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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상토론] 세상의 평화와 내 안의 평화

by 이윤주원 posted Mar 11, 2003
[난상토론] 세상의 평화와 내 안의 평화


일시 : 2003. 2. 28. 7:30∼10:20
장소 :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실
사회 : 이윤주원(인드라망 편집위원장)

함께 하신 분들 : 김광하(경불련 정책위원장), 김선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 총무국장), 이향민(인드라망생명공동체 회원), 이정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장), 조최윤순(인드라망생명공동체 회원), 임효정(인드라망생명공동체 조직위원장), 이상경(인드라망생명공동체 회원), 최수옥(인드라망생명공동체 사무처 간사)


사회 : 먼저, [난상토론] '세상의 평화와 내 안의 평화'를 기획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겟습니다. 2000년도 부시 미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뒤부터 한반도의 핵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2월 15일 1,000만명 정도의 세계시민이 보여준 반전 평화의 의지가 높긴 하지만, 전쟁의 하려고 하는 부시정권의 야욕은 쉽게 거두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북한 핵 문제 때문에 많은 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와 대화를 나눈 분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우리가 끼여들 여지가 너무 없다는 것이에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렇다고 '전쟁이다'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조장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겁니다. 우선 여러분이 생각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먼저 말한 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전쟁이 없다고 평화가 아니다"

김광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세상에 평화가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힘의 긴장관계를 평화로 말해야 할지. 아무튼 힘든 문제입니다. 논리적으로 출발해 보면, 평화는 전쟁과 반대되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평화가 있다면 전쟁은 있을 수 없죠.

그러나 역사적으로 항상 전쟁이 있어 왔어요. 평화가 있었다면 전쟁은 없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 증거로 볼 때 우리가 평화를 경험한 적이 없는 거죠.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평화라는 것은 한시적 균형관계가 아니었던가요. 긴장관계가 무엇인가요?. 인간의 역사를 볼 때, 긴장관계는 계층과 국가 간의 힘의 불균형 상태일 뿐입니다. 힘이 팽팽하게 맞선다면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긴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더라도 참고 있어야 합니다. 산업혁명 뒤 영국을 보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갈등이 있었지요. 이 때, 어느 한 계급이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에 평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 여운 선생님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평화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보셨습니다. 동의합니다.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 평화는 진정한 평화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느껴왔던 평화란 긴장관계였을 뿐입니다.


이정호: 우리는 흔히들 전쟁의 반대말이 평화이고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라고 하는데, 맞는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전쟁은 그 전쟁이 초래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작은 분쟁들로 시작됩니다. 커다란 전쟁도 수많은 작은 분쟁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내 안의 전쟁과 바깥의 물리적 전쟁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현실을 벗어나려면 평화의 철학과 평화의 방법론, 이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으로 구체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을 안 하는 것이 평화다" 이것이 아니고. 평화의 철학을 가지고 일상 속에서 평화를 느껴보는 경험을 축적하고, 평화를 지키는 사회시스템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너무 평화에 대한 상상력이 빈약한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우리는 전쟁과 폭력에 익숙하게 길들여 있어 보입니다.


사회: 평화의 철학과 평화의 방법론이 없고 오히려 전쟁과 폭력에 길들여져 있다고 하셨는데,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사실 시민사회단체의 운동론도 평화적 방법론보다 배타적인 방법론이 지배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계적인 반전 시위에서 다른 나라보다 한국 시민의 참여가 적은 것은, 우리가 폭력에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향민: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현존하는 사회에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폭력과 갈등을 토대로 만들어진 사회체제이기 때문이죠. 자본주의의 경우, 경쟁에서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다 갖는다는 논리가 통하는 세상이잖아요.

저는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담론은 고민을 못해 봤습니다. 생각했더라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노벨평화상 타신 모든 분들이 평화지킴이로 이라크에 들어가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말들도 하지만 저는 그런 거대담론보다 내 안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 안의 폭력성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이것을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으면 지구촌과 한국의 평화도 힘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일본에서 한 원숭이가 물에 고구마를 닦아 먹는 것을 보고 다른 모든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닦아 먹더랍니다. 근데, 왕래가 없이 떨어진 다른 지역의 원숭이들도 고구마를 물에 닦아 먹더랍니다. 이것은 볼 때, 사람들 개인의 선한 의지가 전 우주(지구촌 세계시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죠. 불교적으로 말하면 공업(共業)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평화가 개인에서 시작하지만,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닦아 먹듯 전 세계로 평화가 퍼져나가지 않을까요.


