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400만이 피를 토하는 날, 김유라의 귀빠진 날

by 림일 posted Feb 16, 2012
탈북작가 림일입니다.
오늘은 2400만이 피를 토하는 날입니다.
이북의 광명성절 즉, 김정일(兒名 김유라)의 귀빠진 날입니다.

제가 [소설 김정일]을 쓴 탓에 오늘 한꺼번에
세 일간지(동아, 세계, 서울)에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잘 난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코리아글로브 님들께 김유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
여기에 세 글을 올립니다. 아시겠지만... 참고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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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고/림일]만년바위에 김정일 이름 새겨 넣고 백두산이 고향이라니…

세계 경제 랭킹 150위권에 있는 자국을 ‘행복한 인민의 나라, 강성대국’이라고 우기는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은 70년 전인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밀영지 귀틀집(통나무집·빨치산 사령부 막사)에서 조선혁명의 영명한 지도자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꼬마들과 군사놀이에서 백전백승의 군사전법을 쓴 총명한 그는 평양에서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4년 4월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했다.

이어 중앙당 조직부 지도원(남한의 대통령정무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여러 직무를 거쳐 9년 만에 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2인자)가 됐다. 그는 수많은 경쟁자와 공정한 경합을 벌인 것도 아니고 단지 아버지의 후광으로 탄탄대로의 출세가도를 밟았다. 생전에 그가 가졌던 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최고사령관 등의 직함을 위해 오래전부터 필요했던 예비 직함이 바로 ‘조직비서’였다.

국회의원과 장관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비리까지도 낱낱이 밝히는 남한에서 알려진 김정일은 정확히 이렇다. 그는 1941년 2월 16일 소련 연해주 부근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 지역 주둔 빨치산부대에서 당시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인 부친 김일성과 빨치산 대원인 모친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광복 후 건국으로 바쁜 부친이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었고 7세 때 모친의 사망으로 4세의 여동생과 졸지에 사실상 고아가 된 그는 심한 모성애 결핍증과 우울증을 갖고 성장했다. 그것이 잔인성이 됐고 33세에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같은 자료는 해외에 사는 김일성의 옛 전우들과 연고자들을 심층취재한 중국과 옛 소련 현대정치학자들의 연구와 논문을 토대로 세상에 밝혀진 것들이다.

북한은 김정일의 40회 생일(1982년)을 맞아 그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와 훈장을 수여하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공식 발표했다. 아무런 해명 없이 하루아침에 그의 출생 연도를 1941년에서 42년으로 고쳤다. 이는 부친 김일성이 출생한 해인 1912년의 2자와 짝수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김정일이 1980년 노동당 6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낙점된 이후인 1987년 2월부터 북한 당국은 백두산을 김정일 혁명사적지(국가유적지)로 지정하고 생가를 지어 성역화에 나섰다. 도로를 내고 천년 수림의 수많은 나무의 껍질을 벗겨 정치 구호를 새겼고 만년 바위에 그의 이름을 새겼다. 국제사회에서 볼 때 엄연히 김정일은 지구 환경파괴 주범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일상이고 꿈과 희망의 전부였다. 거기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으니 어쩌면 풀뿌리로 연명하는 오늘날 인민들의 비참한 모습은 당연한 것이다.
생전에 김정일은 이맘때가 되면 “백두산은 나의 고향이고 나는 백두산의 아들”이라고 늘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백두산을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뭐, 김정일의 고향이 백두산이라고? 백두산은 무슨 얼어 죽을 백두산이란 말인가.

자칭 인민의 어버이라는 그가 정말 큰 산을 사랑한 큰사람이었다면 천만 자식들인 인민의 비참한 삶과 굶주림을 한 번쯤은 고민해 봤어야 했다. 굴뚝에 연기가 끊기고 트랙터가 멈춘 지방의 공장과 농촌에도 갔어야 했고 배고픔을 참다못해 죽음을 각오하고 정든 고향을 등지는 수많은 탈북자의 구구절절한 사연도 들어봤어야 했다.

