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차 헌정사기행에서 牛音 선생(조민 이사)께서는
안중근 장군의 이등박문 사살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를 줄곧 하셨습니다.
아래에 이부영 선생께서 올린 글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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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 이부영 -
최재형 선생님께서 1920년 4월 7일 새벽 우수리스크의 자택에서 연해주를 침공한 일제 군대에게 사로잡혀 세상을 떠나신지 91년째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일제강점 시기는 물론 분단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모시지 못한 후생들의 불경(不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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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1917)을 분쇄한다는 명분으로 미·영·불·체코 등과 함께 일본군은 ‘시베리아 출병’이라는 이름으로 연해주와 동 시베리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선생을 잃은 재러시아 특히 연해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대들보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러일 전쟁(1905) 이후 급속히 기울어가는 조국을 그대로 볼 수 없어, 국내를 탈출해서 연해주로 모여드는 의병들과 해산군인들을 모아 ‘동의사(同義社)’라는 무장독립군 단체를 만드시어 함께 합류하신 안중근 의사를 대장으로 하여 함경도의 주둔 일군 진지를 습격하도록 하셨지요. 안중근 의사와는 의기가 투합하시어 곧 큰 일을 거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대한제국을 무너뜨린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격살하여 민족의 분노를 달래신 일이었지요.
안 의사의 총기 구입으로부터 모든 거사자금을 마련하시고 사격연습을 하도록 하셨지요. 이토 히로부미 격살 이후 일제가 러시아 정부를 압박하여 선생님의 무장독립운동에 제약을 가하자 ‘대동공보’ 신문을 발행하시어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시어 독립지사들을 연해주로 모여들도록 하셨습니다. 이상설 이위종 이범진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등 초기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울라디보스톡으로 집결하였지요. 1919년 3·1운동 직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임시정부인 울라디보스톡(해삼위) 대한국민회의의 산파역도 선생님께서 수행하셨지요. 그 의장은 이상설 선생께서 맡으셨습니다. 이미 시베리아 출병으로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었던 일제는 이런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을 겁니다.
대한국민회의가 상해로 옮겨가서 상해임시정부로 만들어지고 선생님을 재무총장으로 발령했지만 연해주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하셨던 선생님은 떠나실 수 없어 사양하셨습니다. 우수리스크를 근거지로 한인무장대를 조직하여 시가전을 벌이도록 했고 종당에는 선생님께서 1920년 4월 7일 새벽 자택에서 일군에게 사로잡혀 즉결처형 당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860년대 첫 러시아이민자의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가출하여 러시아 상선 선장 부부의 호의로 세계를 둘러보셨고 러시아의 공교육을 최초로 이수한 조선인이 되셨지요. 당시 신학문으로 무장한 세계시민으로 성장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에 정착하여 러시아 지방관청의 책임자로 임명되셨고 1890년대부터 증강되기 시작했던 극동 러시아군을 상대로 하는 군납업자로 큰 부자가 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과 세계 무역업계를 둘러본 안목에 한인들의 우수한 노동력이 결합되어 선생님을 거부로 성장토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망명자들과 군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외로 나오는데 재산만 불려가는 자산가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재산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셨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속에서도 침략하는 일제와 협력하여 돈벌기에 혈안이 되었던 다른 수많은 자산가들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최재형 장학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성원교역의 김창송 회장이 회장을 맡아 주었습니다. 장학회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 선생님을 널리 알리고 선생님의 유지를 잇는 재러시아 고려인 장학생들을 선발하여 대학교육을 받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저는 김 회장께 최재형 선생님의 조그만 흉상을 한국 재계의 중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입구 정면에 세워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뜻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인들에게 알려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선생님, 갈라진 조국 하나 되도록 부디 보살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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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 영
동아일보기자 해직(1975)
열린 우리당 대표
민주.평화.복지 포럼 상임대표
한일협정 무효화를 위한 국민행동(가칭) 준비위원장
최재형 선생 장학회 고문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 장군의 이등박문 사살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를 줄곧 하셨습니다.
