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유교와 기독교- 독선과 포용의 궤적

by 永樂 posted Aug 09, 2010
2010/08/06
미래전략연구원 미래전략포럼
기획위원회 워크샵(제7차 초청토론회)


한국에서 유교와 기독교 - 독선과 포용의 궤적

                                                     금장태(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한국종교의 전통과 현실


종교는 인간의 삶과 함께 시작하였고 사회·문명의 발전과 함께 성숙하여 왔다. 따
라서 한국종교도 언제나 한국역사와 함께 변동하여 왔고,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들
을 그 속에 안고 있다. 그러나 한국종교와 한국역사의 변동은 항상 주변국가의 영
향을 받아 왔던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당대(唐代)의 주
류를 이루었던 삼교조화론(三敎調和論)을 받아들여 삼교(三敎: 儒·佛〕)가 병행하며
조화를 이루어 왔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원·명대(元明代)에 국가통치원리로 확
립되었던 도학(道學)-주자학(朱子學)의 유교이념을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확립하였
다.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종교로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유입되어 짧은 기간에 주
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이처럼 한국종교의 현실은 분명히 한
국사회 속에서 배양되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주변국가에서 불어오는
외풍의 방향을 감지하여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종교는 사회의 안정과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발전의
장애요인이 되거나 침체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불교는 고려말기에 교단이 과도
하게 팽창하면서 국가의 쇠망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마찬기지로 유교는 조선사회의 안정과 문화기반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
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통의식으로 시대변화에 적응력을 상실하면
서 조선왕조의 멸망을 자초하는 직접적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
서 그 사회가 융성할 때에는 종교도 건강하고, 그 사회가 쇠망할 때에는 종교도 병
들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종교교단의 지형도를 보면, 우선 무속(巫俗)을 비롯한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유교·불교의 전통종교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18세기 후반에 전
래하기 시작한 천주교와 19세기말에 전래하기 시작한 개신교가 서양종교로서 근대
적 변혁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민족종교 내지 신종교(新宗敎: 東學-天道
敎·甑山敎·大倧敎·圓佛敎등)교단이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다가 부침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한국사회는 단일종교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여러 종교들이 병행하면서 갈등과 화합을 반복해왔던 다종교(多宗敎)사회
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사회통합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분열할 뿐만 아니라 사회분열
의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종교의 독선적·배타적 태도는 타종교와 대립을 일으키
고, 같은 종파 안에서도 교리적 내지 의례적 차이에 따라 분열하여 대립을 심화시
키기도 한다. 불교의 종파분열은 격심한 대립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
선시대 유교의 학파분열은 정치적 당파분열과 연결되면서 사회분열을 고착화시켰으
며,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유교가 붕괴된 다음에도 여전히 사회분열의 요인으로 잔
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종교든지 자신의 진실성을 표방하여 독선적
내지 배타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지도 기능이나 사회구원 기능
으로서 희망의 역할에 못지 않게 사회분열과 파괴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위험요인이
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우리의 종교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 도학의 독선에 대한 비판


도학이념의 유교지식인들은 엄격한 정통주의 입장에 따라 불교·도교·민간신앙 등
타종교에 대해 이단으로 배척할 뿐만 아니라, 유교 안에서도 경전의 해석이나 우주
론과 인성론의 인식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다른 학파에 대해서도 이단으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폐쇄적 엄격성을 지키고 있었다. 송시열(尤庵宋時烈)은 “말씀마다 모두
옳은 자는 주자요, 일마다 모두 마땅한 자는 주자이다”<.宋子大全., 부록 권17, ‘語
錄’>라고 하여, 주자를 한 글자의 오류도 없는 진리의 기준으로 절대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당시 주자의 경전해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던 박세당(西溪朴世堂)과
윤휴(白湖尹.)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윤휴는
“주자가 해석한 것은 경서(經書)요, 이미 여러 이론(說)을 모으고 절충하여 하나의
이론을 이룬 것이다. …혹시 이론에 견해가 투명하지 못하거나, 실행에 이르지 못
하거나, 깨닫지 못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토론하여 고쳤으니, 머물지 않고 고쳐나
가기를 죽을때 까지 그치지 않았다”<.白湖全書., 권36, ‘讀書記·中庸序’>라 하여,
주자를 끝없이 진실을 찾아가는 추구과정의 열린 인물로 인식하는 상반된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윤증(明齋尹拯)은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주자를 절대시하는 태도에 대해, “사실
을 살펴 보면 혹은 그 명목만 얻어서 그 참 뜻은 반드시 서로 같지 않는 것이 있
고, 혹은 먼저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주자의 말을 증거하여 거듭한 것이 있다. 그
심한 것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 있다. 이로써 사람들이
모두 겉으로는 반대하지 못하나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았다”<.明齋遺稿., 別集권3,
‘擬與懷川書’>고 언급하였다. 곧 송시열이 주자학을 표방하면서 사람의 독자적 견해
를 억압하려드는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여, 마치 패자(覇者)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
을 호령하는 것’(挾天子以令諸侯)처럼, 도학자가 ‘주자를 끼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
는 것’(挾朱子以箝衆口)임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성호학파를 열었던 실학자 이익(星湖李瀷)은 18세기 전반기에 당시 도학이념의
유교가 이미 생명을 잃었다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곧 그는 제자 권철신(權哲身)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사람을 대하여 일찍이 유교의 도리로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이
익됨이 없기 때문이다”<.星湖全書., 권30, ‘答權旣明’>고 하여, 당시 조선사회에서
도학은 극심한 당쟁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는 문제해결의
역량을 잃고 관념적 명분논쟁이나 형식적 의례절차에만 집착하여, 조선사회에서 이
미 유교의 생명이 끝났음을 선고하였던 것이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활동하던 북학파의 실학자 홍대용(湛軒洪大容)은 새로운 실
학적 사유체계를 추구하는 지식인(實翁)의 입을 통해 공허한 도학자(虛子)의 고착되
고 형식화된 사유의 허위성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곧 “정학(正學)을 붙들어 세운
다는 것은 사실상 자랑하는 마음(矜心)에 말미암고, 사설(邪說)을 물리친다는 것은
사실상 이기려는 마음(勝心)에 말미암으며, 세상을 구제하는 인(仁)이란 사실상 권력
을 잡으려는 마음(權心)에 말미암고, 자신을 보전하는 지혜란 사실상 이익을 추구하
는 마음(利心)에 말미암는다”<.湛軒書., 內集권4, ‘.山問答’>고 하여, 유학자들이
허위에 빠져 ‘도(道)’의 참뜻은 사라지고 세상이 허망하게 되었다는 도학의 사상적
타락현실을 고발하였던 것이다.


