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에서 퍼왔습니다.
시각이야 문제가 많지만
팩트중에 참고할만한 것이 좀 보이는 읽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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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호네커 정상회담기록(1)
김일성(金日成)의 충격 고백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서기장실 비밀 문서(文書) 중 金日成·호네커 정상(頂上)회담 기록
천기(天氣) 누설에 가까운 본심토로·비화(秘話) 공개… 김일성의 관점에서 본 한국 현대사(現代史)… 그 의외의 육성 증언(證言)
『팀 스피리트 훈련 때마다 우리는 한 달 반이나 경제가 마비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평화협정을 위한 3자(者) 회담을 제의했더니 미국(美國)은 중국을 끼워 4者 회담을 하자면서 빠져나가고… 우리는 남으로 진군(進軍)할 힘도 없다』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金日成은 호네커와의 회담에서 이 훈련기간 동안에 북한경제가 마비될 만큼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반공(反共) 민간정부가 군사정권보다 유리… 노동자·농민이 일어날 수 있으니』
●『박정희(朴正熙)를 고립시키려고 남북회담(7·4) 시작』
●『문화대혁명 때 중국군이 두만강 넘어 침입… 확성기로 5년간 비방…울며 겨자 먹기로 눈물 흘리면서 참았다』
●『팀 스피리트와 남한 군사력에 대응하느라 노동력이 부족』
●『전두환(全斗煥)은 독종개, 레이건에게 선거자금 제공했다』
● 고르바초프, 金日成의 서울올릭픽 불참 요구를 거절
●『84년에 김정일(金正日)에게 국가경영 맡겼다』
●『남한은 1백만(萬) 대군, 우리는 45萬』
●『아무리 학생들이 데모해도 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한 정권은 변동 없다』
<1995년 11월 월간조선>
金日成-호네커의 세 차례 대화록 입수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동독(東獨) 공산당의 기밀문서(文書)가 서독정부에 넘어갔다. 이 文書 중에는 당(黨) 최고권력 기구인 정치국 문서와 월터 울브리히트, 에리히 호네커, 에곤 크렌츠 같은 역대 黨 서기장 집무실의 문서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 문서와 같은 최고급 기밀문서들이다. 이 문서 중에는 북한에 관한 문서도 수천 페이지나 있었다. 북한은 東獨을 사회주의권(圈)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국가로 생각해 왔다. 東獨의 발달한 군사·과학기술을 배우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북한과 동독 수뇌부는 인간적으로도 무척 친밀해졌다. 金正日이 東獨에서 유학했고 강성산(姜成山) 현(現) 총리·연형묵(延亨默) 전(前) 총리 같은 많은 기술자들도 이 나라에서 공부했다.
특히 金日成은 東獨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친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이기도 했다. 金日成은 몇 달 아래인 호네커를 「동생」이라고 부른 것으로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東獨이 망한 뒤 러시아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호네커를 평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특별기까지 보냈던 것이 金日成이었다. 이 시도는, 그러나 우리 안기부(安企部)와 독일 정보기관의 협조에 의해 좌절되었다. 1977년에는 평양에서, 1984년엔 베를린에서 1986년에는 평양에서 金日成-호네커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세 차례 정상회담에서 오고간 완전한 대화록은 약 1백30페이지에 이른다. 이 기록을 포함하여 수천 페이지의 1949∼1989년 사이 북한관련 비밀문서는 공식적으로는 공개돼 있지 않다. 1991년 독일 내무성은 자유베를린대학(Free University of Berlin) 동북아시아 정치문제 연구소 수석 연구원 서병문(徐炳文)박사(50)에게 북한관련 文書에 대한 분석작업을 의뢰했다.
1978년 이후 자유베를린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徐박사는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다. 徐박사는 지난 9월 서울대학교와 자유베를린대학이 서울에서 공동 주최한 「독일통일의 교훈」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발표회에서 비공개로 「구동독(舊東獨) 비밀문서(文書)를 통해 본 북한」이란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다. 徐박사는 이 논문에서 비밀문서에 나타난 金日成의 남북한 상황 인식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徐교수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왜곡돼 있거나 선전용인 경우가 많은데 이 문서를 통해 金日成-호네커의 솔직한 대화와 재소(在蘇) 및 재남한(在南韓) 동독(東獨) 정보기관의 고급 정보보고를 알 수 있어 북한 수뇌부의 동향과 생각을 정확하게 읽게 된다』고 했다.
5·16 군사정부에 위협 느낀 金日成
북한을 움직여 온 金日成이 친숙한 동지 호네커 앞에서 털어놓은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 중에는 北韓의 공식적인 정책이나 선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경우가 많다. 1972년 7·4공동성명을 낳게 한 남북한 접촉과 1984년의 평화협정체결을 위한(남·북한 및 미국 사이의) 3者회담 제의의 진짜 의도에 대한 金日成의 실토도 있다. 天氣누설에 해당하는 金日成의 이런 육성증언이 믿을 만한 문서에 근거하여 공개되기는 이 기사가 처음이다.
10년에 걸쳐 호네커와 金日成 사이에 10여 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 중 金日成의 말을 추적하면 북한의 변화과정과 金日成의 전략 및 인식의 변화가 손에 잡히게 된다. 이는 金日成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바라본 한반도 정세이자 한국 현대사이기도 하다. 재북한(在北韓) 동독정보기관원이 동독공산당 정치국으로 올린 정보보고에 따르면 북한은 5·16군사쿠데타 이전에는 남한內에 지하당 조직을 유지하면서 4·19데모에도 개입하는 등 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전후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서병문(徐炳文)박사는 『동독정보원은 「5·16이 미국의 사주 없이 독자적으로 일어났으나 군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가는 과정에서 韓·美·日 동맹관계가 강화되었다」는 정확한 분석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5·16을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로 보고 북침을 우려하였다. 金日成은 한 달 뒤 모스코바·북경으로 달려가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5·16군사정부를 상당히 위협적으로 본 金日成은 1960년대에 군사 제1노선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북한의 경제를 망치는 결정적인 정책 선택이었다.
반면 朴正熙정권은 1965년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월남에 파병하여 韓·美·日 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한 바탕에서 경제 제1주의로 나갔다. 朴대통령의 「先경제건설 後군사건설 정책」은 金日成의 「先군사건설 後경제건설」 전략을 파탄으로 몰고간 대전략(grand strategy)으로서 오늘의 남북한 격차를 만들었다. 朴正熙의 전략은 먼저 권투선수의 체력(=경제력)을 튼튼히 키운 뒤 싸움기술을 가르쳐주는 식이었다면 金日成의 전략은 발육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에서 과도한 맹훈련(=군사력 증강)만 시키는 바람에 권투선수가 발병한 경우이다.
東獨 공산당 정치국 文書의 북한관련자료를 보면 북한은 1970년대 중반까지는 남한이 북한보다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열세(劣勢)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우리 정보부측의 계산에 따르면 1969년 북한을 앞서고 남한은 1인당 국민소득에서도 북한을 앞서고 있었고 1976년부터는 군사비 지출예산에서도 앞서기 시작한다).
남한은 백만 군대 갖고 있다
1972년 美國의 닉슨 대통령이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데탕트 시대를 열게 된다. 金日成은 이것을 미국의 약화로 보았고 이 자신감을 기초로 해서 남북한 접촉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7년 12월 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에서 열렸던 金日成-호네커 정상회담에서 金日成은 7·4공동성명 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충실한 국가입니다. 때문에 남한의 많은 지식인들이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우리나라로 왔습니다. 대학과 전문학교에 있는 나이 많은 교수들과 박사들이 남한에서 우리나라로 왔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자연과학자, 중요한 화학자 다른 전문가들 등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이나 일본에서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조국을 건설하고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美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을 30년이상 지배하고 있지만 오늘날 남한의 학생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학생들은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우리는 반대하는 시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반대로 남한의 학생들은 괴뢰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美 제국주의자들과 남한 하수인들의 준동을 억누르고 남한 민중들에게 사회주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 북한이 전체조선을 대표하는 자주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길은 어렵습니다.
조선은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해보지 못한 후진 식민국가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 국가는 발전된 나라로서 혁명을 수행했고 우리나라는 봉건 후진 식민국가로서 혁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가 해방되기 앞서 경제를 완전히 파괴시켰고 우리가 재건을 시작하고 있을 때 美 제국주의자들이 다시 경제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렸습니다. 농업도 마을도 모두 파괴했습니다. 평양에 남아있던 것이라고는 단지 집 세 채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념물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잿더미 위에서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無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동독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움은 대단히 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건설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우리나라는 분단되어 아직도 통일이 안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부담은 상당히 큽니다. 남한 괴뢰 도당들은 백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76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군사력은 백만입니다.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한 번의 3개년 계획과 6개년 계획, 그리고 7개년 계획을 수행했고 지금은 제2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우리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아직 유럽만큼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경제를 창출할 것이고 우리 힘으로 설 것입니다. 우리 당은 5차 당대회의 결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5차 당대회는 혁명 과제를 내놓았습니다. ①사상(이데올로기) 혁명 ②기술혁명 ③문화혁명. 사상혁명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세계혁명의 적인 美 제국주의와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美 제국주의자들이 사상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사상적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그 때문에 全인민을 확고히 결속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적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조건하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을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는 상당히 깁니다. 그 때문에 사상혁명은 중요합니다》
군사독재정권보다 반공(反共) 민간정부가 대남(對南)전략에 더 유리
다음 대화에서 金日成은 남한의 공산화가 日本의 공산화에도 유리한 고지(高地)를 선점(先占)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조선의 통일은 사회주의 진영에도 이익이 되고 일본 내에서도 혁명을 자극하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정책은 조선의 분할에 있습니다. 두 개의 조선을 존속시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으며 우리와 평화협상도 안하고 그들의 군대를 남한에서 철수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남한의 애국자들이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내를 갖고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한에서 朴正熙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고 정당한 민주인사가 정권을 잡는다면 그 사람이 반공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째든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통일의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박정희를 고립시키고 남한의 민주화 투쟁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인내심을 갖고 투쟁해야 합니다. 남한에서 어쨌든 민주인사가 권력을 잡으면 조선의 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력을 감축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을 공산주의로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외국군대는 물러가야 합니다. 남한 민중이 그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들은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 통일의 문제를 해결할 때 우선 두 개의 한국을 만들려는 것에 반대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함께 투쟁해야 합니다.
남한의 애국세력이 민주화 투쟁을 더 많이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朴正熙 괴뢰정부를 완전히 고립시켜야 합니다. 며칠 전 정부의 억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朴正熙가 무너졌을 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될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민주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대화에서 金日成은 대남적화(對南赤化)전략의 본질을 공개하고 있다.
①군사독재정권보다 反共 민간정부가 유리하다
②민간정부下에서는 노동자·농민의 활동이 자유로워질 것이다(각종 규제의 완화로, 또는 對南공작에 의해)
③그렇게 되면 남한 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金日成이 朴正熙, 全斗煥정권을 반대한 것은, 남한 內 민주화 세력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로 남한에서 그들 조직의 활동이 위축돼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7·4 공동성명의 배경
《이제 나는 북쪽과 남쪽 사이의 회담에 대해, 그리고 남북 공동성명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됐냐 몇 마디 할까 합니다. 1972년 북쪽과 남쪽의 적십자회담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적십자사 회담보다 정치회담을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朴正熙는 제네바에서 만나자고 대답해왔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왜 제네바에서 만나야 합니까, 평양이나 서울은 안됩니까. 우리는 말했습니다. 제발 평양으로 오라고. 그리고 그들은 왔고 우리는 만났습니다. 박정희의 대변인이 왔습니다. 물론 그는 美 CIA의 남한지부 간첩이었습니다.
나는 그(편집자주(注)-이후락(李厚洛)정보부장 지칭)에게 말했습니다. 왜 당신들은 한반도 통일의 문제를 외국의 의지해 풀려고 하느냐고. 조선 민족은 오랜 역사를 지녔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외부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미국이나 일본에 기대에 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측에서의 개입을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독자적으로 풀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남침할 것이라고 항상 주장합니다. 우리는 남침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통일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제3의 과제는 민족대단결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어 왔고 우리는 마르크스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원합니다. 자본주의 국가 內에 공산당이 있는 예는 많습니다. 우리는 미군이 남한에 없다면 훌륭히 한 민족으로서 단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남한에 사회주의를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한도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단결을 원합니다. 그들은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박성철(朴成哲) 동지가 서울로 갔습니다. 두명의 박씨가 만났습니다(편집자注-朴正熙와 朴成哲의 비밀회담을 의미). 우리는 이 세 가지 원칙을 다시 한 번 천명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명서를 작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발표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서명하라는 지시를 미국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도 서명했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은 유엔군은 결코 외세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공법을 폐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문제가 없다고 하며 폐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반공법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그것을 없앨 것인지 아닌지?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현재 대화는 중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두 개의 조선을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기 때문입니다.
