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후계체제와 중앙과 지방의 전면적 간부 교체

by KG posted Nov 28, 2011
김정은 후계체제와 중앙과 지방의 전면적 간부 교체

                                박 형 중 (톨일연구원 남북협력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2009년 1월부터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주요 사업 중의 하나는 김정은 후계자에 충성하는 인물로 이루어진 새로운 권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2009년 초반의 주요 권력 및 인물 개편으로부터 시작되어,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거쳐 단계적으로 전 분야에 걸쳐 또한 전국적으로 진행되어오고 있다.

김정은 후계 권력체계 구축의 진행 구조와 과정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1995년 ‘선군정치’가 시작된 이후 군대 및 중앙당에서 핵심 역할을 하던 최고위 엘리트 교체 및 무력화이다. 둘째, 경제 및 보안기구 관련 고위 인물의 숙청이다. 셋째, 지방당 책임비서 개편이다.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와 9월의 당대표자회를 거치면서 지방당 책임비서 대부분이 교체되었다. 전임지방당 책임비서는 대부분 내각 및 중앙당에서 새로운 보직을 받았
다. 넷째, 중앙과 지방의 하급 간부 교체 및 세대교체이다.

여기서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었다. 둘째, 이 네 가지 차원의 권력개편은 대체로 시간상 순차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보면 권력개편을 위한 어떤 기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들은 상호 분리되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히 얽혀있었다.

그 이유는 북한의 권력 구조의 특징 때문이다. 북한의 권력구조는 각급 지도 간부를 ‘소왕(小王)’으로 하고 그 아래 공권력의 사적 남용을 기축으로 사적인 후견-피후견 구조가 성립한다. 이 구조 속에서 공적으로 상급자이자 사적으로 우두머리격인 지도 간부(‘소왕’)가 공적으로 하급자 겸 사적으로 부하에게 보호와 시혜를 제공하고 인신적 충성을 기대하는 교환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어느 지도 간부의 교체는 불가피 그 아래에서 번성해왔던 마치 고구마 줄기 같은 후견망(patronage)에 관련한 다수 하급 인물의 교체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크게는 김정일로부터 김정은으로의 권력 이동에서도 나타난다. 아울러 그 이하의 인물들의 경우에도 수직위계를 따라 내려가면서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최고위 엘리트 교체 동향

먼저 김정일 및 김정은을 제외한 최고위 엘리트 교체 또는 무력화를 보자. 이는 2009년 초반 개시되어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 개최 직전까지 일단락되었다. 이 시기에 1995년 선군정치 이후 가장 두각을 보였던 군부 주요인물과 중앙당 비서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무력화되었다. 주요 인물을 보면, 군부에서는 조명록, 김영춘, 오극렬, 김일철이었고, 중앙당에서는 이제강, 이용철이었다.1)

