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의 시대?
이반 크라스티브(Ivan Krastev)
이반 크라스티브는 소피아에 위치한 종합연구소인 자유전략을 위한 불가리아 센터의 의장이고, 뉴욕대학 레마르크연구소와 부다폐스트에 위치한 중앙 유럽대학의 반미주의 정치에 대한 프로젝트 연구위원이다.
20세기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한 미국의 시대였고,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으며 군사적으로나, 경제, 기술, 문화부분에까지 전 세계에 걸쳐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영어의 전파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원하는 전 세계 수백만명의 지속적인 욕구는 미국의 지배라는 현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미래는 곧 미국의 시대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지만 2001년 9월 11일의 테러공격은 미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현재 들어선 시대는 반미의 시대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반미주의는 9월 11일 뉴욕테러 이후 세계의 독특한 형태로 나타났다. 반미주의의 표현은 미국과 그 지배에 대한 전세계적민의 부정적 태도를 극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한 미국시민과 재산에 대한 테러행위와는 차이가 있다. 미국국기를 불태우고, 미국상품을 보이콧하며, 억제되지 않는 반미의 매력을 통해 선거후원을 결집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많은 지역에서 보편화되어있다. 오늘날 반미주의는 살인적인 형태의 반미주의와 그보다 좀 약한 형태의 반미주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의 힘과 가치 그리고 정책을 싫어하고 미국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 기꺼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죽을 수 있는, 반미주의에 광적인 테러리스트 이고, 두 번째는 길거리에서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반미운동을 하지만 미국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형태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만 다루어 질수 있지만 두 번째 형태는 이것에 반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을 고안하기위해 더 많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반미주의는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즉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과 부시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판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증가하고 있는 반미 여론은 광범위하고 유동성 있는 호소로 주 뼈대를 이루고 있다. 즉 그 현상을 분석하려는 중요한 시도는 세계 구석구석의 반미주의에 대한 다양한 원인뿐만 아니라 반미주의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목적을 포함해야 한다.
어떤 관찰자들은 반미주의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적절한 논쟁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반미주의의 현재 재출현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반미주의 담론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 세계는 어떤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국의 인기가 갑자기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미국을 비난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미주의에서 무엇이 새로운 길인가가 냉전이후의 세계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 공산주의로부터의 분리는 반미주의에 대한 새로운 길의 모색에 어떤 힘을 주었지만, 그러나 또한 이것의 호소에 제한을 가져다주었고, 반미주의는 그 이전 보다 훨씬 더 세계정치의 주류가 되었다. 어떤 점에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오늘날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라이벌이 없어져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말’ 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도착했을 때 반미주의가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염원 그리고 정치적 전략의 조각들은 마치 마술사의 모자에 들어 온 것처럼 새로운 삶을 위해 서로 함께 재생산되고 재결합되었다. 반미주의에 대한 호소는 좌우의 분열을 능가하였고, 성난 대중과 걱정스런 정부에 똑같이 작용되었고, 모든 이데올로기의 목적에 맞아 떨어졌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복합적인 반미주의의 증가에 따른 단순한 반미주의의 소극적 증가이다. 반미주의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또 다른 구실로 가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터키에서처럼 심지어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힘이 되었지만, 더욱 자주 중부 ,동부유럽에서처럼 반민주주의를 규합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반미주의 정서의 전 지구적 설명을 찾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반감을 갖는다는 널리 보급된 견해는 중동에서 그 해석상의 힘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슬람인과 알바니아인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적개심의 대상이 된 발칸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그룹에서, 미국은 현대성의 구체적 실현 때문에 혹평되어지고 있지만, 유럽인들은 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사형제도의 존속을 이유로 현대성 혹은 포스트모던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미국을 비난한다. 미국은 세계화와 일방적인 세계화에 대한 저항 양측면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로의 회귀와 반미주의 증가와의 상호관계는 다른 방법으로 해석되어 진다. 미국의 견해는 대체로 이스라엘의 견해를 반영한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미국의 견해를 반영한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의 우파가 미국이 친유대주의, 친이스라엘이라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반미주의자라고 쉽게 믿고 있다. 유럽 좌파들에게 있어 반유대주의자가 반미주의자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증오가 좌파들을 반시온주의, 반유대주의자로 변하게 만들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설명은 더욱 문제가 있다.
