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연구소에서 좋은 글을 보내 왔습니다.
얼마 앞서 코리아글로브에서도
빛고을을 다녀왔기에 읽어보시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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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충장‧금남로는 알고 있다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은 무등산입니다. 옛날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산의 정상 가까이에 우람하고 장대한, 기암괴석의 서석대(瑞石臺)가 헌걸차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서석대의 장엄한 기상(氣像) 앞에 큰소리칠 인물이 있다면 한번 나와 보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왜소함, 무기력, 나약함은 바로 그런 자연의 위용(偉容)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자연의 장관은 위대하기만 합니다.
광주를 지날 때는 언제나 每過光山府
오래도록 정금남(鄭錦南) 생각이 나네 長懷鄭錦南
신분은 구종직(丘從直)처럼 미천했으나 地如從直劣
재주야 이순신과 견줄 만했네 才比舜臣堪
옛 사당엔 풍운의 기운 서렸고 古廟風雲氣
옛 집터에 시골노인들 전설 전하네 遺墟父老談
웅장할사 서석의 드높은 진산 雄哉瑞石鎭
정기 모아 기특한 위인 탄생시켰네 亭毒出奇男
광주를 재차 지나며 [重過光州]
광주는 5‧18로 자랑스럽고, 5‧18의 본거지는 금남로(錦南路)였습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붉은 피가 흐르던 금남로, 그해 5‧18은 정말로 뜨거웠고 서석대처럼 용기는 치솟아 올랐습니다. 무등산 정기 받아 태어난 기남아(奇男兒)는 조선 초기 구종직(丘從直,1404∼1477)이라는 천민이 너무 똑똑하고 글을 잘해 형조판서에 올라 세종‧성종을 보필하여 국가를 위해 일했던 것처럼,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참으로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나라에 큰 무공(武功)을 세워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오르고, 포도대장, 부원수(副元帥)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괄란‧정묘호란 등에 지략과 능력을 발휘하여 나라를 건져낸 출중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래서 금난군(錦南君)에 군봉(君封)되어 천추에 이름을 날렸으며, 이순신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아 광주에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해, 광주시를 관통하는 도로의 이름을 금남로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광주의 이웃 고을 화순(和順)현감으로 근무하여 다산은 몇 차례 아버지를 뵈러 오며 광주를 지났습니다. 위의 시는 다산이 18세의 어린 시절, 광주를 거듭 지나며 무등산 정기로 태어난 정충신 장군을 생각하며 지은 시였습니다. 신분이 천한 정충신, 행주대첩에 권율장군을 돕고, 권율의 사위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1566∼1618)의 눈에 들어 17세에 무과에 급제해 나라를 위하는 일만 했습니다.
광주의 두 번 째 큰 길은 충장로입니다. 29세에 억울하게 역모에 걸려 옥사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8∼1596),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61년에야 신원되고 1668년에야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681년에야 병조판서로 증직되며, 사후 192년이 되는 정조 12년인 1788년에야 좌찬성에 증직되어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려, 광주의 대표적 의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분을 기리기 위해, 충장로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충장로는 5‧18에 큰 몫을 했던 도로입니다. 모함이 아무리 드세도 진실은 숨길 수 없는 것, 사후 192년 만에야 ‘충장’의 시호를 내린 역사적 진실, 그걸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김덕령‧정충신은 대표적인 무등산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의 충성심과 의혼(義魂)은 무등산의 정기에서 나온 DNA였습니다. 5‧18의 의혼도 무등산의 정기에 닿아 있습니다. 이제는 국립공원이 된 무등산, 5‧18을 왜곡하고 날조된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 무등산의 정기는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지하의 다산 선생도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젊은 시절 다산은 무등산을 찬양하는 시와 기행문도 썼습니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 옥중시 「춘산곡」
5‧18을 폄하하여 광주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거대한 음모, 오늘도 우리의 가슴은 타는데 끌 물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박석무 드림
얼마 앞서 코리아글로브에서도
빛고을을 다녀왔기에 읽어보시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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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은 무등산입니다. 옛날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산의 정상 가까이에 우람하고 장대한, 기암괴석의 서석대(瑞石臺)가 헌걸차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서석대의 장엄한 기상(氣像) 앞에 큰소리칠 인물이 있다면 한번 나와 보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인간의 왜소함, 무기력, 나약함은 바로 그런 자연의 위용(偉容)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자연의 장관은 위대하기만 합니다.