배타적·독선적 도학-주자학은 조선사회에서 지배이념으로서의 지위와 세력을 유
지해갔지만, 어떤 다른 사상도 포용하지 못하는 경직성에 빠지면서 시대변화에 적
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도학-주자학의 이념은 활력을 잃
은 채 형식적인 관습과 허위적인 관념에 매달려 있다가 자멸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선적 종교는 한 시대에 아무리 강성하더라도 결국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이었던 도학-주자학의 경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과 충돌


18세기의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지배이념인 도학-주자학에 대한 도전이 안팎으로부
터 제기되었다. 양명학의 대두와 실학의 확산이 유교 안에서 도학의 시대적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서학-천주교의 유입은 밖으로부터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문
을 열도록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18세기 중반과 후반에서 성호학파 실학자들을 중
심으로 서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익은 서학의 자연과학지식
에 적극적 관심과 수용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천주교 신앙내용에 대해서는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익 문하의 성호학파 안에서 보수적 경향의 공
서파(攻西派: 愼後聃·安鼎福등) 인물들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거부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지만 서양과학지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며, 진보적 경향의 신서
파(信西派: 李家煥·權哲身·李檗·丁若鏞등) 인물들은 서양과학에 대한 실용적 관심에
서 출발하여 점차 천주교 신앙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수용으로 나아가는 상반된 방
향을 보여주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성호학파의 신서파
청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성립되었다. 당시 천주교공동체는
선교사들이 전파한 것이 아니라 유교지식인들이 교리서를 읽고 스스로 천주교신앙
을 받아들여 성립한 자생적 교회라는 점이 중시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하나는 천주교교리서가 지닌 성격이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서양선
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은 천주교교리를 유교경전의 가
르침과 일치시켜 해석하는 이른바 보유론(補儒論)의 적응주의 입장에 따른 것이었
다. 따라서 정통주의적 도학자들은 천주교신앙집단이 표면에 등장하자 전면적 배척
태도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개방적 수용태도를 지닌 실학자들 가운데는 유교적 사
유와 연결된 보유론적 천주교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유교사회인
중국과 조선에서 천주교신앙의 전파가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독선적 대
립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회선교사들이 보여준 포용적 소통의 논리였던 것이 사실이
다. 또 하나는 천주교교리를 받아들인 것은 성호학파의 신서파 청년층 유학자들로
서, 이들은 도학적 사회체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개혁방향을 모색하고 있
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서양과학기술과 천주교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들은
서양과학기술을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이면서, 서양과학지식과 연
결되어 있는 천주교교리에도 긍정적 이해를 심화시켜가다가 천주교신앙의 수용으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주교선교사 쪽의 사정을 보면,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천주교교단들
에는 적응주의 입장을 지키는 예수회에 맞서서 천주교의 순수성을 요구하는 독선적
입장의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 등이 유교전통의 제사를 인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의 문제로 대립하여 ‘의례(儀禮)논쟁’을 일으켰었다. 교황청이 최종적으로 내
린 제사금지령으로 예수회의 포용적 입장이 패배하고 다른 교단의 독선적 입장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렇게 귀결된 배경에는 18세기에 들어오자 정치적으로 서
양의 우월주의가 팽배하면서 선교정책도 기독교우월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
요, 따라서 현지의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적응주의 선교정책이 설 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사회의 유교지식인들을 보면, 서양과학과 천주교신앙을 수용하는 성호
학파 신서파의 개방적 입장은 한줌도 안되는 극소수였고, 절대다수인 도학자들의
강경한 배타적 거부의 벽에 부딪쳤다. 따라서 천주교신앙은 유교지식인 속으로 파
급될 통로를 찾지 못하고, 중인층 내지 서민층 속으로 내려갔던 것이 현실이다. 또
한 북경교회로부터 제사금지령이 전달되자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廢祭焚
主)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유교적 교화체제에 역행하는 반인륜적
사교(邪敎)집단으로 규정하여 금교령(禁敎令)을 내렸다. 그 결과로 신서파에서도 중
심인물의 다수가 이탈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천주교신앙은 1880년대 신앙의 자유
가 공인될 때까지 조선사회 안에서 지하교회로 활동하였고, 유교지식인이 아니라
서민층이 신앙공동체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에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교리서와 개방적 유교지식인이 만
나서 형성하였던 유교·천주교 사이의 조화구조가 무너지고 말았으며, 유교·천주교의
조화구조가 형성할 수 있던 새로운 사상과 종교문화의 가능성도 좌절되고 말았다.
그 대신에 유교전통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서양중심적이고 독선적 입장과 유교체제
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서민층들이 만나 천주교공동체를 이루면서 ‘사옥(邪獄)-순교
(殉敎)’가 반복되는 충돌로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구조가 고착되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선적 도학이념과 독선적 천주교신앙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벌어졌던 첨예한 쟁점들은 크게 4가지 주제로 집약시켜 볼 수 있다. 교리의 기본적
견해와 관련하여서는 ①우선 천주교의 영혼불멸론과 사후세계로서 천당지옥설이 쟁
점의 초점이었으며, ②이와 더불어 ‘천주(天主)’의 존재가 도학의 ‘태극’(太極)이나
‘리’(理)와 구별된다는 견해가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천주교교단의 활동과 관련하
여서는 ③먼저 천주교에서 유교의 조상제사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④또 하
나는 천주교교단이 서양의 무력침략세력과 연결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인
식이다.




4. 한국종교의 시대적 역할과 자기성철


어떤 종교도 한 시대에서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을 모두 드러내고 있다. 종교가
번뇌에 빠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혼란에 빠진 사회를 구출하는 순기능이 있는
가 하면,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면서 복을 팔아 교단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사회적
모순에 편승하여 교단의 세력을 유지하는 등 역기능도 크다. 독선에 빠진 종교는
그 스스로 병들고 사회적 기능도 역기능으로 작용하지만, 이와 반대로 자기 성찰에
과감한 종교는 그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며 사회적 기능도 순기능으로 작용하고 있
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종교의식을 지배하던 불교의 교세는 극성하였는데, 교단과 승려의
타락이 심하여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무거운 짐이 되었을 때, 불교를 억압하고
새로운 이념으로서 도학-주자학의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는 조선왕조의 혁명이 일어
났던 것이다. 도학이념의 유교가 지닌 독선적 정통론이 불교를 억압하였던 것이 사
실이지만, 불교 내부가 타락과 부패로 병들었던 사실이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도 있다.


