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수능시험일이었습니다.
점수에 의한 서열화가 옳다 그르다를 논쟁하는 수준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할만한 글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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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사람`을 뽑을 것인가? `될 사람`을 뽑을 것인가?
한준상(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대학신입생으로 어떤 학생을 뽑아도 상관없다.”는 신입생 선발 자율론은 기존의 대학생선발론들과는 대학과 인간의 능력을 이해하는 시각이 사뭇 다르다. 어떤 이들은 대학의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한 기준으로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이 우선해야 한다고들 주장하기도 한다. 대학의 학문활동을 위해서는 지적인 능력을 제대로 가춘 학생들이 제격이라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에 제동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기존의 구닥다리 지식을 달달 외우고 있는 학생보다는, 앞으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가려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인간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선발
“대학신입생으로 그 어떤 학생을 뽑아도 상관없다.”는 자율론을 굳이 두 이론중의 그 어느 하나로 연결시켜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쪽이다. 수학능력이 우수한 수험생이 대학신입생으로서 제격이라는 논리는 수학능력의 중요성을 전제로 것이고, 그것보다는 인간의 잠재력을 중요시하는 견해는 학생들을 그 무엇이든 ‘되어 질 가능성의 인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경쟁력 없는 대학교육을 할 것인가?
각기의 의견은 나름대로의 실용적 타당성이 있지만, 그 중에서 수학능력중심의 학생선발은 그것이 갖고 있는 장점만큼 그 약점역시 치명적이다. 그동안 한국대학들의 학생선발 원칙은 전자의 원칙, 수학능력의 완성도에 충실한 것들, 말하자면 대학수학능력이라는 것을 갖춘 학생들만을 우선적으로 골라내는 일에 치중해왔다. 자질구레한 이유들을 건너뛰면서 수학능력소지자 우선론의 치명적 오류를 집약 해본다면 이렇게 된다. 앞으로도 오늘날처럼 경쟁력 없는 한국대학교육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한국대학이 가야될 길이라면, 지금까지 해온 관행대로 신입생을 선발하면 된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배우는 동물, 문제는 대학교수들
“그 어떤 학생을 대학신입생으로 뽑아도 상관없다.” 라는 논리는 오늘날의 고교교육을 되돌아보면 더욱더 자명해진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모든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어떤 학생을 뽑아도 괜찮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고교의 외우기 교육의 국제경쟁력을 생각하면, 그 어떤 학생들이 들어온다고 해도 대학에서 학문하지 못할 학생은 하나도 없을 것이 자명하다. 대학은 어떻게 하면 저들을 학문적 수월성에 적합한 대학생으로 거듭나게 해야 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곳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오히려 대학교수들이 보여주는 무(無)와 박(薄)한 배움능력들 뿐이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은 너무 많이 외우게 하고 있어, 저들은 오히려 대학생활을 하기에 부적절한 현실이 오늘의 대학이다. 어쩌면 저들 학생들에게는 고교에서 쓸데없이 집어넣은 것들을 제거해 버리게 만들어 주는 ‘디 프로그래밍’ 프로그램들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배움력을 점수로 저울질 할 수는 없어
둘째로, 인간에게 있어서 배움은 본능이기에 모든 인간이 정상적인 두뇌작용을 할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난 이상 배울 수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어떤 학생이 대학에 들어와도 배움은 계속된다. 인간은 새로운 배움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생각의 틀을 바꾸며, 그들의 삶을 배워나간다. 그들에게 있어서 배움의 수준차이와 정도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차이로 인간의 배움력을 아무렇게나 마름질 할 수는 없다. 정보 한두 개를 더 알거나 말거나 해서 생긴 실수의 점수 차이로 인간의 배움력을 저울질 하는 것은 인간능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가능성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가르고 저렇게 차별하는 것은 학생선발에 관한 전근대적인 국가권력의 개입과, 그런 틀 속에서 만들어진 대학정원규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학생들의 잠재력을 존중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덜 배움’과 지력의 낮음은 서로 같지 않아
학생들이 고교에서 덜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런 ‘덜 배움’은 학생의 지력이 낮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교가 교사가 그 학생의 배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습방법을 그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학교교육의 부작용 탓일 뿐이다. 호랑이에게 고양이 걸음걸이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오류 같은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로 아인슈타인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학교는 아인슈타인의 배우려는 의욕과 지력을 욕하고 면박하기만 했었기에 아인슈타인은 저 홀로 질문하고 답하며 배워야만 했다. 자유로운 대학에 들어와서야 그는 저 홀로 배움의 위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열린대학과 배움에 치열한 교수들이 그의 위대한 천재성을 일깨워놓았다
