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IN 조선족 대이주100년 기획특집 연재를 읽고

by 김용필 posted Nov 28, 2011
[노트북을 열며]
한겨레신문 IN 조선족 대이주100년 기획특집 연재를 읽고

"한국엔 가고 싶지 않아요"


한국에 와서 장기 불법체류하며 일하던 부모들의 뒷바라지로 중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일본으로 유학 간 조선족 젊은세대들은 지금 '건배! 재팬드림'을 외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은 불법체류 자녀라고 이들의 한국유학비자를 허가해 주지 않았던가!                                                                                                                        
한국의 유력 일간지 한겨레신문이 4개월 동안 한국과 중국, 미국, 그리고 일본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의 삶의 현장을 집중 취재해 지난 11월 4일부터 23일까지 기획연재하였다.

한겨레신문은 26개의 조선족중학교가 있었지만 현재는 한 곳만 남아있는 길림성 유하현 현지를 취재해 「한국 바람」」으로 중국 동북3성 현지의 붕괴되어 가는 조선족공동체의 현실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코리안드림을 안고 한국에 온 조선족의 삶과 그 현장인 가리봉동, 그리고 미국, 일본을 돌아 다시 중국 청도 조선족공동체를 조명해 보고, 끝으로 한국 땅에서 태어나 만주로 이주했던 동포1세의 손자뻘인 동포3세 조선족이 중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교수로 자리잡은 일년의 스토리를 전개했다.

이번 한겨레신문의 기획은 세계에서의 보기드문 디아스포라(離散) 집단인 조선족의 대이동을 집중조명하고 조선족의 잠재력을 알렸다는 데에 상당한 의미 부여를 하고 싶다.

신문을 읽으면서, 필자는 “역시 한국사회나 정부가 반성을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과 아울러 “때가 늦은 감이 있으나 모국 대한민국이 상처받은 조선족을 어떻게 치유하고 한민족 공동체로서 상생해 나갈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사회에 와서 ‘차별’ 때문에 서러운 것이 아니라 ‘무시’ 때문에 더 서럽고, 그 자녀들이 한국에 온 부모들이 무시를 받아가며 번 돈으로 일본유학을 선호한 것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싶다.

한 대표적인 사례가 인상깊다. 어머니는 한국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아들은 어머니가 대준 돈으로 북경대학을 졸업해 국비장학금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이 유학생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엔 가기 싫다고 했다.
“어머니가 거기서 괄시받은 것 생각하면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조선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일본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으로 주목받고, 중국 청도에서 기업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밑받침은 분명 한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부모세대들이 한국에 와서 불법체류자 고깔을 써가며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자녀 교육을 뒷바라지한 ‘억척스런 교육열’, 그리고 한중 수교 후 중국진출을 해 중국 현지에 돈을 뿌린 한국기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으로부터 한국은 단지 궁하면 다시 가서 돈 벌 수 있는 곳이지 따듯한 모국이라는 인식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조선족의 한족화는 빠른속도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한겨레신문이 기획보도를 통해 한국사회에 ‘조선족’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고자 했다는 것에 대해 10년 이상을 중국동포를 위해 활동해 온 필자 입장에서 희망을 가져본다.

한겨레신문 기획보도에 희망도 찾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한겨레신문은 중국 현지와 미국, 일본 현지 조선족의 현실을 보여주어 독자인 필자도 도움을 받았지만, 한국의 조선족 현장 보도는 ‘가리봉동’에 치우친 너무나 협소한 접근이 아니었나 싶다.

200만 조선족 동포중 50만 가까이가 한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50만명의 재한조선족은 다양한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 어느 특정 단체나 인물이 전체를 대변할 수 없을 만큼 재한조선족사회는 다양성을 갖고 있다. 가리봉동은 장기간 재개발 발목에 묶여 정체된 곳이 되었고, 가장 낙후된 중국동포 밀집거주지역이다. 조선족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리봉동'에 두었다는 것은 여전히 ‘조선족은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에서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인상이다.