선조 때 서산(西山休靜)대사는 불교교단의 타락상에 대한 반성에 과감하였고 국
가의 위기에 능동적으로 책임을 감당하면서 사실상 유교사회 안에서 불교의 안정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휴정은 삼교가 대립하는 현실인식과 대립
해소의 문제를 종파적 입장에서 벗어나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나는 삼교의 무리들
이 각각 다른 견해에 집착하여 서로 만나려들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이
제 삼교의 문호를 조금 열어 통하게 하려할 뿐이다. 아! 삼교를 통칭하면 ‘도’라 한
다. ‘도’란 무엇인가? 철저히 궁구해 보면 바야흐로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모두
헛된 명목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三家龜鑑.(한불전[7], 634)>라고 하였다. 종
교의 대립현상은 각 종교의 자기중심적 집착 곧 종파적 이기주의에 근원하는 것임
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종교간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종파적 이기심
을 깨뜨리고 넘어서서 진리(道)의 근원을 밝혀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종파적 독
선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열린 눈으로 진리를 보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종파란 본
질적 가치가 아니라 모두 헛된 명목의 껍질일 뿐이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은 독선적인 종파주의의 미성숙한 시야에서 벗어나, 각 종파가 하나의 근원적 진리
를 지향하는 여러 가지 통로의 하나일 뿐이라 각성하는 열린 눈의 성숙한 시야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바로 이 점에서 휴정은 불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자성론(自省論)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곧 그는 “어
찌하여 도적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팔아먹으며 여러 가지 업(業)을 짓느
냐”라고 한 .능엄경.(楞嚴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승려가 타락하면 부처를 해치
는 도적이 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것은 승려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의 성직자
들도 그 본래 정신을 잃으면 교조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고 마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격언이다.


도학은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조선초기의 도학자들은 타락
한 세속권력에 저항하다가 몇 차례 거듭된 사화(士禍)를 통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
다. 그것은 유교이념을 표방한 사회에서 유교이념을 실현하고자 투쟁하다가 희생된
순교(殉敎: 殉道)의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말부터 도학의 선비들이 정
치를 담당하면서 이른바 ‘사림정치’(士林政治)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도학
의 선비들이 배타적 독선과 당파적 이기심에 빠져 분열하여 당쟁을 벌였으니, 도학
이 전성하던 바로 그 시기에 도학의 쇠퇴와 선비들의 타락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당쟁의 과정에서 도학자들은 끊임없이 도학이념을 명분으로 내세워 당파적
대립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조선사회의 분열과 국가의 쇠망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
이다.


영조는 당파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태학(太學)에 탕평비(蕩平碑)를 세워서 선
비들에게 경계하고, ‘탕평’정책을 추진하였지만, 당파에 빠진 도학자들은 군왕의 간
곡한 호소나 국가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도 도학이념을 끌어들여 자기 당파
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을 찾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도학자들이 독선과 이
기심에 빠져 당파적 분열을 일삼고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기만 할 뿐 스스로 자신
의 과오를 성찰하지 못하면서, 조선후기의 도학은 대중의 교화를 위한 기능도 상실
하고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는 충성심도 허상이 되고 말았으며, 조선사회를 이끌어
가던 지도기능을 상실하고 도리어 사회에 부담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존재로 전락
하고 말았다.


도학자들이 정통의식에 따라 천주교에 대해 엄격한 배척과 억압을 요구하였을
때, 정조는 “무릇 좌도(左道)를 끼고 민중을 미혹시키는 것이 어찌 서학(西學) 뿐이
겠는가. 중국에는 육학(陸學)·왕학(王學)·불도(佛道)·노도(老道)의 유파가 있지만 어찌
일찍이 금지했던 일이 있는가. 그 근본을 따지면 오로지 유생(儒生)이 독서하지 않
은 결과에 말미암은 것이다”<.正宗實錄., 12年8月壬辰>라고 하여, 천주교 배척에
앞서 유교의 학풍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것은 유교사회에서 천
주교의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군왕 자신이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유교
정신의 쇠퇴를 지적하였던 반성적 비판이요, 유교현실에 대한 솔직한 자기성찰이다.
사실상 조선 후기에 정통이념으로서 도학이 누리고 있던 사회적 권위에 비하여 도
학이념의 사회체제는 관료의 부패와 민생의 궁핍 및 제도적 모순에서 헤어날 수 없
었다.