멈춰버린 산업현장과 배곯는 인민을 찾아봐야 할 그 시간에 백두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승지에 있는 자신만의 전용별장에서 전세기로 공수되는 프랑스산 코냑에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젊은 여인들의 기쁨조 공연을 보며 세월을 보낸 김정일이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자손대대 독재체제를 위해 끔찍한 핵을 만들어 7000만 우리 민족을 불안케 했고 무시로 남한에 대고 생트집을 잡았다. 이 모든 것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을 백두산이다. 생전 김정일이 노는 꼴에 백두산이 뚜껑이 열려 화산이 폭발하지 않은 것만도 김정일은 저승에서도 감사해야 한다. 안 그러면 백두산이 진짜 터진다.

림일 탈북작가 ‘소설 김정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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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민 피와 눈물 쥐어짠 ‘김정일 선물통치’

<세계일보>입력 2012.02.15 (수) 20:56


16일은 북한이 김일성 생일(4월15일)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김정일의 생일이다. 역사적으로 세계 모든 독재자의 공통점이 바로 선물 정치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 자신의 측근과 충성분자에게 비싼 선물을 아낌없이 주고 또 줬다. 김정일의 선물정치는 가히 유명했다. 북한에서 선물이란 용어는 김정일이 인민들에게 하사하는 물품과 반대로 인민들이 그에게 올리는 진상품에만 붙는 특수용어이다. 필자가 평양에서 29년간 살면서 일반인들이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며 ‘나의 선물’, ‘친구가 준 선물’이라는 표현은 쉽게 들어보지 못했다.

생전에 김정일은 국가명절인 양력설(1월1일), 자신의 생일, 김일성 생일, 국경일(9월9일), 노동당 기념일(10월10일) 등에 어김없이 간부들에게 선물을 돌렸다. 종류는 받는 사람의 직위에 따라 다른데 식료품 꾸러미를 비롯해 컬러TV, 냉장고까지 다양하다. 새로 임명되거나 승진한 최측근 및 특정인에게는 미화 100달러짜리가 수십장 든 봉투도 줬다. 그는 자신이 보고 만족한 영화의 주연배우나 국제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게도 고급주택과 벤츠 승용차를 나눠줬다. 국제경기 시상식에서 북한 선수들이 눈물을 흘리며 김정일을 홍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듣기 좋아 인민의 나라이지, 실제는 간부의 나라인 북한에서 김정일의 선물 수령대상은 노동당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이며 항일빨치산 가족, 혁명열사 유가족, 전쟁 참가 공로자를 포함해 대략 2만∼3만명이다. 극소수 특권층인 이들에게는 일반생필품도 정기적으로 공급되는데, 그때마다 비공개 강연을 통해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주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배려입니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연설을 한다. 노동당의 선전대로 무엇을 공급받는 것 자체가 모두 그의 선물이고 배려이다. 심지어 남한과 외국에서 들어온 각종 지원물자도 김정일의 선물이 된다.

내가 평양에서 난생 처음 받았던 선물은 7세 유치원 시절 김정일 생일날 받은 간식 꾸러미인데 사탕과자, 껌, 젤리 등이 1kg가량 들어 있었다. 평양시민이 명절에 술 1병, 두부 1모를 받아도 그것은 김정일의 선물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피와 땀인 줄도 모른 채 ‘공짜 선물’인 줄 알고 눈물까지 흘리며 받는 북한 주민 대부분이 죽으로 연명하는 비참한 삶의 처지에 있다.

그런데 죽은 시신을 호화궁전에 안치한 것도 모자라 그의 생일을 ‘광명성절’(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천년바위에 김정일의 이름을 새기는 충성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기념주화를 만들고 초대형 동상을 제작하는 비정상적인 집단이 바로 북한이다. 평생토록 인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고 간부에게만 자신의 선물을 줬던 김정일도 호의호식하며 오래살 듯보였으나 결국 저승으로 갔다. 단지 아버지 잘 만난 덕에 일생을 절대독재자로 살았던 김정일이다.