아래에 이부영 선생께서 올린 글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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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선생님께 올리는 편지 - 이부영 -
최재형 선생님께서 1920년 4월 7일 새벽 우수리스크의 자택에서 연해주를 침공한 일제 군대에게 사로잡혀 세상을 떠나신지 91년째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일제강점 시기는 물론 분단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모시지 못한 후생들의 불경(不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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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1917)을 분쇄한다는 명분으로 미·영·불·체코 등과 함께 일본군은 ‘시베리아 출병’이라는 이름으로 연해주와 동 시베리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선생을 잃은 재러시아 특히 연해주의 독립운동 진영은 대들보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러일 전쟁(1905) 이후 급속히 기울어가는 조국을 그대로 볼 수 없어, 국내를 탈출해서 연해주로 모여드는 의병들과 해산군인들을 모아 ‘동의사(同義社)’라는 무장독립군 단체를 만드시어 함께 합류하신 안중근 의사를 대장으로 하여 함경도의 주둔 일군 진지를 습격하도록 하셨지요. 안중근 의사와는 의기가 투합하시어 곧 큰 일을 거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대한제국을 무너뜨린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격살하여 민족의 분노를 달래신 일이었지요.
안 의사의 총기 구입으로부터 모든 거사자금을 마련하시고 사격연습을 하도록 하셨지요. 이토 히로부미 격살 이후 일제가 러시아 정부를 압박하여 선생님의 무장독립운동에 제약을 가하자 ‘대동공보’ 신문을 발행하시어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시어 독립지사들을 연해주로 모여들도록 하셨습니다. 이상설 이위종 이범진 이동녕 이동휘 신채호 등 초기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울라디보스톡으로 집결하였지요. 1919년 3·1운동 직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임시정부인 울라디보스톡(해삼위) 대한국민회의의 산파역도 선생님께서 수행하셨지요. 그 의장은 이상설 선생께서 맡으셨습니다. 이미 시베리아 출병으로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었던 일제는 이런 사태를 방치할 수 없었을 겁니다.
대한국민회의가 상해로 옮겨가서 상해임시정부로 만들어지고 선생님을 재무총장으로 발령했지만 연해주를 근거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하셨던 선생님은 떠나실 수 없어 사양하셨습니다. 우수리스크를 근거지로 한인무장대를 조직하여 시가전을 벌이도록 했고 종당에는 선생님께서 1920년 4월 7일 새벽 자택에서 일군에게 사로잡혀 즉결처형 당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860년대 첫 러시아이민자의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가출하여 러시아 상선 선장 부부의 호의로 세계를 둘러보셨고 러시아의 공교육을 최초로 이수한 조선인이 되셨지요. 당시 신학문으로 무장한 세계시민으로 성장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에 정착하여 러시아 지방관청의 책임자로 임명되셨고 1890년대부터 증강되기 시작했던 극동 러시아군을 상대로 하는 군납업자로 큰 부자가 되셨습니다. 선생님의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과 세계 무역업계를 둘러본 안목에 한인들의 우수한 노동력이 결합되어 선생님을 거부로 성장토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망명자들과 군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외로 나오는데 재산만 불려가는 자산가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재산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셨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속에서도 침략하는 일제와 협력하여 돈벌기에 혈안이 되었던 다른 수많은 자산가들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최재형 장학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성원교역의 김창송 회장이 회장을 맡아 주었습니다. 장학회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 선생님을 널리 알리고 선생님의 유지를 잇는 재러시아 고려인 장학생들을 선발하여 대학교육을 받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저는 김 회장께 최재형 선생님의 조그만 흉상을 한국 재계의 중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입구 정면에 세워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뜻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경제인들에게 알려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선생님, 갈라진 조국 하나 되도록 부디 보살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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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 영
동아일보기자 해직(1975)
열린 우리당 대표
민주.평화.복지 포럼 상임대표
한일협정 무효화를 위한 국민행동(가칭) 준비위원장
최재형 선생 장학회 고문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