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정체성(귀속문제)에 대한 중국의 연구 현황과 논리
서길수(서경대, 고구려연구회)
Ⅰ. 머리말
Ⅱ. 고구려 정체성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논의와 그 전개과정
1. 1980년 이전의 정체성 논의
2. 1980년 이후의 정체성 논의와 귀속문제의 대두
3. 1990년 이후 고구려 귀속문제의 본격적 논의
4. 2000년대의 국가적 과제로 등장한 귀속문제
Ⅲ. ‘고구려=중국사’에 대한 중국의 논리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2.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3. 고구려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갈래 민족이다. 조선족이 아니다?
4.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이다.
5.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지 않았다.
6. 한반도 북부 북한지역도 중국의 역사다.
Ⅳ. 맺는 말
Ⅰ. 머리말
불과 15년 전만 해도 중국의 역사책들은 모두 고구려를 한국의 역사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중국이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와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현재 많은 연구기관과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에서도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수민족사를 연구하는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아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현재의 한국에 대한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
중국 학계가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다’는 주장을 편다는 것은 한국 학자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최근 중국 정부기관인 사회과학원이 고구려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는 광명일보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기사를 실었다는 보도를 접한 한국 학자들은 그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소홀히 했었다. 이제부터라도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중국은 그동안 20년 이상 수 백 편의 논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계속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연구사를 분석․정리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논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장에서는 지난 50년간 중국 학자들의 연구사를 정리하여 그 전개과정을 자세히 분석한다. 3장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를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3장의 내용은 너무 방대해 앞으로 더 자세히 발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판 내용과 참고 자료를 덧붙이기로 한다.
한 국가의 정체성이란 그 국가의 참된 형체를 말하는 것이고, 귀속이란 재산, 권리, 영토 따위가 특정한 주체에 붙거나 딸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귀속문제라는 것은 현재 분쟁이 되고 있는 지역의 재산, 권리, 영토가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에 많이 사용하는 것이며, 귀속이라는 말 자체에는 다분히 정치적 용어라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다. 우리가 1300년 이전의 고구려사를 학술적으로 논의할 때는 당시 고구려를 주체로 놓고 그 나라의 참된 존재가 무엇인가에 연구가 집중되어야 한다. 바로 고구려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귀속문제’라는 용어도 사용하기로 한다.
Ⅱ. 고구려 정체성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논의와 그 전개과정
1. 1980년 이전의 귀속문제 논의
1) 중국 교과서의 내용을 통해서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고구려사=한국사”.
청나라는 고구려의 후손이었던 만주족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고, 청나라 지배층의 고향이고 정신적인 성지였던 압록강 두만강 지역은 소위 중국의 한족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봉금지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청나라 때는 고구려의 귀속문제가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청나라가 멸망한(1911년) 뒤 들어선 국민당 정부에서는 공산당과의 패권다툼에 휘말려 고구려 문제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1932년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12년 동안은 만주국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귀속문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 1980년까지 30년 동안은 중국도 당연히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라고 인정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교과서에 나타난 고구려 서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중국의 중․고․대학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는 주로 국가의 검인정을 받아 공급되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인식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0년대 중국의 중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고구려는 조선의 한 국가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외침략전쟁이라고 쓰고 있다. 1981년 출판된 중학교 『세계역사』 상권에도 ⌈고구려는 조선반도 북부의 노예제국가⌋라고 하여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대학 역사교제 가운데는 세계 중세기사(中世紀史)가 가장 대표적이다. 1956년 고교출판사(高敎出版社)에서 나온 『세계중세기사강의(世界中世紀史講義)』처럼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를 취급하지 않은 교과서도 있지만 50년대 『세계중세기사(世界中世紀史)』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고구려를 모두 한국의 고대국가로 소개하였다. 또한 60년대 교육분야에서 통합해서 펴낸 것으로, 주일량(周一良) 등이 쓴 『세계통사』 중세기 부분에서도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는 모두 고대 한국의 국가라고 쓰고 있으며, 1978년 14개 대학이 종합적으로 펴낸 『세계고대중세기사(世界古代中世紀史)』에서도 ‘고구려는 중국에서 일어나 국경 넘어(跨)에 있는 한 민족이다’고 하여 고구려가 중국 역사가 아니고 세계사이며 한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현재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가 한국사라고 했던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국내외 정치 상황의 영향이다. 50년대 중국은 각 방면이 모두 회복, 발전에 여념이 없었고, 전국 상하가 항미원조(抗美援朝)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중국․조선 양국 인민의 우호, 단결이 일종의 정치조류가 되었다, 연구논문은 물론 출판 서적도 모두 중․조 우의라는 문장으로 둘려 쌓여 있었다. 둘째, 학술연구상황을 보면 동북지구 고대 봉국(封國)과 민족정권에 대한 우리나라 학자의 연구가 결핍된 상태였고, 전문 연구저작이 없었으며 논문도 많지 않았다. 교재 편찬, 특히 세계사 교재는 소련 『세계통사』와 일본 『동양사대계』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다.
실제 50~60년대 중국에서 나온 고구려에 관한 논문은 불과 20편 남짓으로 주로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보고가 주를 이룬다. 이어서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문화혁명기에는 단 한 편의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중국이 특별한 방향으로 연구를 시작하기 전 주변 국가의 모든 역사서는 고구려를 당연히 한국사로 인정했다는 것을 방증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2) 조․중 공동 고고학발굴대를 통해서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고구려사=한국사”
고구려의 정체성에 대한 기존 학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은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이 한국전에 참여하여 두 나라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위해 싸운 혈맹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중국과 북한이 이와 입술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1963년 8월 23일부터 1965년 7월 19일까지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실시한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이다. 당시 고구려사 및 발해사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실이기 때문에 좀 자세하게 보기로 한다.
(1) 1단계(1963. 8. 23~10. 23, 2개월)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7명(2개조로 나누어 편성)
답사 지점 : 3개 성, 1개 자치구의 23개 시
답사 내용 : 10개 사이트 발굴, 7개 박물관과 관련 기관 참관
1조 답사지역 : 내몽골자치구의 적봉, 영성, 요령성의 심양, 요양, 해성, 개평, 무순, 여대, 금현, 금주, 금서, 조양, 객좌에서 주거지 23 곳, 고구려 성터를 비롯한 성터 9 곳, 고인돌 3 곳, 청동단검 출토지와 옛 무덤떼 12 곳, 모두 47 곳. 그 가운데 영성현 남산근, 무순시 돌상자무덤, 요양현 양갑산과 여대시 윤가촌 남하와 후목성 역 무덤을 시굴하였다.
2조 답사지역 : 요령성 환인, 길림성 집안, 길림, 돈화, 연길, 화룡, 훈춘, 흑룡강성 영안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무덤떼 2 곳, 고구려, 발해, 요, 금의 성터 12 곳, 고구려 무덤떼 11 곳, 모두 25 곳을 답사하였다. 그 가운데 집안현 역전 유저과 돈화현의 유정산, 화룡현의 북대, 연안현의 대주둔, 발해 무덤떼의 일부를 시굴하였다.
(2) 2단계(1964. 5. 10~7. 23, 2개월 13일)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7명(2개조로 나누어 편성)
1조 발굴지역 : 요령성 여대시 후목성역의 강상, 누상, 쌍타자, 금현 양갑점의 소서구, 동가구, 용천 등 5 곳 유적 발굴. ᄀ 가운데 누상, 소소구 와룡천의 발굴으 마무리하고 강상과 쌍타자 유적은 끝내지 못함.
2조 발굴지역 : 길림성 돈화현 유정산의 발해 무덤께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의 발해 상결 용천부 터를 발굴굴하였다. 육정산 무덤떼 발굴 마무리, 상경 용천부 터 발굴 첫 단계 시작.
(3) 3단계(1964. 8. 20~10. 20. 2개월)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7명(2개조로 나누어 편성)
1조 발굴지역 : 강상, 쌍타자 유적 발굴 계속, 윤가촌 남하와 장군산 유적 새로 발굴
2조 발굴지역 : 발해 상경 용천부 터를 계속 발굴하여 마침.
(4) 4단계(1965. 5. 23~7. 19, 1개월 25일)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1명
발굴지역 : 요령성 심양시 정가와자 유적을 발굴하고 보고서 초고의 편집을 마쳤다.
두 나라는 공동발굴대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 특히 북한은 압록강 북쪽의 역사 유적에 대한 답사와 발굴이라는 성과에다 발굴한 많은 유물을 직접 북한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광개토태왕비 원석탁본도 입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러한 밀월관계는 당시 두 나라 사이에 고구려의 정체성을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조중 공동 고고학발국대의 활동를 상세하게 다룬 것은 앞으로 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국간의 발굴사업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가 한반도에서 우리 학자가 중국에서 발굴하고, 나아가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하여 이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바람이다.
역사고고학에서 있었던 두 나라의 밀월관계는 바로 이 공동발굴대의 보고서 때문에 깨어지고 만다. 북한에서 1966년 발행한 『중국 동북 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가 그 원인이었다고 한다. 물론 북한측의 말을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중국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발굴보고서는 발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기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요령성 문물고고연구소의 한 책임자는 “그 뒤 단 한 번도 학자 교류가 없었으며 학술지 교환까지도 끊어버렸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북한은 주체사상의 역사적 바탕으로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공동 발굴대에서 발굴한 내용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2) ‘고구려=중국사’ 논리 개발의 시도
이 기간에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중국 학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를 어떤 형태로든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애국적 사관을 가진 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역사학계에서는 김육불(金毓黻)이었고, 고고학계에서는 이문신(李文信)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할 정도는 아니고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밝히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김육불의 『동북통사』 : 한족(漢族) 위주 역사서술의 배경과 한계
한국의 학자들에게도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김육불은 현재 중국에서 ‘고구려=중국사’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맨 먼저 인용하는 학자로서 ‘고구려=중국사’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다. 김육불은 만주족이라던가 심지어는 조선족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것은 김육불의 이력과 학문적 성향을 자세히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김육불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고찰해 보며 동시에 김육불이 왜 고구려를 비롯한 압록강 북녘의 땅을 중국사로 편입시키려 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김육불 1887년 현재 요령성 요양에서 태어나 1962년 사망한다. 엄격한 훈장 집에서 태어난 김육불은 6살에 글방에서 공부하다 19살에 소학당에 들어가 10년만에 중학당, 대학당까지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다니던 북경대학당 문학문을 졸업하므로 해서 김육불의 출세는 보장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김육불은 바로 심양문학전문학교 교사 겸 봉천성 의회 비서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 뒤 당시 중화민국의 관리로서 요직을 거치면서 15년 뒤 1931년 요령성 교육기관의 최고 책임자인 교육청 청장이 된다. 김육불은 관리로 있으면서도 꾸준히 연구에 전념하여 1927년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이란 책을 낸다.
그러나 1932년 만주에 진출한 일본의 세력을 업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을 세우면서(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한다) 당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육불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3개월 남짓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省)도서관 부관장을 맡아 도서 정리를 하였고, 이어 『봉천통지(奉天通志)』 편찬직을 맡으므로 해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하게 된다. 이 때 1933년부터 3년간 편찬한 『東北叢書』가 1936년 『遼海叢書』라는 이름으로 심양에서 출판된다. 1936년 문물을 고찰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동경을 간 뒤 상해로 도망가 자유를 찾는다.
상해를 거쳐 남경으로 간 김육불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로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동북통사』를 비롯한 중요한 저서를 남기게 된다. 1936년 봉천에서 편찬에 참여했던 『奉天通志』, 260권을 비롯하여 『遼海叢書』, 『渤海國志長編』 20권을 출판하게 되면서 학문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그 뒤 대학에서 강의한 노트를 바탕으로 『東北通史』(上篇), 『宋遼金史』, 『中國史學史』를 출판하게 되는 데 이 때 쓴 『동북통사』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동북통사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육불의 동북통사가 갖는 시대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20세기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뒤 중화민국이 들어섰으나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300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을 내세워 만주국을 세움으로 해서 만주의 주인은 만주족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중국 전역을 공략하고 있었던 때이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서 일본은 서양적 방법론으로 무장된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지리학자들이 만주에 보내 만주의 정체성을 발굴하고 있었다. 일본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고 그들 밑에서 자료정리를 담당했던 김육불은 앞으로 만주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만주가 중국의 역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경 등지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만주가 중국 한족의 역사 현장이었다는 것을 연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936년 9월 김육불은 남경 중앙대학 역사계에서 만주에서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동북사를 강의하였다. 8개월간 강의한 내용으로 『동북사고(東北史稿)』를 완성하였다. 그 뒤 37년 안휘성 관리를 거쳐 1938년 중경으로 간 중앙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그 강의안을 사용하다가 1941년 가을 삼태동북대학(三台東北大學)에 부임하면서 책으로 낸 것이 바로 『동북통사』이다. 당시로서는 중국 학생들에게 일본에게 빼앗긴 만주를 회복하기 위해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도 만주가 중국 한족의 역사라는 강의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김육불의 의도는 『동북통사』의 시대구분만 보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고구려 705년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은 3가지 시대로 나누고 있다.
제1기 한족(漢族) 개발시대(상고~漢․魏)
제2기 동호 부여 두 종족의 각축시대(수나라 초기)
제3기 한족(漢族) 부흥시대(수․당)
시대구분만 보아도 한족이 동북지방에 어떻게 진출했고 어떻게 발전했는가 라는 관점에서 동북사를 서술하려 했던 김육불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김육불의 동북통사를 보면 그의 의도대로 끌어가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기인 한족 개발시대는 10절로 나누었다. 1절에서는 만주에서 가장 오래 된 숙신족이 산동에서 이주해 왔으며 2장에서 4장까지는 동북지역이 기자조선과 연나라, 그리고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는 내용을 이은 것이다. 고구려에 관한 내용은 두 개 절에서만 나오고 나머지는 주로 선비족에 관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학자들은 고구려를 다룬 6절에서 ‘고구려=중국사’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육불은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부여족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한 민족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림 1> 동북민족 계통표
고구려에 관한 두 번째 절은 마지막 10절인데 한 절을 모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를 침략에 할애하고 있다. 219년 후한이 멸망하고 중원에서는 촉, 위, 오 3국이 정립하여 싸우느라고 편한 날이 없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고구려 동천왕은 242년(동천왕 16년) 서안평을 쳤고, 이를 계기로 위나라와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는 크게 패했으나 위나라는 고구려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3국이 싸우느라 고구려에 계속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265년 위나라가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비록 한 때 싸움에 패했지만 위나라는 46년 만에 망해버리고 고구려는 그 뒤 더욱 강성해졌는데 김육불이 이 관구검의 침략에 한 절을 모두 할애한 것은 한족이 고구려 땅을 침범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제2기는 동호족인 모용씨와 부여족인 고구려의 각축시기이고 이때는 한족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쓰고 있으며, 제3기에 제목을 한족 부흥시대라고 붙였지만 고구려 말기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던 내용이 거의 전부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김육불의 동북통사는 고구려와 한족의 전쟁사를 다루었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은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부여를 이어받은 동족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고, 두 전쟁을 통해 양국이 서로 다투었던 국제관계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3) 고고학자 이문신(李文信)의 한족(漢族) 유물을 찾기 위한 노력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지만 만주에 고구려의 흔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 고고학자가 있다. 이문신은 1903년 요령성 복현(復縣)에서 태어나 1982년 80세에 사망한다. 1921년 청년 이문신은 길림시 용담산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기 시작해 1937년 ⌈길림 용담산 유적보고(吉林龍潭山遺迹報告)⌋라는 논문을 처음 발표한다. 그 뒤 심양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당시 만주지역에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 만주 전역의 발굴에 참여하여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가장 유능한 고고학자가 되었다. 1945년까지는 만주국의 관리로 일본인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중국의 한문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1946년 해방 뒤 고고학계의 주요 직책을 두 거치면서 쓴 논문에서는 한족 유물을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해방 이후 처음 쓴 ⌈길림시 부근의 사적과 유물⌋이란 논문 서문에 보면 그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 길림은 만주어로 ‘지린우라(吉林烏拉)’이다. … 북으로 나아간 한(漢)의 문명 역시 이곳이 기점이 된다. 동북 고문화의 옛 자취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요양․심양(遼沈) 중심과 함께 멀리 길림시까지 확장해 가는 것이 도리로 보아 당연하다. 진보적인 사람을 억누른 청대(淸代) 학자들이 황실 종족(옮긴이 : 만주족)의 개인 의견을 유지하기 위해 옛 역사를 말살하고 속설을 거짓으로 꾸며내 소위 한인세력은 개원과 철령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奏)나라와 진(秦)나라가 군현으로 봉한 땅을 지극히 먼 땅(大荒)의 밖에 있다고 보았는데, 사료가 부족하고 연구인력이 적어, 우리나라 학자들조차도 변강에 대한 연구를 지극히 소홀히 하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 자란 이 땅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서문에서 이문신은 지금까지의 연구가 만주족인 청나라의 어용학자 때문에 한족의 역사가 말살되었다고 보고 “만주 땅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한족으로서 어찌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그 역사가 한족에 속한다는 논리보다는 만주에 한족의 역사도 있었고 그 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도이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이 만주와 조선(滿鮮)을 경략하면서 부여족은 ‘현토군’의 속국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부여 유적이 남아있듯이 한(漢)의 문명도 남아있어야 하고, 이는 가능하다. 이것은 특별히 문헌에서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출토된 유물을 고찰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고구려 이전 부여) 유물은 한(漢) 문화가 만들어낸 것과 도착민이 남긴 것이 있다.