조선초기에는 도학이념이 불교를 개혁대상으로 삼았지만, 조선후기에는 도학이
개혁대상으로 위치가 뒤집어졌던 것이다. 도학이념 체제의 사회적 폐단과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조선후기 실학이 등장하였지만, 절대다수의 도학이 구축해놓은 견고
한 벽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도학체제의 붕괴국면에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다. 한편으로 외래종교로서 18세기 말에 자리잡기 시작한 천주교와 19세기
말에 전래하기 시작한 개신교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자생종교로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신종교 및 민족종교가 출현하여 도학체제의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보면, 우선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조선사회의
예교(禮敎)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윤지충은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땅
에 묻은 이유를 밝히면서, “사대부집안의 목주(木主: 神主)는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기를 원치 않는
다”<.正宗實錄., ‘15年11月戊寅>라고 대답하였다. 육신의 부모 위에 있는 ‘대부모’
인 천주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임금의 위에 있는 ‘대군주’로서 천주의 명령을 따르
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주교의 규범이 유교적 사회체제의 국법에 어긋날 때에는
국법을 어기고 천주교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확신을 밝히고 있으니, 천주교를 받아
들이지 않는 가정이나 국가와는 언제든지 충돌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천주교는 전래초기에 예수회가 서양과학기술을 천주교교리와 함께 소개함으로
써, 중국의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서양과학기술의 수용은 유교전통사회의 낡
은 세계관을 변혁시켜주고 생산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지만, 조선사회에 전파된 천주교는 종교적 신념만 강화하고 기술문명의 전수에
는 관심의 문을 닫았다. 당시 천주교의 선교단체는 이미 예수회가 아니었고, 또 선
교정책도 유교사회를 존중하여 이에 적응을 추구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천주교는 현실사회의 개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세(來世)에서 개인적 구원을 강조
하는데 기울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층민을 신분적 억압으로부터 해소시켜주고, 축
첩제도의 폐단을 개선하는 등 일정한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는 서양
종교로서 조선사회의 전통과 이질적 성격이 강한 신앙공동체를 유지해 갔던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서양선교사들이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활동하였던 점에서 천주
교와 다를 바 없다.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급격히 붕괴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사회
체제의 보호 밖으로 밀려난 서북지역 대중들 속으로 신속히 파고들어 교세가 빠르
게 성장하였다.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의료활동으로 대중의 생활을 보호하고, 교육활
동으로 새로운 근대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를 열어주었으며, 음주와 도박과 사술(邪
術) 등으로 황폐화된 사회풍조에 맞서서 풍속을 바로잡아주면서, 조선왕조의 체제
붕괴로 방황하던 대중은 물론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다수 개
신교에 들어갔다. 조선왕조의 붕괴와 일제의 식민지배 사이 사회적·정신적 공황기에
개신교가 대중의 신앙적 요구에 부응하고 사회적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천주교
보다 백년 늦게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훨씬 더 큰 교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천주교나 개신교가 조선사회의 쇠퇴와 붕괴과정에서 대중 속에 자리를 잡고 성
장하면서 서양의 정치·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대표하였던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교전통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교전통에 상반하는 서구적
근대질서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우리의 역사적·문화적 기반과는 이질적인 서구적
가치질서를 우월한 것으로 요구하면서, 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역사적 뿌리와 연결되
지 못하고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의 요구와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말았다. 조선왕
조의 붕괴과정에 서양종교로서 천주교나 개신교가 충족시켜줄 수 없었던 전통질서
의 내부적 개혁과 민족의식의 각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상응하여 발생하였던 것이
신종교 내지 민족종교의 등장이다. 중국에 예속된 도학의 사대주의적 ‘존화론’(尊華
論)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서양문화에 의존하는 기독교의 이질적 분위기에도 벗어나
는 독자적 노선을 찾아갔던 것이다.




5. 유교 속의 포용논리


종교조직은 다른 종교와 교세의 경쟁에 빠져들면서 서로 비난하거나 부정하려들고
심하면 다른 종교를 파괴하려드는 집단적 이기심이나 배타적 공격성이 매우 강하
다. 그 뿐만 아니라 한 종교가 궁극적 존재의 인식에서나 교리체계의 진실성에 대
한 독단적 신념을 제시하는 순간에 이미 다른 종교의 신념을 용납하지 못하고 적대
적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종교간의 대립과 갈등은 종교
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 독선의 미성숙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종
교의 만남에서 대립과 갈등을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그만큼 그 종교의 교단이나 사회체제가 성숙한 단계에 올라와 있음
을 의미한다.


유교는 정통성을 중시하는 독단적 사유와 더불어 다양성의 조화를 존중하는 포
용적 사유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공자는 “군자는 조화를 이루지만 동조하지 않고,
소인은 동조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논어., 子
路>)고 말하여, 지조없이 영합하여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신을 지키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열린 자세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서로 다른 맛이 어울려 국맛
을 내듯이, 서로 다른 소리가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을 이루듯이, 서로 다른 주장이
어울려야 화평한 정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획일화된 추종(同)이 아니
라 다양성의 화합(和)이 진실한 것임을 강조하여 ‘조화’를 가치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도학자들은 명분과 의리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엄격하게 배척하였지
만, 배타적 논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포용적 논리도 간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
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양쪽을 조정하려 노력하고 있었던 율
곡에게 어떤 사람이 “천하에는 양쪽 다 옳거나 양쪽 다 그른 경우는 없다”고 항의
하자, 이때 율곡은 “천하에는 진실로 양쪽 다 옳거나 양쪽 다 그른 경우가 있다”<.
栗谷全書., 권34, ‘年譜下’>고 하여, 무왕(武王)과 백이(伯夷)·숙제(叔齊)의 경우처럼
대립된 입장의 양쪽이 모두 옳은 경우를 들면서, 양시양비(兩是兩非)의 화해논리를
제시하였던 일이 있다.


실학자 정약용은 “성인의 도리는 구애됨이 없고 막힘이 없으며 의(義)를 따른다.
그러므로 ‘시중’(時中)이라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의리
도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다. … 양주와 묵적은 모두 현인이다”<.與猶堂全書.[2],
권5, ‘孟子要義’>라고 하여, 맹자이후 유교전통에서 이단의 대표적 유형으로 규정한
양주의 위아설(爲我說)이나 묵적의 겸애설(兼愛說)에 대해서도 한쪽에 집착하는 폐
단을 경계할 뿐이지 그 주장은 유교의 도리 속에 포용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곧 ‘이단’이란 한쪽 극단에 치우친 것이므로 ‘중용’ 속에 포용할 수 있다고 보거나,
양주와 묵적을 ‘도’ 속에 포용할 수 있다는 논리는 확장시켜보면 진정한 ‘도’는 어떤
이질적 종교나 사상도 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한다.