경제 및 내부 통제 관련 고위 인물 숙청

그 다음 단계로 진행된 것이 경제 관련 및 내부 통제 관련 고위 인물의 숙청이었다. 경제관련 인물의 해임에 등장하는 전형적 이유들은 경제 실패에 대한 책임, 비리 문제와 정책 노선 갈등의 문제이다. 내부통제 관련 인물 숙청의 이유는 김정은의 국가보위부나 인민보안부와 같은 핵심 통치기구에 대한 장악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숙청은 대체로 2010년 및 2011년 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지도간부가 교체될 때 후속 현상으로 그 아래에서 서식해오고 있던 후견망 및 관련 하급 인물이 함께 제거되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기관 지도간부의 숙청은 그 기관 전체에 대한 물갈이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먼저 경제관련 고위 인물의 숙청을 보자. 2009년 3월 전임 철도상인(1998.9~2008.10) 김용삼이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명목은 노동자들의 절도에 따른 기관차 100여대 폐차사건 그리고 용천 폭발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알려지고 있다.2) 2011년 9월경에는 내부 비리를 문제삼아 철도성 간부 물갈이가 시작되었다.3) 2010년 3월 중앙당 계획재정부장이던(2005.9~2010) 박남기가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 때문에 총살당했다. 이어 김정일의 ‘7월 2일 방침’에 따라 박남기, 김용삼의 사진 및 저작물 삭제사업이 진행되었다.4) 2010년 6월 경 전임 재정상(1998.9~2008.10)인 문일봉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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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서 자세히 논의했다. 박형중, “2010.9.28 당대표자회의 재평가: 새로운 권력 연합 출범의 자축 기념식,” ꡔOnline Series Co 11-25ꡕ (서울: 통일연구원, 2011. 9. 21). 홍성남도 2009년 3월에 사망했다. 그는 내각총리(1998.9~2003.9), 함경남도당 책임비서(2003.9~2009.3)를 역임했다.
2) 문성휘, “북, 박남기 등 처형된 간부들 사진 삭제지시,” ꡔ자유아시아방송ꡕ, 2010년 7월 13일; 백나리, “북, 김용삼 전 철도상 처형 ... 룡천역 폭발 관련,” ꡔ연합뉴스ꡕ, 2011년 4월 4일.
3) 최오남, “北, 갖가지 비위 저지른 철도성 간부 물갈이 시작,” ꡔ열린북한방송ꡕ, 2011년 9월 28일.
4) 문성휘, 위의 글.
5) 백나리, “北, 김용삼 前철도상 처형…룡천역 폭발 관련 문일봉 전 재정상도 처형설,” ꡔ연합뉴스ꡕ, 2011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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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8년 이상 북한 군수경제를 담당해왔던 비서국 비서 전병호(85)가 2010년 9월 박도춘으로 교체되었다. 이어 2010년 말에 군수공업부와 제2경제위원회(군수경제 담당) 산하 간부 20여명이 횡령 등의 혐의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수공업부와 제2경제위원회 간부들은 무기 수출 대금 중 일부를 빼돌리다 국가안전보위부에 적발된 것으로 전해졌다.6) 전병호는 제2경제위원회 위원장(1982.3), 당 비서국 비서(1986.12), 국방위원회 위원 겸 당 군수공업정책검열부장(1990.5), 당 중앙위 경제정책검열부장(1994.3), 국방위 위원 재선(1998.9)에 임명된바 있었다. 전병호는 2010년 9월 당 군수담당 비서에서는 해임되었지만, 당정치국 위원, 내각 정치국장 겸 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

전병호는 2011년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직에서도 물러나고 역시 박도춘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전병호는 노환으로 실명 직전이었다 한다. 박도춘은 북한 군수공업의 중심지역인 자강도당 책임비서(2005.6-2010.9)를 역임했었다. 역시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이태남 내각 부총리가 1년도 채 안 돼 ‘신병 관계’를 이유로 해임됐다. 그는 함경남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1996.1~2003.9)을 거쳐 평남도당 책임비서(~2010.6)였고, 내각 부총리(2010.6~), 당정치국 후보위원(2010.9~)을 겸임해왔었다.

2011년 6월에는 중앙당 계획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홍석형(2010.7~)이 해임되었다. 홍석형의 해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6월 6일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결과에 대한 설명을 듣고 북·중 관계를 대를 이어 강화하기로 결의했다. 2000년부터 김 위원장의 7차례 방중 후 노동당이 회의를 열어 방중 결과를 논의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회의에서 홍석형 당 비서가 직무 조정을 이유로 해임됐다. 홍석형은 함경북도당 책임비서(2001.7~2010.9)를 거쳐 2010년 9월 당 중앙위 비서,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위 위원으로 승진했었다. 그의 해임 이유에는 세 가지 추정이 있다. 첫째, 북·중 경협 부진에 대한 책임 때문이라 추정되었다.7) 둘째, 홍석형은 이 회의에서 중국식 모델을 일부 수용하자고 발언했다가 중국의 첩자로 몰려 숙청되었다는 추측도 있다.8) 셋째, 중국에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8월 초에 홍석형과 박남기의 간첩활동에 대한 ‘통보자료’를 만들어 각 도보위부 부부장이상급 간부들에게 돌렸다 한다.9)

