버미얀마주화

필자는 9월 19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 민주화를 위한 세계 포럼” (World Forum for Democratization in Asia)에 참가했다.

독자들은 이런 회의가 있었나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이 회의는 제2회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았다. 2년 전에 대만에서 제1회 회의가 있었고 이번 회의가 두 번째이다.

“아시아 민주화를 위한 세계 포럼”이란 명칭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 회의는 아시아 민주주의를 위해 주로 NGO 활동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자리이다. 참석자들은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망라된다. 필자는 1회 회의에도 참석하였기 때문에 이번 회의에 참가한 많은 참가자들과 이미 낯이 익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이 회의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기관은 놀랍게도 대만이다. 대만민주기금회(TFD, Taiwan Foundation for Democracy)라는 곳이다. 대만 기금회는 주로 대만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는다. 그러니 사실 대만 정부가 이 회의를 지원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 왜 대만에서 이런 큰 회의를 지원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대만민주기금회 사람들의 공식적인 답변은 말 그대로 아시아 민주주의의 진흥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알다시피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국과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다. 과거 한국과 북한이 서로 그랬던 것처럼 중국은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들과는 단교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그래서 현재 대만은 유엔 가입도 못하는 등 국제적으로 심각히 고립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 대만은 국제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때문에 대만은 아시아의 NGO들과 연대하면서 아래로부터 지원군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포럼”은 이런 전략의 일환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대만 정부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필자는 이 회의를 통해서 다양한 아시아 민주주의 활동가들과 사귀고 그 나라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그런데 대만민주기금회(TFD)처럼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 관련 시민 단체를 지원하는 재단들은 미국이나 유럽에는 여러 개가 있다. 미국에는 미국민주주주의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이 있고 유럽에도 영국의 Westerminster Foundation외에 여러 곳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시아에는 대만밖에 없다.

한국 민주화 세력 세계로 눈 못 돌려

사실 아시아 대부분 국가들은 여전히 발전 도상국이기 때문에 타국 NGO들을 전문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많지 않다. 아시아에서 선진국 대열에 낄 수 있는 나라는 한국, 일본, 대만 정도이다. 그런데 일본의 대다수 국민들은 인권, 민주주의 같은 말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이걸 부자병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민주주의가 일본에 정착된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일본에서 민주주의는 자국 시민 사회로부터 내재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패배 이후에 미국으로부터 외생적으로 이식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 인권, 민주화 관련한 시민 단체들은 아주 약한 편이다.

그에 반해 한국과 대만은 아래로부터 민중의 힘(People’s Power)를 경험한 나라들이다. 대만은 1988년 계엄이 해제되었다. 그 이후 민주화 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어 95년경에 야당으로 정권 교체를 경험한다.

한국은 대만보다는 민주주의의 선배이다. 87년에 직선제 민주화 투쟁이 승리하여 이제 20년 정도의 알찬 민주주의 운영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대만 보다는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지도국으로서 자격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대만민주기금회 같은 활동은 사실 한국이 먼저 시작했어야 했다. 그런데 한국은 아쉽게도 87년 민주화 이후에 세계 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내부적으로만 에너지를 소진한 느낌이 있다.

사실 한국은 소위 386 세대라 불리는 강력한 민주화 활동가 풀이 존재한다. 이 세대는 한국의 민주주의 경험을 아시아와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자산을 인류를 위해 쓰지 못한 것이다.

만약 87년 민주화 이후 아시아와 세계 민주화 고양을 위해 타국 NGO들도 지원하고 활동가들도 파견하는 일들을 꾸준히 했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본다. 10년 이상만 꾸준히 그런 활동을 전개했다면 지금 우리는 꽤 많은 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가지고 네트워크를 형성해 있을 것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그렇지만 국제 사회에서도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크는 국가의 힘이고 자산이다. 우리와 동지적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아시아와 전 세계에 퍼져 있다면 그것의 유형, 무형의 가치는 계산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인적 네트워크는 국가가 활용할 수도 있고 기업이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는 386 정권이라 이름 붙을 정도로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한 정권임에도 아시아와 세계로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민주주의기념 사업회 활동에서 보듯이 오직 과거 민주화 투쟁을 기념하는, 좀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팔아먹는 일밖에 한 것이 없다.
이제 내년이면 한국에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 필자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우리도 아시아와 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나름대로 기여하는 활동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에도 대만민주주의기금회 같은 기관을 구성하여 전 세계 민주주의 NGO들을 지원하고 또 한국의 과거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체계적으로 훈련하여 전 세계에 파견하는 활동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이제 한국은 아시아 나아가 세계 민주주의의 지도적 국가가 되어야 한다.


