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나는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신비경험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신비경험이란 다음과 같다. 즉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드리는 시간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날 하루가 눈 앞에 정확히 전개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사람이 오후 3시에 당신을 만나러 오는 환상을 보게 되면 틀림없이 환상대로 그 사람이 그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벽에 엎드려 기도드리는 시간에 나타나는 환상에서 그날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대로 연출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재미가 나서 이런 신비경험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큰일났다 싶어 그 버릇을 고치느라고 한참 혼이 났다는 말씀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김지하 시인과 나눈 일이 있다. 이 말을 들은 김 시인은 곧바로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정신착란증인데 함 선생님의 위대한 점은 그것을 버릴 수 있었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65~66쪽)
여기서 새삼 1971년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상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197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초 전국의 대학 교무위원급 교수 수백 명이 숙명여대 강당에 모여 당시 문교부 장관인 민관식씨의 사회로 당시 중앙정보부 제8국장 강인덕 씨의 시국강연을 듣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들은 강연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기억할 필요도 없지만, 그 날 밤 강연회가 끝난 다음 숙명여대 정문에서 남영동 큰 도로까지 걸어 나오면서 눈물을 삼킨 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전국 대학의 수장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대제학이라 할 수 있는 문교부장관의 사회로 중앙정보부 일개 국장이 강연하는 것을 꼼짝 못하고 들어야 하는 초라한 내 모습이 참담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209쪽)
1979년 5월 8일 함 선생님 사모님 1주기 추도예배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다.
사모님의 1주기 추도예배를 일정한 장소를 택하여 성대하게 치르자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함 선생님이 극구 사양하여 외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조촐하게 가족을 중심으로 친지 몇 분이 원효로 선생님 댁에서 모이게 되었다.(중략)
나는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국내에 없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 선생님 댁을 찾았다. 김 박사가 추도사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와 좌정할 무렵 조용한 분위기가 갑자기 다소 흔들리는 듯하더니 김대중 씨가 온다는 전언이 왔다. 신문에서 그리고 말로만 듣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직접 가까운 데서 만나게 되었다는 설렘 같은 걸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내내 마루의 창문 옆에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계시던 함 선생님 앞에 김대중 씨가 드디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왼손에는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좌우로 세 명씩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마루 위에 겸허하게 서 계신 팔십 노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김대중 씨의 모습에서 신문에 자주 소개된 병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뻘인 늙은 선생님 앞에서 지팡이를 딱 짚고 서 있는 그 태도에서 나는 도무지 추도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김동길 박사가 내 어깨를 흔들면서 나가는 것이 어떠냐는 눈짓을 보내 함께 일어서서 앞에 무릎꿇고 앉아 계신 몇몇 분을 헤치고 나와 그 장소를 떠났다. 나오면서 정면에 서 있는 김대중 씨와 악수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김대중 씨를 직접 대한 단 한 번의 만남이었다. 김 박사의 자동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면서 그때까지 몇 차례 김대중 씨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이 그렇게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주 옛날 아마도 김홍일 의원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 남편 김대중 후보가 선거에 패하고 피신해 있는 동안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타인지사이기는 하지만 다소 분노 같은 느낌을 가진 기억이 되살아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309~311쪽)
(10.26 직후) 어느 날 나는 노명식 교수, 이미 타계한 조요한 교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신문의 가판이 성행하고 있었다. 노 선생이 때마침 신문을 사서 펼치더니 별안간 “김 선생 이것 어찌된 거야?” 하며 신문을 내게 내밀었다. 신문에는 함석헌 선생님이 김대중 씨의 출마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 싶어 곧바로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선생님이 직접 받으셨다.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평소와는 달리 흥분된 어조로 “큰일낼 사람들이오. 이 노릇이 다아 돈노름이오.”하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셋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사연인즉 다음과 같았다. 전날에 당시 선생님 주변의 한 명사의 부인이 성명서를 들고 와서 지지 성명을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는 것이다. 그 성명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원만한 합의에 의한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글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별지에 서명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음 날 김대중 씨 지지성명으로 둔갑한 것이었다.(315쪽)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일일이 거명하지는 않지만--전두환 대통령을 둘러싼 당시의 쟁쟁한 문인들이 보여준 아부상이다. 언젠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방한하여 한 강연에서 “문인은 잠수함에서 사육되는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 것을 필자는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나는 문학을 잘 모르지만 그 수많은 원로시인들이 연출했던 추태에 지금도 분노를 느낀다.(358쪽)
선생님의 마지막 공식행사는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서울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일이다. 일부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았다. 어떻게 선생님이 노태우 대통령과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병상에 누워 계시던 선생님은 “아니 그러면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나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악수도 하지 말란 말이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불편한 몸을 추스려 성화 점화식에 나가시는 선생님의 뒤를 좇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3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