朴正熙와 협상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박정희와 함께 협상을 진행한다면 박정희에 반대하는 남한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미국은 항상 박정희와 우리를 함께 앉히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와는 협상을 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았고 남한의 많은 애국자들을 감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박정희는 계속 미군이 남아 있기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나라의 통일은 없고 분단의 고착과 두 개의 조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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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호네커 정상회담기록(2)
남북한 모두 상대방의 침략을 우려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로서 南北 적십자회담에 관여하던 중 북한측과 대화채널을 열고 1972년 3월에 평양으로 잠입, 김영주(金英柱)(북한노동당조직부장)를 만났던 정홍진(鄭洪鎭)씨는 『金日成이 얘기하듯이 우리가 먼저 제네바를 회담장소를 제의한 것이 아니고 제3국에서 만나자는 정도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남북접촉을 갖기로 한 것은 전쟁을 막자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1968년에 1·21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 美 정보함 푸에블로호(號) 납치, 울진 삼척 공비침투, 69년엔 美정찰기 EC-121격추, 70년대엔 朴대통령의 암살을 노린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朴대통령은 북한이 전쟁준비를 끝내고 남침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美國 닉슨 대통령은 주한(駐韓) 7사단을 철수했고 정치전쟁, 즉 게릴라전(戰)엔 개입하지 않겠다는 괌 독트린을 발표하여 朴정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970년 8월15일 朴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 「평화적인 체제 경쟁」을 제안하는 「8·15선언」을 발표한다. 경제개발에 자신감을 갖게 된 朴대통령은 전쟁만 막을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북한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8·15선언에 기초하여 1971년 8월12일에 대한적십자사가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이것은 7·4 성명으로 발전한다.
金日成은 남북이 藍피?자주·민족대단결 원칙을 이용하여 주한(駐韓)미군의 철수와 공산당의 합법화를 뜻하는 반공법 철폐를 요구했다. 朴대통령은 전쟁재발의 방지를, 金日成은 對南적화를 위한 장애물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여 시작했던 남북회담은 1973년 6·23선언 이후에 중단된다. 6·23선弔?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평화적인 체제경쟁을 보장할 수 있는 평화구조의 한반도內 정착을 지향한 것이다. 金日成은 이를 「두 개의 조선 책동」이라 하여 반대했다.
정홍진(鄭洪鎭)씨에 따르면 몇 차례의 남북한 대표단 왕래로 해서 북한측은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가 손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 기자들과 대표단은 평양에 가서 절망했으나 북한측은 서울의 발전상에 놀랐기 때문이다. 이 회담을 통해서 金日成이 얻은 것은 남한이 북침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라고 鄭洪鎭씨는 말했다. 金日成이 1974년부터 「사회주의 대건설」이란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 고층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안도의 표현이었다.
북한은 또 서방 선진국의 자본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73년엔 서방차관도입액이 3억7천5백만 달러로 소련차관(1억9백만 달러)의 세 배를 넘었다. 1960년대에 군사 제1노선을 추구했던 金日成은 70년대엔 경제건설에 중점을 두게 되는데, 때가 늦었다.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커지더니 75년부터 외채상환이 늦어지고 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도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 金正日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 사상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경제건설의 절대조건인 사회의 자율성과 창발성이 약화되었다. 반면 朴正熙정부는 몸집이 커지는 경제를 바탕으로 1974년부터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남북한 군비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중국은 우리에게 확성기 전쟁을 걸어 왔다』
1977년 호네커와의 정상회담록에서 金日成은 70년대 상반기에 중국으로부터 당했던 고통을 심각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과 관련하여 우리는 소련과 중국의 현재 관계 때문에 특별히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련 동지들이나 중국 동지들이나 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함께 한 전우(戰友)들입니다. 우리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일본에 대해서만 함께 투쟁한 것이 아닙니다. 1945년 이후 중국혁명전쟁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함께 싸웠습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예부대와 포병을 중국에 보냈습니다. 조선대혁명군은 중국군대와 함께 중국의 끝인 하이난(海南)까지 갔습니다. 그렇기에 중국동지들은 조선인들도 피를 흘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밀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에 반대하여 투쟁할 때 그들은 의용군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1천5백㎞에 이르는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매우 밀접합니다.
우리가 밀접히 협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하는 모든 것을 다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중국이 하는 것처럼 단 한 분야에서만 기술건설을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이 인민공사를 건설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동지관계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인민들의 내부모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대했습니다. 특히 소위 문화혁명을 수행할 때는 관계가 아주 나빴습니다. 그들은 1천5백㎞의 국경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조선의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중국과의 국경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매일 확성기로 말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커다란 확성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민들에게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38선에서는 미군이 확성기로 우리를 반대하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북쪽에선 중국이, 남측에선 미국이 양쪽으로 그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확성기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했습니까?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등뒤에 적을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북쪽과 남쪽에 동시에 우리의 군대를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국 속담에 있는 것처럼 울며 매운 겨자를 먹었습니다. 겨자는 매우 매워서 우리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매운 것을 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삼켰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갈 때쯤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고 결국 개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중국이 소련을 제국주의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내?1975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공동성명에 「헤게모니」(패권)와 같은 단어를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내가 반대했기 때문에 그것은 빠졌습니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우리를 이해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적들과 싸워야 할 때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윱求?
다른 면에서 우리는 중국에 반대하는 소련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레닌을, 10월혁명을 수행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소련은 항상 경제적 정치적으로, 그리고 한국전쟁기간에도 우리를 지원해주었습니다. 소련은 의용군을 보내주지는 않았지만 고문단을 보내주었습니다. 전후(戰後) 건설시기에 그들은 우리를 지원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우리의 발전소와 제철소 건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과 좋은 무역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등소평(鄧小平)의 집권후 중국-북한 관계는 개선되었다. 1982년 4월 金日成의 70회 생일에 鄧은 호요방(胡耀邦)을 데리고 와 金日成에게 그가 중국공산당의 다음 번 총서기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胡耀邦은 金日成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金日成은 이를 직접 소련 서기장 체르넨코에게 중계했다.
1984년 5월30일 베를린
金日成, 「앞으로 金正日이 지도할 것」
1984년 5월 金日成은 모스크바에서 체르넨코 소련공사당 서기장과 회담한 뒤 베를린으로 와서 호네커와 다시 만난다. 1984년 5월29일자로 된 동독공산당의 한 기밀문서는 다음날로 예정된 金日成-호네커 정상회담에 대비하여 金日成의 방소(訪蘇) 활동을 요약하여 서기장실에 보고한 것으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 주요부분을 요약한다.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KDVR)의 당 및 국가대표단 소련방문에 대하여.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당과 국가대표단의 방문은 양국의 관계 및 소련 공산당과 조선 노동당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키고자 이루어진 것이다. 23년 전 김일성이 소련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나서 소련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하 북한) 사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쌓여 왔다. 이런 문제는 가슴을 열고 동지적 믿음으로 상세히 거론할 필요가 있었다. 협상의 중요한 결과는 소련 언론에 상세히 언급되었다. 우리는 추가적으로 아래의 것들을 보고하고자 한다.
1. 현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소련과 북한대표단 간의) 의견교환은 우리와 북한 동지들이 대부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국제적 상황에 대한 평가와 이 상황이 첨예해진 원인에 대한 관점의 일치를 말한다. 체르넨코는 조선노동당과 북한 지도층이 유럽 안보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참여국들의 많은 노력을 지지하는 것은 높이 평가했다. 다음과 같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김일성은 소련의 사회주의건설 경험들을 보다 활발히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동지들은 일본의 무장화 과정과 미국 일본 남한으로 구성된 블록을 형성하려는 계획이 가져올 위험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아주 근접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김일성은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자신은 좋은 관계라 생각한다며 더 이상 말을 안하였다.
우리는 북한 동지들에게 소련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우리 나라는 조건도 달지 않고 그들의 정상화와 관계개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잇다. 우리는 중국 지도부와 미국 일본의 정치가들 사이에 접촉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에도 관심을 갖도록 했다. 중국 지도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은 결코 재무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김일성은 중국지도부를 변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중국은 10억의 국민을 지닌 가난한 국가이고 중국 지도부가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대한 도움을 얻기 위하여 계산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김일성이 시아누크가 이끄는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시아누크가 남한과 캄보디아의 관계를 끊고 북한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2. 김일성은 한반도 입장을 설명하면서 특히 북한이 남한을 결코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반도에 대한 3者협상(북한 미국 남한)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는데 워싱턴이 이 협상에 북경이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은 이러한 변화를 반대하고 있다. 소련측은 긴장의 완화와 남한에서 미군의 철수 또 외부의 간섭 없이 현재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찬성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최근 한국의 문제는 항상 워싱턴과 도쿄와 북경의 정치적 게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중국지도부를 몰아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문제를 한국인들의 등 뒤에서 결정하게 되는 위험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한訃?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평양이 약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3. 공식적인 협상 외의 대화에서 김일성은 북한 최고지도부의 변화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번 방문이 그의 마지막 해외방문이라며 앞으로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아 이들 金正日과 수상 강산성(姜成山)이 다른 나라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일성은 최근 당과 국가의 핵심에 김정일의 지도하에 일하는 상대적으로 젊은 간부들이 투입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4. 무역, 경제, 과학·기술, 안보의 영역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데 대한 문제가 다루어졌다. 북한 동지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소련의 경제원조를 더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측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이익과 그들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고려해서 이러한 제안들을 검토해보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동독(東獨)측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동독정부는 金日成이 소련과 교섭하는 데 있어서 자문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金日成이 소련측에 대해 金正日이 젊은 또래 간부들을 기용하여 당과 국가를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은, 이 무렵부터 金正日이 국내문제를 총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팀 스피리트 때문에 우리 경제가 멍든다』
1984년 5월 30일 오전 9시30분부터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던 金日成-호네커 정상(頂上)회담에서 金日成은 韓·美군의 팀 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이 북한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김일성)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동지들과 원자력발전소 건설문제를 확실히 해두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 1조 Kwh의 전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농업발전에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산업 문제를 해결한다면 다른 모든 것이 문제가 없게 될 것입니다. 경제건설 분야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노동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40만에서 45만의 군인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남한이 70만 군인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4만3천의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국방력을 감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노동력 문제를 기계화와 자동화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계와 산업분야 전체를 자동화할 때 노동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노동력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다면 많은 광산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산업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아마도 잉여노동력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지금 귀국(貴國)과의 무역과 원조를 통해 자동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우리 젊은 간부들의 교육을 귀국에서 시키고 싶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발전도상에 나타날 수 있는 어려움들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남한의 실상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남한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합니다. 매년 미국은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레이건 시대 전부터 이런 군사훈련을 실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것은 더욱 증가했습니다. 작년에 그들은 이 군사훈련에 미군 외에도 남한군 10만을 동원했습니다. 우리는 미군이 10만의 남한 병력을 동원한 것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상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올해에 미군은 이 군사훈련을 위해 20만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이 군사훈련은 「팀 스피리트 83」 「팀 스피리트 84」였습니다. 오키나와와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美 본토에서도 많은 미군이 왔습니다. 그것은 대규모로 계획된 군사훈련이었습니다. 올해 우리는 작년과는 달리 비상소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은 이 군사훈련으로 우리와 남한주민들을 위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휴전선에는 매일 긴장감이 감돕니다. 적들이 그런 군사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대응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산업생산에 커다란 타격이 됩니다. 우리 병력 수가 남한보다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때 많은 노동자들을 군대로 소집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소집되면 1년에 한달 반정도 노동력에 차질이 생깁니다. 이는 대단히 큰 손실입니다.
『할 수 없이 3者회담 제의』
우리는 이러한 현 긴장상태를 없애기 위하여 올해에 우리와 미국 남한간의 3者대화를 제의했습니다. 이 대화의 목적은 우선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통해 군비 동결협정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한에 불가침협정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으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양측의 군대를 감축하고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적들은 우리가 남한을 침공할 것이라고 하며 이를 여러 핑계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에 미군이 계속 있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美 국회서는 세계인민들을 속이기 위해 우리 군사력이 남한보다 강하다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적들보다 더 강한 군사력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인민은 1천7백만이고 남한은 3천만이나 됩니다. 이런 주민 수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군사적으로 더 강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무기의 잠재력을 생각해보면 적들은 미국의 모든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핵무기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가 군사적으로 매우 강하다는 핑계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을 공격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남한을 계속 점령하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이자 군사거점일 뿐입니다. 미국은 한 번도 남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카터가 대통령 재직 시 남한에서 군대를 부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레이건 때는 주한 미군 병력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3자회담에 반대한다고 공식적으로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북한 양측이 대화와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당국자들은 그 점에 대해 권한이 없습니다. 예전에 그들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와 미군은 서명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서명을 한 사람들만 회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대했던 사람은 빠져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남북한이 이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평화협정을 통한 군비동결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불가침선언을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한 군대의 최고명령권자는 사실 미국입니다. 미국과 남한 군사력은 서로 통합돼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남한 대통령과 이 회담을 진행시킨다면 평화협정을 통한 군비동결협정을 맺을 수 없으며 군인을 10만 내지 20만으로 줄이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적들은 두 개의 조선을 원하고 있으며 두 나라의 평화통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중국을 참여시키는 4자회담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4자회담에 참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중국은 조선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레이건이 중국에 갔을 때 4자협상을 제안했으나 중국은 반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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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타개 위해 3者회담 제의
1977년 호네커와 회담했을 때와는 반대로 84년의 金日成은 「죽는소리」를 하고 있다. 남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여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자니 노동력이 부족하고, 특히 팀 스피리트 훈련에 대응하려고 예비병력을 소집하니 산업생산에 매년 한달 반씩이나 큰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는 하소연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경제적 피해를 해결하려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3者회담을 미국에 제안했는데 미국은 중국을 끼워 넣는 4者회담을 역(逆)제의하여 빠져 나가버리니 남한과의 군비경쟁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호소이다.
