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산과 정수일

by 永樂 posted Jul 06, 2006
정다산과 정수일


70년대부터였던가, 남도를 여행할 때면 강진의 다산초당을 둘러보곤 했다. 다산초당 자체도 많이 달라졌지만, 연년세세 그 주변은 더욱 몰라지게 달라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산초당 아래에 기념품 가게가 생기고, 거기서 다산과 다산초당에 대해 안내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그 안내인이 우리가 다산초당을 떠날 때 한사코 방명록에 몇 마디 말을 남겨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마땅한 말을 언뜻 찾지 못해 그냥 서명만 하고 떠나 왔는데, 그때로부터 방명록에 다산에 관해 어떻게 무슨 말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결론은 대체로 “당신의 수난은 당신에게는 고통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더할 수 없는 문화적 자산을 갖게 해주었고, 또한 한 민족된 긍지와 보람을 안겨주었습니다”라 하는 것이었다. 다산초당에 가게 되면 방명록에 이렇게 쓰리라 마음먹은 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직 다산초당을 방문하지 못했다.

다산이 겪은 고난은 우리를 연민에 빠지게 한다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다산이 만약 그 당시 잘나가는 선비로 일생을 마쳤다면 과연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5백여권의 저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참으로 오묘한 섭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힘이랄까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에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산이 당시에 겪어야 했던 고난의 기록들은 우리를 안타깝고 또 슬프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다산에 대한 아련한 연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가령 신유추안에서 형님의 죄상을 묻는 대목에 이르자,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으나, 또한 아래로는 아우가 형의 죄를 증언할 수도 없습니다”고 한 것은 명답이기에 앞서 다산이 당시에 처했던 상황의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그 자신이 자호(自號)한 여유당(與猶堂) 에서도 무엇이 선생으로 하여금 세상을 그렇듯 조심조심 살 수 밖에 없게 했는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도 연민 없이는 읽어내려갈 수가 없다. “이제 너희들은 망한 집안의 자손이다. … 폐족으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가지 밖에는 없다.” 당신의 학문적 열정과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도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을 믿고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2백년 안팎의 시간을 뛰어넘어 나는 깐수 정수일에게서 다산에게 갖게 되는 비슷한 연민을 느낀다. 다산과 정수일, 두 분은 비슷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 인생의 기구한 것이 그러하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그러하며, 고난 속에서도 불태우고 있는 학문적 열정이 또한 그러하다. 연변에서 태어난 정수일은 중국에서 25년, 북한에서 15년, 그리고 남한에서 22년을 살고 있다. 그 가운데 5년을 다산이 지상의 지옥(獄者 陽界之鬼府)라 일컫는 감옥에서 살았다. 1963년, 당시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 진의(陳毅)와의 담판을 통해 합법적으로 중국국적을 탈퇴하고 북한으로 돌아온 것을 그는 환국(還國)이라고 표현한다. 아랍인으로 행세하던 때도 그는 언제나 ‘한국’이라는 제3인칭 대신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나라를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일로 생각한다.(爲國獻己爲至高) 그래서 그는 그의 아호를 ‘나라’를 확대 심화시킨 위공(爲公)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는 시대의 소명에 따르는 것이 삶의 출발점이고, 지성의 양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삶의 방도이며, 겨레에 헌신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는 교육이 백년대계라면 학문은 만년대계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 검사조차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복하여, 감옥 안에서의 집필을 주선하고, 구속되기 전의 원고가 입력된 컴퓨터를 복원해준다. 법원도 판결문에서 “개인적으로 정세분석보고 이상으로 학문연구에 가치를 두었고, 이러한 피고인의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학문적 열정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여 그의 학문에 대한 집념을 평가하고 있다.

다산의 글쓰기를 귀감으로 삼아

그가 감옥 안에서 집필하는 과정은 참으로 눈물겨웠다. “무릎인대가 늘어나고, 슬 관절에 이상이 생겨 다리가 부석부석 부어있는 상태에서 두 다리를 포갠 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아무데나 대고 쓴다는 것은 고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소. 그렇게 두어시간 쓰고 나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아 발등은 희끄무레하게 변색되고, 하체는 거의 마비상태여서 고목처럼 꼬집어도 별 감각이 없거든.”(정수일의 옥중 편지)

이러한 자신의 글쓰기는 다산의 그것을 귀감으로 삼았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한증탕 같은 여름철, 더덕더덕 땀띠 돋아난 엉덩이를 마루바닥에 붙이고, 하루 열 댓 시간씩 뭉개면서 내가 내내 생각한 것은 유배생활 18년간, 5백여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선생이었다. 선생은 줄곧 앉아서 너무 오래 글을 쓰다 보니, 엉덩이가 짓뭉개져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서서 썼다고 한다. 실감나는 이야기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절차탁마하고, 마부위침(磨斧爲針)하는 선현들의 불요불굴의 의지와 실천은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도 내내 옮긴이의 귀감이었다.”(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번역 후기)

그는 감옥에서의 집필을 비롯 최근 몇 년 동안에 10권이상의 저서, 세계에서 두 번째의 완역본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역주서를 냈다. 2백자 원고지로 무려 5만매가 넘는 분량이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질과 양의 양면에서 가히 놀랄 만큼 초인적인 것이었다. 그는 실크로드가 중국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경주까지 이어졌음을 밝혔으며, 이 나라가 결코 은둔국이 아니라, 세계와 활발히 교류한 세계정신의 나라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는 한국을 명실상부한 문명교류학의 중심국으로 세우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종심의 나이에 아직도 불타고 있는 그의 학문에의 열정이 이 땅에서 마침내 활짝 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