이 논문의 결론을 보면 이문신의 순수 학술적인 면을 떠나 한족들에게 만주에서 한족의 역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격문 같은 인상마저 준다.
원래 동북의 문화가 진한(秦漢)의 변색(邊塞)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땅속에서 발굴한 재료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선인들의 풍부하고 위대한 업적, 기와 한 조각 벽돌 한 장은 모두 수없이 많은 피눈물을 흘리며 쌓아 발전시킨 것인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 비록 문헌이 부족하다는 흠이 있지만 유적 유물 연구를 중심으로 문화사에 종사하는 우리가 가야 할 정도를 어찌 길림시 한 구석이라고 가지 않겠는가?(亦吾人從事於文化史者之正路, 豈吉市一隅爲然耶)
2. 1980년 이후의 귀속문제 논의
(1) 중국의 개방과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부활
1975년까지 중국의 고구려 연구는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발표된 20편 남짓한 논문은 대부분 고구려 유적지에서 종사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발굴보고 수준이었다. 1965년부터 1974년 10년간은 문화대혁명 때문에 단 한 편의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 뒤 80년 들어서면서 고구려 연구는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1979년 이후 중국이 개혁개방과 동시에 학자들에게 고구려사 연구가 양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이후 본격화된 중국의 소위“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家)”라는 중국의 민족정책의 확립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통일적다민족국가에 대한 논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시작되었다. 50년대 학계는 두 가지 견해로 나뉘었다.
첫째, 백수이(白壽彝) 같은 학자들이 내놓은 것으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범위를 바탕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이래 이 토지에서 살던 선민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며, “황조(皇朝)의 강역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역사상의 국토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고 보았다. “우리의 역사 작업이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 편향으로 빠지기 대단히 쉽다” “우리를 국사 조대(朝代) 하나하나를 고립된 땅으로 보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고, 역사와 우리 현재의 사회생활의 결합할 수가 없다”
둘째 손조민(孫祚民)이 주장한 것이다. 그는 “중국고대사의 조국 강역과 소수민족의 문제는 역사적 태도와 변증의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중화인민공화국 국토 범위 안에 사는 각 민족(과거역사 상의 민족 포함)은 모두 중국 민족 대가정의 구성원이며 그들의 역사는 모두 중국역사의 일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역사 단계는 반드시 각 족(族) 왕조의 강역이 역대 국토의 범위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각 해당 왕조 강역 밖에 있는 독립된 민족국가는 당시 중국의 범위 안에 포괄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러한 독립민족국가가 어떤 원인 때문에 점차 한족에 융합되거나 한족 왕조에 통일된 이후는 중국의 민족 성원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도 조국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건국 초기의 이러한 논쟁은 백수이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여 오늘날 국토의 범위를 정하는 원칙으로 수 십 년간 유일한 표준이었다.
80년대 들어서 이 문제는 두 번째 큰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논쟁을 일으킨 것이다.
우선 양건신(楊建新)이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내 놓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진, 양한, 수당, 원, 명, 청 시대는 모두 기본적으로 전국통일의 시대를 실현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 발전의 근간으로 이 시기의 강역도 역사상 중국의 강역 범위를 확정하는 주요 표준이 된다. 언뜻 보면 손조민의 논리와 같아 보이지만 아주 새로운 관점이 엿보인다. 즉 한족의 왕조가 아닌 원나라나 청나라도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1981년 열린 ⌈중국 민족관련사 학술좌담회⌋에서 중국 민족과 강역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여기서 담기양(潭其驤)은 “신중국의 역사학자는 양수경(楊守敬)처럼 중원왕조의 판도만 가지고 역사상 중국의 범위를 정하는 논리를 다시 흉내낼 수는 없다. … 역사상 중국의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우리는 청조(淸朝)가 통일을 완성한 뒤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입하기 이전의 청조(淸朝) 판도, 구체적으로 말해 18세기 50년대부터 19세기 40년대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 판도를 가지고 우리 역사시기 중국의 범위를 잡는다. 소위 역사시기의 중국이란 이 범위를 말한다. 몇 백년이라고 해도 좋고 몇 천년이라고 해도 좋다. 이 범위 안에서 활동한 민족은 중국 역사상의 전권이라고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한다.”
담기양은 오늘날 강역을 표준으로 하자는 백수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역사상 중원왕조의 강역으로 표준으로 하자는 손조민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다른 관할형식이 당시 중국에서 시행한 주권과 관할의 표준이라는 양건신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전체 역사 시기, 몇 천년 이래 역사발전에 따라 자연 형성된 중국 전체가 역사상의 중국이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유일한 원칙이라고 말하며, 다만 “ 역사상 중국이 한때 역사상 중국 범위 이외의 지방에서 통제하고 있었다면, 그 지방이 역사상 중국 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몇몇 중국 왕조의 판도 안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승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중국 주변에 있는 모든 국가는 중국이거나 아니면 중국의 판도 안에 들어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80년대는 담기양의 주장이 크게 각광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귀속문제를 다루는많은 사람들이 담기양의 논문을 인용하고 몇 가지 책에서는 전문을 싣기도 한다.
1981년 ⌈중국 민족 관련사 학술좌담회⌋에는 동북지방에서 귀속문제의 핵심적 역할을 할 손진기가 참여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손진기의 논리는 담기양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는 내용이다. “역사상 대체로 안정적인 전통 강역을 역사상 민족과 정권으로 하는 귀속원칙을 만들었다”. 그 뒤 손진기는 귀속이론에 관한 논문들만 모아 책을 편찬하고 여러 논문집에 그의 논조를 발표해 동북지방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에 대한 이론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80년대 이후 이처럼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확산되면서 동북지방의 최대 현안인 고구려 발해 문제 연구가 본격적인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2) 북한의 『조선전사』 출간과 중국의 반응
한편 1979년 북한이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연구한 『조선전사』를 새롭게 내어놓았다. 특히 고구려사를 다룬 『조선전사』 3권의 경우 대외투쟁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루어 고구려의 ‘반침략적 애국투쟁정신’을 강조한다. 한편 북한은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부각시키기 위해 발해사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특히 발해의 고구려 계승문제에 큰 비중을 둔다.
80년대 중국 학계에 소개된 『조선전사』의 이러한 내용도 중국 학자들을 상당히 자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중국에서 번역이 된 1985년 이후 중국의 논문 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을 비판하기 위해 쓴 논문들이 여러 편 나온다.
(3) 연구 결과에 대한 분석
80년대 들어와서 고구려 민족의 원류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깊이 있게 연구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의 원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가장 많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고구려가 고이, 부여, 예맥 가운데 어디서 출발하였는가에 초점이 있었고, 때로 고구려와 중원 정권과 신속, 조공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고구려는 중국사라는 주장은 아주 미약했다. 물론 이 당시 조선족 학자들은 고구려가 독립된 고대 국가라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80년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중국동북사’라는 관점에서 역사, 고고학, 강역 같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학자들이 나오는데 귀속문제와 관련해서 몇몇 학자들이 주목된다.
그 첫 번째가 손진기이다. 1931년 강소성 무석(无錫)에서 태어난 손씨는 해방 후 혼란기를 거쳐 22세인 1953년 동북인민대학 역사계에 입학하면서 역사를 시작했고, 1959년 28세 나이로 길림성 해룡현(海龍縣) 사범학교 교사가 되면서 지방사 연구를 시작한다.
1987년 발표한 『동북민족원류』에서 고구려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고구려민족의 원류를 보면서 “과거에는 고구려민족을 조선민족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는데 이는 전면적인 고찰이 되지 못한다. 반드시 그 원류를 고증하여 판별해야 할 것이다”고 하며 고구려족의 기원을 맥족(貊族)으로 보았고 일부 예족(穢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기원은 예맥(濊貊)이라는 주장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맥족 가운데서도 몽고족에 가까운 ‘호맥(胡貊)’이이라고 주장해, 적어도 이 당시만 해도 손진기는 고구려 문화가 중원문화보다는 오히려 동호문화와 가깝다는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의 고조선인과 예인․백제인 가운데 고구려족에 융합된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구려와 같은 언어 같은 종족 관계였기 때문에 이들의 융합은 아주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300여 년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모두 고구려에 융합된 것이다. 부여족과 옥저족은 고구려족과 같은 말, 같은 종족이기 때문에 융합이 가장 빨랐을 것이다”고 주장해 이 내용만 보면 손진기는 적어도 당시 고구려 영토에 속한 종족들은 모두 언어가 같고 같은 종족이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서에 나온 일부 한족들의 기사를 바탕으로 고구려민족에는 ‘한족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손진기의 논리는 고구려 속에 융합되지 못한 민족이 있다는 강조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705년 동안 주변의 종족들을 받아들여 고구려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손진기의 ‘고구려인=한족’이라는 논리는 고구려 705년의 성격에서 찾기보다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고구려인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보았다. 종합해서 보면, 고구려 땅은 말갈과 신라가 나누어 차지했고, 그 백성은 돌궐․말갈․신라로 나뉘어 편입되었는데 당나라로 넘어간 고구려인까지 합하면 모두 네 갈래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당․돌궐․말갈의 후예는 지금의 중국 한족이 되었고 신라로 간 일부만 조선족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전반적인 내용으로 보았을 때 이 당시 손진기가 가장 자신 있게 내 건 논리는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인이 중국과 한국 어느 쪽에 많이 융합되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9년 손진기가 요령성 박물관의 왕면후(王綿厚), 요령성고고연구소의 풍영겸(馮永謙)들과 함께 펴낸 『동북역사지리』 두 권은 당시까지 나온 책 가운데 역사지리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심도 있게 고구려를 다룬 책이었다. 이 책은 고구려의 지명과 도성 및 산성의 현재 위치에 대해 과감하고 광범위하고 비정해 나가는데 두 군데 정도 고구려의 귀속에 관한 관점을 표시한다.
1권에서 후한 시기 고구려를 다루면서 “고구려 왕국은 한 대(漢代) 비군현(比郡縣)의 한 민족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가 가 한 대에 이미 정식으로 한나라의 판도에 들어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에 고구려를 독립국가로 본다거나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그 설치와 귀속에 관한 것을 논하지 않았는데 이렇게는 고구려왕국의 성질을 규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판단한 기준이 서한과 후한 사이의 왕망이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자 나라이름을 ‘하구려(下句驪)’로 했다가 후한 때 들어와 다시 고구려가 된 사실이다. 사실이 이 내용은 왕망이 고구려를 전쟁에 동원하려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반대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이 한나라에 귀속된다는 기준이라고 한 것은 상당히 논지가 약한 것이었다.
2권에서도 “종합적으로 볼 때 당나라 초기 50년 가운데 당이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은 5년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45년은 고구려가 주로 당나라에 신하로서 예속되어 있었고 당나라의 번속(藩屬)으로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논리의 주된 관점은 고구려가 당나라에 조공하고, 관직을 받았다는 전통적인 이론에 대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란 서로 적대국으로 고구려는 당당한 한 독립국이라는 관점에 대한 반박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동북지방사 연구에서 장박천(張博泉)의 연구도 주목을 받는다. 장박천은 80년에 쓴 현토군에 관한 논문을 바탕으로 1981년 쓴 『동북역대강역사』에서 ‘고구려는 항상 현토군으로부터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는 중앙에 조공을 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군량을 제공하고 군사를 내어 전쟁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또 고구려는 위(魏), 진(晋)에 신하로서 예속되어 있었고, 남북조에는 번국(蕃國)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985년 낸 『동북지방사고』에서는 “고구려는 한 대(漢代) 군현(郡縣)구역 안에서 발전하였고, 당시와 그 이후 구역의 확대도 원래 관할구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중원이나 중원 북방정권의 번국(蕃國)에 속해 있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다민족의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기 위해 진행한 전쟁이지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해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고 해서 고구려의 중국 귀속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80년대 귀속문제를 다룬 학자로는 경철화(耿鐵華), 동문륜(董萬侖)의 『동북사강요(東北史綱要)』, 동동(佟冬)이 주편한 『중국동북사』 등에도 비슷한 논조를 보이고 있다.
3. 1990년 고구려 귀속문제의 본격화
1) 1990~1993년
90년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다. 그러나 1993년까지만 해도고구려는 조선사라는 주장과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이 병립한다.
손옥량, 이전복, 『고구려간사』, 삼성출판사, 서울, 1990 //////////////////????????
동북사를 다루는 몇 몇 책들이 고구려 중국에 귀속한다는 서술한다. 설혼(薛虹)․이주전(李澍田)들이 펴낸, 『중국동북통사』에는 “고구려족은 서한의 현토군에 속했기 때문에 서한 경내의 한 민족이며 고구려 건국 이후에도 한나라 왕조와 번속(藩屬)관계였다. … 남북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번속 관계는 이중신속관계로 남조에게 신하로 칭하고 북조에게도 신하로 칭했다. …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가 요동군을 수복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양소전(楊昭全)이 관계한 『중조변계사』에서는 “고구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예속하였으며,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역대 중원왕조가 관할한 소수 지방정권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3년까지만 해도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었다. 연변대학의 역사 교수들이 쓴 역사책은 당연히 고구려는 한국사였을 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쓴 책들 가운데는 1994년까지도 그 논조가 변함이 없었다. 장유화(張維華)의 『중국고대대외관계사』는 “4~7세기 조선반도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정립하고 있다”고 고구려를 중국의 대외관계사에 넣었으며, 유이승(劉李勝)이 편저한 『한국개론』에서는 한국 학자들과 똑 같은 의견이었다. 고로가(高路加)의 『중국북방민족사』는 내몽고 대학의 본과 강습서이다. 이 책은 각 민족을 언어별로 분류하였는데 예맥, 기자조선, 옥저, 부여, 고구려, 근대 중국에 들어온 조선족을 모두 조선어족으로 분류하였다.
이 시기에 요령성 심양에 심양동아연구중심이 설립된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수익성 사업을 차리는 붐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손진기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학술연구, 도서출판을 위주로 하는 연구단체를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이 국립이고 모든 자금이 국가에서 나오던 시대에서 사립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기업형 연구소를 차린 심양동아연구중심은 국립 연구단체가 몇 십 년씩 걸리던 사업을 짧은 시간에 해냈다. 이 연구소에서 출판한 『중국고고집성』이나 『고구려발해연구집성』 같은 자료들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에게도 고구려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심양동아연구중심(瀋陽東亞硏究中心)
설립 : 1991년 심양시동아문화연구소(沈陽市東亞文化硏究所)
1992년 심양동아연구중심(沈陽東亞硏究中心)으로 개명
주임 : 손진기(孫進己)
현재 직원 30명 남짓, 겸직연구원 100명 남짓
주된 사업 :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 고고학 연구.
산하 연구소 : 동아역사연구소, 동아민족연구소, 동아고고연구소, 동아문고 편집부
주요 저작 : 『東北亞硏究』 26권, 『中國考古集成』東北편, 華北편 등 총135권, 『高句麗 渤海硏究集成』6권, 『北方歷代人物傳』 7권, 『東北地方史硏究系列』4권, 『遼寧省市縣文物志』5권,『高句麗硏究系列』5권.
연구 책임자 손진기․손홍의 연구성과
孫進己 외, ⌈渤海的族源⌋, 『學習和探索』, 1982-5.