이 통보자료에 따르면 홍석형이 북한 내부 비밀들을 아들에게 넘겨주었고 라진·선봉에서 무역부분 사업을 하던 그의 아들이 중국을 오가며 중국 국가안전국 요원들에게 비밀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1998년 농업담당비서 서관히가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북·중 경협이 강화되고 있는 2011년에 홍석형이 ‘중국의 간첩’으로 몰린 것은 하나의 강력한 경고일 수 있다. 아래 서술하듯이 2010년 9월 홍석형이 함경북도를 떠난 후 함경북도는 대대적 비사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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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철환, 안용현, “장관 3명 처형… 평양은 숙청중,” ꡔ조선일보ꡕ, 2011년 4월 4일.
7) 김미경, “北 홍석형 노동당비서 전격 해임 北·中경협 미흡 책임 물은 듯,” ꡔ서울신문ꡕ, 2011년 6월 7일.
8) 이용수, “北, 1990년대부터 경제 책임자 5명 행방불명… 1명 자살·2명 처형,” ꡔ조선일보ꡕ, 2011년 10월 6일.
9) 박성우, 문성휘, “홍석형 계획재정 부장이 중국 스파이?,” ꡔ자유아시아방송ꡕ, 2011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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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이던 류경이 간첩죄로 처형당했다. 이와 함께 보위부 핵심 간부 30명이 처형되었다. 류경과 핵심간부 대량 숙청은 김정은의 국가보위부 장악을 위한 노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1년 3월에는 인민보안부장 주상성(2004.7~)이 해임되었다. 그는 평안남도 대동군 보안서장으로 철직(해임된 후 좌천)돼 근무하고 있다고 하며, 해임 명목은 북·중 국
경관리 실패 및 김정일 열차사고 문책 때문으로 알려졌다.10)

도당 전임 책임비서의 내각 및 중앙당 보직 임명

다음으로 지방 권력 개편을 보자.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에서 3명의 지방당 책임비서가 내각의 총리, 부총리로 보직 변경했다. 이어서 9월 당대표자회를 통해 중앙당 기구를 확충하는 가운데, 앞의 3명을 포함 대부분의 전임 지방당 책임비서가 당중앙위 비서, 정치국(후보)위원, 당중앙위 위원과 기타 중앙당 보직을 받았다. 그들의 자리에는 전임자의 경력에 비하여 대체로 한 급수가 떨
어진다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이는 지방권력의 대대적 개편을 의미했다.

먼저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내각으로 자리를 옮긴 3명을 보자.11) 평양시당 책임비서였던(2009.8~2010.6) 최영림은 2010년 6월 내각 총리로, 9월에는 당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다. 평양시당 책임비서 후임에는 문경덕이 임명되었다. 문경덕은 2010년 9월에 당중앙위 비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이태남 평안남도당 책임비서(2003.9?~2010.6)는 내각 부총리가 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홍인범이 임명되었다. 황해남도당 책임비서였던(2005.6~2010.6) 김낙희는 내각부총리가 되었고, 2010년 9월에 당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황해남도당 책임비서에는 노배권이 임명되었다. 그는 황해북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1998.9~2006.4)을 거쳐 2007년 3월부터 중앙위 부부장으로 있었다.

다음으로 2010년 9월 당대표자회를 거쳐 지방당 책임비서가 중앙당 보직을 갖게 된 경우이다. 최용해 황해북도당 책임비서(2006.4~2010.9)가 박태덕으로 교체되었다. 아울러 최용해는 당중앙위 비서, 당정치국 후보위원, 당중앙군사위원, 인민군 대장이 되었다. 김평해 평북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1997.9~2010.9)은 당정치국 후보위원, 당중앙위 비서, 당간부 부장이 되었다. 후임으로 이만건이 임명되었다. 홍석형 함경북도당 책임비서(2001.7~2010.7)는 2010년 7월 당계획재정부장으로, 2010년 9월에는 당중앙위 비서, 당정치국 위원으로 되었다. 함경북도당 책임비서 후임에는 오수용이 임명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홍석형은 2011년 6월 당 중앙위 비서에서 해임되었다.