이상경: 저도 생각하기에 세상 전체의 평화는 상상하기가 힘들어요. 내가 집에서 가족과 나른한 오후를 보낼 때, 아무 생각없이 방에 누워있을 때, 개인적으로 잠깐 평화를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사람들이 욕망과 뭔가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평화를 느끼기엔 정말 힘들어 보입니다.

모든 전쟁의 원인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그런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부시도 국가적 이익을 얻으려고,  9.11 테러를 경험한 국민들의 반테러 정서를 이용하면서 정치적 행동을 하는 거 아닙니까. 이러한 개인적 이익에 대한 욕구, 더 나아가 국가적 이익에 대한 욕구가 있는 한 지구촌의 평화는 좀 어렵지 않을까요.


김광하: 역사적으로 가장 전쟁이 많았던 때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였을 겁니다. 전국시대 말기에 가면 120여개 국가들이 전쟁을 통해서 통합되어 7개 국가만 남습니다. 이랬으니 얼마나 전쟁이 많았겠습니다. 한 나라, 한 나라가 없어질 때마다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진시황의 진나라와 중원의 진나라가 천하를 놓고 겨룰 때, 자존심 강한 중원의 진나라 병사들은 전투에 져서 포로로 잡힌 뒤, 진시황이 풀어주면 다시 덤비곤 하는 거예요. 너무 지겨웠던 진시황은 중원의 진나라 사람을 50만명 가량을 파묻어 죽였다는 거예요. 다시는 덤비지 못하게. 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입니까.

춘추전국시대에 공자 같은 분은 당시의 전쟁과 폭력의 원인을 서로 왕이 되기 위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싸운다고 보았죠. 계급질서를 받아들이면 싸울 일이 없다고 여겼던 거예요. 자기가 속한 계급에서 자기가 지킬 도리만 다하면 사회질서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다고 본 거죠. 공자는 그래서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夫夫 子子)라는 말을 남겼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이렇게 자신의 위치와 계급에 맞게 처신을 해야 하늘의 도리에 맞게 사는 것이라고 공자는 주장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모시며 공경하고, 이런 습관이 커서는 왕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충성하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로 이어지는 거죠.

그러나 도가(道家)의 입장은 어떤 계급도 계급에 묶어놓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종을 통해서는 사회적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죠. 왕이 잘 살면 나도 잘 살고 싶다는 거죠. 나는 백성이니까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법을 누가 만들었지요. 그게 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아닙니까. 자연의 법, 어디에도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본래 백성도 없고 왕도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왕만의 풍요롭게 사는 것은 불평등하기에 어떤 계급도 계급의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계층 간의 불균형이 있을 때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도가는 주장했던 것입니다.


"분노의 사회의 불균형한 조건에 발생한다"

사회: 사람들은 분노를 개인적 감정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노, 즉 화를 심리적 수행으로 이겨내려 하지요. 그러나 분명 분노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노가 지닌 역사성과 사회성을 통찰하지 못하면 결코 분노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수행한 수도자들이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내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수행을 한 분들이 화를 내다니. 그래서 주위 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수행하신 분들이 왜 저리도 쉽게 분노하고 화를 표현하는 것입니까?"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을 했지만 제가 만족할만한 답은 없었습니다. 특히 "화를 냄으로써 우매한 중생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덕 높으신 스님의 화는 그 자체가 깨달음의 방편이었다"라는 어느 스님의 글을 읽었을 때는, 도무지 그 스님께서 이해하시는 불교가 무엇인지 헛갈리기조차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분노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올바르게 성찰하지 않고서는 개인적으로 분노, 화냄을 다스릴 수 없다고 봅니다. 결코 분노, 화냄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김광하: 분노, 즉 화는 우리 삶의 불균형한 조건 속에서 생기는 때문에 개인적으로 참는다고 화를 억제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떤 종교와 도덕도 화를 개인적 수행의 문제로만 본다면 화를 이겨낼 가르침을 줄 수는 없습니다. 화냄의 원인은 사회의 불균형한 조건에 있습니다. 그래서 화의 원인을 개인적, 심리적, 도덕적으로 보고 풀어간다면 미로의 성에서 영원히 길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탐욕도 인색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인색함을 버리고 베풀라고 했지요. 이익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탐욕이 있고 탐욕의 밑뿌리에는 인색함이 감춰져 있지요. 그런데 불교가 관념화되면서 탐욕, 즉 탐내는 마음의 원인을 관계성의 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의 정서적 불균형의 문제로 본 거죠. 사회·윤리적 도덕성을 개인의 문제로 바꿔 개인 수행의 문제로 돌려버린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런 사회·정치적 관계성으로 탐욕과 분노를 보지 않고 관념적, 개인적 수행의 문제로 탐욕과 분노를 본 당대 승단의 편협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죠.


