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숙은 왜 북한에 가게 되었나?

by 이주성 posted Jul 10, 2012

박인숙은 왜 북한에 가게 되었나?




박인숙의 한국에서 생활은 고독의 하루, 하루 였습니다.
인터뷰에서 박인숙이 이야기 했듯이 박인숙은 사실 한국에 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한국에 계시는 아버지와 중국에서 만나 돈을 받아가지고 북한으로 돌아 가려고 했었습니다. 북한에서 중국에 한번 나온다는 것은 많은 모험을 하지 않고서는 힘든 과정입니다. 일이 안 될 터라 국경경비대에 많은 돈을 주기로 하고 중국까지 몰래 나온 박인숙은 아버지가 뇌출혈로 병원에서 정신을 잃고 있다는 소식은 청천병력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박인숙에게 아버지의 생존은 생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면 북한주민 모두 그러 하듯이 박인숙의 일가는 굶주림으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어야 하는 기막힌 처지 었습니다. 그래도 박인숙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미국 오빠를 통해 북한에 있는 박인숙의 형제들에게 돈을 전달해 주었다고 합니다. 박인숙이 중국에서 아버지가 돈을 보내주지 않는다면 북한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것은 중국으로 오면서 북한국경 경비대들과 북한 브러커들에게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으면 많은 돈을 주기로 하고 중국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언제 사망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제 박인숙에게는 돈이 없이는 북한으로 돌아 갈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박인숙은 한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으로 오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오빠와 남동생, 미국의 오빠간에 토의 한끝에 중국 브러커에게 돈을 주고 비행기로 박인숙을 한국으로 데려 왔다고 합니다. 박인숙은 저와 함께2006년 10월 12일 하나원을 퇴소하여 송파구 거여2동 6단지에 있는 17평짜리 아파트를 정부로 부터 배정 받아 생활 하였습니다.

박인숙과 같은 단지에서 생활을 하면서 매일 만나 이야기도 하고 그가 격고 있는 마음의 고충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북한평양에서 대학교원을 하던 박인숙의 아들은 박인숙이 한국에 온 사건으로 하여 황해도 농촌에 강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몇번 며느리 엄마가 혜산에 와서 박인숙에게 아들 가족을 살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며 돈을 요구하여 제가 알기로는 3번에 걸쳐 몇백만원을 북한에 부쳐주었다고 박인숙이 이야기 하였었습니다. 그 돈은 미국에 있는 오빠에게 안타까운 소리를 하니 도와주고 한국에 있는 무역을 한다고 하는 오빠에게서는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평시에 말하곤 하였습니다.

박인숙은 저와 허물없는 사이어서 언젠가는 돈 많은 영감에게 시집을 가볼까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박인숙에게 오빠들이 도와주지 않는가고 물어보니 몇번인가 몇십만원씩 용돈을 주고는 많은 돈을 주지 않는다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기 몫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였습니다. 자주 박인숙의 집에 가 식사랑 같이하면서 낡은 중고 텔레비와 남들이 쓰다 버린 중고 냉장고 침대 같은 것들을 집에 들여 놓았었습니다.

제가 동생이나 오빠들에게 집에 놓을 가전 제품을 사주지 않는 가고 물어보니 사실 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전혀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의 경우는 전화를 할 일이 있어 전화하면 바쁘니 비서에게 하라고 하고는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평상시 얼굴 모습은 항상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수심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박인숙이 넘어져 다리를 다쳐 수년간 다리 때문에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느라 고생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번 한국의 형제들은 박인숙이 한국에 있는 6년동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다며 박인숙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동생에게 있어 친누이인 박인숙의 한국출현은 지나가던 북한거지 꽃제비가 귀족집에 찾아온 것 과 같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존재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남동생을 만날 생각을 포기 한지 오래다."라고 말입니다. 박인숙이 북한에 있는 아들과 친척들로 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자주 받았다고 합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박인숙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북한에 있는 자식들에게 남겨놓은 돈이라도 있으면 조금 줄수 없는가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인숙의 남한에 있는 형제들은 아버지가 한푼도 북한에 있는 형제들에게 유산을 남겨놓은 것이 없다며 외면한다고 박인숙이 언젠가는 울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자식들도 같은 자식인데 우리아버지가 그럴리가 없다. 아버지가 없으니 어디가서 물어 볼데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한민국 법에는 재산 상속법이 있으니 법원에 소송을 해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박인숙은 '자신에게는 돈이 없어 변호사 비용도 없다."며 돈 줄 마음이 있으면 내가 법원에 제기 하지 않아도 이미전에 주었을 것이라며 형제들은 돈이 많으니 변호사들에게 돈을 찔러주면 자신은 재판에서 질것이 뻔 한데 상소하나 마나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인숙은 한국에 올 때 하늘처럼 믿었던 형제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무시하는데 받은 마음의 상처로 하여 배신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평시에 한국에 있을 때 말하곤 했습니다.

