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위기관리 능력
9·11 테러가 터졌을 때다. WTC(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해 있던 뉴욕 선물거래소는 사건 발생 4일 만에 영업을 재개했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평소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체계적인 준비가 있었다. 1993년 WTC에서 폭탄테러가 한 번 벌어진 이후 위기관리를 위해 매년 30만 달러를 투입해 왔다. 맨해튼 인근의 롱 아일랜드에선 비상 사무공간과 별도 컴퓨터 시스템도 관리해 왔다. 9·11 당시 뉴욕 선물거래소는 비상대피 계획에 따라 260명의 직원도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은행도 테러가 터지자 미리 준비된 뉴저지의 지하벙커로 관련 기능과 인력을 이동시키고 전세계 금융 네트워크를 신속하게 복구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시간 정도의 지연 사태가 발생했지만, WTC 내 사무공간이 소실된 뒤 12시간 동안 1만9000건의 계약을 처리했다. 이는 143억 달러 규모로, 평소 업무의 70% 수준이었다.
수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에 노출된 기업들은 항상 위기관리 또는 위험관리에 신경을 기울인다. 선진기업들은 해외출장 때도 임원들을 여러 비행기에 나눠 태운다. 한 비행기에 탔다가 추락이라도 하면 그 회사 기능은 올스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도자의 리더십에는 통찰력, 상상력, 실천력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정적인 자질은 바로 ‘위기관리(Risk management)’ 능력이다. 유능한 투수는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초일류 기업들은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이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우리 기업 중 비상대책반이나 태스크 포스를 가동했다는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증시(證市)나 외환시장은 워낙 참여자가 많고 이미 글로벌화돼 있어 충격이 일시적이다. 하지만 일선 기업들은 후유증이 클 것이다. 거래선이 끊길 가능성도 많고 여러 협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그런데도 모두 화들짝 놀랐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로 돌아가 버렸다.
어느 회사원의 얘기다. “북한이 도발한다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들었어요.”
맞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와 진실이 ‘클리셰(cliche)’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다. 클리셰란 틀에 박힌 상투적인 문구라는 뜻이다. 지금 한국에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클리셰가 되었다. 이것이 비극이다.
그동안 한국은 너무 고성장의 관성(慣性), 평안의 관성에 빠져 왔다. 하지만 멸망과 재난은 보통 경고하지 않고 온다. 문제는 이번에는 ‘북한의 핵실험’이란 사전 경고까지 나타났는데도 너무 평안했다는 점이다. 이런 한국인들을 보며 외국인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다.
일개 기업도 위기와 위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대응하는 것이 기본인데, 수천만 명의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한가한 것은 문제다. ‘안보 불감증도 문제지만, 안보 민감증도 문제’라는 말은 지도자가 할 말은 아니다. 지도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 유능한 지도자라면 그 옛날 어느 예언자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무엇이 클리셰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이 땅에 필요하다.
최홍섭·산업부 차장대우 hschoi@chosun.com
9·11 테러가 터졌을 때다. WTC(세계무역센터)에 입주해 있던 뉴욕 선물거래소는 사건 발생 4일 만에 영업을 재개했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평소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체계적인 준비가 있었다. 1993년 WTC에서 폭탄테러가 한 번 벌어진 이후 위기관리를 위해 매년 30만 달러를 투입해 왔다. 맨해튼 인근의 롱 아일랜드에선 비상 사무공간과 별도 컴퓨터 시스템도 관리해 왔다. 9·11 당시 뉴욕 선물거래소는 비상대피 계획에 따라 260명의 직원도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은행도 테러가 터지자 미리 준비된 뉴저지의 지하벙커로 관련 기능과 인력을 이동시키고 전세계 금융 네트워크를 신속하게 복구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시간 정도의 지연 사태가 발생했지만, WTC 내 사무공간이 소실된 뒤 12시간 동안 1만9000건의 계약을 처리했다. 이는 143억 달러 규모로, 평소 업무의 70% 수준이었다.
수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에 노출된 기업들은 항상 위기관리 또는 위험관리에 신경을 기울인다. 선진기업들은 해외출장 때도 임원들을 여러 비행기에 나눠 태운다. 한 비행기에 탔다가 추락이라도 하면 그 회사 기능은 올스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도자의 리더십에는 통찰력, 상상력, 실천력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결정적인 자질은 바로 ‘위기관리(Risk management)’ 능력이다. 유능한 투수는 무사 만루의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초일류 기업들은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이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데, 우리 기업 중 비상대책반이나 태스크 포스를 가동했다는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증시(證市)나 외환시장은 워낙 참여자가 많고 이미 글로벌화돼 있어 충격이 일시적이다. 하지만 일선 기업들은 후유증이 클 것이다. 거래선이 끊길 가능성도 많고 여러 협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그런데도 모두 화들짝 놀랐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로 돌아가 버렸다.
어느 회사원의 얘기다. “북한이 도발한다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귀가 아프게 들었어요.”
맞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진리와 진실이 ‘클리셰(cliche)’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다. 클리셰란 틀에 박힌 상투적인 문구라는 뜻이다. 지금 한국에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은 클리셰가 되었다. 이것이 비극이다.
그동안 한국은 너무 고성장의 관성(慣性), 평안의 관성에 빠져 왔다. 하지만 멸망과 재난은 보통 경고하지 않고 온다. 문제는 이번에는 ‘북한의 핵실험’이란 사전 경고까지 나타났는데도 너무 평안했다는 점이다. 이런 한국인들을 보며 외국인들이 기이하게 여길 정도다.
일개 기업도 위기와 위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대응하는 것이 기본인데, 수천만 명의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한가한 것은 문제다. ‘안보 불감증도 문제지만, 안보 민감증도 문제’라는 말은 지도자가 할 말은 아니다. 지도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 유능한 지도자라면 그 옛날 어느 예언자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무엇이 클리셰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이 땅에 필요하다.
최홍섭·산업부 차장대우 hschoi@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