이정호: 화도 화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지듯이, 평화도 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평화라는 것을 명확한 상으로 만들 경험을 쌓지 못했고, 사회적 인식도 부족하다. "전쟁이 없는 것이 평화다"라는 논리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담기에는 좀 모자란 듯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귀농, 생명성, 자주적 삶, 작은 공동체 속에서의 평화적 삶, 지역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며 삽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삶과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 이 둘 사이의 접점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지금 나는 나의 평화, 세상의 평화를 위해 바르게 살아가고 운동에 참여한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회: 이정호 사무처장은 "전쟁이 없다고 평화는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시는지요. 여기에 동의하신다면 토론을 '내 안의 평화'에 중심을 두어 풀어가 보도록 하지요.


"경쟁과 폭력이 일상화된 삶"

조최윤순: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작년 가을, 불교귀농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엔 바로 귀농하고 싶더라고요. 육체노동을 하든, 무엇을 하던지 마음도 편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자체가 경쟁사회입니다. 경쟁을 하면서 저도 꽤 많이 지쳤습니다. 근데 아직도 귀농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장애물이 가로막더군요. 그래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현대사회에서 전쟁과 경쟁은 한 배에서 나온 형제 같아요. 평화는 경쟁이 없는 사회가 가능해야 이뤄지지 않을까요. 제 자신도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경쟁에서 뒤 처지는 것 같고. 경쟁에서 뒤 처지면 생존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저는 그래서 경쟁이 있는 한, 평화가 이뤄지기는 힘들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평화를 참 멀고 힘든 길 같습니다.


사회: 얼마 전 경실련에서 10명의 간사를 뽑는데, 100명이 지원을 했답니다. 모두 고급인력들이 지원했다고 해요. 그래서 저희 경불련 간사들이 모여서 우리도 뒤 처지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예전에는 앞서려고 공부를 했는데, 지금은 현상유지를 위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지키기 위해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항상 타인에 대해 날이 서 있다고 봅니다. 그러다 보니 폭력에 대해 무감해지지요. 폭력이 일상화되면 평화는 관념 속의 유물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시대에 평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 답답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기반 자체가 나를 '경쟁과 폭력의 일상화'로 몰아넣는 거죠. 저같이 노숙자 쉼터에서 일하는 사람도 그런데, 해운회사 다니는 이상경씨는 아침부터 정신없이 움직이는 경쟁조직에서 일한다면서요. 참 힘들 것 같습니다.


이상경: 우리는 전쟁이죠. 외국 사람들하고 일하지만 로컬업체하고도 일합니다. 일을 따오려면 개인적 친분도 있어야 되고, 대접도 해야 됩니다. 저녁에 접대 자리로 술 먹으로 갈 때, 우리 영업하는 사람은 전투라고 합니다. 다음날 술 먹고 늦게 오거나 결근해서 자리에 없으면 농담삼아 전사했다고 해요.


이정호: 우리 내부의 평화의 씨앗을 싹틔워야 합니다.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평화의 밑그림을 그려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당장 이라크 전쟁과 북 핵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냐"는 질책에도 주눅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라크 전쟁 반대와 북 핵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그것대로 끊임없이 주위사람과 노력을 해야 합니다만, 내 안에 있는 평화의 힘을 믿고 신념을 가진 채 항구적인 평화를 일궈나가는데도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평화를 나에 적용하고, 사회에 적용하려는 진지한 노력들이 시도돼야 합니다.


이상경: 제가 다니는 회사 동료들, 주로 남자 사원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을 들어보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의 전쟁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들은 "우리 회사 배가 기름때고 가야 하는데, 기름 값이 오르면 안 되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많이 보겠다"는 둥 "전쟁하려면 빨리 하지. 왜, 기름 값 오르게 질질 끄냐." 이 따위 이야기나 하고 있어요. 참 답답한 절망감을 느껴집니다.

얼마 전 개그우먼 이경실씨가 남편한테 맞았을 때도, 회사 남자 사원들은 "돈번다고 얼마나 유세를 했으면 그랬겠냐"는 등 정말 한심한 말을 지껄였죠. 도무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요. 폭력이 그들의 일상 속에 깊게 배어 있어 보입니다.