명확하지 않은 정의(Definition)
반미주의에 대한 정의는 항상 불명확할 것이다. 이런 꼬리표는 미국의 가치 혹은 정책을 비난하는 어떤 목소리에도 적용할 수도 없고, 적용해서도 안 된다. 미국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반미주의가 적합하지는 않다. 그러나 단순히 미국정부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이유로 어떤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반미주의의 정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트릭은 때때로 실제 삶과 시간에서 두 가지 자세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한다. 반미주의는 미국의 모든 것에 대한 조직적 반대이다.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정부결정 혹은 특정한 정책문제에 대한 단순한 논쟁을 넘어서는 것이다.
반미주의를 정의하는 가장 분명하고 논리적인 방법은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 반대에 서는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아메리카니즘에 대해 구글이나 아마존에서 검색을 했을 때, James W.Ceaser의 “반미주의의 계보” 나 Jean-Francois Revel의 책 “ 반미주의”가 첫 번째로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현재 견해는 반미주의론이 폭넓게 확장된 형태이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배경과 정치론이 그 자신만의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미국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반미주의에 참을 수 없는 매력을 주고 있다.
미국시민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 비호의적인 여론조사, 상업적인 보이콧, 적대적인 유세발언과 미디어보도 그리고 현재 현안에 대해 써있는 온 도시벽의 낙서와 같은 반미주의의 표현형식의 다양성은 반주의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미국을 반대하는 다양한 형식의 정책적 결과는 무엇인가? 미국은 반미주의 태도가 넓게 퍼진 나라나 또는 대중은 기본적으로 친근하나, 정부가 공공연히 반미국인인 나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시민을 목표로 하기위해 대량의 반미정서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론조사에 근거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가진다는 확신도 없다.
역사적으로, 반미주의 분석은 우파의 일이었고, 그 주제에 대한 모든 토론에 정치적 색체를 띠게 했다. 좌파의 대부분의 견해에서 반미주의에 대한 초점은 단지 미국정책에 대한 비평을 무시하거나 혹은 신용하지 않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반미주의는 미국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상 실천에 있어 분명한 실패에 대한 항의이다. Chalmers Johnson 은 2001년 9월 11일의 자살테러는 미국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외정책을 공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반미주의를 분석하는 의미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 대외정책 비평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많은 미국의 우파들은 “ 그들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라, 가치를 증오 한다 ” 고 말하며 반미주의의 증가는 미국 문명과 삶의 방식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아랍의 증오는 미국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미국이 무엇이고 무엇을 대표 하느냐에 의해 증오하기 때문에 중동에서의 미국의 더한 친 아랍정책도 아랍세계에서 반미주의의 현재수준을 줄일 수 없을 것이다. 좌파와 우파는 또한 미국의 군사력이 반미주의 증가에 어떤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취하고 있다. 우파는 미국이 자신의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반미주의 상승을 더욱 고취하고 있다고 본다.
극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시각이 공유하는 것은 반미주의가 미국에 대한 것이라는 평범한 확신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생각에는 가장 의문스러운 점이다. 반미주의와 지역에서의 반미주의 대한 반응 양쪽 다 미국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향후 정치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모순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반미주의는 정치의 부재가 아니라 선거에서의 고전으로부터 고통 받는 세상의 정치적 이슈로 정의되고 있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 적들과 말하지 않는 꿈들의 공존하는 사회이다. 그들의 경제는 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더욱 행복해 하지는 않는다. 세계 많은 곳에서, 투표자들은 함정에 걸린 느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유로이 정권을 쫒아 버릴 수도 있지만,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느낌을 갖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대중의 숙고에 바탕이 되는 상식을 음모론적 상상이 대신하고 있다.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와 정치의 부재, 이것들의 파괴적인 우둔함이 반미론이라는 유혹적인 힘의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반대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무엇에 반대하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미국에 반대하고 있다.
서유럽의 가장최근의 조사는 반미주의성향의 유권자들의 태도에 중요한 변화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프랑스의 오래된 전형적인 패턴이 서유럽 곳곳의 평범한 현상이 되었다. 엘리트들은 일반대중보다 더욱 미국에 부정적이고, 젋은이들은 연장자들보다 더욱 비판적이다. 합리성을 찾는 정치 엘리트들과 이유를 찾는 젊은 세대들이 반미를 주장하는 새로운 유럽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얼굴들이다.