홍성남(2003.9~2009.3)의 후임자인 함경남도당 책임비서 태종수(2009.8~2010.6)는 당 총무부 부장이 된 후, 2010년 9월 당 중앙위 비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후임자는 곽범기였는데, 그는 1998년 9월부터 내각부총리였다. 박도춘 자강도당 책임비서(2005.6~2010.9)는 당중앙위 비서, 당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고, 2011년 4월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자강도당 책임비서 후임에는 주영식이 임명되었다. 김히택은 2009년 3월에 양강도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고, 2010년 9월에는 당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김히택은 당경제정책검열부 제1부부장(2001.1~), 당 중앙위 제1부부장(경공업)(2001.10~)를 거쳤다. 그는 당경공업부장(1997.7~)인 김경희의 심복으로 알려졌다. 그의 전임자 김경호(2002.12~2009.3)는 양강도 청년동맹 제1비서 설정식의 탈북사건으로 해임되었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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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헌진, “베이징 소식통 北 주상성 前인민보안부장, 郡보안서장 좌천,” ꡔ동아일보ꡕ, 2011년 4월 11일.
11) 다음에 거론하는 직책 변경은 통일부 홈페이지>통일북한정보>북한개요>주요인물 참조.
12) 문성휘, “양강도 당 책임비서 치매로 곤혹,” ꡔ자유아시아방송ꡕ, 2011년 10월 26일; 이성진, “양강도 당 책임비서 교체에 간부-주민 반응 엇갈려,” ꡔ데일리 NKꡕ, 2009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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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강양모는 홍춘삼을 대신하여 2009년 12월 남포시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 백계룡은 이철봉을 대신하여 2010년 2월 강원도당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임경만은 김현주를 대신하여 2010년 2월 나선시당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

각 도내 및 중앙 부서 내 간부급 권력 개편 동향

흥미로운 것은 도당 책임비서의 교체는 해당 도내 권력 구조에 충격과 개편을 초래하는 연쇄 파급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역이 평안북도, 함경북도와 양강도 지역이다. 김평해는 비서 및 책임비서로 20여년 이상 봉직했던 평안북도당을 떠나 중앙당 비서가 되었지만, 김평해가 떠난 평안북도의 주요 간부는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거
의 10년이나 봉직했던 홍석형이 떠난 이후 함경북도도 거의 1년 내내 비사검열을 받았다. 김경호가 비서 및 책임비서로 9년 동안 봉직하다 교체되었던 양강도도 함경북도와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았다. 이태남(평안남도), 홍석형(함경북도)은 지방당 책임비서에서 중앙당 고위 직책으로 승진했지만 곧이어 숙청당했다. 이를 보면 도당비서의 명목상 승진이 반드시 실질적 권한 강화를 의미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중앙부처 중에서 무역성도 검열과 물갈이의 목표가 되었다.

2010년 9월 이후 함경북도와 양강도 지역에 대한 비사검열이 현격하게 강화되어 진행되었다. 이러한 검열은 현재까지(2011년 11월)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검열과 비사투쟁은 3방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탈북 방지 투쟁, 둘째, 대마약 투쟁, 셋째, 중간 간부 검열과 물갈이이다. 지난 1년 동안의 대략의 추이를 보면 이렇다. 첫째, 2011년 초 중동 재스민 혁명에 관한 소식이 북한 내부로 전파될 것에 관한 경계심이 강했다. 둘째, 보위부, 당을 제치고 보위총국(사령부), 호위총국이 직접 투입되었다. 셋째, 각종 명목과 조합의 합동 검열이 시행되었는데 검열단 자체의 부패가 극심했다. 셋째, 비사검열은 특히 함북도, 양강도 국경 연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9월에는 평안북도로 확대되었다. 넷째, 호위총국과 보위총국이 직접 나서서 국경경비대와 세관을 그리고 변경지역 보안기관에 대한 검열을 실시했다. 다섯째, 탈북자 가족을 내륙에 추방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여섯째, 국경지역에 CCTV를 설치하고 공민증 교체를 준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탈북, 마약, 한류 유통만이 단속되는 것이 아니라, 도내의 당, 정권기관, 사법 검찰 부문, 그리고 세관이 검열되었다. 그 주요 목적은 간부 기율잡기 또는 흠집 잡아 물갈이 명분 만들기로 보인다.

아울러 2011년 9월초 평안북도 도당 및 신의주 시당 주요 간부들에 대한 집단 숙청 및 평안북도에 대한 검열이 있었다.13) 도당에서는 선전비서와 조직부장 등 평북 지역의 권력 서열 10위 내 인사가 3명이 포함되었다. 조직부장은 조직비서 밑에서 대부분의 현안과 실무를 담당하는 중책이다. 신의주시에서는 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보안서장과 수사과장을 포함해 30여 명이 같은 비리 혐의로 해임 또는 강등됐다. 이 사건은 2010년 9월 당대표자회 이후 취임한 신임 이만건 도당 비서가 김정은의 지원을 받아 전임 김평해 비서의 세력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김평해는 10년 동안 도당(조직)비서(1989.9~1997.9)를 거쳐 1997년 9월부터 도당 책임비서가 되었다. 김평해는 2010년 9월 당정치국 후보위원, 당중앙위 위원, 중앙당 간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이어서 10월초 신의주 세관에 대한 대대적 검열이 있었다.14)

신의주 세관은 9월초 자체 검열을 진행했다. 자체검열 진행 도중 중앙당 검열 성원들이 내려와 대대적인 검열이 다시 시작됐다. 그 결과 세관장을 비롯한 세관원들 대부분이 교체됐다.

