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여행사' 김세광 대표

by KG posted Jun 20, 2012
'백두여행사' 김세광 대표
2011.07.19



무형의 상품을 팔아야하는 여행사업은 오로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번창이 보장된다.

고객들이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불만을 갖는다면, 요즘 같은 인터넷시대에 된서리를 각오해야 한다.

'백두여행사' 김세광 대표는 이같은 업계 속성을 정확히 꿰뚫고, 사업 시작 5년이 채 안되어 백두산관광 전문 여행사를 성공시켰다.

직원 한 명 없이 한 해 매출 10억 원을 달성했고, 흔한 신문광고 하나 없이 대부분 고객들이 주변의 추천을 받고 온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 하루벌이 하던 암울한 시절, 값진 거름되다

김세광 대표는 11년 전 부모님, 남동생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경북 성주군 용암면 출신인 할아버지가 이주 1세대였고, 한국에 여전히 친척들이 살고 있었기에 김 대표의 가족들은 어렵지 않게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다른 동포들과 비교해 더없이 유리한 입장이 되었지만 김 대표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다.

중국에 있을 때부터 형편이 워낙 어려웠는데 한국으로 오기 위해 국가에서 임대받은 토지 10년치(중국은 임대형식으로 토지 사유화를 인정)를 10분의1 헐값으로 넘기고 사채까지 빌렸던 탓이었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값이 없어 배를 타고 왔으니 당장 먹고살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더구나 어머니는 시각장애 1급이었고 아버지는 한국으로 오기 1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충남 천안 단칸방에 부모님을 모셔놓고 동생과 함께 무작정 구미로 갔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을 옮겨 다니며 기계, 리모델링, 제조업 등에 근무했던 그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속칭 '노가다'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잠시 농사짓던 때를 생각하고 목수일을 찾아 나섰어요. 나가봤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후에 알게 됐지만 현장에서 가장 고된 일이 주어졌어요. 오후 간식시간에 빵을 우걱우걱 삼키면서 친구에게 도저히 못하겠다고 털어놓고는 뛰쳐나왔어요."

이후 그는 구미에 있는 의류회사에 취직했다.

잠을 줄이고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그 와중에 부모님께 매달 용돈 보내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1년쯤 지나니 빚이 청산됐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열심히는 살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랄 게 전혀 없었다는 걸 새삼 느끼고는 서울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2002년 초에 서울 올라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컴퓨터 구입이었습니다.

아내가 교회를 다녔는데 한국 분께서 자신의 카드를 빌려주셔서 할부로 살 수 있었어요. 당시 180만원이라는 거금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컴퓨터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겠더라고요. 훗날 여행사 일하면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 '동포출신' 정체성 되찾으니 기적처럼 사업 풀려

한국생활을 위해 영어공부도 하는 등 의욕적인 날들을 보내던 그에게 동춘항운(동춘훼리) 아르바이트는 운명을 180도 바꿔놓았다.

"표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주 항로가 속초에서 러시아를 거쳐 훈춘으로 가는 백두산코스였어요. 두어 달 해보니 신이 나고 호기심도 생기더라고요. 처음 1년은 아르바이트 식으로 하다가 동춘항운 산하 여행사에 아예 입사를 해서 관광객들 인솔부터 배웠어요."

김 대표는 동춘항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6년 말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백두여행사를 설립했다.

자본금도 넉넉지 않았던 데다가 동포 출신으로 한국인들을 상대할 수 있을지 처음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 때는 해외여행객이 뚝 끊겨 그나마 한 명 있던 직원을 정리해야했다.

"일부러 중국 출신이라는 걸 숨겼었어요. 그런데 경영마저 어려워지며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더라고요. 이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되든 오픈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자 신기하게 일이 술술 풀렸어요. 손님들이 "중국에 대해 잘 알 것 같다. 다른 여행사보다 더 잘해줄 것 같다"고들 얘기해주시는 거예요."