18세기 후반 천주교의 초기전래과정에서 천주교를 수용하였던 성호학파 신서파
의 유교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대부분 유교체제에서 벗어나 천주교신앙으로 빠져들거
나 천주교신앙을 포기하고 유교체제로 돌아왔던 사실은 유교와 천주교 사이의 포용
과 조화가 어려웠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약용은 20대의 청년시절 천주교
신앙에 빠져들었다가 30대 초반에 공식적으로 천주교신앙에서 벗어났음을 밝혔던
인물이지만, 그의 방대하고 창의적인 유교경전해석에서는 천주교신앙의 빛으로 유
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정약용이 천주교교리의 영향을 받아들여 유교·천주교의 조화가능성을 열어주면
서 유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였던 대목을 네가지 점으로 짚어볼 수 있다. ①먼저
‘천(天)-상제(上帝)’의 존재에 대해, 주자학에서 ‘리’(理)라 규정한 형이상학적 인식에
서 벗어나, 지각능력을 지니고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는 주재자로서 인격신적 존재
로 재발견하였다. ②또한 인간은 ‘천-상제’가 항상 내려와 감시하는 앞에 홀로 마주
선 ‘신독’(愼獨)의 자리를 각성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거짓없는 진실함(誠)으로
섬기는 신앙적 자세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겨야 한
다’(實心事天)는 사천학(事天學)의 경학세계를 열어주었으며, 그것은 하늘을 섬기는
(事天) 신앙적 세계와 부모를 섬기는(事親) 인륜적 세계를 일관시킴으로써, 신앙에
기반하는 도덕질서를 제시하는 것이다. ③이와 더불어 인간은 ‘천-상제’가 내리는 명
령과 경고를 도심(道心)에서 들을 수 있음을 확인하여, 인간의 도심이 바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라 강조함으로써, 상제와 인간의 생생한 인격적 만남을 보여주
었다. 또한 그는 ‘천-상제’의 명령(天命)이 인간에게 주어진 ‘성’(性)은 인간의 마음이
선(善)을 좋아하는 기호(嗜好)라 해석하여 주자학에서 ‘성’을 ‘리’라 보는 본체론적
해석에서 벗어났다. 이에 따라 인간의 선과 도덕은 인간의 본질로 내재한 것이 아
니라 인간 마음의 기호에 따라 인간이 실천하여 이루는 성과라 하여 인간 의지의
자율성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열어주었다. ④나아가 정약용은
‘천-상제’와 인간을 마주 서게 하고, 물질적 존재에는 어떠한 신성(神性)도 부여하지
않으며, 주자학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깨뜨리고 ‘기’(氣)도 물질의 한 양상일
뿐이라 보고 ‘리’도 물질에 의지한 법칙일 뿐이라 하여 이기설(理氣說)의 형이상학
에서 벗어나 경험과학적 사유기반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정약용의 경학은 유교와 천주교의 세계관을 조화시켜 재해석한 것이지
만, 그렇다고 유교경전을 천주교교리에 일치시킨 것이 아니다. 곧 그의 경학은 천주
교교리의 수용을 통해 주자학적 틀에서 벗어나 유교경전 속에 잠재되었던 신앙적
세계를 깨워냄으로써, 유교사상을 얼마나 신선하고 풍요롭게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지를 가장 잘 드러내 주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질적 사상의 수용이 전
통의 파괴를 초래한다는 위기의식과 방어논리를 내세웠던 보수적 도학자가 사실상
유교정신의 시대적 변화를 가로막아 파멸의 길을 자초하였던 반면에, 도리어 기독
교사상의 수용이 시대변화 속에 유교사상의 적용가능성을 열어주는 의미있는 길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6. 자성(自省)과 화합(和合)의 종교에 대한 희망


오늘날 한국사회의 종교적 분포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가 서구적 현대
질서를 배경으로 하나의 축을 이루고, 불교가 전통종교로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며,
전통종교로서 유교나 신종교들은 군소세력으로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다종교사회
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해방이후 서구중심적 정치역학과 서구지향
적 가치질서 속에서 기독교가 급팽창하였고, 이에 비해 유교는 전근대적 전통질서
로서 급격히 붕괴되고 말았다. 사실 조선시대에 시대정신의 기준으로 독선적 권위
를 누리던 유교의 역할을 오늘에는 기독교가 대신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리 유독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폭발적 성장
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가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배를 받아야 하는 역사적
파국에 따른 정신적 공황을 겪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근대사회에서 전통종
교가 망국과 식민지배, 민족분단, 민주화, 근대화 등 역사의 격동 속에 혼돈에 빠진
대중을 구제할 수 없었을 때 기독교가 그 공백을 쉽게 파고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안정적 질서를 회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상황에서 우
리사회의 종교적 상황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현대 한국사회가 서구지향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시대정신
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오늘에 와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제 기독교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서양의 압도적 영향력도 줄어들
면서 그 반면에 중국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는 국제질서 속에서 방향감각이 조정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봉건적 전근대적인 것으로 부정하는
가치관에서 자주성과 고유성의 요구에 따라 전통의 재발견이 탐색되면서 정신문화
적 새로운 각성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기독교가 서양에 배경을 가지고 있
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졌고, 유교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매우 감소되었다. 문제는 오늘의 현재에 기독교
와 유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지
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에 도학전통의 유교가 배타적 독선에 빠졌다가 스스로 무너졌는데, 오
늘의 기독교는 독선에 빠져있고 엄청나게 팽창한 교세에 사로잡혀 유교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종교는 교세의 팽창과 사회적 영향력을 누리는데
안주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붕괴의 길에 접어드는 것이다. 대중과 사회를 향해 가르
침을 베푸는 목소리만큼이나 종교교단 자체의 불의와 비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의
목소리가 들려야 하지만, 어디에도 서산대사처럼 “어찌하여 도적들이 나의 옷을 빌
려 입고 여래를 팔아먹느냐”고 교단을 꾸짖는 성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스
스로 성찰할 수 없는 종교는 독선에 더욱 깊이 빠지고 거대한 성전(聖殿)과 성상(聖
像)을 세우는 경쟁 속에 속으로 병이 깊어져 갈 뿐이다.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종교
는 사회에 희망을 열어주거나 지도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사회의 모순과 함께
흘러가다가 좌초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종교가 스스로 성찰
할 수 있으면 독선과 대립의식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를 향해 열린 자세를 지니게
되고 종교 사이의 상호 이해와 조화의 길을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천주교나
개신교 안에서 토착화의 시도나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대세에 파묻히는 소수의 희미한 목소리일 뿐이다.


한국에서 유교의 현실은 스스로 붕괴되고 사회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기 개혁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외래사상을 수용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전통 속에서 사상적 생명력을 되살려내어 왔다. 앞으로
중국이 사회주의 이후를 위한 정신적 기반을 유교전통에서 재발견한다면 유교이념
의 새로운 체계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19세기말 근대화과정에서 강유
위의 공양학(公羊學)에 기초한 ‘대동’(大同)사상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켰던 유교근대화의 시도였다. 가까운 장래에 중국에서 새로운 유교
개혁론이 등장하여 확산된다면 한국사회에도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유교는 이미 죽은 종교이거나 흔적이 지워
져가는 전통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잠재의식 속에 아직도 살아
있고, 지표면 아래에 뿌리가 살아있다고 본다면 다시 봄을 맞게 되었을 때 새로운
면모로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유교적 순환사관(循環史觀)에서는
“회복됨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復, 其見天地之心乎.<.주역., 복괘>)고 하였다.