완전히 수세(守勢)에 몰린 金日成은 그런 가운데서도 남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남한의 종주국」 미국과의 직접 협상만을 고집하고 있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이며 남한 지배층은 미국의 괴뢰라는 환상에 집착하는 바람에 金日成은 미국과 한국을 군축협상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고, 북한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1976년 남한 우세로 역전되기 시작한(年군사비지출 기준) 남북한의 군비경쟁은 1980년代에 남한의 압도적 우세가 점차 가속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90년엔 남한의 군사예산이 북한의 두 배, 지금은 네 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뒤지기 시작한 북한이 핵(核)개발에 더욱 매달리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평화협ㅐ?통해서 군비경쟁을 동결시키려는 목적의 3者협상제의가 팀 스피리트 훈련으로 인한 ?뮌?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金日成의 고백은 역사적 증언(證言)이다.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데는 군사적 압력과 같은 강경한 대응이 유효하다는 것을 새삼 입증해 준다. 남북한 대화의 역사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북한의 입장이 약화되었을 때 그들은 대화로 나왔던 것이다.
서병문(徐炳文)박사는 『중국은 내심으로는 소련의 위협을 견제해 주는 주한미군(駐韓美軍)의 계속 주둔은 바라고 있었으므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노리는 金日成의 3자회담 제의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의 북한관련 문서를 읽어본 느낌으로서 徐교수는 『북한·중국·소련의 협조관계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韓·美日의 협력관계가 北·中·蘇의 그것보다도 더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전두환(全斗煥)은 독종개』
이어지는 대화에서 金日成은 全斗煥대통령을 「독종개」라고 부르면서 악담을 쏟아놓고 있다.
《조선의 상황은 남한 민중의 투쟁이 강화되고 있는 경향입니다. 예전에 남한 민중들은 미국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기대려고 했습니다. 이 두 경향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예전에 남한 민중들은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자주권을 위해 싸우지 않았으나 이제는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주권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남한의 젊은이와 학생들은 자주권을 위해 힘차게 투쟁합니다.
全斗煥 도당은 박정희 도당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들은 더 사악할 뿐 아니라 맹렬하기도 한 독종개입니다. 남한 내 미국의 지배권을 지휘하는 대장(편집자 주注-주한미군 사령관을 지칭하는 뜻)은 베트남 전쟁 당시 全斗煥과 함께 베트남을 반대해 싸웠습니다. 全斗煥은 레이건 대통령후보시절 많은 선거 자금을 헌납했습니다. 레이건이 대통령이 됐을 때 그는 남한 내에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두환을 맨 먼저 초대했습니다.
전두환은 권력을 쥐고 난 후 남한내 민주주의 정당들을 우리의 지지자라는 핑계로 해체했습니다. 민주정당들의 몇몇 지도급 인사들은 체포되었고 몇몇은 추방됐습니다. 모든 민중들과 많은 가톨릭 인사들은 全斗煥 정권에 반대하여 힘찬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全斗煥 대신 다른 사람을 앉히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는 소문도 떠돌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국이 계속 남한을 점령하고 있는 한 통일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새로운 평화제안을 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한 민중의 투쟁을 고무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서병문(徐炳文)박사에 따르면 金日成은 그러나 『남한 內 학생 운동세력은 본질적으로 反독재적이지 친공적(親共的)이지 않으며 남한 내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견해는 보였다고 한다. 金日成의 한 측근은 또 『주한미군이 남한에서 물러나더라도 남한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다. 金日成이 全斗煥대통령을 두려워한 것은 朴대통령 시절과는 달리 全斗煥정부가 「호전적인」 레이건 대통령과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全斗煥정부가 국력을 총동원하여 추진하고 있었던 서울올림픽이 북한체제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군이 두만강을 건너 왔다』
1984년 호네커와의 대화에서 金日成은 또 중국 문제를 들고 나와 길게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의 근대화작업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로 향해 문호를 개방, 시장경제화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金日成은 『중국이 미국, 일본, 인도와 평화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마당에 소련에 대해서 적대정책을 쓸 리가 없다』면서 호네커에게 『소련이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관계개선을 하도록 권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金日成은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소련의 도움으로 공장을 짓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최근에 호요방(胡耀邦) 총서기에게 『북한도 소련의 원조로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려고 한다』고 했더니 胡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국가로부터의 도입보다 낫다』고 기뻐하더란 이야기를 전했다.
金正日은 또 등소평(鄧小平)이 막후에서 중국을 지도하고 있으므로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관한 결정권도 국가 쥐고 있다고 귀뜸 해 준다. 金日成은 여기서도 또 1969년 중국-북한 접경지대에서 일어났던 불상사를 공개했다.
《그때 내가 휴양 중에 있었는데 인민무력부장이 긴급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그때가 우수리江(편집자 注-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 사이를 흐르는 아무르江의 지류로서 中·蘇국경隙岾?있는 곳)에서 중국과 소련군이 충동했을 무렵입니다. 글쎄 중국군이 두만강을 풍?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군대를 보내면서 명령했어요. 『쏘지는 말라 . 생포하라』고. 결국 중국군은 돌아갔습니다만 그 5년 동안 우리는 꾹 참아야 했습니다》
북한, 본질문제 외면으로 개혁에 실패
1984년 전후하여 金日成은 북한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여 몸부림을 쳐보기도 했다. 이 무렵 金正日이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씨와 나눈 솔직한 대화는 지난 10월호 月刊朝鮮에 육성테이프와 함께 소개돼 있다. 이 테이프에서 金正日은 물질적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非)생산성과 非능률성을 개탄하면서도 개혁의 어려움을 실토하고 있다.
1983년 10월 19일 대화에서 金正日은 『최근에 중국에 가서 호요방을 만났는데 조금 개방해 놓으니까 기술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수염·머리 기르는 것부터 배우는 바람에 골치를 앓고 있더라』고 설명한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金正日을 개방의 현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북한도 개방의 길에 나서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金正日은 그러나 중국에서 개방의 부작용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 같다. 1985년엔 과학원 지질학 실장 박철 연구사의 제안으로 「농장 포전(圃田)개인책임관리제」를 전국적으로 시험했다.
집단농장의 일부 농토를 개인농화하여 생산성을 높여보려는 이 시도에는 강성산(姜成山)총리도 호응했으나 金日成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중국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은 집단농장의 개인농화에 의한 식량증산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북한은 이 본질적 문제를 외면했다. 개인농화(個人農化)는 金日成의 주체농법(農法)에 어긋나는 반동(反動)으로 낙인돼 버렸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거쳐 최근에 귀순한 농업과학원 과학자 이민복씨에 따르면 북한농업의 기본 문제는 농토의 부족이나 종자(種子)의 불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업의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정보당 8∼12t의 수확이 가능한 벼도 집단농장에서 기르면 정보당 3∼5t밖에 거둘 수 없는 것은 네 것 내 것이 없는 집단농장의 관료주의와 나태함 때문이란 것이다. 1984년 金日成은 金正日에게 개혁의 칼을 쥐어주었으나 그 칼로써는 주체사상과 사회주의라는 제도를 건드리지 못하게 돼 있었다. 문제의 근본을 그대로 방치한 개혁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1984년에 합영법(合營法)을 제정하여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 한 시도도 70년代에 서방에 진 빚 때문에 서방자본의 유치엔 실패하고 조총련계 중소기업을 유치하는 데 그쳤고 이들 합작기업도 그 뒤 거의가 철수해버렸다. 「제도의 개혁」없는 북한의 개방은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1986년 10월 19일 평양
호네커, 군축노력 설명
1986년 10월 19일, 북한을 방문한 에릭 호네커 서기장은 평양에서 金日成과 마주 앉았다. 호네커는 『어제 평양시민들이 마련해준 환영식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격이었다』고 인사했다. 金日成은 『1984년에 동독을 방문했을 때 베를린 시민들이 우중(雨中)에도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호네커는 이날 동구공산권이 직면한 최대 문제인 군비축소에 대하여 길게 언급하였다.
《우리는 매우 근심스런 눈으로 국제적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서독 같은 제국주의국가들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토군은 우리 국경의 서쪽에 강력한 군대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서독과 영국, 이탈리아 등 서유럽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 놓고 강력한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핵무기를 구상 중입니다. 우리는 핵무기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네바회담을 환영합니다. 그곳에서 미국과 소련의 공동성명이 있었습니다.
이 회담에서 핵무기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핵전쟁을 해서는 안되고 그런 전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올바른 주제가 표명되었습니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세 가지 분야별 작업그룹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전략무기를 다루고, 또 중거리 무기, 그리고 세계에서 군사력을 확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조직된 그룹입니다. 이 그룹들의 작업은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정치위원회 부다페스트 회의에서 더 확대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고자 계획했습니다. 우리는 나토에서 특히 미국이 핵무기를 없앤 후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재래식 무기분야에서 유리해질 것이라고 항상 주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우리의 제안은 대서양에서 우랄에 이르기까지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그 제안은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상황 위에서 고르바초프 동지는 우리와 의논한 후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새로운 회담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 가지 복합문제입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레이건이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전략공격무기를 50% 감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미소 양국이 동시에 중거리 미사일을 완전히 없애자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소련은 오랫동안 실행해온 바대로 핵실험을 그만둘 수도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서기 2천년까지 핵무기의 완전한 철폐를 보장하기 위해 적절한 곳에 통제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은 미국의 「별들의 전쟁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 모든 것이 좌초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회담의 성과는 없었을지라도 세계의 평화와 무장해제를 위한 운동을 고무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의 군비경쟁에 굴복한 고르바초프
1988년 소련을 맹주로 하는 세계공산주의권(圈)의 상황은 金日成이 동독을 방문했던 1984년보다도 악화돼 있었다. 군비경쟁을 앞세운 레이건의 대소(對蘇) 압박정책은 결정적인 목조르기로 치닫고 있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이 된 후 두 가지 중요한 對蘇공세를 취했다. 서(西)유럽에 중거리 미사일 퍼싱(Pershing)을 배치하고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의 추진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SDI는 핵탄두를 탑재한 소련의 미사일을 공중에서 완벽하게 요격하기 위한 새로운 방어망의 건설을 의미했다. 이것이 성사된다면 소련의 대륙간 미사일은 고철이 될 판이었다. 소련은 이 두 가지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력(生産力)을 상실하고 있었다. 남은 방법은 군축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파격적인 군축제안을 하면서 미국의 SDI계획의 10년간 동결을 전략미사일 폐기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레이건은 이 제안을 매정하게 거절함으로써 고르바초프의 굴욕적인 군축제안도 거부해버렸다. 그 2년 뒤 소련은 일방적으로 50만병력과 1만대의 탱크 감축을 발표해야 할만큼 경제적으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러니 군축협상에 내놓을 카드도 없어져 버렸다. 소련의 붕괴를 마무리지은 레이건의 대소(對蘇)압박은 압도적인 경제·과학·기술력을 근거로 한 군비증강정책에 의해서 가능했다. 한반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남한은 핵(核)무장 포기선언을 하고 북한은 核카드를 쓰는 바람에 아직도 게임의 마무리가 안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金日成 : 『인민들의 의식주 해결이 당면과제』
이날 金日成은 자신의 허리병이 호전되었다면서 장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북한의 당면문제가 의식주(衣食住)의 해결이라고 말하고 있다.
《(잠시 휴식 후에) 김일성 동지는 높은 의자를 가리키며 그 의자는 특별히 그의 척추통 때문에 준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상태는 약간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어했다. 그는 10월말 비행기를 타고 소련을 방문했다.
에리히 호네커 동지 : 1984년은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나라에 머문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김일성 동지 : 나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동독의 제11차 당대회 결정을 성취하기 위해 열광적인 노력이 있었고 특히 기술혁명 분야에서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성공은 全 사회주의 지지자들의 성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성공으로 생각하고 그 때문에 특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의 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SDI계획을 살펴보면 거대한 독점자본이 고도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강요되는 것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제국주의가 과학기술에 있어 사회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全세계에 과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계평화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 공고화를 위해 또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공고히 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고도로 발전된 사회주의국가인 동독이 과학·기술발전을 계속해서 주동해 나가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몇 가지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제2차 7개년 계획을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제3차 7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6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10개 전망목표를 달성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당신나라처럼 높은 발전수준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발전국가로서 세 가지 근본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안정화시키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민들을 보살피는 데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매우 척박한 토지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백만㏊의 농경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곡물생산은 1백50만㏊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머지 50만㏊는 농사짓기 힘든 산간 구릉지입니다.
당신은 1백50만㏊에서 1천5백만 인민이 먹을 곡식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농업생산을 집약적으로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쌀의 경우 우리는 ㏊당 평균 7.2t을 생산하고 옥수수는 6t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9백만t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위 ㏊당 생산량을 더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지면적은 매우 적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와 맞닥뜨려 있습니다.