孫進己, ⌈歷史上民族歸屬的判定及統一多民族國家的形成⌋, 『中國民族關係史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4;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已, 「古代東北民族的分布⌋ (上, 下), 『東北地方史硏究』 1985-1.
孫進己, 『東北民族源流』,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孫進己 主編, 『中國北方八省市考古論著滙編』, 北方史地資料編委會, 1987
孫進己, 『東北各民族文化交流史』, 春風文藝出版社, 1992
孫進己, 『東北亞民族史論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東北民族史硏究(一)』,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國家的建立和發展⌋,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王國的管轄範圍⌋,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王國和中央皇朝的關係⌋, 『東北民族史硏究』, 1994
孫進己, ⌈高句麗族的起源⌋, 東北民族 史硏究(1),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族和周邊各族的關係⌋,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已, 「關于高句麗歸屬問題的幾個爭議焦点」, 『東北民族史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孫進己 主編, 『東北亞歷史地理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繼承發展譚其驤先生的學術思想不斷推進邊疆史地的硏究⌋, 『東北亞歷史地理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5;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古朝鮮的西界⌋,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孫進已, 「高句麗的歸屬」,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爲維持中朝韓友好和半島局勢穩定歷史上高句麗的歸屬仍以中朝共有爲宜⌋, 『當代中國邊疆問題調硏』, 1998-33
孫進己 ⌈國家和民族的歸屬⌋,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確定歷史上民族,政權,彊域歸屬的理論原則⌋,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孫泓, ⌈關于渤海歸屬問題的硏究⌋,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已, 「對高句麗歸屬問題的硏究」,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沈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外, 『高句麗硏究』, 1999년 脫稿 現在 出版進行中.
孫進己, ⌈對東北民族史硏究方法的一些体會⌋,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孫進己, ⌈高句麗歷史硏究綜述⌋, 『社會科學戰線』, 2001-5(東北歷史與文化).
孫進己, ⌈國際法中關于確定土地,民族政權歸屬的原則⌋,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吉林時代文藝出版社‘ 2002.
孫進己, ⌈讓渤海史硏究成爲促進東北亞各國友好的橋梁⌋, 『博物館硏究』, 2002-3.
孫進己, ⌈我國歷史上彊域形成,變遷的理論硏究⌋, 『中南民族大學學報(人文社會科學版)』, 2003.
孫進己, ⌈論歷史歸屬硏究中的理論標準⌋, 延邊大學 『東疆學刊』, 2003-1.
孫進己․孫泓, ⌈對高句麗歸屬問題的硏究⌋,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孫泓, ⌈從渤海國和中央皇朝關係的演變看渤海國的歸屬的變化⌋,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내부출판).
孫進己․孫泓,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王綿厚 外, 『東北歷史地理』(1),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孫進己․馮永謙 外,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孫進已․張春霞, 「從高句麗與中央皇朝關係的演變看高句麗的歸屬」,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泓 編, ⌈歷史上政權及民族歸屬理論硏究論著目錄⌋,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泓, ⌈高句麗民族的形成,發展及消亡⌋,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 입장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 상당한 연구성과를 쌓고 있었으나 우방국가인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여 내놓고 발표를 하지 못했다. 중국 당국이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북한을 자극할 만한 연구발표를 삼가해 달라는 권고조차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1993년이 될 때까지는 고구려 귀속문제가 양성화되지 못하고 음성적인 연구에 그쳤다.
양국간에 이 문제가 표면화 된 것은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이었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그동안 가볼 수 없었던 중국 땅에 한국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1992년 국교가 수립되면서 양국간에 여러 가지 행사들이 기획되고 실행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93년 열린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이다.
1993년 제1차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토론회
곳 : 집안시
때 : 8월 11~14일
주최 : 해외한민족연구소, 중국조선사연구회, 조선일보사
협찬 : 롯데그룹
이 토론회에는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원래 귀속문제에 대한 논의는 전혀 기획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첫날 종합토론이 진행되는 도중 발표자가 아닌 방청석에서 당시 북경대학 청화대학에서 근무하는 정인갑 교수가 고구려의 귀속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당시 집안박물관 부관장이었던 경철화(耿鐵華)가 “나 개인의 학설이자 중국 동북지방 역사 및 고고학의 성과인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서기 427년부터는 고구려가 조선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문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방의 용(龍)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 김일성대학의 역사학계 원로인 박시형(당시 84세) 교수가 “한 나라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법이다. 과거의 고조선․고구려 땅이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다고 해서 그 역사를 어떻게 중국사에 갖다 붙여 중국 소수민족 운운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고구려야 옛날부터 고조선․부여와 함께 중국인들 스스로가 역사책에서 ‘동이족’이라고 독립해 지칭했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란 서술은 역대 어느 사서에도 없다.”고 반박하였다. 중국 학자들이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역사상 고구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측 손진기는 “우리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고 할 수 없고 대부분은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되었다”고 되받았다.
이 당시 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도 고구려 역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한국 학자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논의는 있었지만 그 주장이 주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인 학자들에게도 큰 놀라움이었다.
이 국제학술대회가 끝난 뒤 한국과 중국 양국에는 갑자기 고구려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1994년 이후 갑자기 고구려 연구열이 달아오른 것은 당시 연구의 흐름이 ‘고구려=중국사’로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대회에서의 있었던 뜨거운 논쟁은 많은 중국 학자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2) 1994년 이후 고구려 연구의 르네쌍스
1994년 이후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전문으로 하는 고구려연구소와 고구려연구중심이 설립되고, 사회과학원과 각 대학에 국경문제와 한반도에 관한 연구소가 잇따라 설립된다. 최근 동북공정을 실시한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도 이 때부터 고구려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 통화사범대학(通化師範學院) 고구려연구소
설립 : 1995년 7월, 소장 : 耿铁华 교수/현재 소장 - 杨春吉 교수
부소장 : 黄甲元 교수(长白山区地方史 전문가), 倪军民 부교수(사망)
설립목적 : 고구려 역사와 고고 연구, 인재와 地缘 우세함을 발휘.
고구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및 族源, 族属, 고구려와
중원왕조․백제․신사․일본․발해와의 관계 문제 연구
성과 :
通化师范学院, 『通化师范学报-高句丽史研究专号』, 1996-1
杨春吉․耿铁华 主编, 『高句丽歷史与文化研究』, 吉林师范学院古籍研究所编, 吉林文史出版社 长白丛书研究系列, 1997. 6.
杨春吉․耿铁华 编, 『중국학자 고구려연구 문헌목록』, 通化师院 高句丽研究所, 1997
杨春吉․耿铁华, 倪军民 主编, 『高句丽史籍滙要』, 吉林文史出版社 高句丽研究丛书, 1997. 6.
耿铁华, 倪军民 主编, 『高句丽歷史与文化』, 吉林文史出版社 高句丽研究丛书, 高句丽歷史与文化丛书, 2000. 4
杨春吉․耿铁华 主编, 『高句丽归属问题研究』, 吉林文史出版社 高句丽歷史与文化丛书, 2000. 12
통화사범대학의 고구려연구소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연구기관보다 우수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바로 고구려 705년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국내성이 바로 통화시에 있으며, 첫 수도인 환인 오녀산성도 국내성과 같이 짧은 거리 안에 있어 현장에서 직접 고구려 유물을 발굴하고 유적을 답사할 수가 있다. 둘째, 가장 먼저 생긴 고구려 전문 연구소이기 때문에 각 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국학자 고구려연구 문헌목록』이나 고구려자료집인 『고구려사적회요(高句丽史籍滙要)』 같은 기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셋째, 고구려사 연구 전문가가 있다. 그리고 집안 박물관의 연구자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어 연구인력 확보가 쉽다. 넷째,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는 큰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비해 이 대학은 고구려 연구를 특화하여 전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연구소는 다른 어떤 단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런 연구성과는 다분히 경철화 교수 한 명의 활약에 힙입은 바 크다.
2) 길림성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설립 : 1997년, 소장 : 孫文範(정년퇴직),
길림성사회과학원의 고구려연구중심은 고구려 연구의 중심이 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으나 아직 그렇다 할만한 연구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같은 중요한 행사를 중국변강사연구중심과 함께 공동주최하는 등 힘을 쓰는 듯 하지만 괄목할만한 연구성과가 없는 것은 고구려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인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구 책임자 劉炬의 연구성과
劉炬․寧勇, ⌈論唐太宗征高句麗受挫之原因⌋,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劉炬, ⌈唐太宗東征高麗勝敗辨⌋,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劉炬, ⌈唐滅高句麗善后政策之失誤及影響⌋,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吉林時代文藝出版社‘ 2002..
3) 길림성사회과학원 조선․한국연구소
소장 : 楊昭全
직접 고구려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장 양소전 교수의 한중관계사 연구에 고구려 연구 성과가 관심을 끈다.
연구 책임자 양소전의 연구성과
楊昭全, ⌈中,朝,韓三國關于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的硏究槪況⌋,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 ⌈韓國學者關于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之論著簡介⌋,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 ⌈漢四郡位置與漢東北長城⌋,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 「論高句麗歸屬」, 『韓國上古史學報』(13), 서울, 1993.
楊昭全, 「論高句麗的歸屬」,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韓俊光, 『中朝關係簡史』, 遼寧民族出版社, 1992
楊昭全․孫玉梅, 『中朝邊界史』, 吉林文史出版社, 1993
楊昭全․孫玉梅, 主編 『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史料滙編』, 吉林文史出版社, 1994
楊昭全․何彤梅, 『中國-朝鮮․韓國關係史』(上), 天津人民出版社, 2001
4) 동북사범대학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東北民族與彊域硏究中心)
구성 학자 : 劉厚生, 孫啓林, 李德山
성과 : 『黑土地的古代文明』,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高句麗史話』, 『渤海國史話』,
동북사범대학은 동북지방에서 가장 우수한 역사학과를 두고 있다. 길림대학이 고고학이면 동북사범대학은 역사학인 것이다.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에서 제1차 전국 동북 민족과 강역에 관한 학술토론회(東北民族與彊域學術硏討會)를 주관하였다. 이 회의에서 고구려에 관한 논문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 유후생 교수는 중국변강지구 역사사회연구(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 동북공작참(東北工作站) 부참장 일을 맡고 있으며, 동북공정에서도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유후생
劉厚生, ⌈亟待加强東北邊疆史的硏究⌋,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劉厚生 外, ⌈尊重歷史, 正視現實 - 中國東北地方史學術討論會紀要⌋,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이덕산
李德山, ⌈高句麗族稱及其族屬考辯⌋, 『社會科學戰線』, 1992-1;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李德山, ⌈夫餘族考略⌋,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吉林時代文藝出版社‘ 2002.
李德山, ⌈燕族的族稱,發展及對東北的開發⌋,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손계림
孫啓林 譯, ⌈朝鮮歷史學者是怎樣看待東北古代文化和彊域的 - 朝鮮新書 『古朝鮮歷史槪觀』 節譯⌋,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孫啓林 編譯, ⌈韓國徐炳國著『高句麗帝國史)』簡介⌋,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孫啓林, ⌈二戰後,朝鮮半島南北方史學界對高句麗硏究綜述⌋,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孫啓林, ⌈二戰後朝鮮史學界的高句麗硏究槪況⌋,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孫啓林, ⌈二戰後韓國史學界高句麗硏究槪況⌋,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5)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중국변강지구 역사사회연구(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 동북공작참(東北工作站)
* 1995년 -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주임 마대정 ‘제1차 전국고구려학술대회’ 참석
* 1996년 하반기 - 고구려 문제를 중국사회과학원 중점연구 과제로 정식 입안
* 1997년 - 연구참가자들 길림성 고구려 유적 고찰, 길림, 요령, 흑룡강성 고구려사 동북지방사 연구 학자들과 교류 및 연구
* 1997년 연말 - 과제 초고 완성
* 1998년 - 邊疆史地叢書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 출판 (黑龍江敎育出版社, 1998년 12월)
6) 중요 학술대회
(1) ‘제1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
때 : 1998년 6월 26일~28일(3일간)
곳 : 통화시
공동주최 :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통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소
* 전국 제1차 고구려 학술토론회 『論文集』,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통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소, 1999. 6.
(2) 중국 동북지방사 학술토론회
때 : 1998년 12월
곳 : 장춘
(3) 제1차 전국 동북 민족과 강역에 관한 학술토론회(東北民族與彊域學術硏討會)
때 : 1999년 7월 24일~27일
곳 : 길림성 장춘시․길림시
참가 : 70명 남짓
논문 : 40편 남짓
결과물 :
劉厚生․孫啓林․王景澤 主編, 『黑土地的古代文明』,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區歷史與社會硏究 東北工作站․東北師範大學東北民族與彊域硏究中心, 東北民族與彊域硏究叢書, 2000.
4. 2000년대의 동북프로젝트의 등장과 귀속문제 논의
1) 2002년 동북프로젝트(東北工程)
2001년 북한이 고구려 고분벽화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다. 만일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면 고구려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당황한 중국은 그 해 문화부 차관을 평양에 급파한다.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신청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의를 거절했고 중국에서는 다음해인 2002년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특별한 프로젝트를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 설치하기에 이른다. 중국사회과학원이 고구려사 귀속문제를 관여한 것은 이미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러 동북공정의 실시는 고구려 문제가 국가 사업의 중요 정책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뜻하며, 지금까지의 고구려 연구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구였다면 이제부터는 전국적인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출범한지 불과 몇 달 뒤인 7월 9일부터 13일까지 관련 학자 1백여 명을 참여시킨 가운데 고구려 전반에 관련된 특별 토론회를 갖고 한꺼번에 무려 7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고문: 李鐵映, 중공 정치국 위원,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項懷城, 중앙위원, 財政部 部長.
영도소조(지팀팀): 조장 : 王洛林, 중앙위원, 중국사회과학원 副원장.
부조장 : 楊光洪, 黑龍江省委 副書記, 全哲洙, 길림성 副성장, 趙新良, 요녕성 副성장.
馬大正, 중국사회과학원 中國邊疆史地연구중심, 연구원.
비서장 : 厲聲,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주임, 연구원.
전문가위원회: 주임 : 馬大正,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연구원.
부주임 : 秦其明, 중국사회과학원 부비서장, 연구원.
厲聲,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주임, 연구원.
성원: 成崇德, 중국인민대학 淸史硏究所 소장, 교수.
王 正, 중국사회과학원 科學硏究局 副局級 學術秘書, 연구원.
郝時遠, 중국사회과학원 民族硏究所 소장, 연구원.
王 巍, 주국사회과학원 考古硏究所 부소장, 연구원.
于 沛,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사연구소 부소장, 연구원.
潘春良, 흑룡강성 宣傳部 副部長.
步 平,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부원장, 연구원.
弓 克,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
邴 正, 길림성 사회과학원 원장, 연구원.
常衛國, 요녕성 선전부 부부장.
趙子祥, 요녕성 사회과학원 원장, 연구원.
劉厚生, 중국변강역사와 사회연구 東北工作站 副站長, 교수.
고정사무실 성원
주임
李國强,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主任助理, 연구부 주임, 연구원.
劉 爲,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연구부 부연구원.
李大路,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行政사무실 주임.
2) ‘제2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第二屆東北邊疆歷史與現狀曁高句麗學術硏討會)
때 : 2002년 7월 9일~13일(5일간)
곳 : 장춘시, 통화시
주최 :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吉林省社會科學院
후원 : 遼寧省社會科學院, 黑龍江省社會科學院, 吉林大學, 東北師範大, 遼寧大學,
延邊大學, 北華大學, 吉林師範大學, 長春師範學院, 通化師範學院
참가 : 100명 남짓, 논문 70편.