국적회복한 중국동포1세들에 대한 조명이 없었다는 점도 아쉽다. 국적회복한 중국동포 1세들은 일제시기에 부모 따라 만주로 이주해 숱한 역경을 거쳐 1992년 한중수교 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 1세대들이다. 이들은 현재 2만 5천여명에 이른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조선족은 없었을 것이고, 조선족 내에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후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고 빈 그루터기만 안고 살고 있다.


<연재를 마치며>를 읽고

끝으로 한겨레신문이 연재를 마치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한국정부의 조선족 정책에 대해서는 “비자에만 매몰된 역사였다”는 출입국 공무원의 반성어린 자평을 인용해 소개했고, “조선족이 중국 국민이라는 전제 아래 현지 진출한 한국 기업 등을 통해 중국내 조선족 위상을 높여주는 것이 (한국• 중국•조선족)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대학교수의 의견, 그리고 중국에서 자립한 조선족이 “장차 남북교류와 통일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동포단체 활동가의 말을 인용해 소개했다.

필자는 이런 결론을 덧붙히고 싶다. 2012년 내년은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해는 방문취업제 도입 5년 만기가 되어 한국에 와서 5년 이상 일하던 동포들이 출국을 하고 1년 후 재입국하는 순환이 시작되는 해이다. 이것은 조선족사회가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또한번 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정부는 한국에 한번도 들어오지 못한 조선족에게 한국 입국 기회를 주기 위해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동포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재외동포법상 동포로 인정하고도 조선족을 전반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이젠 진지하고 냉철하게 짚어보고 더 늦기 전에 한민족 공동체로서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유학 가는 조선족이 바라본 '일본과 한국'>  

한겨레신문 기획특집 <조선족 대이주 100년> 11월 19일자 토요일 판은
일본으로 유학가는 조선족 젊은이들을 소개했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1980년대 말부터 조선족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서 날품 팔아 돈 버는 조선족 부모들이 자녀의 유학비용을 뒷받침했다. 현재 일본에는 5만3000여명의 조선족이 체류하고 있다. 그 가운데 33%가 유학생이다. 일본에서 취업한 이는 27%인데, 상당수는 유학 직후 현지에서 일자리를 얻은 경우로 추정된다.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 일본 체류 조선족의 주류를 이룬다. 한국 체류 조선족 대다수가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것과 비교된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농사짓던 조선족 1세대, 외국에 나가 하층 노동을 담당한 2세대에 이어, 석사학위 이상 고학력에 한국어·중국어·일본어에 모두 능통하여 세계를 제 무대로 삼으려는 조선족 3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최인원(33)씨는 중국 길림성 서란시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간 홀어머니가 그의 학비를 댔다. 베이징자오퉁(북경교통)대를 졸업한 뒤 일본 요코하마국립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일본 최대 생활용품 제조업체에 취직해 중국 수출 업무를 맡고 있다. 중국 국적의 본사 직원은 최씨가 유일하다. 회사는 일본인 입사동기를 제치고 그를 가장 먼저 계장으로 승진시켰다. 민족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최씨를 배려했다.

일본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한국은 달랐다. 어머니를 만나러 설이나 추석 때 한국에 가면 택시기사부터 최씨를 무시했다. 최씨의 말투는 한국인과 달랐고, 그런 최씨를 택시기사는 서슴없이 무시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요. 우리 부모들이 한국에서 괄시받은 것 생각하면 한국에 가고 싶지도 않고.” 일찍 아버지를 여읜 최씨에게 ‘우리 부모’란 조선족 장년층 전체를 뜻한다. 그는 ‘차별’이 아니라 ‘무시’라는 단어를 골라 거듭 힘을 주었다. 조선족의 역사적·문화적 자존이 한국인에 의해 상처받았다는 뜻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족의 ‘한국 바람’은 일본 또는 중국 내륙 대도시에 자녀를 유학 보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만난 조선족 유학생 대다수의 부모는 여전히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 중국동포희망연대 대표


@동포세계 제8호(통번258호) 2011.11.25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