6차 당대회에서 우리는 30만㏊땅을 새로 일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다를 메워 이 땅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땅의 일부(20만㏊)를 농업 생산을 위해 이용할 계획입니다. 나는 우리의 농토가 2백만㏊에 이를 때 먹고사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지개량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또한 당신과 함께 남포 수문건설 현장을 방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시설은 올 6월에 준공되었습니다. 댐 건설을 통해 우리는 바다에서 밀려오는 짠물을 차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는 매우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군인들이 전쟁을 할 수 없는 조건하에서 건설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의복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전혀 면화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화학섬유를 생산해야만 합니다. 60년대에 우리는 이미 비닐론섬유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생산량 5만t 규모로 건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순천에 생산량 10만t 규모의 화학공장을 새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목재를 원료로 만든 5천t의 비스코스 섬유와 아닐린 섬유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서 우리는 1년에 20만t의 인공 섬유를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6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1백50만t의 재료를 생산하겠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토대에서 우리나라에서 의복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당신은 주거 문제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는 연간 15만에서 20만 채의 집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매우 많은 주거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인민들은 이미 건설에 있어 훌륭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건설해야만 했습니다. 제3차 7개년 계획으로 우리는 이 세 가지 기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 전 작업의 토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선적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기술적·문화적 혁명이라는 세 가지 위대한 혁명과정을 끝까지 수행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자들과 직접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데올로기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 당의 모든 동지들은 중앙 위원회의 둘레에 확고히 서 있으며 인민들은 당의 주위에 확고히 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교육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우리 인민들을 총동원할 수 있습니다.(중략)
우리나라의 45%인 8백만이 넘는 인민들이 항상 여러 가지 교육과정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지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인민들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만 집단주의 정신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유효합니다. 『전 인민이 배워야 한다. 모든 당 동지들이 배워야 한다. 모든 군인들이 배워야 한다. 모두가 배워야 한다』 세 가지 커다란 혁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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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호네커 정상회담기록(4)
『남한을 점령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金日成은 이어서 남한 內의 민주화운동이 통일지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면서도 미군이 주둔하는 한 정권의 교체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남한을 점령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투의 말도 했다.
《남한은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 인민들 내에서 반미감정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해 기대하고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은 남한의 해방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략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미국자본이 경제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남한은 미국과 일본의 독점으로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계속적으로 시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도 만5천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했습니다. 시위구호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장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을 떠나라』 어제는 이런 구호 속에 일본도 포함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소리 높여 외칩니다. 『미국은 물러가라. 그리고 미국의 정책을 추종하는 군사독재도 물러가라. 우리는 이 땅의 민족해방을 이룰 것이다』 어제의 시위는 남한 국회의원들이 앞장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반공(反共)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을 위한 투쟁이 전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인 종교단체들맛?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도 反美 선전에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요구는 민주세력들뿐만 아니라 학생들 지식인들 언론인들 가운데서도 강하게 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한 내부에서 권력관계가 빠르게 변화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미군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은 남한의 상황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미군이 그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몇 년 전에 3자(者) 협상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985년 양측 의회나 의회 대표들이 대화를 갖고 불가침선언을 명시화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남한측에서 우리가 남한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계속 주장하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쪽으로 진군(進軍)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계속 밝혀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6차 당대회에서 우리는 이미 고려연방제를 제안했습니다. 미국사람들에게는 현재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한에서 군사독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남한에서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한 방패막이를 필요로 합니다. 북쪽과 남쪽이 불가침 협정을 맺게 되면 미국이 남한에 주둔하는 근본토대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제안을 미국이 반대하는 정확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던 남측과의 공식적인 협상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남한당국에 말했습니다. 남한이 북한과 공식적으로 회담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군사부문부터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남한에는 1천 기 이상의 핵무기가 주둔해 있습니다. 그것들 중 두 개만으로도 우리나라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1천개나 필요할까요? 그것은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에는 현재 새로운 무기고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호네커 동지, 나는 소련과 미국의 대화가 성공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레이건은 독점자본의 급사』
金日成은 다음 대화에서 미소(美蘇)간의 군축협상이 순조롭지 못한 데 대하여 아쉬워하고 있다. 두 강대국이 군축에 합의하면 거기에 편승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축도 이뤄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네바회담을 반겼습니다. 우리는 제네바에서의 고르바초프 동지의 관점과 전적으로 생각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레이캬비크에서 보인 고르바초프 동지의 관점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특히 우리는 고르바초프 동지의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을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는 그의 제안을 지지합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매우 훌륭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레이건은 거대한 미국 독점기업들의 급사역할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은 「별들의 전쟁」을 실행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것은 단지 거대한 미국 독점자본에만 기여할 것입니다.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집행하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투쟁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과 모든 평화세력들이 고르바초프 동지의 제안을 지지한다면 이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나는 호네커 동지에게 우리는 미래에도 한반도 비핵평화지대를 위한 투쟁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특히,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환영하며 이러한 결정을 내린 당신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매우 고귀한 것이고 사회주의를 위해서도 매우 이로운 것입니다. 개개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중국과의 관계를 매우 발전시켜나간다면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다시금 좋아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중국 수상 이선념 동지는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중국은 당신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선념 동지는 당신을 이미 루마니아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당신에 대해 매우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당신과 좋은 대화를 갖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1984년 유럽에 간 이후 나는 많은 중국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1985년 5월 호요방(胡耀邦) 동지가 우리나라에 비공식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또한 당신에 대해 매우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당신과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중국방문은 사회주의국가들의 단합과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나는 경제적인 골칫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60년대에 비날론 공장을 건설했을 때 우리는 그 공장에 쓰기 위한 자동화장치 모두를 동독으로부터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는 동독의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의 활동력을 보장해주던 시기늄윱求? 그렇기에 나는 오늘 우리가 순천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때 필요한 장비들을 당신이 지원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이런 장비를 얻는다면 공장 건설을 매우 빨리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후략)》
호요방(胡耀邦)의 실토 : 『한국전쟁 때 중국군 38만(萬)사상』
호네커는 金日成을 만난 뒤 곧 바로 북경으로 날아가 호요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10월22일 회담에서 胡耀邦은 중요한 수치를 두 가지 밝혔다.
《50년대 초 우리는 백만의 군대를 한국에 보냈습니다. 한국전쟁 결과 우리는 38만의 사상자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미국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소련으로부터 50억루불어치 무기와 장비를 샀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우리는 10만 이상의 군인과 간부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2백억 달러를 경제와 군사원조로 주었습니다. 전장에서는 1만명 이상의 중국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사회주의권 수뇌회담과 서울올림픽 참가 결의
金日成은 호네커와 회담한 직후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2년 전 金日成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다』고 얘기했었는데 왜 또 갔을까? 그 수수께끼는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 비밀문서(文書) 속에서 풀렸다. 1986년 11월, 즉 金日成의 방소(訪蘇) 한달 뒤 모스크바에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金日成이 자신을 찾아와 소련과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고르바초프는 金日成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수뇌회의에서 서울올림픽 참가여부가 논의되었다. 쿠바 수상 카스트로만이 보이콧에 찬성했고 다른 나라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남북한이 공동개최를 하는 방향으로 노력해 보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徐박사는 『86년 11월의 이 1백50만여 페이지짜리 수뇌회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회의가 공산권의 급속한 개혁·개방을 재촉한 분수령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올림픽이 남북 결전장
『고르바초프는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을 솔직히 밝힙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국민이 잘 살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퍽 감동적입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공산권 국가들이 결정한 데는 국내적인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국가는 모두 체육 강국인데다가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러 또 다시 보이콧할 경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것으로 우려했을 것입니다. 북한은 동독에 대해서도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이것만은 호네커가 듣지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은 남북한 간의 결전이었을 뿐 아니라 동구공산권의 붕괴를 앞당긴 촉매제였습니다』 동독 올림픽 선수단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보고서를 정치국에 제출했다. 徐박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기운영과 사회의 발전상에 대해서 매우 놓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한국이 올림픽에 정치나 이념을 개재시키지 않은 데 대해서 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徐박사는 남한이 압도한 군비경쟁, 팀 스피리트 훈련, 그리고 서울올림픽이 金日成의 북한을 코너로 몬 3大정책이었다고 분석했다.
朴正熙대통령이 10·26직전에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심할 때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것이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한 대결에 종지부를 찍고 동구공산권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金日成은 서울올림픽에 맞붙을 놓기 위해 평양세계청년 축전(89년)을 유치했다. 이 준비를 위해 약 50억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는 바람에 경제파탄은 더욱 심해져 1990년부터 지금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 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KAL858편 여객기를 폭파해 1백15명을 죽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김현희(金賢姬)는 「살아있는 증언(證言)」으로 남아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서울올림픽이란 對공산권 비밀통로를 북방정책이란 고속도로로 확장시켜 북한의 우방들과 수교함으로써 金日成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독만은 붕괴 때까지 한국과 국교를 트지 않았는데 이는 호네커와 金日成의 우정에 기인한다. 1988년 호네커는 아내를 金日成에게 보내 남한과 수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金正日은 1989년 4월에 동독을 공식방문하기로 돼 있었으나 급변하는 동독의 내부사정으로 취소되었다.
北 호위총국의 가혹한 훈련에 경악
1991년 12월 안기부(安企部)는 러시아 정부측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망명중인 호네커가 평양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 이를 독일정보기관(BND)에 알려주었다. 독일정부는 즉시 러시아정부에 항의, 출국을 중지시키고 독일로 데려가 재판에 회부했다. 중병(重病)으로 풀려난 호네커는 칠레로 가서 거기서 1994년 초에 사망했다.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 및 서기장실 비밀 文書 중에는 1988년 북한을 방문했던 케슬러 당시 국방장관의 보고서도 있다. 서(徐)박사가 당시 방북단(訪北團)의 수행자를 찾아 물어보았으나
그는 『북한 인민군, 특히 호위총국 부대의 가혹한 훈련과 투지를 보고 경악했다』고 하더란 것이다. 『저 군인들은 젓가락만 있어도 끝까지 싸울 사람들이다』 케슬러 국방장관은 오진우(吳振宇) 인민무력부장의 안내로 金日成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군에서는 장교들이 서독 텔레비젼 방송을 보는 것을 허용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金日成은 못들은 척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케슬러 장관이 재차 물었더니 金日成은 『그건 바보짓이다. 그렇게 하면 무너진다. 북한에선 나부터 남한 방송을 듣지 않고 있다』며 퉁명스럽게 말하더란 것이다.
서병문(徐炳文)박사는 『북한관련 문서들을 검토해 보니 오늘의 金正日이 북한 정권 안에서 퍽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더라』고 했다. 『북한은 그 동안 개방을 안한 것이 아니라 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1984∼92년까지 金正日 책임 하에 이루어진 개방의 시도는 실패라는 결론을, 金日成이 93년에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金正日을 뒤로 물리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수습을 하려다가 급사(急死)했습니다. 북한이 이 지경이 된 책임을 金正日이 진 상태에서 金日成까지 가버렸으니 그의 권력승계는 겉으로는 순조롭지만 내부적으로는 취약하다고 봅니다. 이제 북한은 붕괴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 확실한데 그래도 군사력은 살아있으니 휴전선의 대비는 더 단단히 해야 하겠습니다』
金正日 권력에 큰 구멍
대북(對北)전문가 이동복(李東馥)씨(前 안기부장 특별 보좌관)도 『金正日은 지금 북한군부의 포로가 돼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金正日의 권력에 문제없다」는 통설을 반박했다. 金日成은 죽기 전에 동생 김영주(金英柱)를 재기용하고 처 김성애(金聖愛)를 카터와의 회담에도 데리고 나오는 등 金正日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의 사후(死後)에도 金正日은 당과 국가의 대표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 인민회의를 2년간 소집하지도 않아 국가예산조차 발표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金日成의 신격화를 더욱 심화시켜 무덤에 들어가서도 북한을 계속 통치하도록 떠받들고 있으니 金正日을 어떻게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게 李씨의 분석이다. 동독(東獨) 공산당 정치국 비밀 文書를 통해서 북한의 본질과 金日成의 본심을 들여다 본 徐박사와, 우리나라 제1의 북한 전문가가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徐炳文 박사는 『1992년 부총리 김달현(金達玄)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온건파를 도와줄 수 있었으면, 남한의 경제원조로써만이 북한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세력을 밀어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그 온건파가 퇴장하고 이제는 강경파가 득세했다』고 분석했다.
金日成의 육성고백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모순이 있다. 군축을 원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와 남한 불확인(不認定)정책을 고집한다. 그런 고집과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버려야 군축이 될텐데 金日成은 허구와 위선의 명분을 위하여 북한 경제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북한의 오늘날 지배층이, 『남한을 인정해야 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남한뿐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도록까지 상황이 더 악화되길 기다리면서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길밖에 달리 묘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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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이야 문제가 많지만
팩트중에 참고할만한 것이 좀 보이는 읽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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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호네커 정상회담기록(1)
김일성(金日成)의 충격 고백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서기장실 비밀 문서(文書) 중 金日成·호네커 정상(頂上)회담 기록
천기(天氣) 누설에 가까운 본심토로·비화(秘話) 공개… 김일성의 관점에서 본 한국 현대사(現代史)… 그 의외의 육성 증언(證言)
『팀 스피리트 훈련 때마다 우리는 한 달 반이나 경제가 마비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평화협정을 위한 3자(者) 회담을 제의했더니 미국(美國)은 중국을 끼워 4者 회담을 하자면서 빠져나가고… 우리는 남으로 진군(進軍)할 힘도 없다』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金日成은 호네커와의 회담에서 이 훈련기간 동안에 북한경제가 마비될 만큼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반공(反共) 민간정부가 군사정권보다 유리… 노동자·농민이 일어날 수 있으니』
●『박정희(朴正熙)를 고립시키려고 남북회담(7·4) 시작』
●『문화대혁명 때 중국군이 두만강 넘어 침입… 확성기로 5년간 비방…울며 겨자 먹기로 눈물 흘리면서 참았다』
●『팀 스피리트와 남한 군사력에 대응하느라 노동력이 부족』
●『전두환(全斗煥)은 독종개, 레이건에게 선거자금 제공했다』
● 고르바초프, 金日成의 서울올릭픽 불참 요구를 거절
●『84년에 김정일(金正日)에게 국가경영 맡겼다』
●『남한은 1백만(萬) 대군, 우리는 45萬』
●『아무리 학생들이 데모해도 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한 정권은 변동 없다』
<1995년 11월 월간조선>
金日成-호네커의 세 차례 대화록 입수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동독(東獨) 공산당의 기밀문서(文書)가 서독정부에 넘어갔다. 이 文書 중에는 당(黨) 최고권력 기구인 정치국 문서와 월터 울브리히트, 에리히 호네커, 에곤 크렌츠 같은 역대 黨 서기장 집무실의 문서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 문서와 같은 최고급 기밀문서들이다. 이 문서 중에는 북한에 관한 문서도 수천 페이지나 있었다. 북한은 東獨을 사회주의권(圈)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국가로 생각해 왔다. 東獨의 발달한 군사·과학기술을 배우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북한과 동독 수뇌부는 인간적으로도 무척 친밀해졌다. 金正日이 東獨에서 유학했고 강성산(姜成山) 현(現) 총리·연형묵(延亨默) 전(前) 총리 같은 많은 기술자들도 이 나라에서 공부했다.