3) 고구려․발해문제학술토론회(高句麗渤海問題學術討論會)
때 : 2003년 8월 23~24일(2일간)
곳 : 길림성 延吉市
공동주최 : “동북공정” 사무실․연변대학 中朝韓日文化比較硏究中心(교육부 文科基地)
주관 : 연변대학 中朝韓日文化比較硏究所
참가 : 25명(흑룡강사회과학원,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통화사범학원, 연변대학, 요령성박물관, 요령대학, 심양동아연구소, 정주대학 및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4) 제3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第三屆全國高句麗學術硏討會)
-고구려 학술연구, 고구려유적 세계문화유산 지정 촉진, 고구려 국내성 천도2000주년 기념 -
때 : 2003년 10월 9~11일(3일간)
곳 : 길림성 집안시 집안호텔
주최 : 길림성사회과학원․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 9일 오전에는 집안시 정부 주최 고구려 국내성 천도2000주년 기념축전과 상징건축물 제막식에 참가
* 대회 참가 논문은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紀念高句麗遷都國內城2000周年學術論文集』으로 출판될 예정
5) 『중국고구려사』의 중국사로 본 고구려사 시대구분
1998년 발행된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펴낸 변강사지 총서 1호에 『고대고구려역사논총』이란 제목을 붙였다. ‘중국+고구려 역사’라고 고구려사 앞에 나라이름을 써서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는 것을 표지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이다. 그런데 2002년 말(실제는 2003년 초)에 『중국고구려사』란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경철화 교수가 지은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시대구분할 때 고구려 자체의 역사에서 갖는 특징적 사건이나 시기를 가지고 시대구분을 하였다.
① 초기 - 흘승골성 수도 시기(기원전 35~기원 3년), 중기 - 국내성 수도 시기(3~427년), 후기 - 평양 수도 시기(427~668)
② 조기 - 장수왕 천도 이전(한․위․진 시대), 중기 - 고구려 전성단계(대개 남북조시대), 만기 - 고구려 쇄망단계(수․당시대)
③ 전기 노예사회 - 건국부터 평양 천도까지, 후기 봉건사회 - 평양 천도 이후 멸망까지
그러나 이번에 나온 『중국고구려사』는 중국 역사에 따라 고구려를 구분하고 있다.
① 양한(兩漢)시기 : 추모왕~산상왕(10왕) 고구려 정권을 건립하여 점차 튼튼해지며 대외 확장에 힘쓴다. BC 37~227년
② 위․진(魏晋)시기 : 동천왕~호태왕(9왕) 고구려 사회가 변혁, 발전하고, 강역을 확대한다. 227~412년
③ 남북조시기 : 장수왕~평원왕(6왕) 고구려 최대의 발전과 안정기. 413~590년
④ 수․당시기 : 영양왕~보장왕(3왕) 고구려 국세가 쇠약해지고 내부 모순이 더해져 멸망에 이른다. 590~668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흥망에 따라 시대구분한 것이다. 한 나라의 시대를 구분하면서 다른 나라의 왕조에 따라 시대구분을 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논리이다. 마치 남의 생일을 내 생일에 따라 결정하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이다.
소위 중국이란(원래 중국이란 나라는 없었다. 편의상 명칭으로 사용한다) 진․한 이후 북송(320년)을 빼고는 300년 이상 된 나라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700년이 넘는 고구려사를 중국 학자들이 시대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일 것이다. 경철화는 고구려 705년 동안 중국의 흥망을 4단계로 나누었는데 이 자체가 문제성을 안고 있다.
고구려 한 나라가 705년 동안 번영을 누리는 동안 고구려의 서방(현재의 중국)과 북서방(현재의 몽골)에서는 35개의 나라가 생겼다가 없어졌다. 그 가운데 70% 가까운 24개 국가가 50년도 못 가고 망했으며, 86%가 넘는 30개 국가는 100년도 못 가고 망했다. 200년 이상 간 나라는 단 두 나라뿐이다 - 한나라(221년), 당나라(290년)
* 한나라(221년)는 대부분 고구려 건국 이전에(고구려 건국 10년 망함)존재하였고, 당나라(290년)는 대부분
고구려 멸망(당나라 건국 후 50년) 이후에 존재하였다.
한편 35개 나라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지배한 나라였다.
50년 미만의 나라 (24개 나라)
후양(氐) - 7년, 서연(선비) - 10년, 남연(선비) - 13년, 동위 - 17년, 남양(선비) - 18년, 전연(선비) - 22년, 서위 - 22년, 서양 - 22년, 제 - 24년, 후연(선비) - 25년, 전조(흉노) - 26년, 하(흉노) - 26년, 북주 - 26년, 북연 - 28년, 북제 - 28년, 진 - 33년, 후조(羯) - 34년, 후진(羌) - 34년, 수 - 38년, 촉 - 43년, 북양(흉노) - 43년, 위 - 46년, 성(氐) - 46년, 서진(선비) - 47년
*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촉나라 위나라는 이 곳에 속한다.
100년 미만인 나라(6개 나라)
오 - 52년, 진 - 52년, 양 - 56년, 송 - 60년, 전진(氐) - 61년, 전양- 6년
* 삼국지의 오나라는 이 곳에 속한다.
100년 이상인 나라(5개 나라)
동진 - 103년, 북위 - 149년, 후한 - 196년, 한 - 221년, 당 - 290년
이 연표는 중국의 역사책에서 뽑아 정리한 것이다. 고구려 한 나라가 705년간 이어지는 동안 중국은 같은 민족끼리 또는 다른 민족과 수많은 투쟁과 전쟁의 역사가 이어져 편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온 35개국은 모두 중국이 자국의 역사로 치는 곳이다. 경철화가 이런 역사를 한족 위주로 4단계로 나누는 것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도대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데 705년 동안 꿋꿋이 이어온 고구려가 수없이 흥망을 반복하는 어떤 나라에 속했다는 말인가?
Ⅲ. ‘고구려=중국사’에 대한 중국의 논리
이 부분은 앞으로 서영수 교수와 윤명철 교수가 자세하게 발표할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그 개요만 설명한다.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이것은 고구려 귀속문제 논쟁의 초점 가운데 하나이다.
* 고구려를 세운 맥인 - 당시 중국의 한 민족이었다.
* 기원전 3세기 - 모두 연(燕)의 영역
* 기원전 2세기 - 연나라 위만(衛滿)이 위씨조선 건립
당시 위만 - 한나라의 위탁을 받아 그 지역을 관할.
* 고구려 - 기원전 108년에 벌써 한(漢)나라 현토군의 한 현,
졸본부여(卒本夫余) - 한나라 현토군.
기원전 37년 주몽 고구려 5부 통일 - 당시 모두 한나라 현토군의 영토,
* 중국 영토에서 진행 - 오늘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2.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1) 주몽 건국 이전 - 한조(漢朝)의 현토군 고구려현 존재
2) BC37년 추모(주몽) 고구려 세운 뒤 계속 중국의 중앙정권과
신하로 예속되는 관계(臣附關係).
고구려후, 고구려왕, 정동대장군, 영주사사(營州刺史),
낙랑군공(樂浪郡公), 낙안군공(樂安郡公) 같은 관직을 받았다.
3) 북위, 북제 및 남조 의 각 나라 정권에 공물을 바쳤다.
* 전체 역사과정을 통해 보면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국의 한 지방민족정권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할거를 가지고 전 역사 기간 동안 중국에 귀속되었던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3. 고구려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갈래 민족이다. 조선족이 아니다?
*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후예
일부는 중원으로
일부는 돌궐로
일부는 발해로 들어가 - 모두 중국 각 종족에 융화됨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 - 신라에 귀속,
그 뒤 또 작은 수의 고구려인 - 당과 발해에서 신라로 돌아갔다
이런 고구려인만 - 조선족에 융화
* 오늘날 조선족 - 선조는 주로 고대의 삼한(三韓), 즉 신라인
+ 상당수 조선반도로 옮겨간 중국 각 종족. 고구려 후예는 극소수
4.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이다.
* 오늘날의 중․조 국경을 가지고 본다면 - 침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 1000년간 (낙랑군 4백년 + 기씨조선, 위씨조선)
모두 중국의 한족이 지배하던 곳
* 고구려가 반도의 북부를 점령 - 쳐들어와 점령한 것
한족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점령 - 잃어버린 땅 수복
* 역사상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 - 대외침략전쟁 아니고, 중국 국내 민족간의 전쟁.
* ⌈고구려가 고조선 땅을 되찾는다⌋ - 도리에 맞지 않다.
고구려인 - 고조선의 후대가 아님 - 수복할 권리가 없다.
5.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지 않았다.
* 오랫동안 고려라고 불렀기 때문에 같은 나라로 잘 못 인식된 것.
왕씨고려 = 조선 역사, 오늘날의 조선족 선조가 건립한 것
고씨고려 = 중국 역사, 오늘날 중국 각 민족의 선조가 세운 것
* 왕건(王建) - 신라 장군 -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
왕건(王建) - 신라 김씨 계통, 고구려 고씨의 위(位)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 왕씨고려(개성, 대동강 이남) - 신라 옛 땅, 고구려 땅 아니다.
* 고려시대 서희(徐熙) 주장․『송사(宋史)』도 인정 - 틀렸다
고구려 - 현재 조선의 역사라고 잘못 알게 하는 중요한 원인.
6. 한반도 북부 북한지역도 중국의 역사다.
* 한반도 북부가 한국의 일부분으로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5세기 고구려 평양 천도 - 조선 국가가 된 것 아니다.
고구려가 두 나라로 나뉘어 속할 수 없다.
* 기씨(箕氏)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衛氏)조선(기원 2세기) = 중국 역사
이씨(이씨)조선 = 한국 역사
* 당(唐)이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지역을 떼어 주었고,
요(遼)가 압록강 이동 여진 영토를 고려에게 떼어 주었고,
명(明)이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주었다.
오늘날의 한중국경은 한민족이 북쪽으로 확장하여 형성된 것이다.
Ⅳ. 맺는 말
1) 중국 학자들의 논문은 연구 인력과 성과가 많은 반면 논문으로서 완성도가 떨어진 것들이 많다. 1) 확실한 전거를 대지 않은 것들이 많다. 주를 확실히 달지 않기 때문에 누구 논문이 원본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2) 저명한 논문집에도 논문 형식을 취하지 않고 마치 수필처럼 쓴 것들이 많다. 3) 같은 논문을 여기저기 중복해서 싣는 경우도 상당 수 있다. 귀속문제만 보더라도 새로운 연구성과라기 보다는 똑 같은 내용이 여러 책에 수도 없이 반복해서 나온다.
2)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 심지어는 미국의 학자들도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중국어와 일본어를 해독하고 자료를 섭렵하여 자신의 연구에 반영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극히 일부 번역본을 빼놓고는 외국의(특히 한국어 자료) 연구 성과를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3) 고구려사를 연구하면서 연구성과를 통해 귀속문제를 다루는 학자보다 귀속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더 많을 정도로 학술적인 객관성이 부족하다. 반면에 한국 학자들은 그 연구인원이 적다는 사실 빼놓고도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급급했지 고구려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4) 고구려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만주 전역이 옛 고구려 영토였기 때문에 요령성, 길림성 의 고고문물연구소를 비롯하여 박물관 연구 담당자들은 모두가 고구려사를 전공한다고 할 정도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최근 주요 학자들은 대부분 정년되직을 했거나 정년이 가까운 반면 젊은 학자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중국 학계도 객관적인 학문적 자세와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젊은 학자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역사연구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5) 폐쇠적인 연구 분위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성과가 나오기 힘들다. 앞으로 한국, 일본, 몽골, 러시아 들과 공동연구를 통해서 적어도 동아시가 각 국이 인정하는 보편타당성 있는 역사기술이 필요하다. 중국은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인식은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중화사상 위주의 학문 연구는 아시아사나 세계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고 궁극적으로 중국 자체에게도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 중화사상을 내건 중국 역사는 끝없는 정복전쟁의 연속이었고 이민족에 지배당한 역사가 길다. 진나라 이후 300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북송 한 나라뿐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5호16국(4세기 전후), 북위(149년), 요(210년), 금(120년), 원(109년), 청(297년)은 사실상 이민족의 지배였으나 이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해야 하는 아픔도 사실은 모두 지나친 중화사상에 있었던 것이다.
토론 자료 : 중국에서 제안된 있는 고구려사 연구 강화 방안
1. 고구려 역사 연구 심화를 위한 소견(馬大正,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연구중심 변강사지 총서, 1998)
1) 고구려 자료의 조사와 연구, 정보의 수집과 정리를 깊이 있게 진행해야 한다.
자료는 연구를 진행하는데 끊임없이 강화해야 할 기초작업이다. 고구려 사료 수집과 정리, 또한 국내 학자 100년간의 연구성과 모음집을 낸 것은 기뻐해야 할 성과이다. 현재 아직 계속 해야 할 작업이 세 가지가 있다.
㉠ 한문(漢文)으로 된 문학과 사학 서적에서 고구려에 관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이다. 양보융(楊保隆)의 ⌈각 사(史) ‘고구려전’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 해 대한 고찰⌋은 이 방면에 대한 유익한 연구였다. 이러한 작업은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 외국, 즉 조선(북한)과 한국 학자들의 연구 정보와 성과를 수집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긴박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 공백상태인 이 분야의 변화를 기대한다.
㉢ 국내 고구려 관련 고고학의 성과를 총 집결하여 출판해야 한다. 이상의 3가지 사업이 크게 진전되었을 때 고구려 역사 연구 또한 견실한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 방향(思路)를 개척하고 중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주제 선정을 잘 해야 한다.
이 몇 년간 관련 기관에서 진행한 고구려사 연구가 모두 고구려약사(高句麗簡史), 고구려통사, 여러 권의 고구려사 출판에 힘을 쏟고 있는데 서로간의 정보교환이 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의 중복과 인력자원의 낭비를 피할 수가 없다. 또한 약사나 통사 체제에 얽매어 있어 핫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가 어려워 진다. 우리가 앞으로 연구해야 할 중점 과제는 다음과 같다.
① 고구려 민족의 근원(源)과 유파(流) 연구
② 고구려 민족 지방정권의 귀솔 연구, 아울러 중국 고대 지방 민족정권의 귀속에 관한 이론 연구
③ 중국 고서, 특히 24사에서 고구려 기록에 관한 고증․해석(考釋), 분석(辨析), 연구
④ 고구려 고고의 새로운 발굴성과에 대한 정리, 연구.
④ 중국 학자 고구려사 연구 총괄
⑤ 조선(북한), 한국 및 일본 학자의 고구려사 연구 총괄
⑥ 조선(북한), 한국 고구려사 연구 가운데 비학술화되어 가는 추세 연구
3) 연구 역량 조직, 협력(協作) 강화로 연구의 총체적(整體) 우세를 발휘한다.
현재 국내 고구려 역사, 고고, 문화재(文物)에 대한 연구 인력은 대부분 길림․요령․흑룡강성에 집중되어 있으며, 고구려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다수 동북민족사나 동북아사를 연구하면서 고구려사를 겸하여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 인력도 적고 후계자도 모자라는 형편이다. 연구 역량을 조직하는 데도 3가지 시급한 일이 있다.
① 관련된 연구단체에서는 연구계획의 연계,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내에 이미 일정한 연구 실력을 갖추고 있고, 이에 따른 행정기구도 갖추어져 있다. 고구려 연구가 주요(또는 중요) 임무인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통화사범학
서길수(서경대, 고구려연구회)
Ⅰ. 머리말
Ⅱ. 고구려 정체성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논의와 그 전개과정
1. 1980년 이전의 정체성 논의
2. 1980년 이후의 정체성 논의와 귀속문제의 대두
3. 1990년 이후 고구려 귀속문제의 본격적 논의
4. 2000년대의 국가적 과제로 등장한 귀속문제
Ⅲ. ‘고구려=중국사’에 대한 중국의 논리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2.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3. 고구려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갈래 민족이다. 조선족이 아니다?
4.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이다.
5.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지 않았다.
6. 한반도 북부 북한지역도 중국의 역사다.
Ⅳ. 맺는 말
Ⅰ. 머리말
불과 15년 전만 해도 중국의 역사책들은 모두 고구려를 한국의 역사로 서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중국이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와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현재 많은 연구기관과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에서도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수민족사를 연구하는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아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 부여, 발해, 현재의 한국에 대한 연구도 포함되어 있다.
중국 학계가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다’는 주장을 편다는 것은 한국 학자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최근 중국 정부기관인 사회과학원이 고구려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는 광명일보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기사를 실었다는 보도를 접한 한국 학자들은 그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소홀히 했었다. 이제부터라도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중국은 그동안 20년 이상 수 백 편의 논문을 통해서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계속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연구사를 분석․정리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논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2장에서는 지난 50년간 중국 학자들의 연구사를 정리하여 그 전개과정을 자세히 분석한다. 3장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논리를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3장의 내용은 너무 방대해 앞으로 더 자세히 발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판 내용과 참고 자료를 덧붙이기로 한다.