또한 평안북도 일대에 대한 추가 검열이 10월 중순까지 있었다. 이 검열은 60여명의 함경북도 검열 성원에 의해 실시되었고 10월 28일 도내 간부와 무역기관 일꾼을 대상으로 총화되었다. 그 결과로 평안북도 선천군 조개잡이 수산사업소 기지장, 부기지장, 조개잡이 선장, 양정사업소 비서, 운종리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의 5명이 총살당했다. 검찰소장은 자살했고, 보위부장 등 선천군 핵심간부 10여명과 함께 평북도당 이만건 책임비서 서기도 동반 해임되었다.

2011년 9월초 중순 무역성을 대상으로 한 내각 정치국 호위사령부와 국방위원회 연합검열조의 검열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15) 내용을 보면, 해외대표부 일군들의 경우, 과거 무역 내역을 모두 찾아내 건당 수입과 지출을 세세하게 뒤지고 따져보면서, 누수항목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그 목적은 개인이 얼마나 빼돌렸는지, 혹은 상급당이나 상층 간부에게 얼마나 바쳤는지 등을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국장급 7명이 해직되었고, 산하 각 기구마다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다.
해외대표부 일군들 중에는 자진 귀국한 사람도 있지만, 지난 1~2년 동안 과제 완수를 제대로 못한 사람들은 “국가에 다른 공헌이 없는 충성심이 모자란 사람”이라며 소환장을 발부받았다.

식량문제를 해결하러 중국으로 나갔던 무역성 부상과 참사도 전격 구속됐다.16) 이들이 별 성과를 내지 못하자, 중앙당에서는 이들을 불러들여 직무 태만과 과제 미완성 등의 명목으로 구속 수감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무역성 간부 약 90%가 바뀌었다고 한다. 무역성 간부의 대대적 교체는 대중 무역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북한 내부에 소비재 공급을 교란하여 물가 등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현재 무역상은 이용남(2008.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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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박준형, “평북 간부30명 숙청 이만건-김정은 공동작품,” ꡔ데일리 NKꡕ, 2011년 10월 4일; 박준형, “김정은, 지역감정까지 이용? 평북서 5명 총살,” ꡔ데일리 NKꡕ, 2011년 11월 2일.
14) 김준호, “북, 신의주 세관 대대적 물갈이,” ꡔ자유아시아방송ꡕ, 2011년 10월 4일.
15) 좋은벗들, “무역성 간부들, 사실상 전원교체?,” ꡔ오늘의 북한소식ꡕ, 제420호, 2011년 9월 14일.
16) 좋은벗들, “무역성 부상과 참사, 전격 구속,” ꡔ오늘의 북한소식ꡕ, 제420호, 2011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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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간부 세대 교체 동향

하급 간부 교체 및 세대교체와 관련한 여러 동향을 보면 이렇다. 2010년 11월 말에 열린 도당책임비서회의는 60세 이상 노세대 당원들과 장애인 당원들을 ‘명예당원’으로 이전시킬 것을 결정했다. 60세 이상 당원 100만 명을 명예 당원으로 전환하고 그 자리를 20~30대 청년들로 채운다는 것이다.17) 2010년부터 시작되어, 2011년 6월경까지 북한 내 시·군 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서에 젊은 층 간부들이 대거 배치되었다.18) 평안도의 경우 보위부와 보안서 간부들이 젊
은이들로 빠르게 교체돼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보위부의 경우 한 부서에 20대 후반~30대 초반이 2~3명 정도, 보안서에서는 10명 중 5~6명이 30대라고 한다. 양강도의 경우 보위부와 검찰소, 보안서에는 30대 초반 아니면 중반 사람들로 거의 배치되고 있으며, 30대 초·중반이 시·군 보위부 부부장까지 하고 있는 곳도 늘고 있다고 했다.