특히 金日成은 東獨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친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이기도 했다. 金日成은 몇 달 아래인 호네커를 「동생」이라고 부른 것으로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東獨이 망한 뒤 러시아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호네커를 평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특별기까지 보냈던 것이 金日成이었다. 이 시도는, 그러나 우리 안기부(安企部)와 독일 정보기관의 협조에 의해 좌절되었다. 1977년에는 평양에서, 1984년엔 베를린에서 1986년에는 평양에서 金日成-호네커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 세 차례 정상회담에서 오고간 완전한 대화록은 약 1백30페이지에 이른다. 이 기록을 포함하여 수천 페이지의 1949∼1989년 사이 북한관련 비밀문서는 공식적으로는 공개돼 있지 않다. 1991년 독일 내무성은 자유베를린대학(Free University of Berlin) 동북아시아 정치문제 연구소 수석 연구원 서병문(徐炳文)박사(50)에게 북한관련 文書에 대한 분석작업을 의뢰했다.
1978년 이후 자유베를린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는 徐박사는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다. 徐박사는 지난 9월 서울대학교와 자유베를린대학이 서울에서 공동 주최한 「독일통일의 교훈」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발표회에서 비공개로 「구동독(舊東獨) 비밀문서(文書)를 통해 본 북한」이란 논문을 발표한 적도 있다. 徐박사는 이 논문에서 비밀문서에 나타난 金日成의 남북한 상황 인식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徐교수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왜곡돼 있거나 선전용인 경우가 많은데 이 문서를 통해 金日成-호네커의 솔직한 대화와 재소(在蘇) 및 재남한(在南韓) 동독(東獨) 정보기관의 고급 정보보고를 알 수 있어 북한 수뇌부의 동향과 생각을 정확하게 읽게 된다』고 했다.
5·16 군사정부에 위협 느낀 金日成
북한을 움직여 온 金日成이 친숙한 동지 호네커 앞에서 털어놓은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 중에는 北韓의 공식적인 정책이나 선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경우가 많다. 1972년 7·4공동성명을 낳게 한 남북한 접촉과 1984년의 평화협정체결을 위한(남·북한 및 미국 사이의) 3者회담 제의의 진짜 의도에 대한 金日成의 실토도 있다. 天氣누설에 해당하는 金日成의 이런 육성증언이 믿을 만한 문서에 근거하여 공개되기는 이 기사가 처음이다.
10년에 걸쳐 호네커와 金日成 사이에 10여 시간 동안 이뤄진 대화 중 金日成의 말을 추적하면 북한의 변화과정과 金日成의 전략 및 인식의 변화가 손에 잡히게 된다. 이는 金日成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바라본 한반도 정세이자 한국 현대사이기도 하다. 재북한(在北韓) 동독정보기관원이 동독공산당 정치국으로 올린 정보보고에 따르면 북한은 5·16군사쿠데타 이전에는 남한內에 지하당 조직을 유지하면서 4·19데모에도 개입하는 등 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5·16전후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서병문(徐炳文)박사는 『동독정보원은 「5·16이 미국의 사주 없이 독자적으로 일어났으나 군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해 가는 과정에서 韓·美·日 동맹관계가 강화되었다」는 정확한 분석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5·16을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로 보고 북침을 우려하였다. 金日成은 한 달 뒤 모스코바·북경으로 달려가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다. 5·16군사정부를 상당히 위협적으로 본 金日成은 1960년대에 군사 제1노선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북한의 경제를 망치는 결정적인 정책 선택이었다.
반면 朴正熙정권은 1965년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월남에 파병하여 韓·美·日 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한 바탕에서 경제 제1주의로 나갔다. 朴대통령의 「先경제건설 後군사건설 정책」은 金日成의 「先군사건설 後경제건설」 전략을 파탄으로 몰고간 대전략(grand strategy)으로서 오늘의 남북한 격차를 만들었다. 朴正熙의 전략은 먼저 권투선수의 체력(=경제력)을 튼튼히 키운 뒤 싸움기술을 가르쳐주는 식이었다면 金日成의 전략은 발육이 충분하지 않은 단계에서 과도한 맹훈련(=군사력 증강)만 시키는 바람에 권투선수가 발병한 경우이다.
東獨 공산당 정치국 文書의 북한관련자료를 보면 북한은 1970년대 중반까지는 남한이 북한보다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열세(劣勢)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우리 정보부측의 계산에 따르면 1969년 북한을 앞서고 남한은 1인당 국민소득에서도 북한을 앞서고 있었고 1976년부터는 군사비 지출예산에서도 앞서기 시작한다).
남한은 백만 군대 갖고 있다
1972년 美國의 닉슨 대통령이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데탕트 시대를 열게 된다. 金日成은 이것을 미국의 약화로 보았고 이 자신감을 기초로 해서 남북한 접촉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7년 12월 9일 오전 10시부터 평양에서 열렸던 金日成-호네커 정상회담에서 金日成은 7·4공동성명 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북한은 충실한 국가입니다. 때문에 남한의 많은 지식인들이 부유한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우리나라로 왔습니다. 대학과 전문학교에 있는 나이 많은 교수들과 박사들이 남한에서 우리나라로 왔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자연과학자, 중요한 화학자 다른 전문가들 등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남한이나 일본에서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조국을 건설하고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美 제국주의자들이 남한을 30년이상 지배하고 있지만 오늘날 남한의 학생들은 우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학생들은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우리는 반대하는 시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반대로 남한의 학생들은 괴뢰정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美 제국주의자들과 남한 하수인들의 준동을 억누르고 남한 민중들에게 사회주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 북한이 전체조선을 대표하는 자주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길은 어렵습니다.
조선은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해보지 못한 후진 식민국가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 국가는 발전된 나라로서 혁명을 수행했고 우리나라는 봉건 후진 식민국가로서 혁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가 해방되기 앞서 경제를 완전히 파괴시켰고 우리가 재건을 시작하고 있을 때 美 제국주의자들이 다시 경제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렸습니다. 농업도 마을도 모두 파괴했습니다. 평양에 남아있던 것이라고는 단지 집 세 채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념물로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잿더미 위에서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無에서 시작했던 것입니다. 물론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동독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도움은 대단히 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움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건설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웠습니다. 우리나라는 분단되어 아직도 통일이 안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부담은 상당히 큽니다. 남한 괴뢰 도당들은 백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76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군사력은 백만입니다.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한 번의 3개년 계획과 6개년 계획, 그리고 7개년 계획을 수행했고 지금은 제2차 7개년 계획을 수행하려고 합니다. 우리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아직 유럽만큼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경제를 창출할 것이고 우리 힘으로 설 것입니다. 우리 당은 5차 당대회의 결정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5차 당대회는 혁명 과제를 내놓았습니다. ①사상(이데올로기) 혁명 ②기술혁명 ③문화혁명. 사상혁명은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세계혁명의 적인 美 제국주의와 직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美 제국주의자들이 사상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사상적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그 때문에 全인민을 확고히 결속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적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조건하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을 한번도 수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는 상당히 깁니다. 그 때문에 사상혁명은 중요합니다》
군사독재정권보다 반공(反共) 민간정부가 대남(對南)전략에 더 유리
다음 대화에서 金日成은 남한의 공산화가 日本의 공산화에도 유리한 고지(高地)를 선점(先占)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조선의 통일은 사회주의 진영에도 이익이 되고 일본 내에서도 혁명을 자극하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정책은 조선의 분할에 있습니다. 두 개의 조선을 존속시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으며 우리와 평화협상도 안하고 그들의 군대를 남한에서 철수시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남한의 애국자들이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내를 갖고 이 사업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한에서 朴正熙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고 정당한 민주인사가 정권을 잡는다면 그 사람이 반공주의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째든 그런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면 통일의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박정희를 고립시키고 남한의 민주화 투쟁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인내심을 갖고 투쟁해야 합니다. 남한에서 어쨌든 민주인사가 권력을 잡으면 조선의 평화통일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군사력을 감축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을 공산주의로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의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외국군대는 물러가야 합니다. 남한 민중이 그들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들은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 통일의 문제를 해결할 때 우선 두 개의 한국을 만들려는 것에 반대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함께 투쟁해야 합니다.
남한의 애국세력이 민주화 투쟁을 더 많이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朴正熙 괴뢰정부를 완전히 고립시켜야 합니다. 며칠 전 정부의 억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朴正熙가 무너졌을 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될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민주적인 상황이 이루어진다면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대화에서 金日成은 대남적화(對南赤化)전략의 본질을 공개하고 있다.
①군사독재정권보다 反共 민간정부가 유리하다
②민간정부下에서는 노동자·농민의 활동이 자유로워질 것이다(각종 규제의 완화로, 또는 對南공작에 의해)
③그렇게 되면 남한 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하게 된다. 金日成이 朴正熙, 全斗煥정권을 반대한 것은, 남한 內 민주화 세력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로 남한에서 그들 조직의 활동이 위축돼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7·4 공동성명의 배경
《이제 나는 북쪽과 남쪽 사이의 회담에 대해, 그리고 남북 공동성명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됐냐 몇 마디 할까 합니다. 1972년 북쪽과 남쪽의 적십자회담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적십자사 회담보다 정치회담을 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朴正熙는 제네바에서 만나자고 대답해왔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왜 제네바에서 만나야 합니까, 평양이나 서울은 안됩니까. 우리는 말했습니다. 제발 평양으로 오라고. 그리고 그들은 왔고 우리는 만났습니다. 박정희의 대변인이 왔습니다. 물론 그는 美 CIA의 남한지부 간첩이었습니다.
나는 그(편집자주(注)-이후락(李厚洛)정보부장 지칭)에게 말했습니다. 왜 당신들은 한반도 통일의 문제를 외국의 의지해 풀려고 하느냐고. 조선 민족은 오랜 역사를 지녔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외부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미국이나 일본에 기대에 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미국과 일본측에서의 개입을 없애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독자적으로 풀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남침할 것이라고 항상 주장합니다. 우리는 남침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통일 문제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제3의 과제는 민족대단결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어 왔고 우리는 마르크스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원합니다. 자본주의 국가 內에 공산당이 있는 예는 많습니다. 우리는 미군이 남한에 없다면 훌륭히 한 민족으로서 단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우리는 남한에 사회주의를 강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한도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단결을 원합니다. 그들은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기본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박성철(朴成哲) 동지가 서울로 갔습니다. 두명의 박씨가 만났습니다(편집자注-朴正熙와 朴成哲의 비밀회담을 의미). 우리는 이 세 가지 원칙을 다시 한 번 천명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명서를 작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발표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서명하라는 지시를 미국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도 서명했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은 유엔군은 결코 외세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공법을 폐지해야 합니다. 그들은 문제가 없다고 하며 폐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반공법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그것을 없앨 것인지 아닌지?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현재 대화는 중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두 개의 조선을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기 때문입니다.
朴正熙와 협상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박정희와 함께 협상을 진행한다면 박정희에 반대하는 남한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미국은 항상 박정희와 우리를 함께 앉히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와는 협상을 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았고 남한의 많은 애국자들을 감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박정희는 계속 미군이 남아 있기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나라의 통일은 없고 분단의 고착과 두 개의 조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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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호네커 정상회담기록(2)
남북한 모두 상대방의 침략을 우려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로서 南北 적십자회담에 관여하던 중 북한측과 대화채널을 열고 1972년 3월에 평양으로 잠입, 김영주(金英柱)(북한노동당조직부장)를 만났던 정홍진(鄭洪鎭)씨는 『金日成이 얘기하듯이 우리가 먼저 제네바를 회담장소를 제의한 것이 아니고 제3국에서 만나자는 정도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남북접촉을 갖기로 한 것은 전쟁을 막자는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1968년에 1·21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 美 정보함 푸에블로호(號) 납치, 울진 삼척 공비침투, 69년엔 美정찰기 EC-121격추, 70년대엔 朴대통령의 암살을 노린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朴대통령은 북한이 전쟁준비를 끝내고 남침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美國 닉슨 대통령은 주한(駐韓) 7사단을 철수했고 정치전쟁, 즉 게릴라전(戰)엔 개입하지 않겠다는 괌 독트린을 발표하여 朴정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1970년 8월15일 朴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 「평화적인 체제 경쟁」을 제안하는 「8·15선언」을 발표한다. 경제개발에 자신감을 갖게 된 朴대통령은 전쟁만 막을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북한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8·15선언에 기초하여 1971년 8월12일에 대한적십자사가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이것은 7·4 성명으로 발전한다.