한 국가의 정체성이란 그 국가의 참된 형체를 말하는 것이고, 귀속이란 재산, 권리, 영토 따위가 특정한 주체에 붙거나 딸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귀속문제라는 것은 현재 분쟁이 되고 있는 지역의 재산, 권리, 영토가 어느 나라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에 많이 사용하는 것이며, 귀속이라는 말 자체에는 다분히 정치적 용어라는 느낌을 숨길 수가 없다. 우리가 1300년 이전의 고구려사를 학술적으로 논의할 때는 당시 고구려를 주체로 놓고 그 나라의 참된 존재가 무엇인가에 연구가 집중되어야 한다. 바로 고구려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고구려의 정체성을 연구하는 것이지만 중국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귀속문제’라는 용어도 사용하기로 한다.
Ⅱ. 고구려 정체성에 관한 중국 학자들의 논의와 그 전개과정
1. 1980년 이전의 귀속문제 논의
1) 중국 교과서의 내용을 통해서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고구려사=한국사”.
청나라는 고구려의 후손이었던 만주족이 중국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고, 청나라 지배층의 고향이고 정신적인 성지였던 압록강 두만강 지역은 소위 중국의 한족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봉금지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청나라 때는 고구려의 귀속문제가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청나라가 멸망한(1911년) 뒤 들어선 국민당 정부에서는 공산당과의 패권다툼에 휘말려 고구려 문제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1932년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12년 동안은 만주국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귀속문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 1980년까지 30년 동안은 중국도 당연히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라고 인정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교과서에 나타난 고구려 서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중국의 중․고․대학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는 주로 국가의 검인정을 받아 공급되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인식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0년대 중국의 중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고구려는 조선의 한 국가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외침략전쟁이라고 쓰고 있다. 1981년 출판된 중학교 『세계역사』 상권에도 ⌈고구려는 조선반도 북부의 노예제국가⌋라고 하여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대학 역사교제 가운데는 세계 중세기사(中世紀史)가 가장 대표적이다. 1956년 고교출판사(高敎出版社)에서 나온 『세계중세기사강의(世界中世紀史講義)』처럼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를 취급하지 않은 교과서도 있지만 50년대 『세계중세기사(世界中世紀史)』에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고구려를 모두 한국의 고대국가로 소개하였다. 또한 60년대 교육분야에서 통합해서 펴낸 것으로, 주일량(周一良) 등이 쓴 『세계통사』 중세기 부분에서도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는 모두 고대 한국의 국가라고 쓰고 있으며, 1978년 14개 대학이 종합적으로 펴낸 『세계고대중세기사(世界古代中世紀史)』에서도 ‘고구려는 중국에서 일어나 국경 넘어(跨)에 있는 한 민족이다’고 하여 고구려가 중국 역사가 아니고 세계사이며 한국사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현재 고구려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가 한국사라고 했던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첫째, 국내외 정치 상황의 영향이다. 50년대 중국은 각 방면이 모두 회복, 발전에 여념이 없었고, 전국 상하가 항미원조(抗美援朝)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중국․조선 양국 인민의 우호, 단결이 일종의 정치조류가 되었다, 연구논문은 물론 출판 서적도 모두 중․조 우의라는 문장으로 둘려 쌓여 있었다. 둘째, 학술연구상황을 보면 동북지구 고대 봉국(封國)과 민족정권에 대한 우리나라 학자의 연구가 결핍된 상태였고, 전문 연구저작이 없었으며 논문도 많지 않았다. 교재 편찬, 특히 세계사 교재는 소련 『세계통사』와 일본 『동양사대계』의 영향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다.
실제 50~60년대 중국에서 나온 고구려에 관한 논문은 불과 20편 남짓으로 주로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보고가 주를 이룬다. 이어서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문화혁명기에는 단 한 편의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중국이 특별한 방향으로 연구를 시작하기 전 주변 국가의 모든 역사서는 고구려를 당연히 한국사로 인정했다는 것을 방증해 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2) 조․중 공동 고고학발굴대를 통해서 본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고구려사=한국사”
고구려의 정체성에 대한 기존 학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은 연구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이 한국전에 참여하여 두 나라가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위해 싸운 혈맹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중국과 북한이 이와 입술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1963년 8월 23일부터 1965년 7월 19일까지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실시한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이다. 당시 고구려사 및 발해사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사실이기 때문에 좀 자세하게 보기로 한다.
(1) 1단계(1963. 8. 23~10. 23, 2개월)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7명(2개조로 나누어 편성)
답사 지점 : 3개 성, 1개 자치구의 23개 시
답사 내용 : 10개 사이트 발굴, 7개 박물관과 관련 기관 참관
1조 답사지역 : 내몽골자치구의 적봉, 영성, 요령성의 심양, 요양, 해성, 개평, 무순, 여대, 금현, 금주, 금서, 조양, 객좌에서 주거지 23 곳, 고구려 성터를 비롯한 성터 9 곳, 고인돌 3 곳, 청동단검 출토지와 옛 무덤떼 12 곳, 모두 47 곳. 그 가운데 영성현 남산근, 무순시 돌상자무덤, 요양현 양갑산과 여대시 윤가촌 남하와 후목성 역 무덤을 시굴하였다.
2조 답사지역 : 요령성 환인, 길림성 집안, 길림, 돈화, 연길, 화룡, 훈춘, 흑룡강성 영안에서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무덤떼 2 곳, 고구려, 발해, 요, 금의 성터 12 곳, 고구려 무덤떼 11 곳, 모두 25 곳을 답사하였다. 그 가운데 집안현 역전 유저과 돈화현의 유정산, 화룡현의 북대, 연안현의 대주둔, 발해 무덤떼의 일부를 시굴하였다.
(2) 2단계(1964. 5. 10~7. 23, 2개월 13일)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7명(2개조로 나누어 편성)
1조 발굴지역 : 요령성 여대시 후목성역의 강상, 누상, 쌍타자, 금현 양갑점의 소서구, 동가구, 용천 등 5 곳 유적 발굴. ᄀ 가운데 누상, 소소구 와룡천의 발굴으 마무리하고 강상과 쌍타자 유적은 끝내지 못함.
2조 발굴지역 : 길림성 돈화현 유정산의 발해 무덤께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의 발해 상결 용천부 터를 발굴굴하였다. 육정산 무덤떼 발굴 마무리, 상경 용천부 터 발굴 첫 단계 시작.
(3) 3단계(1964. 8. 20~10. 20. 2개월)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7명(2개조로 나누어 편성)
1조 발굴지역 : 강상, 쌍타자 유적 발굴 계속, 윤가촌 남하와 장군산 유적 새로 발굴
2조 발굴지역 : 발해 상경 용천부 터를 계속 발굴하여 마침.
(4) 4단계(1965. 5. 23~7. 19, 1개월 25일)
참가 인원 : 북한․중국 각각 11명
발굴지역 : 요령성 심양시 정가와자 유적을 발굴하고 보고서 초고의 편집을 마쳤다.
두 나라는 공동발굴대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 특히 북한은 압록강 북쪽의 역사 유적에 대한 답사와 발굴이라는 성과에다 발굴한 많은 유물을 직접 북한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광개토태왕비 원석탁본도 입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러한 밀월관계는 당시 두 나라 사이에 고구려의 정체성을 가지고 따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조중 공동 고고학발국대의 활동를 상세하게 다룬 것은 앞으로 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국간의 발굴사업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 학자가 한반도에서 우리 학자가 중국에서 발굴하고, 나아가 세계 각국의 학자들이 발굴에 참여하여 이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는 바람이다.
역사고고학에서 있었던 두 나라의 밀월관계는 바로 이 공동발굴대의 보고서 때문에 깨어지고 만다. 북한에서 1966년 발행한 『중국 동북 지방의 유적 발굴 보고』가 그 원인이었다고 한다. 물론 북한측의 말을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중국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발굴보고서는 발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기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요령성 문물고고연구소의 한 책임자는 “그 뒤 단 한 번도 학자 교류가 없었으며 학술지 교환까지도 끊어버렸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북한은 주체사상의 역사적 바탕으로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공동 발굴대에서 발굴한 내용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게 된다.
2) ‘고구려=중국사’ 논리 개발의 시도
이 기간에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중국 학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를 어떤 형태로든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애국적 사관을 가진 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역사학계에서는 김육불(金毓黻)이었고, 고고학계에서는 이문신(李文信)이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을 할 정도는 아니고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다는 점을 밝히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김육불의 『동북통사』 : 한족(漢族) 위주 역사서술의 배경과 한계
한국의 학자들에게도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김육불은 현재 중국에서 ‘고구려=중국사’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맨 먼저 인용하는 학자로서 ‘고구려=중국사’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다. 김육불은 만주족이라던가 심지어는 조선족이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것은 김육불의 이력과 학문적 성향을 자세히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김육불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고찰해 보며 동시에 김육불이 왜 고구려를 비롯한 압록강 북녘의 땅을 중국사로 편입시키려 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김육불 1887년 현재 요령성 요양에서 태어나 1962년 사망한다. 엄격한 훈장 집에서 태어난 김육불은 6살에 글방에서 공부하다 19살에 소학당에 들어가 10년만에 중학당, 대학당까지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이 다니던 북경대학당 문학문을 졸업하므로 해서 김육불의 출세는 보장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만주로 돌아온 김육불은 바로 심양문학전문학교 교사 겸 봉천성 의회 비서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 뒤 당시 중화민국의 관리로서 요직을 거치면서 15년 뒤 1931년 요령성 교육기관의 최고 책임자인 교육청 청장이 된다. 김육불은 관리로 있으면서도 꾸준히 연구에 전념하여 1927년 『요동문헌징략(遼東文獻徵略)』이란 책을 낸다.
그러나 1932년 만주에 진출한 일본의 세력을 업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을 세우면서(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한다) 당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육불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다. 3개월 남짓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省)도서관 부관장을 맡아 도서 정리를 하였고, 이어 『봉천통지(奉天通志)』 편찬직을 맡으므로 해서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하게 된다. 이 때 1933년부터 3년간 편찬한 『東北叢書』가 1936년 『遼海叢書』라는 이름으로 심양에서 출판된다. 1936년 문물을 고찰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동경을 간 뒤 상해로 도망가 자유를 찾는다.
상해를 거쳐 남경으로 간 김육불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주로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동북통사』를 비롯한 중요한 저서를 남기게 된다. 1936년 봉천에서 편찬에 참여했던 『奉天通志』, 260권을 비롯하여 『遼海叢書』, 『渤海國志長編』 20권을 출판하게 되면서 학문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게 된다.
그 뒤 대학에서 강의한 노트를 바탕으로 『東北通史』(上篇), 『宋遼金史』, 『中國史學史』를 출판하게 되는 데 이 때 쓴 『동북통사』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한 동북통사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육불의 동북통사가 갖는 시대적 배경을 읽을 수 있다. 20세기 열강의 침략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뒤 중화민국이 들어섰으나 1932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300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했던 만주족을 내세워 만주국을 세움으로 해서 만주의 주인은 만주족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중국 전역을 공략하고 있었던 때이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서 일본은 서양적 방법론으로 무장된 많은 역사학자, 고고학자, 지리학자들이 만주에 보내 만주의 정체성을 발굴하고 있었다. 일본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고 그들 밑에서 자료정리를 담당했던 김육불은 앞으로 만주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만주가 중국의 역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남경 등지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만주가 중국 한족의 역사 현장이었다는 것을 연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936년 9월 김육불은 남경 중앙대학 역사계에서 만주에서 연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동북사를 강의하였다. 8개월간 강의한 내용으로 『동북사고(東北史稿)』를 완성하였다. 그 뒤 37년 안휘성 관리를 거쳐 1938년 중경으로 간 중앙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그 강의안을 사용하다가 1941년 가을 삼태동북대학(三台東北大學)에 부임하면서 책으로 낸 것이 바로 『동북통사』이다. 당시로서는 중국 학생들에게 일본에게 빼앗긴 만주를 회복하기 위해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도 만주가 중국 한족의 역사라는 강의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김육불의 의도는 『동북통사』의 시대구분만 보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고구려 705년간의 역사를 다음과 같은 3가지 시대로 나누고 있다.
제1기 한족(漢族) 개발시대(상고~漢․魏)
제2기 동호 부여 두 종족의 각축시대(수나라 초기)
제3기 한족(漢族) 부흥시대(수․당)
시대구분만 보아도 한족이 동북지방에 어떻게 진출했고 어떻게 발전했는가 라는 관점에서 동북사를 서술하려 했던 김육불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김육불의 동북통사를 보면 그의 의도대로 끌어가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기인 한족 개발시대는 10절로 나누었다. 1절에서는 만주에서 가장 오래 된 숙신족이 산동에서 이주해 왔으며 2장에서 4장까지는 동북지역이 기자조선과 연나라, 그리고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는 내용을 이은 것이다. 고구려에 관한 내용은 두 개 절에서만 나오고 나머지는 주로 선비족에 관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학자들은 고구려를 다룬 6절에서 ‘고구려=중국사’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육불은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부여족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고구려와 백제는 한 민족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림 1> 동북민족 계통표
고구려에 관한 두 번째 절은 마지막 10절인데 한 절을 모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고구려를 침략에 할애하고 있다. 219년 후한이 멸망하고 중원에서는 촉, 위, 오 3국이 정립하여 싸우느라고 편한 날이 없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고구려 동천왕은 242년(동천왕 16년) 서안평을 쳤고, 이를 계기로 위나라와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이 싸움에서 고구려는 크게 패했으나 위나라는 고구려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3국이 싸우느라 고구려에 계속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고, 265년 위나라가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비록 한 때 싸움에 패했지만 위나라는 46년 만에 망해버리고 고구려는 그 뒤 더욱 강성해졌는데 김육불이 이 관구검의 침략에 한 절을 모두 할애한 것은 한족이 고구려 땅을 침범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제2기는 동호족인 모용씨와 부여족인 고구려의 각축시기이고 이때는 한족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쓰고 있으며, 제3기에 제목을 한족 부흥시대라고 붙였지만 고구려 말기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던 내용이 거의 전부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김육불의 동북통사는 고구려와 한족의 전쟁사를 다루었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은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부여를 이어받은 동족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고, 두 전쟁을 통해 양국이 서로 다투었던 국제관계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3) 고고학자 이문신(李文信)의 한족(漢族) 유물을 찾기 위한 노력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지만 만주에 고구려의 흔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한 고고학자가 있다. 이문신은 1903년 요령성 복현(復縣)에서 태어나 1982년 80세에 사망한다. 1921년 청년 이문신은 길림시 용담산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기 시작해 1937년 ⌈길림 용담산 유적보고(吉林龍潭山遺迹報告)⌋라는 논문을 처음 발표한다. 그 뒤 심양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당시 만주지역에 활동하고 있던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 만주 전역의 발굴에 참여하여 당시 중국인으로서는 가장 유능한 고고학자가 되었다. 1945년까지는 만주국의 관리로 일본인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중국의 한문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1946년 해방 뒤 고고학계의 주요 직책을 두 거치면서 쓴 논문에서는 한족 유물을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해방 이후 처음 쓴 ⌈길림시 부근의 사적과 유물⌋이란 논문 서문에 보면 그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 길림은 만주어로 ‘지린우라(吉林烏拉)’이다. … 북으로 나아간 한(漢)의 문명 역시 이곳이 기점이 된다. 동북 고문화의 옛 자취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요양․심양(遼沈) 중심과 함께 멀리 길림시까지 확장해 가는 것이 도리로 보아 당연하다. 진보적인 사람을 억누른 청대(淸代) 학자들이 황실 종족(옮긴이 : 만주족)의 개인 의견을 유지하기 위해 옛 역사를 말살하고 속설을 거짓으로 꾸며내 소위 한인세력은 개원과 철령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奏)나라와 진(秦)나라가 군현으로 봉한 땅을 지극히 먼 땅(大荒)의 밖에 있다고 보았는데, 사료가 부족하고 연구인력이 적어, 우리나라 학자들조차도 변강에 대한 연구를 지극히 소홀히 하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 자란 이 땅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서문에서 이문신은 지금까지의 연구가 만주족인 청나라의 어용학자 때문에 한족의 역사가 말살되었다고 보고 “만주 땅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한족으로서 어찌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하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그 역사가 한족에 속한다는 논리보다는 만주에 한족의 역사도 있었고 그 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도이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이 만주와 조선(滿鮮)을 경략하면서 부여족은 ‘현토군’의 속국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부여 유적이 남아있듯이 한(漢)의 문명도 남아있어야 하고, 이는 가능하다. 이것은 특별히 문헌에서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출토된 유물을 고찰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고구려 이전 부여) 유물은 한(漢) 문화가 만들어낸 것과 도착민이 남긴 것이 있다.