9.11 테러이후 미국은 아랍세계가 자신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리고 아랍의 반미국인주의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특별한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다시 부활한 반미국인주의는 세계정치에서 이러한 자세를 주요 원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라크문제에 관한 미국과 E. U 간의 이해차이가 반미주의의 정치적 잠재력 분석에 중요하다. 이라크에 관한 논쟁의 재실행은 서부유럽의 새로운 반미주의와 미국과 아주 약간의 관련이 있을 뿐 이라크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반미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밝혀 내는대 도움이 되었다.
유럽 그리고 반미국인주의의 유혹
정치는 종종 유용한 진부한 표현을 꾸며내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토니블레어 영국수상은 미국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 전 연설에서 편안한 친근감은 아니지만, 그들의 상처가 최근의 것이고, 그들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고, 그들의 자유와의 친근 관계가 아직 열정적이기 때문에, 유럽연합의 새로운 회원국들은 유럽화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를 잘 실행했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항상 정상적인 설명을 만들지 않는다. 어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동부유럽의 이라크에 관한 미국과의 동맹 결정에서 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블레어 보다 훨씬 더 완고하다. 이러 분석의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이 투표에 의해 옹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경험한 모든 국가에서 여론조사는 강한 반전 여론(70 -75%)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의지의 연합’ 은 사실 껄끄러운 연합이다. 소피아와 베를린의 유일한 차이는 소피아에서의 대다수의 반전여론이 거리가 아닌 여론조사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보수주의자들의 사건읽기는 동부유럽 엘리트들의 동기에 관하여 공통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자유서약 논쟁은 Vaclav Havel 와 Adam Michnik 같은 이전의 반체제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미국의 원조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유럽의 절반을 움직이는 구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의 행동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자유서약은 결코 그들의 등록된 상표나 특징이 아니다.
워싱턴의 반대자들은 새로운 유럽이 새로운 행렬에 들어가는 것을 ‘종사자의 행진’ 이라고 빠르게 이름 붙였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정부에 항의하는 이러한 정부들의 의심스러운 충성은 냉전시대에 소련에 대항해 보여주기 위해 이용했던 충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동기로 움직이는 자유서약과 동떨어진 종속국가들의 본능적인 행동은 동유럽 국가들이 걸아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이 해석 또한 옳다고 증명하기 어렵다. 힘의 정치라는 점에서 보면 유럽의회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보다 훨씬 큰 채찍과 당근을 동유럽국가들에게 휘두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위성국가 정서가 제대로 작용했다면, 새로운 유럽은 옛날로 회귀했었어야 했다.
요컨대, 자유서약과 위성국가 정서 둘 다 모두 워싱턴을 향한 동유럽국가들의 지원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폴란드와 프랑스의 진짜 차이는 반미주의를 조장하는 데에 따르는 이득과 손실에 대한 그들의 다른 판단이다. 파리는 반미주의가 고조되는 것을 보면서 세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기회를 보고 있고, 바르샤바는 같은 현상을 지켜보면서 10년간의 고된 정치 경제 개혁으로부터 얻은 수확에 대한 위협을 보았다.
반미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유럽
이라크전쟁 동안 새로운 유럽과 옛 유럽을 구분하는 진짜요인은 서유럽국가 리더들에게 있어 반미론의 눈길을 끄는 유혹이었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유럽국가들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반미주의를 건드려 보는 것이 단순히 나쁘지 만은 않았다. 공산주의 이후 정부들은 반미주의의 증가를 걱정해야 하는 중요한 국내정치문제를 안고 있다. 동유럽국가들이 지난 10년간 겪어왔던 민주주의와 시장의 변화는 미국의 깃발아래 감싸져왔었다. 민주주의가 동유럽국가들에 들어갔을 때, 민주주의는 영어로 된 노래였으며, 미국헌법에 대한 사랑이었고, 미국의 재정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전에 공산주의를 경험했던 국가의 개혁주의 엘리트들의 미국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상징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파괴적이었다.
