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중앙아시아를 다시 보자 - 중앙일보 김석환

by 寶圓 posted Aug 10, 2005

7월 말~8월 초 기자는 유라시아의 떠오르는 핵심 국가들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헤집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신밀월을 과시하고 양국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만든 상하이 협력기구가 중앙아시아 주둔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중앙아시아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옛 소련시절부터 이 지역을 10여 차례 다녀보았지만 이번처럼 한눈에 중국과 터키의 진출이 눈에 띄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알마티와 타슈켄트 등 이 지역의 주요한 시장이나 거리, 국영업체들엔 중국의 물결과 영향력이 이미 현실화하고 있었다. 아스타나 항공의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엔 중국과 카자흐, 중국과 중앙아시아 관계의 긴밀성을 보여주는 특집을 다룬 잡지가 서비스되고 있었다. 하지만 알마티 시내 6곳에 위치한 터키의 거대 할인업체인 '람스토르 매장'에선 터키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과 진출의 의지가 다른 어느 국가보다 분명하게 느껴진다.

한때 브레진스키가 '거대한 체스판'에서 언급했던 한국 자본과 한국인들의 활동상은 그 잠재력과 역사적 연고성에 비해 저하되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은 1990년대 초반 제1위의 투자국이었다. 대우를 필두로 갑을.신동 등이 앞다퉈 투자에 나섰고 고려인으로 불리는 한인들의 사회.정치적 진출에 힘입어 손쉽게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냉전이 완전히 종식된 뒤 이 지역이 역사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한국의 위상은 조금씩 저하됐다.

비단길의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의 시대에도 이 지역은 세계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다 유라시아의 핵심지를 소련이 장악하면서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냉전 종식 후 이들은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알카에다와 미국과 같은 수퍼 파워 간의 이른바 비대칭전쟁(非對稱戰爭)이 발발하고, 에너지 안보에 대한 미국과 중국 등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이들의 중요성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저지하고,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며, 중국의 부상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미국은 중국의 서쪽 국경과 맞댄 이들과의 관계 정립에 힘을 쏟았다. 특히 카스피해 유전이 중동 전체 유전의 매장량에 육박하는 것으로 밝혀지자 미국은 이들 지역 유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러시아.중국.터키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중국도 지속 가능한 성장과 안보를 위해선 미국의 봉쇄망 바깥에 독자적인 내륙 에너지 안보망을 형성하려 이들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관계 교류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 강국인 러시아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군사.경제.인구학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선 거대한 게임들이 이미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밀착,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의 밀월은 유라시아의 안보전략 지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한국의 주요한 시장이 이들 국가의 전략적 접근에 의해 경쟁이 한층 격화될 수 있다.

물론 리트벨라제나 안제파리제와 같은 이 지역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중국은 스스로가 유발시키는 강한 지역적 반감으로 인해 유라시아의 서쪽,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지도국가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브레진스키도 일본 또한 유라시아의 동쪽, 동북아 지역에서 지역적 역학 관계 때문에 "세계적 국가는 될 수 있지만 동북아의 지도국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과 활로는 무엇인가. 결국 통일을 지향하며, 유라시아에 나타나는 지정학 변화에 적극적이면서도 적절히 대응하면서 이들 지역과의 연계고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상하이 협력기구, 아시아 교류 신뢰구축회의(CICA)의 미래는 중국과 러시아가 쥐고 있지만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빠진 상하이 협력기구와 CICA는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이 이러한 흐름에서 소외된다면 한국은 번영과 평화를 위한 날개의 한 축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게 된다. 냉전기에는 날개의 하나만으로도 비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냉전 후 한국이 스스로의 몸값을 올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유라시아의 큰 틀의 판짜기에서 소외될 수도 있다. 한국은 중앙아시아를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