이 논문의 결론을 보면 이문신의 순수 학술적인 면을 떠나 한족들에게 만주에서 한족의 역사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격문 같은 인상마저 준다.
원래 동북의 문화가 진한(秦漢)의 변색(邊塞)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가 땅속에서 발굴한 재료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선인들의 풍부하고 위대한 업적, 기와 한 조각 벽돌 한 장은 모두 수없이 많은 피눈물을 흘리며 쌓아 발전시킨 것인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 비록 문헌이 부족하다는 흠이 있지만 유적 유물 연구를 중심으로 문화사에 종사하는 우리가 가야 할 정도를 어찌 길림시 한 구석이라고 가지 않겠는가?(亦吾人從事於文化史者之正路, 豈吉市一隅爲然耶)
2. 1980년 이후의 귀속문제 논의
(1) 중국의 개방과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부활
1975년까지 중국의 고구려 연구는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1965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발표된 20편 남짓한 논문은 대부분 고구려 유적지에서 종사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발굴보고 수준이었다. 1965년부터 1974년 10년간은 문화대혁명 때문에 단 한 편의 논문도 나오지 않았다. 그 뒤 80년 들어서면서 고구려 연구는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1979년 이후 중국이 개혁개방과 동시에 학자들에게 고구려사 연구가 양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이후 본격화된 중국의 소위“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家)”라는 중국의 민족정책의 확립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통일적다민족국가에 대한 논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시작되었다. 50년대 학계는 두 가지 견해로 나뉘었다.
첫째, 백수이(白壽彝) 같은 학자들이 내놓은 것으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범위를 바탕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이래 이 토지에서 살던 선민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며, “황조(皇朝)의 강역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역사상의 국토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다.”고 보았다. “우리의 역사 작업이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 편향으로 빠지기 대단히 쉽다” “우리를 국사 조대(朝代) 하나하나를 고립된 땅으로 보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고, 역사와 우리 현재의 사회생활의 결합할 수가 없다”
둘째 손조민(孫祚民)이 주장한 것이다. 그는 “중국고대사의 조국 강역과 소수민족의 문제는 역사적 태도와 변증의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편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중화인민공화국 국토 범위 안에 사는 각 민족(과거역사 상의 민족 포함)은 모두 중국 민족 대가정의 구성원이며 그들의 역사는 모두 중국역사의 일부분이다.
다른 한편으로 과거의 역사 단계는 반드시 각 족(族) 왕조의 강역이 역대 국토의 범위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각 해당 왕조 강역 밖에 있는 독립된 민족국가는 당시 중국의 범위 안에 포괄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러한 독립민족국가가 어떤 원인 때문에 점차 한족에 융합되거나 한족 왕조에 통일된 이후는 중국의 민족 성원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도 조국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
건국 초기의 이러한 논쟁은 백수이의 관점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여 오늘날 국토의 범위를 정하는 원칙으로 수 십 년간 유일한 표준이었다.
80년대 들어서 이 문제는 두 번째 큰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논쟁을 일으킨 것이다.
우선 양건신(楊建新)이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내 놓았다. 그는 “중국 역사상 진, 양한, 수당, 원, 명, 청 시대는 모두 기본적으로 전국통일의 시대를 실현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 발전의 근간으로 이 시기의 강역도 역사상 중국의 강역 범위를 확정하는 주요 표준이 된다. 언뜻 보면 손조민의 논리와 같아 보이지만 아주 새로운 관점이 엿보인다. 즉 한족의 왕조가 아닌 원나라나 청나라도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1981년 열린 ⌈중국 민족관련사 학술좌담회⌋에서 중국 민족과 강역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여기서 담기양(潭其驤)은 “신중국의 역사학자는 양수경(楊守敬)처럼 중원왕조의 판도만 가지고 역사상 중국의 범위를 정하는 논리를 다시 흉내낼 수는 없다. … 역사상 중국의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우리는 청조(淸朝)가 통일을 완성한 뒤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입하기 이전의 청조(淸朝) 판도, 구체적으로 말해 18세기 50년대부터 19세기 40년대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 판도를 가지고 우리 역사시기 중국의 범위를 잡는다. 소위 역사시기의 중국이란 이 범위를 말한다. 몇 백년이라고 해도 좋고 몇 천년이라고 해도 좋다. 이 범위 안에서 활동한 민족은 중국 역사상의 전권이라고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한다.”
담기양은 오늘날 강역을 표준으로 하자는 백수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역사상 중원왕조의 강역으로 표준으로 하자는 손조민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다른 관할형식이 당시 중국에서 시행한 주권과 관할의 표준이라는 양건신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전체 역사 시기, 몇 천년 이래 역사발전에 따라 자연 형성된 중국 전체가 역사상의 중국이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유일한 원칙이라고 말하며, 다만 “ 역사상 중국이 한때 역사상 중국 범위 이외의 지방에서 통제하고 있었다면, 그 지방이 역사상 중국 범위 안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몇몇 중국 왕조의 판도 안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승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중국 주변에 있는 모든 국가는 중국이거나 아니면 중국의 판도 안에 들어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80년대는 담기양의 주장이 크게 각광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귀속문제를 다루는많은 사람들이 담기양의 논문을 인용하고 몇 가지 책에서는 전문을 싣기도 한다.
1981년 ⌈중국 민족 관련사 학술좌담회⌋에는 동북지방에서 귀속문제의 핵심적 역할을 할 손진기가 참여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손진기의 논리는 담기양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는 내용이다. “역사상 대체로 안정적인 전통 강역을 역사상 민족과 정권으로 하는 귀속원칙을 만들었다”. 그 뒤 손진기는 귀속이론에 관한 논문들만 모아 책을 편찬하고 여러 논문집에 그의 논조를 발표해 동북지방에서 통일적 다민족국가에 대한 이론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80년대 이후 이처럼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확산되면서 동북지방의 최대 현안인 고구려 발해 문제 연구가 본격적인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2) 북한의 『조선전사』 출간과 중국의 반응
한편 1979년 북한이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연구한 『조선전사』를 새롭게 내어놓았다. 특히 고구려사를 다룬 『조선전사』 3권의 경우 대외투쟁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루어 고구려의 ‘반침략적 애국투쟁정신’을 강조한다. 한편 북한은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부각시키기 위해 발해사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특히 발해의 고구려 계승문제에 큰 비중을 둔다.
80년대 중국 학계에 소개된 『조선전사』의 이러한 내용도 중국 학자들을 상당히 자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중국에서 번역이 된 1985년 이후 중국의 논문 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을 비판하기 위해 쓴 논문들이 여러 편 나온다.
(3) 연구 결과에 대한 분석
80년대 들어와서 고구려 민족의 원류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깊이 있게 연구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서도 고구려의 원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가장 많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고구려가 고이, 부여, 예맥 가운데 어디서 출발하였는가에 초점이 있었고, 때로 고구려와 중원 정권과 신속, 조공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고구려는 중국사라는 주장은 아주 미약했다. 물론 이 당시 조선족 학자들은 고구려가 독립된 고대 국가라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80년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중국동북사’라는 관점에서 역사, 고고학, 강역 같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학자들이 나오는데 귀속문제와 관련해서 몇몇 학자들이 주목된다.
그 첫 번째가 손진기이다. 1931년 강소성 무석(无錫)에서 태어난 손씨는 해방 후 혼란기를 거쳐 22세인 1953년 동북인민대학 역사계에 입학하면서 역사를 시작했고, 1959년 28세 나이로 길림성 해룡현(海龍縣) 사범학교 교사가 되면서 지방사 연구를 시작한다.
1987년 발표한 『동북민족원류』에서 고구려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볼 수 있다.
고구려민족의 원류를 보면서 “과거에는 고구려민족을 조선민족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는데 이는 전면적인 고찰이 되지 못한다. 반드시 그 원류를 고증하여 판별해야 할 것이다”고 하며 고구려족의 기원을 맥족(貊族)으로 보았고 일부 예족(穢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기원은 예맥(濊貊)이라는 주장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맥족 가운데서도 몽고족에 가까운 ‘호맥(胡貊)’이이라고 주장해, 적어도 이 당시만 해도 손진기는 고구려 문화가 중원문화보다는 오히려 동호문화와 가깝다는 것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한편 “한반도의 고조선인과 예인․백제인 가운데 고구려족에 융합된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구려와 같은 언어 같은 종족 관계였기 때문에 이들의 융합은 아주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300여 년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모두 고구려에 융합된 것이다. 부여족과 옥저족은 고구려족과 같은 말, 같은 종족이기 때문에 융합이 가장 빨랐을 것이다”고 주장해 이 내용만 보면 손진기는 적어도 당시 고구려 영토에 속한 종족들은 모두 언어가 같고 같은 종족이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서에 나온 일부 한족들의 기사를 바탕으로 고구려민족에는 ‘한족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손진기의 논리는 고구려 속에 융합되지 못한 민족이 있다는 강조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705년 동안 주변의 종족들을 받아들여 고구려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손진기의 ‘고구려인=한족’이라는 논리는 고구려 705년의 성격에서 찾기보다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고구려인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보았다. 종합해서 보면, 고구려 땅은 말갈과 신라가 나누어 차지했고, 그 백성은 돌궐․말갈․신라로 나뉘어 편입되었는데 당나라로 넘어간 고구려인까지 합하면 모두 네 갈래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당․돌궐․말갈의 후예는 지금의 중국 한족이 되었고 신라로 간 일부만 조선족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전반적인 내용으로 보았을 때 이 당시 손진기가 가장 자신 있게 내 건 논리는 고구려 멸망 뒤 고구려인이 중국과 한국 어느 쪽에 많이 융합되었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9년 손진기가 요령성 박물관의 왕면후(王綿厚), 요령성고고연구소의 풍영겸(馮永謙)들과 함께 펴낸 『동북역사지리』 두 권은 당시까지 나온 책 가운데 역사지리와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심도 있게 고구려를 다룬 책이었다. 이 책은 고구려의 지명과 도성 및 산성의 현재 위치에 대해 과감하고 광범위하고 비정해 나가는데 두 군데 정도 고구려의 귀속에 관한 관점을 표시한다.
1권에서 후한 시기 고구려를 다루면서 “고구려 왕국은 한 대(漢代) 비군현(比郡縣)의 한 민족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가 가 한 대에 이미 정식으로 한나라의 판도에 들어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에 고구려를 독립국가로 본다거나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그 설치와 귀속에 관한 것을 논하지 않았는데 이렇게는 고구려왕국의 성질을 규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판단한 기준이 서한과 후한 사이의 왕망이 고구려가 말을 듣지 않자 나라이름을 ‘하구려(下句驪)’로 했다가 후한 때 들어와 다시 고구려가 된 사실이다. 사실이 이 내용은 왕망이 고구려를 전쟁에 동원하려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반대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이 한나라에 귀속된다는 기준이라고 한 것은 상당히 논지가 약한 것이었다.
2권에서도 “종합적으로 볼 때 당나라 초기 50년 가운데 당이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것은 5년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45년은 고구려가 주로 당나라에 신하로서 예속되어 있었고 당나라의 번속(藩屬)으로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논리의 주된 관점은 고구려가 당나라에 조공하고, 관직을 받았다는 전통적인 이론에 대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란 서로 적대국으로 고구려는 당당한 한 독립국이라는 관점에 대한 반박이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 동북지방사 연구에서 장박천(張博泉)의 연구도 주목을 받는다. 장박천은 80년에 쓴 현토군에 관한 논문을 바탕으로 1981년 쓴 『동북역대강역사』에서 ‘고구려는 항상 현토군으로부터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는 중앙에 조공을 하였으며 전쟁이 나면 군량을 제공하고 군사를 내어 전쟁을 도왔다’고 주장했다. 또 고구려는 위(魏), 진(晋)에 신하로서 예속되어 있었고, 남북조에는 번국(蕃國)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1985년 낸 『동북지방사고』에서는 “고구려는 한 대(漢代) 군현(郡縣)구역 안에서 발전하였고, 당시와 그 이후 구역의 확대도 원래 관할구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중원이나 중원 북방정권의 번국(蕃國)에 속해 있었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통일적다민족의 중앙집권국가가 요동의 군현을 수복하기 위해 진행한 전쟁이지 본국 통치계급이 영토확장을 위해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고 해서 고구려의 중국 귀속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 외에도 80년대 귀속문제를 다룬 학자로는 경철화(耿鐵華), 동문륜(董萬侖)의 『동북사강요(東北史綱要)』, 동동(佟冬)이 주편한 『중국동북사』 등에도 비슷한 논조를 보이고 있다.
3. 1990년 고구려 귀속문제의 본격화
1) 1990~1993년
90년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다. 그러나 1993년까지만 해도고구려는 조선사라는 주장과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주장이 병립한다.
손옥량, 이전복, 『고구려간사』, 삼성출판사, 서울, 1990 //////////////////????????
동북사를 다루는 몇 몇 책들이 고구려 중국에 귀속한다는 서술한다. 설혼(薛虹)․이주전(李澍田)들이 펴낸, 『중국동북통사』에는 “고구려족은 서한의 현토군에 속했기 때문에 서한 경내의 한 민족이며 고구려 건국 이후에도 한나라 왕조와 번속(藩屬)관계였다. … 남북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의 번속 관계는 이중신속관계로 남조에게 신하로 칭하고 북조에게도 신하로 칭했다. …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가 요동군을 수복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양소전(楊昭全)이 관계한 『중조변계사』에서는 “고구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에 예속하였으며,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역대 중원왕조가 관할한 소수 지방정권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3년까지만 해도 고구려가 한국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었다. 연변대학의 역사 교수들이 쓴 역사책은 당연히 고구려는 한국사였을 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쓴 책들 가운데는 1994년까지도 그 논조가 변함이 없었다. 장유화(張維華)의 『중국고대대외관계사』는 “4~7세기 조선반도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정립하고 있다”고 고구려를 중국의 대외관계사에 넣었으며, 유이승(劉李勝)이 편저한 『한국개론』에서는 한국 학자들과 똑 같은 의견이었다. 고로가(高路加)의 『중국북방민족사』는 내몽고 대학의 본과 강습서이다. 이 책은 각 민족을 언어별로 분류하였는데 예맥, 기자조선, 옥저, 부여, 고구려, 근대 중국에 들어온 조선족을 모두 조선어족으로 분류하였다.
이 시기에 요령성 심양에 심양동아연구중심이 설립된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의 바람을 타고 수익성 사업을 차리는 붐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손진기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학술연구, 도서출판을 위주로 하는 연구단체를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이 국립이고 모든 자금이 국가에서 나오던 시대에서 사립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기업형 연구소를 차린 심양동아연구중심은 국립 연구단체가 몇 십 년씩 걸리던 사업을 짧은 시간에 해냈다. 이 연구소에서 출판한 『중국고고집성』이나 『고구려발해연구집성』 같은 자료들은 중국 뿐 아니라 한국의 학자들에게도 고구려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심양동아연구중심(瀋陽東亞硏究中心)
설립 : 1991년 심양시동아문화연구소(沈陽市東亞文化硏究所)
1992년 심양동아연구중심(沈陽東亞硏究中心)으로 개명
주임 : 손진기(孫進己)
현재 직원 30명 남짓, 겸직연구원 100명 남짓
주된 사업 :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 고고학 연구.
산하 연구소 : 동아역사연구소, 동아민족연구소, 동아고고연구소, 동아문고 편집부
주요 저작 : 『東北亞硏究』 26권, 『中國考古集成』東北편, 華北편 등 총135권, 『高句麗 渤海硏究集成』6권, 『北方歷代人物傳』 7권, 『東北地方史硏究系列』4권, 『遼寧省市縣文物志』5권,『高句麗硏究系列』5권.
연구 책임자 손진기․손홍의 연구성과
孫進己 외, ⌈渤海的族源⌋, 『學習和探索』, 1982-5.