림일 탈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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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백두혈통이 아니라 백수혈통이다

림일 탈북작가· ‘소설 김정일’ 저자


16일은 고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이다. 필자가 평양에서 해마다 2월이면 집중적으로 받았던 김정일 우상화 교육의 한 대목이다. “항일의 영웅 김일성 동지께서 험산 준령의 백두산에서 강도 일제와 맞서 싸우시던 1942년 2월 16일, 조선혁명의 광명한 미래로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탄생하시었다.”

소가 웃다 꾸러미 터질 소리다. 평양 태생의 김일성은 대부분 만주와 연해주 부근에서 활동했다. 북한에서의 활동은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를 90명의 빨치산 대원이 습격한 사건)가 유일한데 이것도 전설 속의 김일성(동북 항일연군 제2군6사 백두산지구장으로 당시 나이가 60대 정도인 노장군)과 엇갈리는 황당한 부분이다.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빨치산 소부대가 만주에서 일제 공격을 피해 1941년 초 연해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2월 16일 김정일(당시 이름 김유라)이 태어났다. 당시 소련 극동군정찰부대 88여단이 주둔하기도 했던 이곳에서 김정일은 5살까지 살았고, 해방이 된 1945년 11월 생모 김정숙의 손을 잡고 함경북도 웅기로 배를 타고 북한에 들어왔다.

1960년 8월 평양 남산 고급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김정일’로 개명하고 ‘수령의 아들’이라는 절대 특권을 누렸다. 1987년 2월 그가 실제 수장인 조선노동당의 결정으로 백두산을 혁명성지로 꾸렸고 그곳이 곧 자기 고향이 되었다. 인민이 우러르는 수령의 고향이 외국이면, 우상화 교육에 걸림돌이 되었기에 엄청난 거짓말도 뻔뻔하게 했던 김정일이다.

북한의 초대 수령 김일성과 2대 수령 김정일에 이어 3대 수령 김정은에 대한 노동당 선전도 기가 막히다. 출생지와 생일이 불분명한 김정은을 “백두혈통을 이어받으신 또 한 분의 위대한 수령,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 강철의 영장”이라고 역설하는 노동당이다. 정말 강철판을 얼굴에 깔았다. 백두산에서 한 번도 항일운동을 한 사실이 없는 할아버지 김일성과, 절대군주가 되어 백두산으로 한가한 산행을 자주 갔던 아버지 김정일이 백두산과의 인연이 전부라면 전부이다.

그런데 어떻게 김정은을 백두혈통이라고 하겠는가? 김정은 일가가 할아버지부터 지금껏 북한에 어떤 공적을 쌓았는가? 전국 곳곳에 자신들의 동상과 기념비를 수천개 세웠고, 생가를 비롯한 혁명사적지를 수백개 건립했다. 모든 가정에 저들의 사진과 어록패를 걸었고, 죽어서도 호화궁전에 들어가 있는 그들이다. 인민이 노동당과 정부를 비판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돼 갇히는 비밀수용소가 20여개 있으며 그 속에 30만명의 정치범이 갇혀 있다.

자칭 인민의 어버이라는 그들이 과연 그 인민을 위해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시장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과 굶어 죽는 노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배고픈 창자를 끌어안고 살벌한 압록강을 넘는 인민들의 기막힌 참상은 과연 뭐란 말인가?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에는 출생신고가 안 된다. 그의 사진만 구겨도 정치범이 되는 잔인한 정권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대대손손 독재와 부귀영화를 위해 살아온 그들은 인민들의 삶과 인권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백수들이었다. 김씨 일가는 백두혈통이 아니라 백수혈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