한자문화권 내지 유교문화권의 정신문화적 사회적 기반은 지난 백여년간 서구지
향적 근대화로 결코 완전히 대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시대적 변화 속에
유교문화권의 전통은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낡은 시대의 종
교로서 동양적 전제군주시대의 독선적 유교나 서양제국주의 독선적 기독교는 더 이
상 새로운 시대의 종교로서 할 수 있는 기능도 역할도 없을 것이다. 인간 위에 군
림하고, 과학지식이나 도덕규범 및 법질서와 충돌하며, 다른 종교와 갈등하는 독선
적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대립의 논리가 아니라 조화의 논리로 화
합을 이끌어가며, 종교가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악과 과오를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
는 성숙한 종교가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한국에서는 유
교·불교·도교·기독교가 조화를 이룬 종교의 질서가 올 것으로 기대된다. 종교는 사
회를 구원하지 못해도 사회가 종교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이 종교
를 선하게 하는 것이지, 종교의 선이 인간을 선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도 “인
간이 진리를 넓힐 수 있지, 진리가 인간을 넓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
道弘人.<.논어., 衛靈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 토 론 문 )

- 발표자: 금장태(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참석자: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고려대 철학과 교수)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중앙대 북한개발협력학과 겸임교수)
백승주 미래전략연구원 평화통일전략 센터장(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이혜정 미래전략연구원 외교안보전략 센터장(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명철 미래전략연구원 연구위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
추장민 미래전략연구원 과학기술전략 센터장(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허 은 미래전략연구원 연구위원(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김형찬: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조선 후기 유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역사적 과정
을 짚어 주시고 그 만남의 중심에 있었던 정약용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
셨습니다. 정약용은 비록 천주교를 배교하였지만, 천주교의 눈으로 유교를 바라보면
서 기독교 정신을 우리 문화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
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정약용은 철저하게 유교 정신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 기독교와 유교를 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의
교점과 충돌점이 어느 지점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같은 고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그러한 고민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금장태: 정약용의 고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면, 그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킬 수 있습
니다. 1970년대 초, 어느 학술회의에서 정약용의 서학문제에 관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정약용과 천주교를 연결해서 발표했는데,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학자들은 ‘정약용은 엄연히 유학자인데 왜 천주교와 결
부시키는가? 정약용의 어느 구절에서 천주교를 인용한 게 있는가?’라는 비판을 하였
습니다. 반대로 당시에 천주교인들을 만나서 정약용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정약용은
배교자다’라는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주교가 그대
로 조선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천관(天觀)의 인식은 천주
교의 천주(天主)개념과 유교의 상제(上帝)개념 사이에 매우 다양한 이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자와 마테오 리치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입장에서 설명하는 형식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서로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방식인 겁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기독
교와 유교를 충돌하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
은 눈으로 유교경전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쉬운 예로 비유하면, 같은 무대 위에서
조명이 다른 부분을 비추기 시작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
교경전을 지금까지의 이해와 다른 새로운 의미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요약하
면 유교경전을 기독교 세계와 아주 쉽게 통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정약용은 중요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과 관련해서 조금 더 말하면, 그의 학문체계는 북학(北學), 이학(理學), 실학
(實學) 등과 달리 어떤 특정한 명칭으로 명명을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정약용이 수사학(洙泗學)의 관점에서 유교경전을 바라보았다고 주장하지만,
정약용은 그 시대에서 자신의 눈으로 수사학의 관점을 빌어 유교경전을 바라보았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약용은 그 시대에서 유교경전을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서로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죠.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정약용의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유교와 불교, 천주교와 불교 사이의 의사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유교가 중국의 현실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유교에 대해서는 적
응주의 정책을 썼고 반대로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
라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지만 중국에서는 불교와 천주교 사이의 논쟁이 매우 활발
하게 일어났습니다. 만일 이러한 논쟁이 발생하여 특정한 시야에서 상대방과 소통
할 수 있는 논리를 필요로 한다면, 정약용의 기독교와 유교의 교점을 찾는 논리는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포용론, 소통론, 대화론과 같은 위치를 차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약용의 이러한 논리를 좀 더 일반화시킨 경우가 그의 중용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맹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중용을 해석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약용이 맹자를 잘못 읽었다고 하지만 그는 맹자를 좀 다르게 읽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는 “양주(楊朱), 묵적(墨翟)을 무부(無父), 무군(無君)이다”라고 단호하
게 배척했습니다. 반면에 정약용은 “성인의 도리에는 양주나 묵적이 다 들어있다”
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독선기신’(獨善其身)과 같이 자기중심의 관심으로서 ‘위아’
(爲我)나, ‘겸선천하’(兼善天下)와 같이 세상을 위한 보편적인 사랑으로서 ‘겸애’(兼
愛), 곧 양주나 묵적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말이죠. 정약용은 “도(道)라는 것은 ‘위
아’와 ‘겸애’를 다 포용하는 게 중용의 도(道)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약용은 한
쪽 극단에 매달려서 다른 견해를 포용할 수 없는 사유(思惟)는 잘라내야 한다고 말
합니다. 쉽게 말해 양주와 묵적의 견해를 잘라내자는 게 아니라 양주나 묵적의 주
장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유와 소통하지 못하는 견해를 잘라내자는 뜻이죠. 정약용
은 소통 못하는 사유가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약용의
포용 논리는 유교와 천주교의 관계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일반론으로
서 포용 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의 논리가 어떤 면에
서는 종교 간의 대화의 문제, 갈등 구조에서 소통의 논리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김형찬: 정약용은 기독교와 유교의 갈등과 충돌의 문제를 깊이 생각을 하고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
20세기 무렵 기독교와 유교의 갈등과 충돌은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
시아에서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정약용과 같은 고
민이나 해결방안 제시, 학문적 성과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금장태: 일본의 경우는 서양의 과학문물을 도입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최한기의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죠. 정약용이 경학자였다면 최한기는 서양과학을 도입해서
그것을 유교전통의 기철학 체계 속에서 재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최한기 같은 인물
들은 당시 일본에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중국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
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에서 정약용의 경우와 유사한 시도를 한 인물은 제가
본 자료의 범위에서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서양 선교사 중에서 정약용과 유사한 시도를 했던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
다. 서양 선교사들 중에는 .천유인.(天儒印) 곧 천주교와 유교는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똑같다는 입장에서 저술을 하여 유교와 천주교를 소통하는 논리를 선교방식
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저술은 사서 한 구절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각각
의 구절이 천주교의 어떤 교리에 해당되는지를 말할 정도로 서로를 일치시키려고
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이렇듯 유교와 천주교의 융합을 주장한 당시 선교사 가운
데에는 마테오 리치의 입장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경우
는 성리학과는 단절하고 유교 경전과 소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 가운
데는 천주교를 성리학적인 사유와도 연결시키려 시도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
다. 그러나 서양 선교사의 선교활동 영향 아래 있었던 몇몇 중국의 유교 지식인들
이 그 시기에 소통론으로 글을 썼지만 경전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인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은 동아시아사상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김형찬: 그러한 소통의 맥락에서 현재 중국의 부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서구를 따라가려고 하면서, 한편
으로는 자국의 문화적인 자존심을 세우고, 확산시키겠다는 의도로 전 세계에 공자
센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를 종교ㆍ문화 간의 소통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기독
교와 잘 화합해서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닌 단순히 공자를 내세
워서 유교문화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소통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
다.