유럽인들을 구분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의 유산과의 싸움이었다. 서유럽에서 1968년의 저항자들은 반미주의자이고 반자본주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아주 구체화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자들의 착취가 있는 ‘미제국주의’ 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세대들의 상상 속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세계의 상징이었다. 독일의 학생리더였던 Rudi Dutschke가 1968년 프라하에 연대투쟁을 위해 갔을때 시장독점과 자본주의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함께할 것을 제안하자, 체코의 학생들은 그에게 그 문제가 바로 우리가 진짜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유럽의 ‘제 3의길’ 은 자본주의에서 탈피하는 길이었고, 폴란드와 체코에게는 사회주의를 벗어나는 길이었다. 유럽에서 현재 힘을 갖고 있는 많은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들의 사회주의화의 차이가 이라크 위기 동안 증가되는 반미주의에 대해 확산되는 반작용을 이끌었다. 베를린과 바르샤바 모두 1968년 운동의 유산에 여전히 충성했지만, 그 유산이 바로 서부유럽과 동부유럽을 나누었다.
동유럽인들은 그들의 서유럽 이웃들 중 몇몇이 진짜 유럽 국가민으로써 탄생과 동부유럽의 개혁주의 엘리트들의 분명하고 현존하는 위험성을 두드러짐, 그리고 그들의 정책을 바꿈으로써 촉진되고 있는 현재의 반미주의 물결을 금방 알아차렸다. 공산주의체제를 겪었던 유럽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지난 10년간의 변화에 실망하며 동시에 반미주의론이 파리와 베를린에서 그 정당성이 선언되어졌을 때 좌우파 양쪽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당들에게 그 문을 열어 주었다. Ian Buruma 는 유럽국가의 인기영합주의는 역사적으로 거의 항상 반미주의 였다고 말했다.
BBSS Callup International 과 자유전략연구소가 발칸반도의 5개국(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코소보, 루마니아, 세르비아)에서 2004년 6월 실시한 여론조사는 위에 언급한 Ian Burma의 주장에 그 타당성을 뒤받침 하였다. 이번 여론조사의 응답에서 시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에 관련이 있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향한 그들의 적개심이 드러났다. 응답자중 미국에 우호적인 사람들 또한 가장 친 민주주의적이고 E. U.에 가장 호의적인 이었다. 서부유럽과는 반대로 발칸반도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고, 연령이 낮으며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가장 자주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새로운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은 미국과 E. U.의 대립을 그들 자신들의 사회개혁 결과에 극도로 부정적 요소로 인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동유럽은 민주주의가 아메리칸드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오늘날 동유럽의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이런 지역적 상황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풍조는 시장과 민주주의를 공격할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편에 섰다.
대안적인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비전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현 상태에 대해 증가하는 대중의 비난에 고무된 동유럽의 반 민주주의 세력은 정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반발표를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담아낼 정치적 노선으로써 반미주의를 보았다. 반미주의의 힘은 그 공허함에 있다. 세르비아의 Vojislav Seselj(그는 현재 헤이그에 위치한 UN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와 같은 정치인에게 있어, 세르비아인이 더 이상 코소보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혹은 보스니아를 위해 더 이상의 살인을 각오하지 않았을 때, 반미주의는 국수주의자들의 행동지침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불가리아 같은 국가의 옛 공산주의 엘리트들에게 있어 반미주의는 그들 자신의 시간대에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전망에 그들 자신을 다시 넣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였다. 동유럽의 얼마나 많은 옛 공산주의자들이 반미주의에 대한 유럽의 생각을 이용 하느냐를 관찰하면 놀라움을 금할 수없다. 새로운 신구좌파에게 있어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함정에 빠트리는 전략이다. 몇몇의 옛 공산주의 정부에게 있어 반미주의는 일반대중의 분노에 초점을 바꾸는 도구이다. 그리고 진실을 깨달은 대중들에게 있어 반미주의는 엘리트들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전달수단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해결책이 ‘역사의 종말(공산주의가 멸망)’ 같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승부에서 반발표가 승리했을 때 반미주의는 그들이 즐겨 찾는 전략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럽의 반 - 반미주의가 단순히 친미주의로 인식되어지지만, 이 두개의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워싱턴의 몇몇 정치적 그룹들은 E.U를 외교안보정책에 관해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도구로써 새로운 유럽을 사용하는 장난을 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전략은 아주 위험한 비현실적인 추정에 기초해 있을 것이다. 국제범죄재판소에서 E.U의 편에선 거의 모든 새로운 민주주의적 결정은 미국정책입안자들에게 있어 동유럽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중대한 외교정책의 실수라는 신호가 되어야 한다. 동유럽이 이라크위기동안 미국에 편으로 돌아온 것은 지리적 약점을 넘어선 역사적 승리였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장기적으로 봐서는 지리적 강점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럽은 유럽연합의 기초를 반미주의로 만드는 경향에 반대하는,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가 아닌 강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신-드골주의자와 보수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 유럽은 18세기에 군국주의 유럽에 대항했던 신세계와 같은 방법으로 현재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반미주의는 유럽의 일상적인 정치적 언어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유럽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러한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을 향한 유럽의 도전 문제는 유럽이 이 경쟁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적 자본주의 모델을 촉진시키는 기회로 보기보다는 보다 넓게 시장에 기초한 방향으로 그 모델을 크게 전환시키기 위해 대중의 지지를 얻는 전략으로 이 경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현실은 전후 서부유럽에서 개발된 사회복지국가 정책 추구에 있어서 유럽이 점점 더 유럽인화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이 그들의 국경너머 국가들에게 지원한 경재개발 프로젝트을 살펴보면, 이 지원들이 그들이 자국에서 매도하던 신자유주의적 정설과 똑같은 형태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반미주의로 형성된 유럽인의 정체성에 관한 부정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유럽의 거부감은 유럽인들에게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긍정적인 정체성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재 유럽과 미국은 일반적 가치와 이득에 의해 나누어진 동맹인 것이다.