金日成은 남북이 藍피?자주·민족대단결 원칙을 이용하여 주한(駐韓)미군의 철수와 공산당의 합법화를 뜻하는 반공법 철폐를 요구했다. 朴대통령은 전쟁재발의 방지를, 金日成은 對南적화를 위한 장애물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여 시작했던 남북회담은 1973년 6·23선언 이후에 중단된다. 6·23선弔?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엔에 남북한이 동시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는 평화적인 체제경쟁을 보장할 수 있는 평화구조의 한반도內 정착을 지향한 것이다. 金日成은 이를 「두 개의 조선 책동」이라 하여 반대했다.
정홍진(鄭洪鎭)씨에 따르면 몇 차례의 남북한 대표단 왕래로 해서 북한측은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가 손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 기자들과 대표단은 평양에 가서 절망했으나 북한측은 서울의 발전상에 놀랐기 때문이다. 이 회담을 통해서 金日成이 얻은 것은 남한이 북침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라고 鄭洪鎭씨는 말했다. 金日成이 1974년부터 「사회주의 대건설」이란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 고층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안도의 표현이었다.
북한은 또 서방 선진국의 자본도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73년엔 서방차관도입액이 3억7천5백만 달러로 소련차관(1억9백만 달러)의 세 배를 넘었다. 1960년대에 군사 제1노선을 추구했던 金日成은 70년대엔 경제건설에 중점을 두게 되는데, 때가 늦었다.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커지더니 75년부터 외채상환이 늦어지고 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도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 金正日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서 사상통제를 강화함으로써 경제건설의 절대조건인 사회의 자율성과 창발성이 약화되었다. 반면 朴正熙정부는 몸집이 커지는 경제를 바탕으로 1974년부터 전력증강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남북한 군비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중국은 우리에게 확성기 전쟁을 걸어 왔다』
1977년 호네커와의 정상회담록에서 金日成은 70년대 상반기에 중국으로부터 당했던 고통을 심각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과 관련하여 우리는 소련과 중국의 현재 관계 때문에 특별히 어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련 동지들이나 중국 동지들이나 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함께 한 전우(戰友)들입니다. 우리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일본에 대해서만 함께 투쟁한 것이 아닙니다. 1945년 이후 중국혁명전쟁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함께 싸웠습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예부대와 포병을 중국에 보냈습니다. 조선대혁명군은 중국군대와 함께 중국의 끝인 하이난(海南)까지 갔습니다. 그렇기에 중국동지들은 조선인들도 피를 흘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밀접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에 반대하여 투쟁할 때 그들은 의용군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 1천5백㎞에 이르는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매우 밀접합니다.
우리가 밀접히 협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하는 모든 것을 다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중국이 하는 것처럼 단 한 분야에서만 기술건설을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이 인민공사를 건설했을 때 우리는 정상적인 동지관계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인민들의 내부모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대했습니다. 특히 소위 문화혁명을 수행할 때는 관계가 아주 나빴습니다. 그들은 1천5백㎞의 국경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조선의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중국과의 국경지역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매일 확성기로 말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큰 나라이기 때문에 커다란 확성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민들에게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38선에서는 미군이 확성기로 우리를 반대하는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북쪽에선 중국이, 남측에선 미국이 양쪽으로 그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확성기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했습니까?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등뒤에 적을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북쪽과 남쪽에 동시에 우리의 군대를 집중시킬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국 속담에 있는 것처럼 울며 매운 겨자를 먹었습니다. 겨자는 매우 매워서 우리 눈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매운 것을 먹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삼켰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갈 때쯤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고 결국 개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중국이 소련을 제국주의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내?1975년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공동성명에 「헤게모니」(패권)와 같은 단어를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내가 반대했기 때문에 그것은 빠졌습니다. 그들은 많은 점에서 우리를 이해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적들과 싸워야 할 때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윱求?
다른 면에서 우리는 중국에 반대하는 소련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레닌을, 10월혁명을 수행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소련은 항상 경제적 정치적으로, 그리고 한국전쟁기간에도 우리를 지원해주었습니다. 소련은 의용군을 보내주지는 않았지만 고문단을 보내주었습니다. 전후(戰後) 건설시기에 그들은 우리를 지원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우리의 발전소와 제철소 건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련과 좋은 무역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등소평(鄧小平)의 집권후 중국-북한 관계는 개선되었다. 1982년 4월 金日成의 70회 생일에 鄧은 호요방(胡耀邦)을 데리고 와 金日成에게 그가 중국공산당의 다음 번 총서기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胡耀邦은 金日成에게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金日成은 이를 직접 소련 서기장 체르넨코에게 중계했다.
1984년 5월30일 베를린
金日成, 「앞으로 金正日이 지도할 것」
1984년 5월 金日成은 모스크바에서 체르넨코 소련공사당 서기장과 회담한 뒤 베를린으로 와서 호네커와 다시 만난다. 1984년 5월29일자로 된 동독공산당의 한 기밀문서는 다음날로 예정된 金日成-호네커 정상회담에 대비하여 金日成의 방소(訪蘇) 활동을 요약하여 서기장실에 보고한 것으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 주요부분을 요약한다.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KDVR)의 당 및 국가대표단 소련방문에 대하여.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당과 국가대표단의 방문은 양국의 관계 및 소련 공산당과 조선 노동당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키고자 이루어진 것이다. 23년 전 김일성이 소련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나서 소련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하 북한) 사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쌓여 왔다. 이런 문제는 가슴을 열고 동지적 믿음으로 상세히 거론할 필요가 있었다. 협상의 중요한 결과는 소련 언론에 상세히 언급되었다. 우리는 추가적으로 아래의 것들을 보고하고자 한다.
1. 현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소련과 북한대표단 간의) 의견교환은 우리와 북한 동지들이 대부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국제적 상황에 대한 평가와 이 상황이 첨예해진 원인에 대한 관점의 일치를 말한다. 체르넨코는 조선노동당과 북한 지도층이 유럽 안보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참여국들의 많은 노력을 지지하는 것은 높이 평가했다. 다음과 같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김일성은 소련의 사회주의건설 경험들을 보다 활발히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동지들은 일본의 무장화 과정과 미국 일본 남한으로 구성된 블록을 형성하려는 계획이 가져올 위험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아주 근접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김일성은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자신은 좋은 관계라 생각한다며 더 이상 말을 안하였다.
우리는 북한 동지들에게 소련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우리 나라는 조건도 달지 않고 그들의 정상화와 관계개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잇다. 우리는 중국 지도부와 미국 일본의 정치가들 사이에 접촉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에도 관심을 갖도록 했다. 중국 지도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은 결코 재무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김일성은 중국지도부를 변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중국은 10억의 국민을 지닌 가난한 국가이고 중국 지도부가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대한 도움을 얻기 위하여 계산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김일성이 시아누크가 이끄는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시아누크가 남한과 캄보디아의 관계를 끊고 북한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2. 김일성은 한반도 입장을 설명하면서 특히 북한이 남한을 결코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한반도에 대한 3者협상(북한 미국 남한)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는데 워싱턴이 이 협상에 북경이 참여하도록 설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은 이러한 변화를 반대하고 있다. 소련측은 긴장의 완화와 남한에서 미군의 철수 또 외부의 간섭 없이 현재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찬성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최근 한국의 문제는 항상 워싱턴과 도쿄와 북경의 정치적 게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다. 미국은 이 문제에 대해 중국지도부를 몰아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문제를 한국인들의 등 뒤에서 결정하게 되는 위험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이 한訃?문제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평양이 약간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3. 공식적인 협상 외의 대화에서 김일성은 북한 최고지도부의 변화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번 방문이 그의 마지막 해외방문이라며 앞으로는 계속해서 그의 지시를 받아 이들 金正日과 수상 강산성(姜成山)이 다른 나라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일성은 최근 당과 국가의 핵심에 김정일의 지도하에 일하는 상대적으로 젊은 간부들이 투입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4. 무역, 경제, 과학·기술, 안보의 영역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데 대한 문제가 다루어졌다. 북한 동지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소련의 경제원조를 더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측은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이익과 그들의 현실적인 가능성을 고려해서 이러한 제안들을 검토해보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하였다》
동독(東獨)측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동독정부는 金日成이 소련과 교섭하는 데 있어서 자문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金日成이 소련측에 대해 金正日이 젊은 또래 간부들을 기용하여 당과 국가를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은, 이 무렵부터 金正日이 국내문제를 총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팀 스피리트 때문에 우리 경제가 멍든다』
1984년 5월 30일 오전 9시30분부터 베를린에서 진행되었던 金日成-호네커 정상(頂上)회담에서 金日成은 韓·美군의 팀 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이 북한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김일성)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동지들과 원자력발전소 건설문제를 확실히 해두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 1조 Kwh의 전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때 농업발전에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산업 문제를 해결한다면 다른 모든 것이 문제가 없게 될 것입니다. 경제건설 분야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노동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40만에서 45만의 군인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남한이 70만 군인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4만3천의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국방력을 감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노동력 문제를 기계화와 자동화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노동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는 여러분들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계와 산업분야 전체를 자동화할 때 노동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노동력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다면 많은 광산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다른 산업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아마도 잉여노동력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지금 귀국(貴國)과의 무역과 원조를 통해 자동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한 우리 젊은 간부들의 교육을 귀국에서 시키고 싶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런 문제들은 발전도상에 나타날 수 있는 어려움들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남한의 실상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남한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합니다. 매년 미국은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레이건 시대 전부터 이런 군사훈련을 실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것은 더욱 증가했습니다. 작년에 그들은 이 군사훈련에 미군 외에도 남한군 10만을 동원했습니다. 우리는 미군이 10만의 남한 병력을 동원한 것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상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올해에 미군은 이 군사훈련을 위해 20만 병력을 소집했습니다.
이 군사훈련은 「팀 스피리트 83」 「팀 스피리트 84」였습니다. 오키나와와 하와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美 본토에서도 많은 미군이 왔습니다. 그것은 대규모로 계획된 군사훈련이었습니다. 올해 우리는 작년과는 달리 비상소집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은 이 군사훈련으로 우리와 남한주민들을 위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휴전선에는 매일 긴장감이 감돕니다. 적들이 그런 군사훈련을 실시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대응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산업생산에 커다란 타격이 됩니다. 우리 병력 수가 남한보다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때 많은 노동자들을 군대로 소집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소집되면 1년에 한달 반정도 노동력에 차질이 생깁니다. 이는 대단히 큰 손실입니다.
『할 수 없이 3者회담 제의』
우리는 이러한 현 긴장상태를 없애기 위하여 올해에 우리와 미국 남한간의 3者대화를 제의했습니다. 이 대화의 목적은 우선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통해 군비 동결협정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한에 불가침협정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으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양측의 군대를 감축하고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적들은 우리가 남한을 침공할 것이라고 하며 이를 여러 핑계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한에 미군이 계속 있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美 국회서는 세계인민들을 속이기 위해 우리 군사력이 남한보다 강하다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적들보다 더 강한 군사력을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인민은 1천7백만이고 남한은 3천만이나 됩니다. 이런 주민 수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군사적으로 더 강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무기의 잠재력을 생각해보면 적들은 미국의 모든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핵무기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가 군사적으로 매우 강하다는 핑계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을 공격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남한을 계속 점령하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이자 군사거점일 뿐입니다. 미국은 한 번도 남한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카터가 대통령 재직 시 남한에서 군대를 부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레이건 때는 주한 미군 병력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3자회담에 반대한다고 공식적으로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북한 양측이 대화와 협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당국자들은 그 점에 대해 권한이 없습니다. 예전에 그들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와 미군은 서명을 했습니다.
그 때문에 서명을 한 사람들만 회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대했던 사람은 빠져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남북한이 이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평화협정을 통한 군비동결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불가침선언을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한 군대의 최고명령권자는 사실 미국입니다. 미국과 남한 군사력은 서로 통합돼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남한 대통령과 이 회담을 진행시킨다면 평화협정을 통한 군비동결협정을 맺을 수 없으며 군인을 10만 내지 20만으로 줄이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적들은 두 개의 조선을 원하고 있으며 두 나라의 평화통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미국사람들은 중국을 참여시키는 4자회담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4자회담에 참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중국은 조선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레이건이 중국에 갔을 때 4자협상을 제안했으나 중국은 반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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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타개 위해 3者회담 제의
1977년 호네커와 회담했을 때와는 반대로 84년의 金日成은 「죽는소리」를 하고 있다. 남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여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자니 노동력이 부족하고, 특히 팀 스피리트 훈련에 대응하려고 예비병력을 소집하니 산업생산에 매년 한달 반씩이나 큰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는 하소연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경제적 피해를 해결하려고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3者회담을 미국에 제안했는데 미국은 중국을 끼워 넣는 4者회담을 역(逆)제의하여 빠져 나가버리니 남한과의 군비경쟁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호소이다.