금장태: 아마도 중국은 유교문화를 사회주의와 연결해서 새롭게 해석할 것입니다.
통속적으로 유교를 사회주의와 결합시킨 경우를 북한에서 볼 수 있고, 유교를 기독
교와 결합시킨 경우를 통일교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은 거대한
인력을 이용해서 유교의 사회주의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위한 작업을 할 것이고,
북한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고 새롭게 해석할 것입니다. 그 작업이 완료된 이후에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인 ‘중화주의’는 더욱 강화되겠죠. 그리고 공자센터 건립이 갖는
의미는 중국이 자기 영향력 속에서 다른 사회를 거두어들이려는 포교의 태도이지
자기를 변화시켜서 외부에 적응하여 소통하고자 도모하지는 않을 것이라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중국이 유교에 대한 재해석을 하더라도 포용적인 이론을
충분히 계발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정약용의 모델이 유교와
기독교 사이나 유교와 타종교 사이의 교류를 위한 열린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장민: 저도 같은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중국이 갖고 있는 소통의 문제점이
그것입니다. 사실, 중국은 사회주의의 이념을 벗어버리고 성장을 해왔습니다. 그리
고 중국은 사회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을 갖고 동시에 미국, 서구와 다른 형태의 중
국을 내세우려는 -중국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포용이 아닌 대립하는 형태로- 목
적으로 공자 이념을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에 공자센터를 건립하는 것도 바로 그 차원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중국의 공자센터 건립은 인류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보다
는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 간의 파열음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의 이러한 행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 부분에서 정약용은 우리
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만일 정약용이 유교와 천주교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었다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사상적 자산을 가지고 중국의
방식이 대립적이고 파괴적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논의의 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 역할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또는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
만 그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장태: 중국이 과거 팽창주의 시절처럼 유치한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겠죠. 왜냐하
면 전 세계에 중국이 안 나간 곳이 없고, 엄청난 화교세력도 전부 수용을 해야 하
기 때문에 중국은 좀 더 세련된 명분과 논리를 제시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한편으로 서양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학자들과 비교적 활발한 관계를 유지하
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교 연구를 하는 중
국인 학자들이 세계 곳곳에 많이 나가 있기 때문에 그 목소리들이 중국의 이론발전
에 여과, 조정되어서 좀 더 세련된 논리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기본 의도는 팽창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단순하게 ‘중국을 따라오
라’는 일방적인 방식은 잘 수용되지 않겠지만 여전히 중국은 정신적, 문화적으로 주
도권을 잡고 팽창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모두 다 거기에 넘어가서 중국
의 문화적 아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중국은 거부감을 심하게 일으키지 않는 범
위에서 자기만의 세련된 통치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추장민: 세련됨 속에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독소들이 곳곳에 숨어있
을 가능성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악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중국이
그런 방식으로 통치이데올로기를 세련화한다면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형태의 정
치철학이나 종교 간의 소통과 화해와 같은 형태는 아닐 것입니다. 현재 공자나 유
교사상이 중국의 팽창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고 동시에 인류
사회의 새로운 종교나 정치사상의 대안을 찾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가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활동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구해우: 말씀을 들으면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속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과 진행
과정을 평가하시면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조선이, 그 안에서도 정약용이 유교
와 기독교의 원리와 내용을 융합해서 유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했다는 평가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새로운 유교 해
석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같은 시대에 일본이나 청나라에서는 유교가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고 알
고 있습니다. 조선 역시 소중화 사상에 휩쓸리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
었지만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내적인 차원에서 조선의 유교는 이론적으로 발전
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이러한 유교의 이론적 발전을 토대로 유교와 기독
교의 만남을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면서 둘을 융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중국은 근대에 들어 와서 유교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 발전이 없는
상태에서 실용적인 영역에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다가 제국주의에 휩쓸려서 식민지
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은 유교 연구에 천착해서 동양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만남을 시도하기 보다는 자국의 신장된 경제, 국력에 기초해
서 대외적인 차원에서 소프트파워를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는 그러
한 차원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러한 중국의 의도
는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의도
를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중국의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
웅>(2002)이나 <황후화>(2006) 같은 영화와 2008년 북경 올림픽의 개폐막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영화를 보면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를 정당화시키거나 중화패권
주의가 전체주의로까지 발전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북경올림픽의 개폐막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장예모 감독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중국 공산당의 통
치이데올로기, 중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데 있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센터의 확산도 문화와 학문의 연계성 차원에서 볼 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러한 의도에 대응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유교 문명의 소통을 중요하게 취급한다면 우리는 정약용센터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중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장태: 중국은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뒷받침하는 유교적 논리를 개발하고 그
것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도 이 영향을 받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
게 독자적인 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대로 중국에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 구 교수께서 제시하는 대책방향은 중요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
시에 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유교를 종교와의 관계, 사회 모든 분야와의 관계에서
재평가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한국 경제 또는 법질서, 예술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만일 유교와 사회 여러 분야가 연결되는 부분에 대해
서 한발 앞서 검토하고 개발하면서, 그곳에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중국의 새로운 유교이론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만일 우리가 중국의 행보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아 중국에 편입되면 한국
은 또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겁니다.
조선의 개국 이후 몇 백 년이 지나서 한국 유학은 자기 스스로의 이론틀을 만들었
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는 중국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만들었죠. 그 독
자적인 노선이 다분히 주자학적인 조건에 고착된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독자적이라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중국의 새로운 이론에 따라가기 시작하면 우
리는 자신의 독창적인 영역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추장민: 최근 들어 각종 연구기관에서 인문학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중국을 연구
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그 연구과제들 중에는 “중국이 공자 사상을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어떻
게 평가할 것인가?” 또는 “공자센터의 확장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라는 주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중화패권주의를 확산시키고 이데올로기를 수출하기 위한 중국의
의도를 분석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겠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
서 중국의 공세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다분히 수세적인 차원의 접
근을 넘어서서 “한국에 우리의 유교 또는 유학이 있는가? 중국은 유교적 관점에서
현대를 재해석을 할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유교를 어떻게 재해석 할 것인가?”라
는 보다 적극적인 입장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해우: 저는 우리가 중화주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 동양역사를
보는 눈을 바로 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동양사는 중국의 논
리 -중국이 중심이고 오랑케가 주변에 위치한다-가 아니라 ‘남북문명’ 곧, 한족을 중
심으로 하는 남방문명(황하문명)과 고조선, 고구려, 몽골까지 이어지는 북방문명이
공존해 왔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고 봅니다. 또 노자, 장자의 도교 사상이 아닌
우리 전통의 ‘선(仙)’사상, 풍류도에 대한 관심도 필요합니다. 사실 고조선이나 고구
려의 통치이데올로기는 선사상이었습니다. 물론 유교나 불교가 일부 영향을 주었지
만 큰 줄기에서 바라보면 선사상이 우리의 전통사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선사상이 꺾이기 시작했고 성리학이 국가지도이념으로 채택
이 되면서 이와 연관해서 소중화주의가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송시
열에 의해서 소중화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소중화주의에 빠
져들었던 역사를 갖고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사상사적 흐름 -조선시대 이후를 중
심으로 해석되는 경향- 에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
리 역사를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전통사상까지 포괄시켜서 우리 사상사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중화주의에 휩
쓸려가는 사상적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금장태: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화주의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
고 있습니다. 극명한 예로 조선말기 주자학자인 유인석(柳麟錫)의 묘비를 들 수 있
습니다. 그 분의 묘비에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곧 ‘명나라 안의 조선국’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명’에 속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1897년
고종의 황제등극은 우리가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유학자들 사이에는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으로 나눠졌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종이 ‘황제’로 불리
는 것에 반대하고, 국가 명칭인 ‘대한제국’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물론 우리 사상사의 기반을 고대사까지 넓히는 것도 중요하
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중화의식이 우리 의식에 상당히 깊이 뿌리박혀 있
는 상황에서 우리 사상사 안에 문화적, 정신적인 자주의식을 확보하는데 어떤 문제
점과 함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해주는 작업이 좀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대한제국이 만들어지고 고종은 환구단(.丘壇)을 만들어 황제 즉위식을 했습니
다. 환구단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1913년
에 이 독립국가의 상징인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거기에다가 철도호텔을 짓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철도호텔을 헐고 더 크게 조선호텔을 짓습니다. 사실, 역사의
식의 차원에서는 총독부를 헐어내는 것보다 환구단을 복원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시기도 문제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에도 문제가 상당히
심각합니다. 이러한 작은 부분들부터 확인해야 그에 따른 대책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과 우리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독자적인 자
기발언권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합니다. 만일 그대로 우리가 중국에 편입되면, 중국
변방국의 대접 밖에 못 받을 겁니다.

