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찬 조선일보 기자
입력 : 2012.11.08 15:21
애플·구글·MS 등… 전세계 수억명이 이용하는플랫폼이 무기
최근 지도에 독도 표기 맘대로 변경…
"일본이 교과서 하나 바꾸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영향력"
최근 구글 회장은 프랑스 대통령 만나 "뉴스 검색료 받으면 뉴스 빼겠다" 위협
글로벌 IT기업이 국가 주권을 넘보는 시대가 도래했다.

최근 구글과 애플이 지도에서 '독도' 표기를 변경한 것이 대표적이다. 양사는 각각 독도 표기를 '리앙쿠르암'과 '리앙쿠르암·독도·다케시마'로 바꾸기로 하고 이를 한국 정부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중립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상 한국 시장보다 몇 배 더 큰 일본 시장의 눈치를 봤다는 것이 정부와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이윤 추구'를 제1의 목적으로 하는 기업들이 한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쥐락펴락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였던 사안도 이제는 '초(超)국가' 글로벌 기업과의 분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문제는 구글·애플·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IT기업들의 영향력이 한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데 있다. 이 기업들에 한 국가와 같은 수준의 철학이나 명분을 바라는 것은 무리다.

정부 관계자는 "애플이 독도 표기를 바꾸면서 '일본 시장이 한국보다 크기 때문에 본사 차원에서 사업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명했다"고 말했다. 한국판에서 검색하면 '독도'로 보여주고, 일본판에서 검색하면 '다케시마'로 보여주는 '양다리' 정책도 결국 어느 쪽도 잃지 않으려는 기업의 속내를 보여주는 현실이자 한계다.
중앙대 이광훈 교수(경제학)는 "구글과 애플 같은 글로벌 IT기업들은 전 세계 곳곳의 컴퓨터 앞에 앉아있거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모든 이들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든다"며 "일본이 교과서 하나 바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런 기업들은 전 세계인들에게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손만 내밀면 닿을 곳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구글과 애플의 지도에서 독도와 동해표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전 세계인의 교과서를 바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 정부와 싸우는 것보다, 애플·구글의 지도 하나 바로잡는 게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의 영토 분쟁에서도, IT기업들과의 분쟁에서도 모두 밀리고 있다.
IT기업의 초국가적인 힘은 최근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이 프랑스 대통령을 직접 만나 온라인상 뉴스 검색료를 담판짓는 장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프랑스 주요 언론사들은 구글이 자사의 뉴스 검색결과를 통해 막대한 광고수입을 올리고 있다며, 구글에 뉴스 검색료를 부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구글은 "구글 검색에서 프랑스 매체들의 뉴스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국가의 권력은 울타리가 있지만, 다국적 IT기업은 국경을 넘나들면서 부지불식간에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막강한 플랫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사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 정책을 뒤집고 플랫폼에 탑재된 콘텐츠를 뒤바꿀 수 있다. 동원할 수단도 검색·지도·상거래·사전 등 무궁무진하다.
글로벌 IT기업들의 힘은 전 세계에 깔려있는 '플랫폼'이다. 애플의 작년 총매출액은 1080억달러(117조원). 대한민국의 작년 GDP(1조1635억달러)의 10분의 1 수준이다. 애플의 아이폰·아이패드 등 모바일 기기 누적 판매량은 우리나라 국민 숫자의 8배 수준인 4억대에 육박한다. 구글은 전 세계 검색엔진 점유율 1위이고,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도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페이스북·트위터가 수익모델이 부진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건재(健在)하는 것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억명의 이용자들 덕분이다. 전 세계인들이 수시로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올리는 공간의 힘은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저가(低價)에 태블릿PC '킨들 파이어'를 뿌리는 것도 결국은 플랫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기기를 확산시킨 뒤, 자사가 강점을 가진 콘텐츠 판매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IT 플랫폼' 경쟁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플랫폼 경쟁력은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구글과 애플에 대응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한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포털이나 메신저,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등은 모두 국내 시장에서만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국내 포털시장을 장악한 '네이버'와 '다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국내 기업들이 만든 지도 프로그램도 3D를 지원하는 등 기능은 훌륭하지만 국내에만 이용자가 국한돼 있다. 여기에 아무리 독도, 동해라고 표기한들 전 세계엔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다.
국민메신저 '카카오톡'도 가입자의 80%가량이 국내 이용자다.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시장에서도 페이스북과 대적할 만한 것은 카카오톡과 연계된 '카카오스토리'뿐이다. 게임도 훌륭한 플랫폼이 될 수 있지만, 현재 미국·유럽 등까지 글로벌하게 인기를 끌고 있는 국산 게임은 없다.
결국 전 세계 시장에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명백한 사실을 알리고 싶어도 그럴 만한 수단이 없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지면광고에,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광고를 띄우는 것이 뉴스가 되는 수준이다.
국내 기업 중 글로벌 플랫폼을 갖췄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삼성전자 정도다. 스마트폰 '갤럭시' 시리즈로 전 세계에서 1억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몸체'만 삼성 제품일 뿐,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운영체제(OS)는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탑재하고 있다. 갤럭시 시리즈가 많이 팔리면 삼성전자는 기기 판매의 일회성 매출을 올릴 뿐이지만, 구글은 자체 앱스토어인 '플레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판다. 구글이 삼성전자·LG전자·아수스 등 업체를 가리지 않고 제휴를 통해 전 세계에 '안드로이드 생태계'를 꾸리는 데 주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성전자 역시 기기에 '삼성앱스'라는 자체 앱스토어를 기본 탑재하고 있어 보급률은 높은 편이지만, 이용률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은 'IT강국'이라고 평을 듣는다. 세계 최고 속도의 인터넷망은 구축했고, LTE(4세대 이동통신)로 세계 이동통신 시장을 선도해가고 있다. 삼성전자도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IT기업이다. 하지만 하드웨어와 인프라만 집중적으로 발달해가고 있을 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콘텐츠 산업은 한참 뒤져 있다. 휴렛팩커드(HP)와 IBM이 컴퓨터를 아무리 많이 팔아도 사용자들이 실제로 접하는 것은 MS의 '윈도' 운영체제다. 전문가들은 그래서 이제 콘텐츠 산업 육성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막강한 플랫폼을 가진 글로벌 IT기업과 한국이 일대일로 맞서야 하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이번 독도 표기 사건에서 우리 정부는 무력했다. 일본이 꾸준한 물밑작업으로 성과를 올렸을 때, 우리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항의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초국가적 권력을 가진 다국적 기업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지식경제부 조신 R&D전략기획단 MD는 "글로벌 플랫폼 구축에 국가와 사회 차원의 지속적 관심을 쏟아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글이나 애플이 독도 표기를 바꾸는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만 사회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가 빠르게 잠잠해지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의 인터넷·스마트폰·태블릿PC에 탑재된 '교과서'가 바뀌는 사안은 일본 교과서가 왜곡된 것보다 훨신 더 강력한 파급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