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없는 어른인가?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가?
코리아글로브의 5월 15일, 265차 화요대화마당은 코리아가 낳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그의 소꿉동무인 수필가 이경희 선생의 에피소드로 시작한 백남준의 일상 이야기는 문화인류학자, 미술 평론가 등 전문가들의 입담을 더하면서 정교한 대담으로 틀을 갖췄다. 백남준에 대한 문외한일지라도 그의 천재성은 많은 경로를 통해 들었을 테지만, 그 개인의 삶을 파전의 조각처럼 떼 내어 맛보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 보면 이번 화요마당은 생동감이 넘치고 일종의 아름다운 수다로 느껴질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과연 백남준의 사사로운 모습은 어떠했는가? 6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자신의 감정을 어떠한 사회적 틀에도 구속받지 않고 내뱉는 그의 언어 사용 또한 “예술가가 얼마나 바쁜데 존댓말을 해!” 하면서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어찌 보면 예의 없는 말투. 소리를 시각화한 천재성에 빗대어 보면 참여한 패널들의 말대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지만 사회적 틀이라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에서는 그는 그저 매너 없는 어른일 뿐이다. 이해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겠으나, 그의 예술에 대한 천재성과 실험정신은 보통 사람이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업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피카소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으로 표현한 혁명적 사고의 전환은 백남준에 와서는 청각의 시각화로 한 단계 진일보해서 20세기 대중들 앞에 선사된다. 물론 그 선물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극찬의 대상이 되지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는 커다란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결국, 백남준의 예술의 혼은 천재, 혹은 순수한 영혼으로 각광 받게 된다. 백남준을 이해하는 또 다른 언어는 ‘코스모폴리탄’ 즉, 세계인이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일본인과 결혼했고, 그러나 한국의 정서를 포기하지 않은 그의 예술은 한국인이 볼 때 세계 어디서도 자부심을 느낄 만하지만, 막상 그의 성장과 배움의 과정에 한국의 요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나라라는 제한 선을 두고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예술 세계는 우주를 다루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백남준에 대한 에피소드와 그에 대한 평론을 통해 하나 강렬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일상의 파괴는 때론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인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새롭게 창조될 때 새로운 일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파괴를 무서워한다면 창조는 없다.’라는 것이다. 신나게 부수고 새롭게 만드는 어린아이들의 블록 놀이를 백남준은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한 것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 그리고 파괴를 위한 창조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한 준비가 이 시대에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줄인다.
코리아글로브의 5월 15일, 265차 화요대화마당은 코리아가 낳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에 관련한 이야기였다. 그의 소꿉동무인 수필가 이경희 선생의 에피소드로 시작한 백남준의 일상 이야기는 문화인류학자, 미술 평론가 등 전문가들의 입담을 더하면서 정교한 대담으로 틀을 갖췄다. 백남준에 대한 문외한일지라도 그의 천재성은 많은 경로를 통해 들었을 테지만, 그 개인의 삶을 파전의 조각처럼 떼 내어 맛보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 보면 이번 화요마당은 생동감이 넘치고 일종의 아름다운 수다로 느껴질 정도로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과연 백남준의 사사로운 모습은 어떠했는가? 6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자신의 감정을 어떠한 사회적 틀에도 구속받지 않고 내뱉는 그의 언어 사용 또한 “예술가가 얼마나 바쁜데 존댓말을 해!” 하면서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어찌 보면 예의 없는 말투. 소리를 시각화한 천재성에 빗대어 보면 참여한 패널들의 말대로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지만 사회적 틀이라는 이미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관점에서는 그는 그저 매너 없는 어른일 뿐이다. 이해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겠으나, 그의 예술에 대한 천재성과 실험정신은 보통 사람이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업적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피카소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으로 표현한 혁명적 사고의 전환은 백남준에 와서는 청각의 시각화로 한 단계 진일보해서 20세기 대중들 앞에 선사된다. 물론 그 선물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극찬의 대상이 되지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는 커다란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결국, 백남준의 예술의 혼은 천재, 혹은 순수한 영혼으로 각광 받게 된다. 백남준을 이해하는 또 다른 언어는 ‘코스모폴리탄’ 즉, 세계인이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일본인과 결혼했고, 그러나 한국의 정서를 포기하지 않은 그의 예술은 한국인이 볼 때 세계 어디서도 자부심을 느낄 만하지만, 막상 그의 성장과 배움의 과정에 한국의 요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나라라는 제한 선을 두고 그를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의 예술 세계는 우주를 다루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백남준에 대한 에피소드와 그에 대한 평론을 통해 하나 강렬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일상의 파괴는 때론 비정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인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새롭게 창조될 때 새로운 일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파괴를 무서워한다면 창조는 없다.’라는 것이다. 신나게 부수고 새롭게 만드는 어린아이들의 블록 놀이를 백남준은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한 것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 그리고 파괴를 위한 창조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한 준비가 이 시대에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