광주를 지날 때는 언제나 每過光山府
오래도록 정금남(鄭錦南) 생각이 나네 長懷鄭錦南
신분은 구종직(丘從直)처럼 미천했으나 地如從直劣
재주야 이순신과 견줄 만했네 才比舜臣堪
옛 사당엔 풍운의 기운 서렸고 古廟風雲氣
옛 집터에 시골노인들 전설 전하네 遺墟父老談
웅장할사 서석의 드높은 진산 雄哉瑞石鎭
정기 모아 기특한 위인 탄생시켰네 亭毒出奇男
광주를 재차 지나며 [重過光州]
광주는 5‧18로 자랑스럽고, 5‧18의 본거지는 금남로(錦南路)였습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붉은 피가 흐르던 금남로, 그해 5‧18은 정말로 뜨거웠고 서석대처럼 용기는 치솟아 올랐습니다. 무등산 정기 받아 태어난 기남아(奇男兒)는 조선 초기 구종직(丘從直,1404∼1477)이라는 천민이 너무 똑똑하고 글을 잘해 형조판서에 올라 세종‧성종을 보필하여 국가를 위해 일했던 것처럼,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참으로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나라에 큰 무공(武功)을 세워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오르고, 포도대장, 부원수(副元帥)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괄란‧정묘호란 등에 지략과 능력을 발휘하여 나라를 건져낸 출중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래서 금난군(錦南君)에 군봉(君封)되어 천추에 이름을 날렸으며, 이순신과 같은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아 광주에 큰 자긍심을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해, 광주시를 관통하는 도로의 이름을 금남로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광주의 이웃 고을 화순(和順)현감으로 근무하여 다산은 몇 차례 아버지를 뵈러 오며 광주를 지났습니다. 위의 시는 다산이 18세의 어린 시절, 광주를 거듭 지나며 무등산 정기로 태어난 정충신 장군을 생각하며 지은 시였습니다. 신분이 천한 정충신, 행주대첩에 권율장군을 돕고, 권율의 사위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1566∼1618)의 눈에 들어 17세에 무과에 급제해 나라를 위하는 일만 했습니다.
광주의 두 번 째 큰 길은 충장로입니다. 29세에 억울하게 역모에 걸려 옥사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8∼1596), 죽은 지 65년이 지난 1661년에야 신원되고 1668년에야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1681년에야 병조판서로 증직되며, 사후 192년이 되는 정조 12년인 1788년에야 좌찬성에 증직되어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가 내려, 광주의 대표적 의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분을 기리기 위해, 충장로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충장로는 5‧18에 큰 몫을 했던 도로입니다. 모함이 아무리 드세도 진실은 숨길 수 없는 것, 사후 192년 만에야 ‘충장’의 시호를 내린 역사적 진실, 그걸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김덕령‧정충신은 대표적인 무등산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의 충성심과 의혼(義魂)은 무등산의 정기에서 나온 DNA였습니다. 5‧18의 의혼도 무등산의 정기에 닿아 있습니다. 이제는 국립공원이 된 무등산, 5‧18을 왜곡하고 날조된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 무등산의 정기는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지하의 다산 선생도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젊은 시절 다산은 무등산을 찬양하는 시와 기행문도 썼습니다.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 옥중시 「춘산곡」
5‧18을 폄하하여 광주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거대한 음모, 오늘도 우리의 가슴은 타는데 끌 물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