■ 영업 밑바탕은 '고객 입장서 생각하기'

실제로 백두여행사는 다른 곳에 없는 특별한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단 한 명이 가더라도 생애 최고의 대접이라 느껴질 만큼 손님을 모시자는 김 대표의 뚝심이었다. 그는 백두여행사 상품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동행한다.

고객보다 한 발 앞서 세세한 문제들을 미리 해결하는 건 물론이고 식사와 술, 과일 등을 사비로 대접한다.

동포들이 운영하는 여행사들이 초청서류나 출입국 업무 등 행정일이 주가 되는 반면, 백두여행사가 유일하게 아웃바운드 여행상품만 취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두여행사에 행정관련 문의가 많이 와서 김 대표도 한때 행정업무를 병행해볼까 고민해봤지만 고객들의 여행에 지장이 있을까봐 금세 마음을 접었다.

패키지여행의 맹점을 최대한 지양한다는 점도 백두여행사만의 성공비결이다. 김 대표가 현장에서 느낀 여행객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구속하는 일정'이었다.

"아무리 많은 인원이 와도 자유여행 왔다는 느낌을 주려고 해요. 그래서 트래킹코스를 많이 만들었죠. 중국에서 나고 자라다보니 저만 아는 길이 많거든요. 백두산 천지에서는 또 저희 여행사만의 이벤트가 있어요. 체험해보신 분들이 동호회에서 소문을 많이 내주셔서 단골손님들이 많습니다.(웃음)"

세 번째 경쟁력은 안전함이다.

중국어가 유창하고 중국 내 지인들이 많은 '백두산 박사'가 동행하다보니 돌발사고 위험이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여행객들이 백두산에 가면 날씨 등 문제로 30~40% 인원만 천지를 보고 돌아오지만 백두여행사를 통하면 90% 이상의 인원이 천지의 비경에 흠뻑 취할 수 있다.

■ 동포들의 여가생활에 관심 기울일 터

김 대표와 동갑내기 회사동기였던 아내 조영란(41)씨와의 만남은 한 편의 드라마다.

넉넉한 형편에 미모의 재원이던 아내와 가난하고 못나고 고졸학력이 전부인 그의 교제를 처갓집에서는 완강히 반대했다.

"처갓집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제가 때마침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걸 아시게 된 장인 장모께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며 결국 결혼을 허락하셨죠. 후에 제가 교회 안 다니고 있다는 소식 들으시고는 속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결혼생활이 마냥 행복했던 건 아니다.

첫 아들을 낳기 전까지 세 번이나 유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여섯 살배기 장난꾸러기 아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고 뱃속에는 둘째가 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제가 한국에 안 왔다면 아내와도 결혼을 못했을 수 있어요. 참 힘겹게 살았고 방황도 많았는데 이제 사람노릇하고 사네요. 한국은 저에게 그런 곳입니다."

그는 아이 얘기를 하며 별안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 본을 신청하러 갔는데 법원서 허가를 받아오라는 거예요. 법원에 가보니 동포들 본을 하나로 통일해서 준다는 겁니다. 내가 본이 있는데 왜 엉뚱한 본을 써야 하냐고 담당자에게 항의를 했는데 공감은 하면서도 정책이라 어쩔 수 없다더군요."

여행사 대표답게 김대표의 최근 관심사는 동포들의 여가활동이다.

"업무상 한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다보니 동포들이 쉬는 날 도박하고 술 마시고 거리에서 싸우고 그런 모습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산악회에 나가기 시작했죠. 동포들도 차츰 인식에 변화가 오면서 산에 가는 한국인들을 부러워는 하는데 방법을 몰라서 못가는 분들이 많아요. 산에서 많이 웃고 얘기하고 맛있는 간식도 먹으며 스트레스 푸는 즐거움을 동포들에게 알려나갈 계획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무일푼으로 건너와 이웃을 돕는 위치에까지 오른 김 대표의 성공담은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동포들에게 두고두고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백두여행사 02-992-8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