박인숙이 한국에서 생활이 어려워 돈을 벌어 볼려고 노력한 모습은 우리 단체에서 조직하여 진행하였던 인터뷰 동영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박인숙은 한국에서 살아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해 보았습니다. 집에서 손 노동 수작업을 하여 용돈을 벌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돈 많은 영감에게 시집을 가 북한에 있는 아들에게 돈을 보내주려고도 해 보았고 미국에 있는 오빠에게 가서 살아보려고 미국까지 갔었으나 말도 모르는 미국생활은 그에게 있어 높은 장벽이었습니다. 미국의 오빠는 박인숙을 미국에 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지만 년세가 많아 오빠가 돌아가시면 조카들이 자신을 달가워 하지 않을 거라며 미국에 가기를 포기한다고 말 한적이 있습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오빠의 집에서 형님의 병간호를 1년에 몇달씩 해주면서 간호비를 받아 돈을 조금씩 모아보았습니다. 미국 오빠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이라며 2000만원 정도의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투자를 하면 이자를 많이 준다는 다단계업자의 거짓 말에 속혀 모두 사기 당하여 몇년간 돈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고 말했었습니다. 다리를 다쳐 수년간 고생한 박인숙에게 한국은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었습니다. 돈도 없고 몸은 이미 병들어 겨우 움직이는 형편에 이런 상황에서 박인숙은 죽어도 자식옆에 가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북한에 다시 들어갔다고 보아 집니다.

박인숙은 이미 연계가 있던 중국 브러커에게 북한에 연락하여 자신이 북한에 돌아가면 살려주겠는가를 물어 본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북한당국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박인숙이 북한에 넘어오면 남한을 헐뜻는 모략선전에 이용하려고 계획하고 살려주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집니다. 제가 송파에서 박인숙과 같은 아파트 단지내에서 살다가 2008년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사오면서 집에는 자주 가보지 못했지만 1달에 한번 정도는 가보았습니다. 또 며칠에 한번씩은 전화로 안부를 주고 받았고 또 저의 단체 회원으로 있으면서 북한에 보내는 양말 수작업도 여러번 함께 하곤 하였습니다.

저의 집에서도 여러번 숙식을 함께 한 적도 있습니다. 저의 막내 아들을 한국에서 낳는데 박인숙이 국립의료원에서 받아 주었을 만큼 저와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5월 초경 박인숙이 없어지기 며칠전에 저와 전화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박인숙은 다른 사람의 전화는 몰라도 저의 전화는 야밤삼경이 되어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박인숙에게 전화를 하니 전화신호는 들어가는데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 몸이 아파 전화를 받지 않나 해서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하니 그래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박인숙이 살고 있던 송파경찰서에 박인숙의 실종신고를 하였었습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인숙의 담당경찰관에 여러번 재촉하여 알아본 결과 며칠전에 중국에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박인숙과의 마지막 이별 었습니다. 박인숙이 한국에서 살면서 저에게 하였던 위에서 언급한 말들이 사실인지 다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박인숙과 가깝게 지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봐 그대로를 적은 것입니다.

박인숙이 자신의 입으로 천국이라고 하던 한국에 살려고 왔다가 지옥같은 북한에 다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기막힌 사연이 씁쓸 하기만 합니다. 북한에 돌아간 박인숙이 평양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불쌍하고 가엽은 모습을 보면서  '한민족이 격어야 하는 비극과 슬픔의 역사가 과연 언제면 끝장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