이향민: 지난 80년대 운동을 할 때엔, 명확한 것이 있었어요. 옳고, 그름에 대한 명한 구분이 운동하는 우리들에겐 있었어요. 그러니 갈등이 없었지요. 명쾌하고 단순하게 세상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런 이분법적인 인식을 갖고 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기분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황폐해졌죠. 그래서 농담삼아 말하고 합니다. "내가 불교를 몰랐다면 단순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저도 구조의 문제와 개인의 수행이 함께 가지 않으면 평화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대안적 삶을 지향하고, 미래를 길게 내다봐야 세상과 개인의 평화를 설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임효정: 여운 선생님 말씀 중에 역사적으로 한번도 평화가 있었던 적이 없다고 했다고 하셨는데, 저도 동의를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평화가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에 대부분 동의하시니까, 다른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운동권의 사람들이 사회와 개인의 변화 중에서 사회개혁을 주로 선택하거나, 또는 함께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불자이다 보니, 개인의 변화가 먼저라는 생각이 있어요. 개인의 변화가 선결되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폭력을 극복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사회: 저도 군대에서 가혹한 폭력을 겪어봤습니다. 군대는 폭력에 무감각해지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죠. 이렇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성인남자들은 폭력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죠. 그래서인지 사회 곳곳에 폭력의 문화가 깊게 스며들어 있어 보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폭력과 경쟁을 부른다"

김광하: 경쟁을 피해 귀농했던 사람들도 지금 경쟁에서 자유로울까요? 아닙니다.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어요. 유기농 농산물 내 놓고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죠. 경쟁을 피해 농촌으로 내려 간 사람들도 결국 시장이 내세운 경쟁의 줄 세우기에서 벗어내기 못한 것이죠. 왜 그럴까요? 그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관념적 인격을 만들지요. 국가, 법인 등이 그것 아닙니까.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국가를 만들어 국부를 충당하고, 법인이라는 인격을 만들고 재화를 비축하고 있어요. 여기서 국가나 법인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만들어졌다고 알 수 있죠. 미국의 이라크 전쟁 야욕도 결국 미국이라는 국가의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재화비축으로 해소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도리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폭력을 부르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구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버릴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평화로 가는 길입니다.


사회: 아까, 이상경씨가 "회사 직원들이 '전쟁이나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라는 휴머니즘이 없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한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말속에 깔린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은 이해합니다.

지난 IMF 국가위기 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집단 패닉상태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이 때 한국이 취한 방법은 외환보유고를 계속 늘리면서 축적하는 것이었죠. 이 엄청난 공포를 겪은 상태에서 직장인들이 가졌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상당했으리라 봅니다. 이 공포는 계속되고 있고요. 이상경씨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한 번 말씀해 주시죠.


이상경: 사회자께서 IMF 국가위기 뒤 심리적 공황상태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엔 더 심해졌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고용에 대한 만연한 불안감입니다. IMF 국가위기 전에는 평생 직장이라는 생각에, 특별한 실수가 없다면 55∼60살까지는 다니겠지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연합뉴스에서 현재 체감하는 정년 나이를 물었더니 '38.5세'였어요. 그 나이가 되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오면 대략 27∼29살인데, 한 10년 정도밖에 돈을 못 번다는 것이죠.

지금 직장인들의 불안감은 더 커졌습니다. 이런 불안감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다 보니, 부패도 더 많아지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회사가 날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능력이 없으면 퇴직 당할 수 있다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기 때문에, 회사원도 몸값을 계속 올려서 직장을 자주 옮기려고 하지요. 회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이죠. 우리시대 직장인들은 대충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경쟁사회에서 살고 있지요.


이정호: 그 속에 평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네요!


김광하: 나는 각자가 우리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평화의 작은 실천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호: 우리가 분노없는 저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또한 저항의 담론이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저항의 개념이 아니라, 즉 네거티브한 것이 아니라 자비(慈悲)있는 지향 같은 포지티브한 담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역사 속에서나 현실에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제안을 하는데, 사람들이 안 따라주면, 분노하잖아요?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가지고 좋은 것을 하든 간에 그것을 해 나가는 방법론도 철저하게 자비(慈悲)있는 지향에 익숙해졌을 때,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평화를 이루는 작은 씨앗은…"

사회: 이제 현실에서 평화를 이루는 실천 방법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해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해낸 아이디어 중 하나는 중·고등학생에게 편지를 써보는 것입니다. 한반도가 북 핵 위기 때문에 싱숭생숭하지 않습니까? 전문가라는 분들 중에서 한마디 안 한 사람이 없을 정도죠. 근데 이것이 오히려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어요. 위기인 거 다 아는데, '위기다, 위기다' 이 말만 남발하고 있어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야기해 줄 때인데,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지요. 그래서 평화가 무엇인지를 중·고등학생에서 알려주는 편지를 써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평화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해 줄 동요대회를 열든지, 평화를 알리는 공익광고를 만들어 TV에서 틀어 주던지. 작은 것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위기를 강조, 더 나아가 강요하는 것보다 평화를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위기를 강조하는 많은 전문가들의 마음 속에는 한반도의 북 핵 위기를 계기로 명예와 이익을 얻어보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참 거부감이 많이 들어요.