속도시험들은 그들의 삶과 무관하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지금과 같은 수학능력시험은 문제출제과정이나 문제들이 그 얼마나 창의적이던 간에 관계없이 끝내는 속도시험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수험생들이 대학에 들어와도 별다른 지장은 없다. 지금의 수학능력시험은 제 아무리 잘 만들어진다고 해도 끝내 제한된 시간 안에 수험생들이 몇 문제에 정답을 하느냐를 점검하는 속도경쟁시험일 뿐이다. 문제풀이과정들이 수험생들에게 창의성이나 논리력, 혹은 그 어떤 수학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고 해도, 결론은 정답 수로 끝나게 된다. 문제풀이 과정이 제아무리 독창적이어도 오답을 내면 점수는 떨어지도록 된다. 사람들이 실제 삶 살이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그렇게 몇 초 안에 정답이나 오답으로 결판을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속도시험들은 그들의 삶과 무관한 것들일 수도 있다. 지금의 고교생들에게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은 저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것들을 먼 훗날을 위해 의미 있는 것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문제풀이의 살생 게임은 이제 그만
문제풀이 스스로가 속도의 경쟁과정들이기에 지금과 같은 지필묵의 수학능력시험은 일종의 게임일 뿐이다. 이 입시게임은 축구나 야구, 혹은 K-1 같은 격투기와는 달리 삶을 잡치기 만들기 충분한 인생잡이 게임이다. 그래서 낙방하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치사적이기 조차하다. 일반적인 게임이야 한번 패하더라도 목숨을 거는 그런 것은 아니기에 나름대로 흥분과 재미도 있게 마련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입시게임은 마치 러시안 룰렛같이 목숨을 걸고 하는 살생의 게임이다. 수학능력시험 점수 때문에 자살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장님행세를 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필자약력: 한준상 교수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원 객원 교수와 연세대 학생처장, 교육연구소 소장 및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울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교육정보분과 위원장, 한국교육개발원 평생 교육센터 운영위원직을 맡고 있다.
*출처: 교육정책포럼(http://mailzine.kedi.re.kr/Column/MailZine/ColumnViw.php?Ac_Num0=5694&Ac_Code=D0010101)
점수에 의한 서열화가 옳다 그르다를 논쟁하는 수준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할만한 글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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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사람`을 뽑을 것인가? `될 사람`을 뽑을 것인가?
한준상(연세대 교육학과 교수)
“대학신입생으로 어떤 학생을 뽑아도 상관없다.”는 신입생 선발 자율론은 기존의 대학생선발론들과는 대학과 인간의 능력을 이해하는 시각이 사뭇 다르다. 어떤 이들은 대학의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한 기준으로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이 우선해야 한다고들 주장하기도 한다. 대학의 학문활동을 위해서는 지적인 능력을 제대로 가춘 학생들이 제격이라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에 제동을 거는 사람들도 있다. 기존의 구닥다리 지식을 달달 외우고 있는 학생보다는, 앞으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학생들을 가려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인간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선발
“대학신입생으로 그 어떤 학생을 뽑아도 상관없다.”는 자율론을 굳이 두 이론중의 그 어느 하나로 연결시켜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쪽이다. 수학능력이 우수한 수험생이 대학신입생으로서 제격이라는 논리는 수학능력의 중요성을 전제로 것이고, 그것보다는 인간의 잠재력을 중요시하는 견해는 학생들을 그 무엇이든 ‘되어 질 가능성의 인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경쟁력 없는 대학교육을 할 것인가?
각기의 의견은 나름대로의 실용적 타당성이 있지만, 그 중에서 수학능력중심의 학생선발은 그것이 갖고 있는 장점만큼 그 약점역시 치명적이다. 그동안 한국대학들의 학생선발 원칙은 전자의 원칙, 수학능력의 완성도에 충실한 것들, 말하자면 대학수학능력이라는 것을 갖춘 학생들만을 우선적으로 골라내는 일에 치중해왔다. 자질구레한 이유들을 건너뛰면서 수학능력소지자 우선론의 치명적 오류를 집약 해본다면 이렇게 된다. 앞으로도 오늘날처럼 경쟁력 없는 한국대학교육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한국대학이 가야될 길이라면, 지금까지 해온 관행대로 신입생을 선발하면 된다고 말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배우는 동물, 문제는 대학교수들
“그 어떤 학생을 대학신입생으로 뽑아도 상관없다.” 라는 논리는 오늘날의 고교교육을 되돌아보면 더욱더 자명해진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모든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 어떤 학생을 뽑아도 괜찮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고교의 외우기 교육의 국제경쟁력을 생각하면, 그 어떤 학생들이 들어온다고 해도 대학에서 학문하지 못할 학생은 하나도 없을 것이 자명하다. 대학은 어떻게 하면 저들을 학문적 수월성에 적합한 대학생으로 거듭나게 해야 할 것인가에 골몰하는 곳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오히려 대학교수들이 보여주는 무(無)와 박(薄)한 배움능력들 뿐이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쓸데없는 것들은 너무 많이 외우게 하고 있어, 저들은 오히려 대학생활을 하기에 부적절한 현실이 오늘의 대학이다. 어쩌면 저들 학생들에게는 고교에서 쓸데없이 집어넣은 것들을 제거해 버리게 만들어 주는 ‘디 프로그래밍’ 프로그램들이 더 필요할 것이다.