孫進己, ⌈歷史上民族歸屬的判定及統一多民族國家的形成⌋, 『中國民族關係史硏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4;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已, 「古代東北民族的分布⌋ (上, 下), 『東北地方史硏究』 1985-1.
孫進己, 『東北民族源流』, 黑龍江人民出版社, 1987
孫進己 主編, 『中國北方八省市考古論著滙編』, 北方史地資料編委會, 1987
孫進己, 『東北各民族文化交流史』, 春風文藝出版社, 1992
孫進己, 『東北亞民族史論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東北民族史硏究(一)』,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國家的建立和發展⌋,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王國的管轄範圍⌋,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王國和中央皇朝的關係⌋, 『東北民族史硏究』, 1994
孫進己, ⌈高句麗族的起源⌋, 東北民族 史硏究(1),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高句麗族和周邊各族的關係⌋,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已, 「關于高句麗歸屬問題的幾個爭議焦点」, 『東北民族史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孫進己 主編, 『東北亞歷史地理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孫進己 ⌈繼承發展譚其驤先生的學術思想不斷推進邊疆史地的硏究⌋, 『東北亞歷史地理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5;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古朝鮮的西界⌋,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孫進已, 「高句麗的歸屬」,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爲維持中朝韓友好和半島局勢穩定歷史上高句麗的歸屬仍以中朝共有爲宜⌋, 『當代中國邊疆問題調硏』, 1998-33
孫進己 ⌈國家和民族的歸屬⌋,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確定歷史上民族,政權,彊域歸屬的理論原則⌋,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孫泓, ⌈關于渤海歸屬問題的硏究⌋,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已, 「對高句麗歸屬問題的硏究」,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沈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 外, 『高句麗硏究』, 1999년 脫稿 現在 出版進行中.
孫進己, ⌈對東北民族史硏究方法的一些体會⌋,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孫進己, ⌈高句麗歷史硏究綜述⌋, 『社會科學戰線』, 2001-5(東北歷史與文化).
孫進己, ⌈國際法中關于確定土地,民族政權歸屬的原則⌋,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吉林時代文藝出版社‘ 2002.
孫進己, ⌈讓渤海史硏究成爲促進東北亞各國友好的橋梁⌋, 『博物館硏究』, 2002-3.
孫進己, ⌈我國歷史上彊域形成,變遷的理論硏究⌋, 『中南民族大學學報(人文社會科學版)』, 2003.
孫進己, ⌈論歷史歸屬硏究中的理論標準⌋, 延邊大學 『東疆學刊』, 2003-1.
孫進己․孫泓, ⌈對高句麗歸屬問題的硏究⌋,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孫泓, ⌈從渤海國和中央皇朝關係的演變看渤海國的歸屬的變化⌋,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내부출판).
孫進己․孫泓,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進己․王綿厚 外, 『東北歷史地理』(1),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孫進己․馮永謙 外,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孫進已․張春霞, 「從高句麗與中央皇朝關係的演變看高句麗的歸屬」,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泓 編, ⌈歷史上政權及民族歸屬理論硏究論著目錄⌋, 『歷史上政權,民族歸屬問題理論硏究』, 瀋陽東亞硏究中心, 1999(내부출판).
孫泓, ⌈高句麗民族的形成,發展及消亡⌋,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 입장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 상당한 연구성과를 쌓고 있었으나 우방국가인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여 내놓고 발표를 하지 못했다. 중국 당국이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북한을 자극할 만한 연구발표를 삼가해 달라는 권고조차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1993년이 될 때까지는 고구려 귀속문제가 양성화되지 못하고 음성적인 연구에 그쳤다.
양국간에 이 문제가 표면화 된 것은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이었다. 중국이 개방되면서 그동안 가볼 수 없었던 중국 땅에 한국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으며, 1992년 국교가 수립되면서 양국간에 여러 가지 행사들이 기획되고 실행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93년 열린 고구려 국제학술대회이다.
1993년 제1차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토론회
곳 : 집안시
때 : 8월 11~14일
주최 : 해외한민족연구소, 중국조선사연구회, 조선일보사
협찬 : 롯데그룹
이 토론회에는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석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원래 귀속문제에 대한 논의는 전혀 기획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첫날 종합토론이 진행되는 도중 발표자가 아닌 방청석에서 당시 북경대학 청화대학에서 근무하는 정인갑 교수가 고구려의 귀속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
당시 집안박물관 부관장이었던 경철화(耿鐵華)가 “나 개인의 학설이자 중국 동북지방 역사 및 고고학의 성과인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서기 427년부터는 고구려가 조선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문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방의 용(龍)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 김일성대학의 역사학계 원로인 박시형(당시 84세) 교수가 “한 나라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법이다. 과거의 고조선․고구려 땅이 지금 중국 영토가 되었다고 해서 그 역사를 어떻게 중국사에 갖다 붙여 중국 소수민족 운운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고구려야 옛날부터 고조선․부여와 함께 중국인들 스스로가 역사책에서 ‘동이족’이라고 독립해 지칭했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란 서술은 역대 어느 사서에도 없다.”고 반박하였다. 중국 학자들이 오늘날의 국경을 가지고 역사상 고구려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측 손진기는 “우리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고 할 수 없고 대부분은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되었다”고 되받았다.
이 당시 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번도 고구려 역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은 한국 학자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논의는 있었지만 그 주장이 주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인 학자들에게도 큰 놀라움이었다.
이 국제학술대회가 끝난 뒤 한국과 중국 양국에는 갑자기 고구려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1994년 이후 갑자기 고구려 연구열이 달아오른 것은 당시 연구의 흐름이 ‘고구려=중국사’로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대회에서의 있었던 뜨거운 논쟁은 많은 중국 학자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2) 1994년 이후 고구려 연구의 르네쌍스
1994년 이후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전문으로 하는 고구려연구소와 고구려연구중심이 설립되고, 사회과학원과 각 대학에 국경문제와 한반도에 관한 연구소가 잇따라 설립된다. 최근 동북공정을 실시한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도 이 때부터 고구려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1) 통화사범대학(通化師範學院) 고구려연구소
설립 : 1995년 7월, 소장 : 耿铁华 교수/현재 소장 - 杨春吉 교수
부소장 : 黄甲元 교수(长白山区地方史 전문가), 倪军民 부교수(사망)
설립목적 : 고구려 역사와 고고 연구, 인재와 地缘 우세함을 발휘.
고구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및 族源, 族属, 고구려와
중원왕조․백제․신사․일본․발해와의 관계 문제 연구
성과 :
通化师范学院, 『通化师范学报-高句丽史研究专号』, 1996-1
杨春吉․耿铁华 主编, 『高句丽歷史与文化研究』, 吉林师范学院古籍研究所编, 吉林文史出版社 长白丛书研究系列, 1997. 6.
杨春吉․耿铁华 编, 『중국학자 고구려연구 문헌목록』, 通化师院 高句丽研究所, 1997
杨春吉․耿铁华, 倪军民 主编, 『高句丽史籍滙要』, 吉林文史出版社 高句丽研究丛书, 1997. 6.
耿铁华, 倪军民 主编, 『高句丽歷史与文化』, 吉林文史出版社 高句丽研究丛书, 高句丽歷史与文化丛书, 2000. 4
杨春吉․耿铁华 主编, 『高句丽归属问题研究』, 吉林文史出版社 高句丽歷史与文化丛书, 2000. 12
통화사범대학의 고구려연구소는 몇 가지 면에서 다른 연구기관보다 우수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바로 고구려 705년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수도였던 국내성이 바로 통화시에 있으며, 첫 수도인 환인 오녀산성도 국내성과 같이 짧은 거리 안에 있어 현장에서 직접 고구려 유물을 발굴하고 유적을 답사할 수가 있다. 둘째, 가장 먼저 생긴 고구려 전문 연구소이기 때문에 각 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국학자 고구려연구 문헌목록』이나 고구려자료집인 『고구려사적회요(高句丽史籍滙要)』 같은 기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셋째, 고구려사 연구 전문가가 있다. 그리고 집안 박물관의 연구자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어 연구인력 확보가 쉽다. 넷째,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는 큰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비해 이 대학은 고구려 연구를 특화하여 전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고구려연구소는 다른 어떤 단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런 연구성과는 다분히 경철화 교수 한 명의 활약에 힙입은 바 크다.
2) 길림성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설립 : 1997년, 소장 : 孫文範(정년퇴직),
길림성사회과학원의 고구려연구중심은 고구려 연구의 중심이 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으나 아직 그렇다 할만한 연구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국제학술대회 같은 중요한 행사를 중국변강사연구중심과 함께 공동주최하는 등 힘을 쓰는 듯 하지만 괄목할만한 연구성과가 없는 것은 고구려를 전문으로 하는 연구인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구 책임자 劉炬의 연구성과
劉炬․寧勇, ⌈論唐太宗征高句麗受挫之原因⌋,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劉炬, ⌈唐太宗東征高麗勝敗辨⌋,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劉炬, ⌈唐滅高句麗善后政策之失誤及影響⌋,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吉林時代文藝出版社‘ 2002..
3) 길림성사회과학원 조선․한국연구소
소장 : 楊昭全
직접 고구려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장 양소전 교수의 한중관계사 연구에 고구려 연구 성과가 관심을 끈다.
연구 책임자 양소전의 연구성과
楊昭全, ⌈中,朝,韓三國關于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的硏究槪況⌋,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 ⌈韓國學者關于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之論著簡介⌋,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 ⌈漢四郡位置與漢東北長城⌋,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 「論高句麗歸屬」, 『韓國上古史學報』(13), 서울, 1993.
楊昭全, 「論高句麗的歸屬」, 『中朝邊界硏究文集』, 吉林省社會科學院, 1998(내부 출판).
楊昭全․韓俊光, 『中朝關係簡史』, 遼寧民族出版社, 1992
楊昭全․孫玉梅, 『中朝邊界史』, 吉林文史出版社, 1993
楊昭全․孫玉梅, 主編 『中朝邊界沿革及界務交涉史料滙編』, 吉林文史出版社, 1994
楊昭全․何彤梅, 『中國-朝鮮․韓國關係史』(上), 天津人民出版社, 2001
4) 동북사범대학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東北民族與彊域硏究中心)
구성 학자 : 劉厚生, 孫啓林, 李德山
성과 : 『黑土地的古代文明』,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高句麗史話』, 『渤海國史話』,
동북사범대학은 동북지방에서 가장 우수한 역사학과를 두고 있다. 길림대학이 고고학이면 동북사범대학은 역사학인 것이다. 동북민족강역연구중심에서 제1차 전국 동북 민족과 강역에 관한 학술토론회(東北民族與彊域學術硏討會)를 주관하였다. 이 회의에서 고구려에 관한 논문이 여러 편 발표되었다. 유후생 교수는 중국변강지구 역사사회연구(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 동북공작참(東北工作站) 부참장 일을 맡고 있으며, 동북공정에서도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유후생
劉厚生, ⌈亟待加强東北邊疆史的硏究⌋,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劉厚生 外, ⌈尊重歷史, 正視現實 - 中國東北地方史學術討論會紀要⌋,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이덕산
李德山, ⌈高句麗族稱及其族屬考辯⌋, 『社會科學戰線』, 1992-1;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李德山, ⌈夫餘族考略⌋, 『中國東北民族與彊域硏究』, 吉林時代文藝出版社‘ 2002.
李德山, ⌈燕族的族稱,發展及對東北的開發⌋,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손계림
孫啓林 譯, ⌈朝鮮歷史學者是怎樣看待東北古代文化和彊域的 - 朝鮮新書 『古朝鮮歷史槪觀』 節譯⌋, 『黑土之的古代文明』, 遠方出版社, 2000.
孫啓林 編譯, ⌈韓國徐炳國著『高句麗帝國史)』簡介⌋,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孫啓林, ⌈二戰後,朝鮮半島南北方史學界對高句麗硏究綜述⌋, 『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論文集』, 1999
孫啓林, ⌈二戰後朝鮮史學界的高句麗硏究槪況⌋,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孫啓林, ⌈二戰後韓國史學界高句麗硏究槪況⌋,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5)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중국변강지구 역사사회연구(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 동북공작참(東北工作站)
* 1995년 -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주임 마대정 ‘제1차 전국고구려학술대회’ 참석
* 1996년 하반기 - 고구려 문제를 중국사회과학원 중점연구 과제로 정식 입안
* 1997년 - 연구참가자들 길림성 고구려 유적 고찰, 길림, 요령, 흑룡강성 고구려사 동북지방사 연구 학자들과 교류 및 연구
* 1997년 연말 - 과제 초고 완성
* 1998년 - 邊疆史地叢書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 출판 (黑龍江敎育出版社, 1998년 12월)
6) 중요 학술대회
(1) ‘제1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全國首屆高句麗學術硏討會)
때 : 1998년 6월 26일~28일(3일간)
곳 : 통화시
공동주최 :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통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소
* 전국 제1차 고구려 학술토론회 『論文集』,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통화사범학원 고구려연구소, 1999. 6.
(2) 중국 동북지방사 학술토론회
때 : 1998년 12월
곳 : 장춘
(3) 제1차 전국 동북 민족과 강역에 관한 학술토론회(東北民族與彊域學術硏討會)
때 : 1999년 7월 24일~27일
곳 : 길림성 장춘시․길림시
참가 : 70명 남짓
논문 : 40편 남짓
결과물 :
劉厚生․孫啓林․王景澤 主編, 『黑土地的古代文明』,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區歷史與社會硏究 東北工作站․東北師範大學東北民族與彊域硏究中心, 東北民族與彊域硏究叢書, 2000.
4. 2000년대의 동북프로젝트의 등장과 귀속문제 논의
1) 2002년 동북프로젝트(東北工程)
2001년 북한이 고구려 고분벽화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다. 만일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이 되면 고구려사가 한국의 역사라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당황한 중국은 그 해 문화부 차관을 평양에 급파한다. “북한과 중국이 공동으로 신청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제의를 거절했고 중국에서는 다음해인 2002년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특별한 프로젝트를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 설치하기에 이른다. 중국사회과학원이 고구려사 귀속문제를 관여한 것은 이미 19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러 동북공정의 실시는 고구려 문제가 국가 사업의 중요 정책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뜻하며, 지금까지의 고구려 연구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구였다면 이제부터는 전국적인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출범한지 불과 몇 달 뒤인 7월 9일부터 13일까지 관련 학자 1백여 명을 참여시킨 가운데 고구려 전반에 관련된 특별 토론회를 갖고 한꺼번에 무려 7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고문: 李鐵映, 중공 정치국 위원, 중국사회과학원 원장, 項懷城, 중앙위원, 財政部 部長.
영도소조(지팀팀): 조장 : 王洛林, 중앙위원, 중국사회과학원 副원장.
부조장 : 楊光洪, 黑龍江省委 副書記, 全哲洙, 길림성 副성장, 趙新良, 요녕성 副성장.
馬大正, 중국사회과학원 中國邊疆史地연구중심, 연구원.
비서장 : 厲聲,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주임, 연구원.
전문가위원회: 주임 : 馬大正,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연구원.
부주임 : 秦其明, 중국사회과학원 부비서장, 연구원.
厲聲,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주임, 연구원.
성원: 成崇德, 중국인민대학 淸史硏究所 소장, 교수.
王 正, 중국사회과학원 科學硏究局 副局級 學術秘書, 연구원.
郝時遠, 중국사회과학원 民族硏究所 소장, 연구원.
王 巍, 주국사회과학원 考古硏究所 부소장, 연구원.
于 沛,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사연구소 부소장, 연구원.
潘春良, 흑룡강성 宣傳部 副部長.
步 平, 흑룡강성 사회과학원 부원장, 연구원.
弓 克, 길림성 선전부 부부장.
邴 正, 길림성 사회과학원 원장, 연구원.
常衛國, 요녕성 선전부 부부장.
趙子祥, 요녕성 사회과학원 원장, 연구원.
劉厚生, 중국변강역사와 사회연구 東北工作站 副站長, 교수.
고정사무실 성원
주임
李國强,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主任助理, 연구부 주임, 연구원.
劉 爲,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연구부 부연구원.
李大路, 중국사회과학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行政사무실 주임.
2) ‘제2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第二屆東北邊疆歷史與現狀曁高句麗學術硏討會)
때 : 2002년 7월 9일~13일(5일간)
곳 : 장춘시, 통화시
주최 : 中國社會科學院 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吉林省社會科學院
후원 : 遼寧省社會科學院, 黑龍江省社會科學院, 吉林大學, 東北師範大, 遼寧大學,
延邊大學, 北華大學, 吉林師範大學, 長春師範學院, 通化師範學院
참가 : 100명 남짓, 논문 70편.