이향민: 드러나는 폭력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막기가 더 쉬워요. 그보다, 나에게 가장 힘든 폭력은 내 안에 있는 시기심과 질투심, 이익을 위한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폭력이고 지속될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악의 의지를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을 하면서 평화를 지향하고 폭력을 없애는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 실천이 아침, 저녁으로 명상을 해요. 20∼30분 동안 자비관이라고 하는 것을 해요. 그것을 매일 하여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커다란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을 일치시켜 인간이 변화해 갈 때, 평화는 만들어져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경: 요즘 보면 서구인들도 동양적 세계관을 가지고 불교적 수행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부시가 기독교적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너는 악(惡), 나는 선(善)'이라고 전쟁을 밀어 부치고 있지만, 세계 어느 사람들도 이라크가 악이고 미국이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부시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지요.

저는 일반인들에 대한 교육이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쾌락공화국일 뿐, 인류의 미래, 우리 자녀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 안 하고 살잖아요. 오히려 박찬호가 공을 몇 개 던지고, 연봉이 얼마고, 이런 유명인과 연예인들 사생활에나 관심이 있어요. 제발 방송에서 이런 말초적인 화면들을 안 내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조최윤순: 작년에 여중생 사망사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더구나 북 핵문제가 보태지고 대통령 선거까지 겹쳐져 소파재협상과 평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컸다고 봅니다.

그때 저는 반전평화 구호가 촛불시위를 뒤덮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들을 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열망이 반전평화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2월 15일 이라크 전쟁 반대 세계시민 행동의 날에 대학로에 5,000여명 정도밖에 안 나와 실망했어요.

저는 그런 이런 활동을 통해서 평화를 가꿔가고 싶어요. 같이 참여해서 우리가 얼마나 평화를 원하는지 알려내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광하: 우리가 삶을 성찰할 수 있으려면, 죽음을 우리의 삶 안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죠. 죽음을 우리 삶의 한 가운데로 가져와서 죽음의 의미와 과정을 밝혀봐야 합니다. 모든 분노와 폭력의 뿌리가 죽음에 기원하고 있기 때문에, 삶 속에서 죽음을 성찰해본다면 분노와 폭력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향민: 죽음은 일상적으로 일어나죠. 그래서 사람들이 굉장히 두려워하고, 파괴의 의미로 받아들이잖아요. 근데 여운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죽음을 친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김광하: 예 그렇습니다. 아주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성찰해야 합니다. 영안실에서도 사진만 보고 고인을 못 보지 않습니까. 실제로 인디언들에게 임종이 굉장히 중요한 행사라고 합니다. 문상 가서 죽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이야기하고, 잘 가라고 인사하고, 고인과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그런데 어느새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친근한 죽음에 대한 문화가 사라졌어요.


이상경: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고. 이렇게 말하니 죽음이 두렵기는 하지만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이향민: 실상사 귀농전문학교에서 저희가 언뜻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는데, 우리는 50이나 60 이후에 대한 준비를 전혀 안 하고 있다고.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귀농전문학교에서 이분들을 모시고, 죽음에 대한 교육과 준비를 해나가면 어떻겠냐고" 이야기들은 나눴지요.


사회: 열띤 이야기가 될 때, 정리하려니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당대비평이라는 계간지가 주장했던 한국사회에 스며있는 '일상적 파시즘'의 폭력성에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그렇게 주장했던 그들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번 알았습니다. 어떤 개인의 글과 인격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이죠. 그래서 논리를 세우는 것보다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이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분석을 아무리 멋지게 해도 그것이 삶으로써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없는 말의 성찬일 뿐입니다.

오늘 토론에서 실천적인 아젠다는 나오지 않았으나, 평화의 토대와 기틀을 만들 수 있는 삶들을 창조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던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이런 대화 자리가 계속되어 다음에는 아젠다까지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자리를 정리할까 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