버마 민주화 시위에 참여

필자도 국제회의를 여러 번 다녀 봤지만 국제회의 참석자의 제일 큰 미덕은 성격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넉살 좋게 돌아 다녀야 많은 사람을 사귀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회의 기간 내내 혼자 밥 먹고 사람도 별로 못사귀고 돌아오기 일쑤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버마 민주화 운동가들이랑 식사를 하는데 19일 아침 10시경에 버마 민주화를 위한 시위가 있는 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청한다. 왜 거절할쏘냐. 내일부터 정식 회의가 있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고 있는데 딱 걸린 것이다.

아침을 먹고 그 친구들이랑 함께 버마 민주화를 위한 집회에 참석했다. 가 보니 필리핀에 있는 중국 대사관 앞이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중국의 친버마 군부 독재 정책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집회는 오늘 전 세계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2006년 9월 버마 인권 문제는 미국의 발의 하에 유엔 안보리의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런데 2007년 1월 안보리 표결에서 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안건 통과가 안되고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이 문제를 부각하며 중국이 대버마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얀마 아닌 '버마'로 불러다오

버마는 아시아에서 북한 다음으로 독재가 심한 나라이다. 88년에 민주적인 총선을 통해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Burmese Democracy) 90%가 넘는 지지로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나 버마 군부는 이 총선을 무효화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 의원들을 투옥하고 국외로 추방하면서 민주주의를 말살한 것이다.

필자는 여러 민주주의 관련 국제회의에서 많은 버마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필자가 북한 민주화에 관심이 많아서 버마와 북한을 종종 비교해 보았다.

북한에 난민 문제가 있는 것처럼 버마도 심각한 난민 문제가 있다. 이미 태국-버마 국경 지대를 비롯하여 수십만의 난민들이 모여 사는 난민 촌이 형성되어 있다. 한 때 탈북자들도 난민촌을 형성할 수 없을까하여 버마 난민촌을 검토하기도 했다. 또 필자가 운영하는 대북 방송인 열린북한방송을 설립하기 전에 버마 민주화 소리 방송(Democratic Voice of Burma)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래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버마 민주주의 투쟁 사례는 북한과 비교하여도 배울 점이 많지만 남한과 비교해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87년 한국에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있었던 것 처럼 버마에는 88년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군부가 민주화 시위를 군대를 동원해 잔인하게 짓밟지 않았고 직선제를 수용했지만 버마는 민주적 총선 자체를 부정하며 독재로 복귀한 것이다.

이런 한국, 버마 군부의 서로 다른 선택 때문에 20년 뒤의 한국과 버마 사회 운명은 완전히 달라져 버린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동시 구가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 있고 버마는 여전히 독재와 저발전에 신음하면서 아시아 최빈곤국 중 하나로 뒤쳐져 있다.

사실 필자도 80년대에 학생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투옥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전두환/노태우로 대표되는 군부 세력에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버마 민주주의 활동가들과 대화를 하면서 버마 군부와 달리 87년 당시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은 한국 군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만약 버마처럼 87년에 한국 군부들도 총칼로 민주 세력을 진압했더라면 2007년 현재 한국 사회와 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 88년 당시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버마 학생들이 지금도 투옥되어 있거나 해외로 추방된 것처럼 필자도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니 집권 세력의 순간의 선택이 한 개인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나 싶었다.

관심 쏟아야 할 아시아 두 나라, 북한과 버마

버마는 지금은 미얀마로 국호를 개칭했지만 국제 사회는 국호를 개칭한 현 집권 세력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새 국호인 미얀마를 인정하지 않고 '버마'라고 부른다. 버마는 60년대에는 한국보다 훨씬 더 잘 나가는 나라였다. 그랬던 이 나라가 지금은 아시아 최고의 독재 국가이자 최빈곤국인 북한과 비교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국에도 버마민족민주연맹 한국 지부에서 활동하는 버마 민주 활동가들이 있다. 필자는 몇 달전에 이 단체와 함께 북한과 버마 민주주의에서 비교 토론하는 회의를 고려대에서 개최한 바 있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는 최고 민주주의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이웃들의 민주주의에는 여전히 별 관심없다. 그 나마 북한 민주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조금 있을 뿐이다. 이제는 한국도 아시아 이웃 나라들의 민주주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북한을 포함하여 아시아 이웃 국가들 중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아야 할 나라 두 군데를 뽑으라면 당연히 북한과 버미얀마다.

오늘 버마 집회에서 참석한 한 사람이 아웅산 수지 여사 피켓 사진을 들고 있었는데 그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Please use your liberty to promote ours. “(당신의 자유를 우리에게도 촉진해달라)그렇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활용하여 자유를 못 누리고 있는 북한과 버마 같은 나라의 자유를 증진하는 데 대한민국 국민들도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하태경 / 회원, 열린북한방송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