인간의 배움력을 점수로 저울질 할 수는 없어
둘째로, 인간에게 있어서 배움은 본능이기에 모든 인간이 정상적인 두뇌작용을 할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난 이상 배울 수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 어떤 학생이 대학에 들어와도 배움은 계속된다. 인간은 새로운 배움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생각의 틀을 바꾸며, 그들의 삶을 배워나간다. 그들에게 있어서 배움의 수준차이와 정도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차이로 인간의 배움력을 아무렇게나 마름질 할 수는 없다. 정보 한두 개를 더 알거나 말거나 해서 생긴 실수의 점수 차이로 인간의 배움력을 저울질 하는 것은 인간능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가능성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가르고 저렇게 차별하는 것은 학생선발에 관한 전근대적인 국가권력의 개입과, 그런 틀 속에서 만들어진 대학정원규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학생들의 잠재력을 존중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덜 배움’과 지력의 낮음은 서로 같지 않아
학생들이 고교에서 덜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런 ‘덜 배움’은 학생의 지력이 낮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교가 교사가 그 학생의 배움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습방법을 그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학교교육의 부작용 탓일 뿐이다. 호랑이에게 고양이 걸음걸이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오류 같은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로 아인슈타인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학교는 아인슈타인의 배우려는 의욕과 지력을 욕하고 면박하기만 했었기에 아인슈타인은 저 홀로 질문하고 답하며 배워야만 했다. 자유로운 대학에 들어와서야 그는 저 홀로 배움의 위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열린대학과 배움에 치열한 교수들이 그의 위대한 천재성을 일깨워놓았다
속도시험들은 그들의 삶과 무관하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지금과 같은 수학능력시험은 문제출제과정이나 문제들이 그 얼마나 창의적이던 간에 관계없이 끝내는 속도시험일 뿐이다. 그래서 어떤 수험생들이 대학에 들어와도 별다른 지장은 없다. 지금의 수학능력시험은 제 아무리 잘 만들어진다고 해도 끝내 제한된 시간 안에 수험생들이 몇 문제에 정답을 하느냐를 점검하는 속도경쟁시험일 뿐이다. 문제풀이과정들이 수험생들에게 창의성이나 논리력, 혹은 그 어떤 수학능력들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고 해도, 결론은 정답 수로 끝나게 된다. 문제풀이 과정이 제아무리 독창적이어도 오답을 내면 점수는 떨어지도록 된다. 사람들이 실제 삶 살이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은 그렇게 몇 초 안에 정답이나 오답으로 결판을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속도시험들은 그들의 삶과 무관한 것들일 수도 있다. 지금의 고교생들에게 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은 저들에게는 별로 의미 없는 것들을 먼 훗날을 위해 의미 있는 것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문제풀이의 살생 게임은 이제 그만
문제풀이 스스로가 속도의 경쟁과정들이기에 지금과 같은 지필묵의 수학능력시험은 일종의 게임일 뿐이다. 이 입시게임은 축구나 야구, 혹은 K-1 같은 격투기와는 달리 삶을 잡치기 만들기 충분한 인생잡이 게임이다. 그래서 낙방하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치사적이기 조차하다. 일반적인 게임이야 한번 패하더라도 목숨을 거는 그런 것은 아니기에 나름대로 흥분과 재미도 있게 마련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입시게임은 마치 러시안 룰렛같이 목숨을 걸고 하는 살생의 게임이다. 수학능력시험 점수 때문에 자살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장님행세를 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필자약력: 한준상 교수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원 객원 교수와 연세대 학생처장, 교육연구소 소장 및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울러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교육정보분과 위원장, 한국교육개발원 평생 교육센터 운영위원직을 맡고 있다.
*출처: 교육정책포럼(http://mailzine.kedi.re.kr/Column/MailZine/ColumnViw.php?Ac_Num0=5694&Ac_Code=D001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