구해우: 사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 같은 경우도 모두 다 독자적인 연호를 썼습
니다. 고려 때는 연호를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
서 연호를 포기하고 명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장선에서 대한제국의
연호 사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장민: 유교는 학문 또는 사상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종교와 관련해서
유교를 살펴보면, 유교는 기독교, 불교와 달리 포교활동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지 않
았기 때문에 유교 경전이 성경이나 불교의 경전과 비슷한 위치를 갖는지에 대해서
도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유교가 종교이고 종교로서 국민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면 유교 역시 기성종교의 포교활동과 같은 종교적 활동이 필
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장태: 그것은 정말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주장
에 대해서는 “유교는 종교다”라고 말하지만, “유교가 반드시 종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유교에는 종교가 아닌 측면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할 겁니다. 일반적으
로 종교는 물과 기름이 분리되는 것처럼 명확하게 세속성과 신성성이 분리되고 있
습니다. 반면, 유교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유교가 현실세계 속에 융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신성성의 경계가 흐릿한 유교가 훨씬 유연성이 높
죠. 그리고 유교의 종교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결국 유교인 스스로 유교적 신념을 갖
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와 같다고 봅니다. 유교의 종교성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교토대학의 이케다 슈조(池田秀三) 교수는 일본에서 유교의 종교문제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는 유교의 종교성과 관련된 부분을 하나하나 짚
어가며 검토하기만 하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마
지막 부분에서 “유교는 종교성이 있지만 종교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족하다“라고 말
합니다.
한편 유교의 종교운동은 조선 후기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00년
대는 조선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유교의 종교화 운동을 한 사
람 가운데 박은식(朴殷植)이 있습니다. 박은식은 대동교(大同敎)라는 교단을 만들었
으며, 장지연(張志淵)도 거기에 참여를 합니다. 조선이 망하고 유교도 망하는 그 시
대에 박은식은 “19세기, 20세기는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였지만 21세기, 22
세기는 유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유교의 종교운동
과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사람은 이병헌(李炳憲)입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
강유위(康有爲)를 다섯 번이나 찾아가서 직접 금문경학(今文經學)과 공교(孔敎)이론
을 배우고 나서 강유위의 ‘공교운동’을 우리나라에서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철
학합일론.(宗敎哲學合一論)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19세기말쯤이면 유교 지식인들의 서양에 대한 인식은 향상됩니다. “기독교는 서양
과학, 서양철학과 충돌한다. 기독교는 비철학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유교는
서양철학, 서양과학과 충돌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전 시대의 종
교이고 유교는 다음 시대의 주자(走者)다”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한편 종교는 고유성이 있어서 과학, 세속과는 다른 독자적인 신념체계를 갖고 있어
야 한다는 종교관도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확장해서 살펴보면 사회주의도 종교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를 책상에서 연구하는 사람에게 사회주의는
종교가 아닌 지식이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거기에 생명을 거는 사람에게는 사
회주의는 종교입니다. 종교는 신념이 살아 있을 때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과거 유학자들은 유교적 신념에 지조를 지키고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유교에 대한 신념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유교는 종교
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죠. 유교는 이미 종교의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라
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역사적으로 유교는 종교였기 때문에 종교적 성
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문제는 꺼진 불 속에서 불씨
가 다시 살아나듯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유교가 오늘에 다시 살아나려고 한다
는 점입니다.

김형찬: 오랜 시간 금장태 선생님과 기획위원들 간에 진지한 토론을 나눴습니다. 모
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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