완전히 수세(守勢)에 몰린 金日成은 그런 가운데서도 남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남한의 종주국」 미국과의 직접 협상만을 고집하고 있다.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이며 남한 지배층은 미국의 괴뢰라는 환상에 집착하는 바람에 金日成은 미국과 한국을 군축협상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고, 북한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1976년 남한 우세로 역전되기 시작한(年군사비지출 기준) 남북한의 군비경쟁은 1980년代에 남한의 압도적 우세가 점차 가속화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90년엔 남한의 군사예산이 북한의 두 배, 지금은 네 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재래식 군사력에서 뒤지기 시작한 북한이 핵(核)개발에 더욱 매달리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평화협ㅐ?통해서 군비경쟁을 동결시키려는 목적의 3者협상제의가 팀 스피리트 훈련으로 인한 ?뮌?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金日成의 고백은 역사적 증언(證言)이다.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는 데는 군사적 압력과 같은 강경한 대응이 유효하다는 것을 새삼 입증해 준다. 남북한 대화의 역사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북한의 입장이 약화되었을 때 그들은 대화로 나왔던 것이다.
서병문(徐炳文)박사는 『중국은 내심으로는 소련의 위협을 견제해 주는 주한미군(駐韓美軍)의 계속 주둔은 바라고 있었으므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노리는 金日成의 3자회담 제의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의 북한관련 문서를 읽어본 느낌으로서 徐교수는 『북한·중국·소련의 협조관계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韓·美日의 협력관계가 北·中·蘇의 그것보다도 더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전두환(全斗煥)은 독종개』
이어지는 대화에서 金日成은 全斗煥대통령을 「독종개」라고 부르면서 악담을 쏟아놓고 있다.
《조선의 상황은 남한 민중의 투쟁이 강화되고 있는 경향입니다. 예전에 남한 민중들은 미국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기대려고 했습니다. 이 두 경향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예전에 남한 민중들은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자주권을 위해 싸우지 않았으나 이제는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주권을 요구하는 것은 미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남한의 젊은이와 학생들은 자주권을 위해 힘차게 투쟁합니다.
全斗煥 도당은 박정희 도당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들은 더 사악할 뿐 아니라 맹렬하기도 한 독종개입니다. 남한 내 미국의 지배권을 지휘하는 대장(편집자 주注-주한미군 사령관을 지칭하는 뜻)은 베트남 전쟁 당시 全斗煥과 함께 베트남을 반대해 싸웠습니다. 全斗煥은 레이건 대통령후보시절 많은 선거 자금을 헌납했습니다. 레이건이 대통령이 됐을 때 그는 남한 내에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두환을 맨 먼저 초대했습니다.
전두환은 권력을 쥐고 난 후 남한내 민주주의 정당들을 우리의 지지자라는 핑계로 해체했습니다. 민주정당들의 몇몇 지도급 인사들은 체포되었고 몇몇은 추방됐습니다. 모든 민중들과 많은 가톨릭 인사들은 全斗煥 정권에 반대하여 힘찬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全斗煥 대신 다른 사람을 앉히려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다는 소문도 떠돌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국이 계속 남한을 점령하고 있는 한 통일을 이룰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새로운 평화제안을 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한 민중의 투쟁을 고무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서병문(徐炳文)박사에 따르면 金日成은 그러나 『남한 內 학생 운동세력은 본질적으로 反독재적이지 친공적(親共的)이지 않으며 남한 내에서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견해는 보였다고 한다. 金日成의 한 측근은 또 『주한미군이 남한에서 물러나더라도 남한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다. 金日成이 全斗煥대통령을 두려워한 것은 朴대통령 시절과는 달리 全斗煥정부가 「호전적인」 레이건 대통령과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全斗煥정부가 국력을 총동원하여 추진하고 있었던 서울올림픽이 북한체제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군이 두만강을 건너 왔다』
1984년 호네커와의 대화에서 金日成은 또 중국 문제를 들고 나와 길게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의 근대화작업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로 향해 문호를 개방, 시장경제화 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金日成은 『중국이 미국, 일본, 인도와 평화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마당에 소련에 대해서 적대정책을 쓸 리가 없다』면서 호네커에게 『소련이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관계개선을 하도록 권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金日成은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보다는 소련의 도움으로 공장을 짓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최근에 호요방(胡耀邦) 총서기에게 『북한도 소련의 원조로 원자력 발전소를 지으려고 한다』고 했더니 胡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국가로부터의 도입보다 낫다』고 기뻐하더란 이야기를 전했다.
金正日은 또 등소평(鄧小平)이 막후에서 중국을 지도하고 있으므로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관한 결정권도 국가 쥐고 있다고 귀뜸 해 준다. 金日成은 여기서도 또 1969년 중국-북한 접경지대에서 일어났던 불상사를 공개했다.
《그때 내가 휴양 중에 있었는데 인민무력부장이 긴급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그때가 우수리江(편집자 注-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 사이를 흐르는 아무르江의 지류로서 中·蘇국경隙岾?있는 곳)에서 중국과 소련군이 충동했을 무렵입니다. 글쎄 중국군이 두만강을 풍?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군대를 보내면서 명령했어요. 『쏘지는 말라 . 생포하라』고. 결국 중국군은 돌아갔습니다만 그 5년 동안 우리는 꾹 참아야 했습니다》
북한, 본질문제 외면으로 개혁에 실패
1984년 전후하여 金日成은 북한체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여 몸부림을 쳐보기도 했다. 이 무렵 金正日이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씨와 나눈 솔직한 대화는 지난 10월호 月刊朝鮮에 육성테이프와 함께 소개돼 있다. 이 테이프에서 金正日은 물질적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의 비(非)생산성과 非능률성을 개탄하면서도 개혁의 어려움을 실토하고 있다.
1983년 10월 19일 대화에서 金正日은 『최근에 중국에 가서 호요방을 만났는데 조금 개방해 놓으니까 기술부터 배우는 게 아니라 수염·머리 기르는 것부터 배우는 바람에 골치를 앓고 있더라』고 설명한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金正日을 개방의 현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북한도 개방의 길에 나서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金正日은 그러나 중국에서 개방의 부작용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 같다. 1985년엔 과학원 지질학 실장 박철 연구사의 제안으로 「농장 포전(圃田)개인책임관리제」를 전국적으로 시험했다.
집단농장의 일부 농토를 개인농화하여 생산성을 높여보려는 이 시도에는 강성산(姜成山)총리도 호응했으나 金日成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중국에서 보듯이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은 집단농장의 개인농화에 의한 식량증산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북한은 이 본질적 문제를 외면했다. 개인농화(個人農化)는 金日成의 주체농법(農法)에 어긋나는 반동(反動)으로 낙인돼 버렸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거쳐 최근에 귀순한 농업과학원 과학자 이민복씨에 따르면 북한농업의 기본 문제는 농토의 부족이나 종자(種子)의 불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업의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정보당 8∼12t의 수확이 가능한 벼도 집단농장에서 기르면 정보당 3∼5t밖에 거둘 수 없는 것은 네 것 내 것이 없는 집단농장의 관료주의와 나태함 때문이란 것이다. 1984년 金日成은 金正日에게 개혁의 칼을 쥐어주었으나 그 칼로써는 주체사상과 사회주의라는 제도를 건드리지 못하게 돼 있었다. 문제의 근본을 그대로 방치한 개혁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1984년에 합영법(合營法)을 제정하여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 한 시도도 70년代에 서방에 진 빚 때문에 서방자본의 유치엔 실패하고 조총련계 중소기업을 유치하는 데 그쳤고 이들 합작기업도 그 뒤 거의가 철수해버렸다. 「제도의 개혁」없는 북한의 개방은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1986년 10월 19일 평양
호네커, 군축노력 설명
1986년 10월 19일, 북한을 방문한 에릭 호네커 서기장은 평양에서 金日成과 마주 앉았다. 호네커는 『어제 평양시민들이 마련해준 환영식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감격이었다』고 인사했다. 金日成은 『1984년에 동독을 방문했을 때 베를린 시민들이 우중(雨中)에도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호네커는 이날 동구공산권이 직면한 최대 문제인 군비축소에 대하여 길게 언급하였다.
《우리는 매우 근심스런 눈으로 국제적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과 서독 같은 제국주의국가들이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나토군은 우리 국경의 서쪽에 강력한 군대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서독과 영국, 이탈리아 등 서유럽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 놓고 강력한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핵무기를 구상 중입니다. 우리는 핵무기로부터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다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네바회담을 환영합니다. 그곳에서 미국과 소련의 공동성명이 있었습니다.
이 회담에서 핵무기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핵전쟁을 해서는 안되고 그런 전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올바른 주제가 표명되었습니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세 가지 분야별 작업그룹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전략무기를 다루고, 또 중거리 무기, 그리고 세계에서 군사력을 확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조직된 그룹입니다. 이 그룹들의 작업은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정치위원회 부다페스트 회의에서 더 확대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고자 계획했습니다. 우리는 나토에서 특히 미국이 핵무기를 없앤 후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재래식 무기분야에서 유리해질 것이라고 항상 주장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우리의 제안은 대서양에서 우랄에 이르기까지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그 제안은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상황 위에서 고르바초프 동지는 우리와 의논한 후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새로운 회담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 가지 복합문제입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레이건이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전략공격무기를 50% 감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미소 양국이 동시에 중거리 미사일을 완전히 없애자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소련은 오랫동안 실행해온 바대로 핵실험을 그만둘 수도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서기 2천년까지 핵무기의 완전한 철폐를 보장하기 위해 적절한 곳에 통제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했습니다. 레이캬비크에서 레이건은 미국의 「별들의 전쟁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 모든 것이 좌초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회담의 성과는 없었을지라도 세계의 평화와 무장해제를 위한 운동을 고무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의 군비경쟁에 굴복한 고르바초프
1988년 소련을 맹주로 하는 세계공산주의권(圈)의 상황은 金日成이 동독을 방문했던 1984년보다도 악화돼 있었다. 군비경쟁을 앞세운 레이건의 대소(對蘇) 압박정책은 결정적인 목조르기로 치닫고 있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이 된 후 두 가지 중요한 對蘇공세를 취했다. 서(西)유럽에 중거리 미사일 퍼싱(Pershing)을 배치하고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의 추진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SDI는 핵탄두를 탑재한 소련의 미사일을 공중에서 완벽하게 요격하기 위한 새로운 방어망의 건설을 의미했다. 이것이 성사된다면 소련의 대륙간 미사일은 고철이 될 판이었다. 소련은 이 두 가지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생산력(生産力)을 상실하고 있었다. 남은 방법은 군축밖에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파격적인 군축제안을 하면서 미국의 SDI계획의 10년간 동결을 전략미사일 폐기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레이건은 이 제안을 매정하게 거절함으로써 고르바초프의 굴욕적인 군축제안도 거부해버렸다. 그 2년 뒤 소련은 일방적으로 50만병력과 1만대의 탱크 감축을 발표해야 할만큼 경제적으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러니 군축협상에 내놓을 카드도 없어져 버렸다. 소련의 붕괴를 마무리지은 레이건의 대소(對蘇)압박은 압도적인 경제·과학·기술력을 근거로 한 군비증강정책에 의해서 가능했다. 한반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남한은 핵(核)무장 포기선언을 하고 북한은 核카드를 쓰는 바람에 아직도 게임의 마무리가 안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金日成 : 『인민들의 의식주 해결이 당면과제』
이날 金日成은 자신의 허리병이 호전되었다면서 장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북한의 당면문제가 의식주(衣食住)의 해결이라고 말하고 있다.
《(잠시 휴식 후에) 김일성 동지는 높은 의자를 가리키며 그 의자는 특별히 그의 척추통 때문에 준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상태는 약간 좋아졌다고 한다. 그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어했다. 그는 10월말 비행기를 타고 소련을 방문했다.
에리히 호네커 동지 : 1984년은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나라에 머문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김일성 동지 : 나 또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동독의 제11차 당대회 결정을 성취하기 위해 열광적인 노력이 있었고 특히 기술혁명 분야에서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성공은 全 사회주의 지지자들의 성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의 성공으로 생각하고 그 때문에 특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의 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SDI계획을 살펴보면 거대한 독점자본이 고도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강요되는 것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제국주의가 과학기술에 있어 사회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全세계에 과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계평화와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 공고화를 위해 또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모든 역량을 공고히 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고도로 발전된 사회주의국가인 동독이 과학·기술발전을 계속해서 주동해 나가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몇 가지 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제2차 7개년 계획을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제3차 7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6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10개 전망목표를 달성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당신나라처럼 높은 발전수준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발전국가로서 세 가지 근본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안정화시키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민들을 보살피는 데 어려운 문제는 우리가 매우 척박한 토지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백만㏊의 농경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곡물생산은 1백50만㏊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머지 50만㏊는 농사짓기 힘든 산간 구릉지입니다.
당신은 1백50만㏊에서 1천5백만 인민이 먹을 곡식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농업생산을 집약적으로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쌀의 경우 우리는 ㏊당 평균 7.2t을 생산하고 옥수수는 6t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9백만t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위 ㏊당 생산량을 더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지면적은 매우 적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와 맞닥뜨려 있습니다.
