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자금 50조의 정체

by 永樂 posted Jan 26, 2006
시장 어지럽히는 자금 50조 정체?
경제 성장 명목 화폐 과다 공급…6년간 화폐량 96% 증가

  

아이들이 자라서 몸이 커지면 옷도 한 치수 큰 것을 사줘야 한다. 그런데 몸이 크는 것보다 훨씬 풍성한 옷을 사주다 보면 소매가 길어 음식이 묻기도 하고, 바지 밑자락이 길바닥을 쓸고 다니는 모양이 될 수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 규모가 커지는 만큼 화폐 공급도 늘려줘야 삐걱거리지 않고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화폐를 경제성장률보다 훨씬 여유 있게 공급하는 일을 지난 수년간 반복해 왔다. 그 결과 나타나게 된 것이 이른바 단기 부동자금인 것이다.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지고 경기가 침체기에 들어가자 2001년 이래 사실상 저금리 기조가 5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동안 지표금리(국고채 3년물)가 8%대에서 3%대로 내려와 선진국 수준의 저금리에 도달했다. 금리는 유동성이란 바다에 떠 있는 부표와 같다. 금리가 이렇게 낮아졌다는 것은 한국은행이 그만큼 통화를 느슨하게 운영했다는 얘기다. 단기 유동성과 근접한 개념인 협의의 통화(M1, 평잔)는 2000년 1월 171조원에서 6년 뒤인 지난해 11월에는 336조원으로 96%가 늘었다. 이 기간에 누적 경제성장률이 35%였던 점에 비춰보면 경제가 커가는 속도보다 화폐 증가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는 얘기가 된다.

투자할 곳을 기웃거리며 금융권에 대기하고 있는 단기 부동자금의 추이를 볼 때 보통 은행·자산운용사·종금사 등 금융기관 수신에서 만기 6개월 미만의 단기 수신을 관찰하게 된다. 이 금액은 지난해 12월 말 현재 435조원(평잔)으로 전체 수신에서 51.8%를 차지한다. 이 비중은 2003년 12월 48.7%, 2004년 6월 49.2%, 2005년 9월 52.4%로 차츰 높아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51~52%에서 등락하고 있다.

사실 6개월 미만의 단기 수신인 435조원이 전부 투기를 노리는 부동자금은 아니다. 개인이 학자금을 내기 위해 따로 떼어놓거나 기업이 설비투자나 물건값을 결제하기 위해 예비해 놓은 자금처럼 실재 거래를 위해 금융기관에 맡긴 자금이 단기 수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정희식 통화금융팀장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은 되지 않지만 단기 수신의 상당 부분이 실물과 관련된 결제성 자금”이라며 “이를 무시하고 ‘투기를 노리는 부동자금 400조원이 떠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재경부도 전체 단기 수신 가운데 경제를 교란할 수 있는 부동자금은 40조~50조원 정도라는 추정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50조원이라도 적은 돈이 아니며 아파트나 토지, 주식 등 자산의 거품을 만들어 경제를 교란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 투기성 자금이 몰릴 경우 강남에 10억원짜리 아파트를 전세(비율 40% 추정) 끼고 8만3000채를 사 놓을 수 있는 금액이다. 분당이나 일산 같은 신도시의 경우 5억원짜리 아파트는 전세 끼고 16만6000채를 살 수 있다.

통상 강남으로 불리는 3개구(강남·서초·송파)의 기존 주택은 24만 채. 이 가운데 보통 매물로 유통되는 물량이 10% 안팎인 점을 감안할 때 적게 잡은 부동자금 50조원의 3분의 1만 꿈틀거려도 강남권 아파트 매물은 동나고, 시장은 파는 사람이 호가를 높이는 대로 값이 오르는 ‘셀러스 마켓’이 된다는 계산이다.

또 이 자금의 일부만 주식시장으로 방향을 틀어도 펀더멘털보다는 돈의 힘으로 주가가 치솟는 유동성 장세가 펼쳐지게 된다. 지난해 이래 코스피지수가 1000과 1200, 1400을 잇따라 넘어서면서 한국 주가의 ‘리레이팅’이 이뤄지고 있는데, 여기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 주식형 펀드다. 이 펀드의 수탁액(주식 편입 비중 60% 이상인 순수 주식형 기준)이 지난해 3월에 10조원, 10월에 20조원을 넘고, 올해 들어 30조원을 돌파한 정도인데도 이런 것을 보면 부동자금을 50조원으로 줄여 잡는다 해도 그 위력이 어느 정도 일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봉현 로이터 기자 (reuterbok@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