한편 2011년 5월 18일에는 각급 당 조직에 젊은 간부들을 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19) 도, 시군 지방 당 조직부 인사지시로 20, 30대 간부들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 간부는 군관출신으로 등용하라는 구체적 지시도 있었다. 7월 24에 진행되었던 도, 시, 군 대의원선거와 관련된 지시에서는20) 각 지역 공장, 기업소 지배인들 중 생산 계획과 노동자들의 물질문화생활개선에서 위훈을 세운 사람들을 기본으로 이전에 비하여 대의원추천을 10%정도 많이 하라고 했다. 한편 지방 보위부에 대한 숙청도 이루어지고 있다. 평안북도 선천군에서도 보위 계통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일부 비리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영내 총살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21) 10월 하순 양강도에서는 보위부 고위 간부가 숙청되었다. 한편 군대 내에서도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22) 김정은은 김정일의 비호 아래 이영호 총참모장과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 등을 통해 군부대 개편과 작전지시 등 실질적인 군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일선 군부대 지휘관을 자신에게 충성심이 강한 30~40대로 교체해 군내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동향의 결과로 중앙당은 물론이고 지방당 간부들과 법기관 일군들이 대거 바뀌었으며, 이들에 대한 광폭정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23) 식량과 생필품은 기본이고, 여타 모든 면에서 보장을 잘 해주고 있는데, 일례로 최근에는 간부용 승용차들을 새로 공급했다. 중앙당에서는 군 단위의 경우 군당 책임비서와 인민위원장, 인민부위원장, 검찰소장과 보안국장, 그리고 보위부장에게 1대씩 6대의 승용차를 제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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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정용수, “김정은, 당원 100만명 ‘젊은 피’ 교체,” ꡔ중앙일보ꡕ, 2011년 3월 11일.
18) 이범기, 이석영 , “北 보위기관 30대 간부로 교체…김정은 체제 준비,” ꡔ데일리 NKꡕ, 2011년 6월 20일.
19) 이준운, “북한 2,30대 간부들 대거 등장, 김정은 시대 준비,” ꡔ열린북한방송ꡕ, 2010년 7월 8일.
20) 최호연, “7월에 도, 시, 군 지방선거회의 진행 본지소식 확인(제2보),” ꡔ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ꡕ, 2011년 7월 4일.
21) 강미진, “양강도 보위부 반탐(방첩) 부부장 구속 수사,” ꡔ데일리 NKꡕ, 2011년 10월 31일.
22) 김은지, “김정은, 군 ‧ 보안기관 지휘권 행사...김정은 교과서 발간 추진,” ꡔ미국의 소리방송ꡕ, 2011년 9월 21일.
23) 좋은벗들, “새 간부들에게는 새 자동차, 주민들은 풀죽 연명,” ꡔ오늘의 북한소식ꡕ, 제424호, 2011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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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2009년 1월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이 본격화되면서, 북한 내부의 상-중-하층의 주요 간부가 전면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1단계는 2009년 초반부터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 개최 때까지 완료되었다. 그 대상은 1995년 이후 선군정치에서 핵심역할을 하던 군과 당의 최고위 간부였다. 상당수 인물은 너무 나이 들어 자연스레 교체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교체의 시기와 방법이 분명히 기획되었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2단계로 경제 및 보안기구 관련 중앙간부에 대한 숙청이 있었다. 이는 2010년 초반에서 2011년 중반까지 진행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경제 관련 고위 인사의 숙청이 빈번했는데, 이는 단순 경제 부진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경제이권 조정과도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 3단계로 2010년 9월을 전후로 도 및 특별시 책임비서가 전면 교체되었다. 대부분의 책임비서가 중앙에서 보다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후임에는 전임자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는 인물이 임명되었다. 대부분의 도당 책임비서가 명목상 중앙의 고위직에 올랐지만, 실질 권한과 권위가 상승했는지는 의문이다. 그 다음 4단계로 각 도내에서 신임 책임비서가 취임하면서 전임 책임비서의 권력구조가 해체되었다. 이는 함경북도, 양강도, 평안북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2010년 9월 당대표자회 이후 중앙 및 지방의
중하급 간부를 전면적으로 교체하여 젊은 30~40대를 등용하는 등 간부 세대교체 동향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간부 교체에 따라 새로이 벼락출세 하는 집단과 그 반대 운명을 맞은 집단 간에 충성과 불만이 엇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