3) 고구려․발해문제학술토론회(高句麗渤海問題學術討論會)
때 : 2003년 8월 23~24일(2일간)
곳 : 길림성 延吉市
공동주최 : “동북공정” 사무실․연변대학 中朝韓日文化比較硏究中心(교육부 文科基地)
주관 : 연변대학 中朝韓日文化比較硏究所
참가 : 25명(흑룡강사회과학원,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통화사범학원, 연변대학, 요령성박물관, 요령대학, 심양동아연구소, 정주대학 및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4) 제3차 전국 고구려 학술토론회(第三屆全國高句麗學術硏討會)
-고구려 학술연구, 고구려유적 세계문화유산 지정 촉진, 고구려 국내성 천도2000주년 기념 -
때 : 2003년 10월 9~11일(3일간)
곳 : 길림성 집안시 집안호텔
주최 : 길림성사회과학원․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 9일 오전에는 집안시 정부 주최 고구려 국내성 천도2000주년 기념축전과 상징건축물 제막식에 참가
* 대회 참가 논문은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紀念高句麗遷都國內城2000周年學術論文集』으로 출판될 예정
5) 『중국고구려사』의 중국사로 본 고구려사 시대구분
1998년 발행된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펴낸 변강사지 총서 1호에 『고대고구려역사논총』이란 제목을 붙였다. ‘중국+고구려 역사’라고 고구려사 앞에 나라이름을 써서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는 것을 표지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이다. 그런데 2002년 말(실제는 2003년 초)에 『중국고구려사』란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경철화 교수가 지은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시대구분할 때 고구려 자체의 역사에서 갖는 특징적 사건이나 시기를 가지고 시대구분을 하였다.
① 초기 - 흘승골성 수도 시기(기원전 35~기원 3년), 중기 - 국내성 수도 시기(3~427년), 후기 - 평양 수도 시기(427~668)
② 조기 - 장수왕 천도 이전(한․위․진 시대), 중기 - 고구려 전성단계(대개 남북조시대), 만기 - 고구려 쇄망단계(수․당시대)
③ 전기 노예사회 - 건국부터 평양 천도까지, 후기 봉건사회 - 평양 천도 이후 멸망까지
그러나 이번에 나온 『중국고구려사』는 중국 역사에 따라 고구려를 구분하고 있다.
① 양한(兩漢)시기 : 추모왕~산상왕(10왕) 고구려 정권을 건립하여 점차 튼튼해지며 대외 확장에 힘쓴다. BC 37~227년
② 위․진(魏晋)시기 : 동천왕~호태왕(9왕) 고구려 사회가 변혁, 발전하고, 강역을 확대한다. 227~412년
③ 남북조시기 : 장수왕~평원왕(6왕) 고구려 최대의 발전과 안정기. 413~590년
④ 수․당시기 : 영양왕~보장왕(3왕) 고구려 국세가 쇠약해지고 내부 모순이 더해져 멸망에 이른다. 590~668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흥망에 따라 시대구분한 것이다. 한 나라의 시대를 구분하면서 다른 나라의 왕조에 따라 시대구분을 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논리이다. 마치 남의 생일을 내 생일에 따라 결정하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이다.
소위 중국이란(원래 중국이란 나라는 없었다. 편의상 명칭으로 사용한다) 진․한 이후 북송(320년)을 빼고는 300년 이상 된 나라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700년이 넘는 고구려사를 중국 학자들이 시대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일 것이다. 경철화는 고구려 705년 동안 중국의 흥망을 4단계로 나누었는데 이 자체가 문제성을 안고 있다.
고구려 한 나라가 705년 동안 번영을 누리는 동안 고구려의 서방(현재의 중국)과 북서방(현재의 몽골)에서는 35개의 나라가 생겼다가 없어졌다. 그 가운데 70% 가까운 24개 국가가 50년도 못 가고 망했으며, 86%가 넘는 30개 국가는 100년도 못 가고 망했다. 200년 이상 간 나라는 단 두 나라뿐이다 - 한나라(221년), 당나라(290년)
* 한나라(221년)는 대부분 고구려 건국 이전에(고구려 건국 10년 망함)존재하였고, 당나라(290년)는 대부분
고구려 멸망(당나라 건국 후 50년) 이후에 존재하였다.
한편 35개 나라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지배한 나라였다.
50년 미만의 나라 (24개 나라)
후양(氐) - 7년, 서연(선비) - 10년, 남연(선비) - 13년, 동위 - 17년, 남양(선비) - 18년, 전연(선비) - 22년, 서위 - 22년, 서양 - 22년, 제 - 24년, 후연(선비) - 25년, 전조(흉노) - 26년, 하(흉노) - 26년, 북주 - 26년, 북연 - 28년, 북제 - 28년, 진 - 33년, 후조(羯) - 34년, 후진(羌) - 34년, 수 - 38년, 촉 - 43년, 북양(흉노) - 43년, 위 - 46년, 성(氐) - 46년, 서진(선비) - 47년
*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촉나라 위나라는 이 곳에 속한다.
100년 미만인 나라(6개 나라)
오 - 52년, 진 - 52년, 양 - 56년, 송 - 60년, 전진(氐) - 61년, 전양- 6년
* 삼국지의 오나라는 이 곳에 속한다.
100년 이상인 나라(5개 나라)
동진 - 103년, 북위 - 149년, 후한 - 196년, 한 - 221년, 당 - 290년
이 연표는 중국의 역사책에서 뽑아 정리한 것이다. 고구려 한 나라가 705년간 이어지는 동안 중국은 같은 민족끼리 또는 다른 민족과 수많은 투쟁과 전쟁의 역사가 이어져 편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온 35개국은 모두 중국이 자국의 역사로 치는 곳이다. 경철화가 이런 역사를 한족 위주로 4단계로 나누는 것 자체가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도대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데 705년 동안 꿋꿋이 이어온 고구려가 수없이 흥망을 반복하는 어떤 나라에 속했다는 말인가?
Ⅲ. ‘고구려=중국사’에 대한 중국의 논리
이 부분은 앞으로 서영수 교수와 윤명철 교수가 자세하게 발표할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그 개요만 설명한다.
1. 고구려는 중국 땅에 세워졌다.
이것은 고구려 귀속문제 논쟁의 초점 가운데 하나이다.
* 고구려를 세운 맥인 - 당시 중국의 한 민족이었다.
* 기원전 3세기 - 모두 연(燕)의 영역
* 기원전 2세기 - 연나라 위만(衛滿)이 위씨조선 건립
당시 위만 - 한나라의 위탁을 받아 그 지역을 관할.
* 고구려 - 기원전 108년에 벌써 한(漢)나라 현토군의 한 현,
졸본부여(卒本夫余) - 한나라 현토군.
기원전 37년 주몽 고구려 5부 통일 - 당시 모두 한나라 현토군의 영토,
* 중국 영토에서 진행 - 오늘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2. 고구려는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1) 주몽 건국 이전 - 한조(漢朝)의 현토군 고구려현 존재
2) BC37년 추모(주몽) 고구려 세운 뒤 계속 중국의 중앙정권과
신하로 예속되는 관계(臣附關係).
고구려후, 고구려왕, 정동대장군, 영주사사(營州刺史),
낙랑군공(樂浪郡公), 낙안군공(樂安郡公) 같은 관직을 받았다.
3) 북위, 북제 및 남조 의 각 나라 정권에 공물을 바쳤다.
* 전체 역사과정을 통해 보면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국의 한 지방민족정권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할거를 가지고 전 역사 기간 동안 중국에 귀속되었던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3. 고구려민족은 중국 고대의 한 갈래 민족이다. 조선족이 아니다?
* 고구려가 망한 뒤 고구려 후예
일부는 중원으로
일부는 돌궐로
일부는 발해로 들어가 - 모두 중국 각 종족에 융화됨
대동강 이남의 일부 고구려인 - 신라에 귀속,
그 뒤 또 작은 수의 고구려인 - 당과 발해에서 신라로 돌아갔다
이런 고구려인만 - 조선족에 융화
* 오늘날 조선족 - 선조는 주로 고대의 삼한(三韓), 즉 신라인
+ 상당수 조선반도로 옮겨간 중국 각 종족. 고구려 후예는 극소수
4.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은 중국 국내전쟁이다.
* 오늘날의 중․조 국경을 가지고 본다면 - 침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이전 1000년간 (낙랑군 4백년 + 기씨조선, 위씨조선)
모두 중국의 한족이 지배하던 곳
* 고구려가 반도의 북부를 점령 - 쳐들어와 점령한 것
한족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점령 - 잃어버린 땅 수복
* 역사상 수․당이 고구려를 친 것 - 대외침략전쟁 아니고, 중국 국내 민족간의 전쟁.
* ⌈고구려가 고조선 땅을 되찾는다⌋ - 도리에 맞지 않다.
고구려인 - 고조선의 후대가 아님 - 수복할 권리가 없다.
5.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지 않았다.
* 오랫동안 고려라고 불렀기 때문에 같은 나라로 잘 못 인식된 것.
왕씨고려 = 조선 역사, 오늘날의 조선족 선조가 건립한 것
고씨고려 = 중국 역사, 오늘날 중국 각 민족의 선조가 세운 것
* 왕건(王建) - 신라 장군 - 신라를 멸한 다음 후고려를 건립.
왕건(王建) - 신라 김씨 계통, 고구려 고씨의 위(位)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 왕씨고려(개성, 대동강 이남) - 신라 옛 땅, 고구려 땅 아니다.
* 고려시대 서희(徐熙) 주장․『송사(宋史)』도 인정 - 틀렸다
고구려 - 현재 조선의 역사라고 잘못 알게 하는 중요한 원인.
6. 한반도 북부 북한지역도 중국의 역사다.
* 한반도 북부가 한국의 일부분으로 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일이다.
5세기 고구려 평양 천도 - 조선 국가가 된 것 아니다.
고구려가 두 나라로 나뉘어 속할 수 없다.
* 기씨(箕氏)조선(기원전 11세기), 위씨(衛氏)조선(기원 2세기) = 중국 역사
이씨(이씨)조선 = 한국 역사
* 당(唐)이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지역을 떼어 주었고,
요(遼)가 압록강 이동 여진 영토를 고려에게 떼어 주었고,
명(明)이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주었다.
오늘날의 한중국경은 한민족이 북쪽으로 확장하여 형성된 것이다.
Ⅳ. 맺는 말
1) 중국 학자들의 논문은 연구 인력과 성과가 많은 반면 논문으로서 완성도가 떨어진 것들이 많다. 1) 확실한 전거를 대지 않은 것들이 많다. 주를 확실히 달지 않기 때문에 누구 논문이 원본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2) 저명한 논문집에도 논문 형식을 취하지 않고 마치 수필처럼 쓴 것들이 많다. 3) 같은 논문을 여기저기 중복해서 싣는 경우도 상당 수 있다. 귀속문제만 보더라도 새로운 연구성과라기 보다는 똑 같은 내용이 여러 책에 수도 없이 반복해서 나온다.
2)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 심지어는 미국의 학자들도 고구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중국어와 일본어를 해독하고 자료를 섭렵하여 자신의 연구에 반영한다. 그러나 중국 학자들은 극히 일부 번역본을 빼놓고는 외국의(특히 한국어 자료) 연구 성과를 거의 도외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3) 고구려사를 연구하면서 연구성과를 통해 귀속문제를 다루는 학자보다 귀속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더 많을 정도로 학술적인 객관성이 부족하다. 반면에 한국 학자들은 그 연구인원이 적다는 사실 빼놓고도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급급했지 고구려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4) 고구려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만주 전역이 옛 고구려 영토였기 때문에 요령성, 길림성 의 고고문물연구소를 비롯하여 박물관 연구 담당자들은 모두가 고구려사를 전공한다고 할 정도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최근 주요 학자들은 대부분 정년되직을 했거나 정년이 가까운 반면 젊은 학자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중국 학계도 객관적인 학문적 자세와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젊은 학자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역사연구에 흥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5) 폐쇠적인 연구 분위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성과가 나오기 힘들다. 앞으로 한국, 일본, 몽골, 러시아 들과 공동연구를 통해서 적어도 동아시가 각 국이 인정하는 보편타당성 있는 역사기술이 필요하다. 중국은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과 국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역사 인식은 아시아 나아가서는 세계 평화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중화사상 위주의 학문 연구는 아시아사나 세계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고 궁극적으로 중국 자체에게도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 중화사상을 내건 중국 역사는 끝없는 정복전쟁의 연속이었고 이민족에 지배당한 역사가 길다. 진나라 이후 300년 이상 지속된 나라가 북송 한 나라뿐이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5호16국(4세기 전후), 북위(149년), 요(210년), 금(120년), 원(109년), 청(297년)은 사실상 이민족의 지배였으나 이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해야 하는 아픔도 사실은 모두 지나친 중화사상에 있었던 것이다.
토론 자료 : 중국에서 제안된 있는 고구려사 연구 강화 방안
1. 고구려 역사 연구 심화를 위한 소견(馬大正, 『古代中國高句麗歷史叢論』,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연구중심 변강사지 총서, 1998)
1) 고구려 자료의 조사와 연구, 정보의 수집과 정리를 깊이 있게 진행해야 한다.
자료는 연구를 진행하는데 끊임없이 강화해야 할 기초작업이다. 고구려 사료 수집과 정리, 또한 국내 학자 100년간의 연구성과 모음집을 낸 것은 기뻐해야 할 성과이다. 현재 아직 계속 해야 할 작업이 세 가지가 있다.
㉠ 한문(漢文)으로 된 문학과 사학 서적에서 고구려에 관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이다. 양보융(楊保隆)의 ⌈각 사(史) ‘고구려전’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 해 대한 고찰⌋은 이 방면에 대한 유익한 연구였다. 이러한 작업은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 외국, 즉 조선(북한)과 한국 학자들의 연구 정보와 성과를 수집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긴박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 공백상태인 이 분야의 변화를 기대한다.
㉢ 국내 고구려 관련 고고학의 성과를 총 집결하여 출판해야 한다. 이상의 3가지 사업이 크게 진전되었을 때 고구려 역사 연구 또한 견실한 기초를 다졌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 방향(思路)를 개척하고 중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주제 선정을 잘 해야 한다.
이 몇 년간 관련 기관에서 진행한 고구려사 연구가 모두 고구려약사(高句麗簡史), 고구려통사, 여러 권의 고구려사 출판에 힘을 쏟고 있는데 서로간의 정보교환이 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노동의 중복과 인력자원의 낭비를 피할 수가 없다. 또한 약사나 통사 체제에 얽매어 있어 핫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기가 어려워 진다. 우리가 앞으로 연구해야 할 중점 과제는 다음과 같다.
① 고구려 민족의 근원(源)과 유파(流) 연구
② 고구려 민족 지방정권의 귀솔 연구, 아울러 중국 고대 지방 민족정권의 귀속에 관한 이론 연구
③ 중국 고서, 특히 24사에서 고구려 기록에 관한 고증․해석(考釋), 분석(辨析), 연구
④ 고구려 고고의 새로운 발굴성과에 대한 정리, 연구.
④ 중국 학자 고구려사 연구 총괄
⑤ 조선(북한), 한국 및 일본 학자의 고구려사 연구 총괄
⑥ 조선(북한), 한국 고구려사 연구 가운데 비학술화되어 가는 추세 연구
3) 연구 역량 조직, 협력(協作) 강화로 연구의 총체적(整體) 우세를 발휘한다.
현재 국내 고구려 역사, 고고, 문화재(文物)에 대한 연구 인력은 대부분 길림․요령․흑룡강성에 집중되어 있으며, 고구려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다수 동북민족사나 동북아사를 연구하면서 고구려사를 겸하여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 인력도 적고 후계자도 모자라는 형편이다. 연구 역량을 조직하는 데도 3가지 시급한 일이 있다.
① 관련된 연구단체에서는 연구계획의 연계,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내에 이미 일정한 연구 실력을 갖추고 있고, 이에 따른 행정기구도 갖추어져 있다. 고구려 연구가 주요(또는 중요) 임무인 길림성 사회과학원 고구려연구중심, 통화사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