6차 당대회에서 우리는 30만㏊땅을 새로 일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다를 메워 이 땅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땅의 일부(20만㏊)를 농업 생산을 위해 이용할 계획입니다. 나는 우리의 농토가 2백만㏊에 이를 때 먹고사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지개량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또한 당신과 함께 남포 수문건설 현장을 방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시설은 올 6월에 준공되었습니다. 댐 건설을 통해 우리는 바다에서 밀려오는 짠물을 차단할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는 매우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군인들이 전쟁을 할 수 없는 조건하에서 건설에 투입되고 있습니다. 의복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전혀 면화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화학섬유를 생산해야만 합니다. 60년대에 우리는 이미 비닐론섬유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생산량 5만t 규모로 건설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순천에 생산량 10만t 규모의 화학공장을 새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목재를 원료로 만든 5천t의 비스코스 섬유와 아닐린 섬유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서 우리는 1년에 20만t의 인공 섬유를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6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1백50만t의 재료를 생산하겠다는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러한 토대에서 우리나라에서 의복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당신은 주거 문제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는 연간 15만에서 20만 채의 집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매우 많은 주거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인민들은 이미 건설에 있어 훌륭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건설해야만 했습니다. 제3차 7개년 계획으로 우리는 이 세 가지 기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 전 작업의 토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선적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기술적·문화적 혁명이라는 세 가지 위대한 혁명과정을 끝까지 수행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제국주의자들과 직접 대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데올로기문제가 가장 기본적인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 당의 모든 동지들은 중앙 위원회의 둘레에 확고히 서 있으며 인민들은 당의 주위에 확고히 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교육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우리 인민들을 총동원할 수 있습니다.(중략)
우리나라의 45%인 8백만이 넘는 인민들이 항상 여러 가지 교육과정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지출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인민들의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수준을 높일 수가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야만 집단주의 정신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유효합니다. 『전 인민이 배워야 한다. 모든 당 동지들이 배워야 한다. 모든 군인들이 배워야 한다. 모두가 배워야 한다』 세 가지 커다란 혁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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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호네커 정상회담기록(4)
『남한을 점령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
金日成은 이어서 남한 內의 민주화운동이 통일지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면서도 미군이 주둔하는 한 정권의 교체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남한을 점령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투의 말도 했다.
《남한은 완전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 인민들 내에서 반미감정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해 기대하고 놀라워하고 두려워하던 시대가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은 남한의 해방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략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미국자본이 경제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남한은 미국과 일본의 독점으로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계속적으로 시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도 만5천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했습니다. 시위구호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장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을 떠나라』 어제는 이런 구호 속에 일본도 포함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소리 높여 외칩니다. 『미국은 물러가라. 그리고 미국의 정책을 추종하는 군사독재도 물러가라. 우리는 이 땅의 민족해방을 이룰 것이다』 어제의 시위는 남한 국회의원들이 앞장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반공(反共)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을 위한 투쟁이 전면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인 종교단체들맛?아니라 기독교인들까지도 反美 선전에 참가한다는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요구는 민주세력들뿐만 아니라 학생들 지식인들 언론인들 가운데서도 강하게 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한 내부에서 권력관계가 빠르게 변화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미군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은 남한의 상황에 대해 염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미군이 그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몇 년 전에 3자(者) 협상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1985년 양측 의회나 의회 대표들이 대화를 갖고 불가침선언을 명시화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남한측에서 우리가 남한을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계속 주장하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쪽으로 진군(進軍)해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계속 밝혀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6차 당대회에서 우리는 이미 고려연방제를 제안했습니다. 미국사람들에게는 현재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남한에서 군사독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남한에서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한 방패막이를 필요로 합니다. 북쪽과 남쪽이 불가침 협정을 맺게 되면 미국이 남한에 주둔하는 근본토대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제안을 미국이 반대하는 정확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던 남측과의 공식적인 협상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남한당국에 말했습니다. 남한이 북한과 공식적으로 회담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군사부문부터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남한에는 1천 기 이상의 핵무기가 주둔해 있습니다. 그것들 중 두 개만으로도 우리나라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1천개나 필요할까요? 그것은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에는 현재 새로운 무기고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호네커 동지, 나는 소련과 미국의 대화가 성공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레이건은 독점자본의 급사』
金日成은 다음 대화에서 미소(美蘇)간의 군축협상이 순조롭지 못한 데 대하여 아쉬워하고 있다. 두 강대국이 군축에 합의하면 거기에 편승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축도 이뤄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네바회담을 반겼습니다. 우리는 제네바에서의 고르바초프 동지의 관점과 전적으로 생각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레이캬비크에서 보인 고르바초프 동지의 관점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특히 우리는 고르바초프 동지의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을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는 그의 제안을 지지합니다. 고르바초프 동지는 매우 훌륭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레이건은 거대한 미국 독점기업들의 급사역할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은 「별들의 전쟁」을 실행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것은 단지 거대한 미국 독점자본에만 기여할 것입니다. 제국주의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집행하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투쟁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과 모든 평화세력들이 고르바초프 동지의 제안을 지지한다면 이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나는 호네커 동지에게 우리는 미래에도 한반도 비핵평화지대를 위한 투쟁을 끝까지 수행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특히, 중국을 방문하는 것을 환영하며 이러한 결정을 내린 당신에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매우 고귀한 것이고 사회주의를 위해서도 매우 이로운 것입니다. 개개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중국과의 관계를 매우 발전시켜나간다면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다시금 좋아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중국 수상 이선념 동지는 10월 3일부터 6일까지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중국은 당신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선념 동지는 당신을 이미 루마니아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당신에 대해 매우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당신과 좋은 대화를 갖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1984년 유럽에 간 이후 나는 많은 중국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1985년 5월 호요방(胡耀邦) 동지가 우리나라에 비공식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또한 당신에 대해 매우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당신과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중국방문은 사회주의국가들의 단합과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나는 경제적인 골칫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60년대에 비날론 공장을 건설했을 때 우리는 그 공장에 쓰기 위한 자동화장치 모두를 동독으로부터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는 동독의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의 활동력을 보장해주던 시기늄윱求? 그렇기에 나는 오늘 우리가 순천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때 필요한 장비들을 당신이 지원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이런 장비를 얻는다면 공장 건설을 매우 빨리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후략)》
호요방(胡耀邦)의 실토 : 『한국전쟁 때 중국군 38만(萬)사상』
호네커는 金日成을 만난 뒤 곧 바로 북경으로 날아가 호요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회담을 가졌다. 10월22일 회담에서 胡耀邦은 중요한 수치를 두 가지 밝혔다.
《50년대 초 우리는 백만의 군대를 한국에 보냈습니다. 한국전쟁 결과 우리는 38만의 사상자를 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미국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소련으로부터 50억루불어치 무기와 장비를 샀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우리는 10만 이상의 군인과 간부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2백억 달러를 경제와 군사원조로 주었습니다. 전장에서는 1만명 이상의 중국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사회주의권 수뇌회담과 서울올림픽 참가 결의
金日成은 호네커와 회담한 직후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2년 전 金日成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것이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다』고 얘기했었는데 왜 또 갔을까? 그 수수께끼는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 비밀문서(文書) 속에서 풀렸다. 1986년 11월, 즉 金日成의 방소(訪蘇) 한달 뒤 모스크바에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金日成이 자신을 찾아와 소련과 공산권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고르바초프는 金日成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 수뇌회의에서 서울올림픽 참가여부가 논의되었다. 쿠바 수상 카스트로만이 보이콧에 찬성했고 다른 나라들은 참가를 결의했다. 남북한이 공동개최를 하는 방향으로 노력해 보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徐박사는 『86년 11월의 이 1백50만여 페이지짜리 수뇌회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회의가 공산권의 급속한 개혁·개방을 재촉한 분수령이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올림픽이 남북 결전장
『고르바초프는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했음을 솔직히 밝힙니다. 이제는 이데올로기의 껍질을 벗고 국민이 잘 살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자고 말하는 것이 퍽 감동적입니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공산권 국가들이 결정한 데는 국내적인 압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공산국가는 모두 체육 강국인데다가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러 또 다시 보이콧할 경우 국민들의 불만이 커질 것으로 우려했을 것입니다. 북한은 동독에 대해서도 서울올림픽 보이콧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이것만은 호네커가 듣지 않았습니다.
서울올림픽은 남북한 간의 결전이었을 뿐 아니라 동구공산권의 붕괴를 앞당긴 촉매제였습니다』 동독 올림픽 선수단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보고서를 정치국에 제출했다. 徐박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한국의 경기운영과 사회의 발전상에 대해서 매우 놓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한국이 올림픽에 정치나 이념을 개재시키지 않은 데 대해서 특히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것이다. 徐박사는 남한이 압도한 군비경쟁, 팀 스피리트 훈련, 그리고 서울올림픽이 金日成의 북한을 코너로 몬 3大정책이었다고 분석했다.
朴正熙대통령이 10·26직전에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심할 때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한 것이 「국제사회에서의 남북한 대결에 종지부를 찍고 동구공산권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金日成은 서울올림픽에 맞붙을 놓기 위해 평양세계청년 축전(89년)을 유치했다. 이 준비를 위해 약 50억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는 바람에 경제파탄은 더욱 심해져 1990년부터 지금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 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KAL858편 여객기를 폭파해 1백15명을 죽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김현희(金賢姬)는 「살아있는 증언(證言)」으로 남아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는 데 일조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서울올림픽이란 對공산권 비밀통로를 북방정책이란 고속도로로 확장시켜 북한의 우방들과 수교함으로써 金日成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독만은 붕괴 때까지 한국과 국교를 트지 않았는데 이는 호네커와 金日成의 우정에 기인한다. 1988년 호네커는 아내를 金日成에게 보내 남한과 수교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金正日은 1989년 4월에 동독을 공식방문하기로 돼 있었으나 급변하는 동독의 내부사정으로 취소되었다.
北 호위총국의 가혹한 훈련에 경악
1991년 12월 안기부(安企部)는 러시아 정부측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망명중인 호네커가 평양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 이를 독일정보기관(BND)에 알려주었다. 독일정부는 즉시 러시아정부에 항의, 출국을 중지시키고 독일로 데려가 재판에 회부했다. 중병(重病)으로 풀려난 호네커는 칠레로 가서 거기서 1994년 초에 사망했다. 동독(東獨)공산당 정치국 및 서기장실 비밀 文書 중에는 1988년 북한을 방문했던 케슬러 당시 국방장관의 보고서도 있다. 서(徐)박사가 당시 방북단(訪北團)의 수행자를 찾아 물어보았으나
그는 『북한 인민군, 특히 호위총국 부대의 가혹한 훈련과 투지를 보고 경악했다』고 하더란 것이다. 『저 군인들은 젓가락만 있어도 끝까지 싸울 사람들이다』 케슬러 국방장관은 오진우(吳振宇) 인민무력부장의 안내로 金日成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군에서는 장교들이 서독 텔레비젼 방송을 보는 것을 허용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金日成은 못들은 척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케슬러 장관이 재차 물었더니 金日成은 『그건 바보짓이다. 그렇게 하면 무너진다. 북한에선 나부터 남한 방송을 듣지 않고 있다』며 퉁명스럽게 말하더란 것이다.
서병문(徐炳文)박사는 『북한관련 문서들을 검토해 보니 오늘의 金正日이 북한 정권 안에서 퍽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더라』고 했다. 『북한은 그 동안 개방을 안한 것이 아니라 하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1984∼92년까지 金正日 책임 하에 이루어진 개방의 시도는 실패라는 결론을, 金日成이 93년에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金正日을 뒤로 물리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수습을 하려다가 급사(急死)했습니다. 북한이 이 지경이 된 책임을 金正日이 진 상태에서 金日成까지 가버렸으니 그의 권력승계는 겉으로는 순조롭지만 내부적으로는 취약하다고 봅니다. 이제 북한은 붕괴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 확실한데 그래도 군사력은 살아있으니 휴전선의 대비는 더 단단히 해야 하겠습니다』
金正日 권력에 큰 구멍
대북(對北)전문가 이동복(李東馥)씨(前 안기부장 특별 보좌관)도 『金正日은 지금 북한군부의 포로가 돼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金正日의 권력에 문제없다」는 통설을 반박했다. 金日成은 죽기 전에 동생 김영주(金英柱)를 재기용하고 처 김성애(金聖愛)를 카터와의 회담에도 데리고 나오는 등 金正日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의 사후(死後)에도 金正日은 당과 국가의 대표자리에 앉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 인민회의를 2년간 소집하지도 않아 국가예산조차 발표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金日成의 신격화를 더욱 심화시켜 무덤에 들어가서도 북한을 계속 통치하도록 떠받들고 있으니 金正日을 어떻게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는 게 李씨의 분석이다. 동독(東獨) 공산당 정치국 비밀 文書를 통해서 북한의 본질과 金日成의 본심을 들여다 본 徐박사와, 우리나라 제1의 북한 전문가가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徐炳文 박사는 『1992년 부총리 김달현(金達玄)이 남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온건파를 도와줄 수 있었으면, 남한의 경제원조로써만이 북한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세력을 밀어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은 그 온건파가 퇴장하고 이제는 강경파가 득세했다』고 분석했다.
金日成의 육성고백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모순이 있다. 군축을 원하면서도 주한미군의 철수와 남한 불확인(不認定)정책을 고집한다. 그런 고집과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버려야 군축이 될텐데 金日成은 허구와 위선의 명분을 위하여 북한 경제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북한의 오늘날 지배층이, 『남한을 인정해야 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남한뿐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도록까지 상황이 더 악화되길 기다리면서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길밖에 달리 묘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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