반미주의의 위험한 유혹
현재 세계정치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 반테러주의, 반부패, 반미주의 이론 속에는 이상한 기능적 유사성이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어떤 보편적인 대안이 없는 시점에 세 가지 이론이 공산주의 종말 이라는 역사의 끝에서 번성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실망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현재 민주주의는 종종 다시 정의되거나 혹은 일그러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반대되지는 않고 있다. 반시장체제와 반자본주의 정서는 수면 속에서 부활을 즐기고 있지만, 수면위에서 이러한 정서는 IMF(국제통화기금)과 Joseph Stiglitz(‘세계화와 그 불만’ 의 저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논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엇이 교수전용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대한 말다툼을 현재 줄이고 있는가. 이세가지 이론은 막연한 불안과 냉소적으로 디자인된 정치적 전략으로 쉽게 채워지는 텅빈 박스와 같다. 각각의 이론은 투표하는 대중과 그들이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한 정치적 엘리트들과의 계속 증가하는 간격에 대한 반응이다. 이 모든 세 가지 이론은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을 비판하는 위험을 피하며 현재 상태를 비난하고 있다. 완전히 충돌되는 이러한 목적을 가진 그룹들은 이 세 가지 이론을 그들 자신만의 예정표와 의제를 제공하기 위해 개발하고 있다.
반부패에 대한 이야기가 1990년대 초 전 세계 정치 현장에서 터져 나왔을 때, 반부패는 민주주의적 개혁과 시장을 더 활성화하는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 개념화 되었었다. 반부패 운동은 정부에 압력을 가해 훌륭한 통치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워싱턴정부)에 의한 공동노력으로 조직되었었다. 반부패에 대한 이야기는 지역의 시민사회활동가와 워싱턴정부에 의해 공유된 반부패에 대한 활동은 무엇이 잘못되어져 왔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의도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중은 그것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부패로 고발된 정부와 아주 적은 부패수준을 요구하는 반대세력사이에 대립을 줄이는 많은 민주주의적 방법 안에서의 정치적 경쟁이었다. 반부패 운동은 전형적인 정부 그리고 충돌하는 생각과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에서 정치적 이해를 손상시켜왔다. 일반대중과 정치적 엘리트들의 사이의 틈을 좁히는 노력과는 상관없이 반부패주의론은 이 틈을 더욱 확장해 왔다.
9.11 테러 이후 테러리즘이 전 세계적 상상력을 붙잡고 있을 때 반테러주의론은 공통적인 위협이 새로운 세계의 요구를 나타 내는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그러나 사실상 많은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그들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파괴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얻기 위해 테러주의 자들의 생각을 빼앗아 왔다. 반테러리즘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NGO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교묘하게 이용되어 지고 있다. 이러한 정부들은 기회를 붙잡았고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반테러리즘과 반부패론의 성공적인 조합과 온건한 반미주의 그리고 오래된 행정부 정치는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수용가능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이 모델은 다른 곳에서 되풀이 되어 질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의 상호의존성과 확산되는 민주주의에 의해 약화된 정부자신에 가장 완화된 행동의 자유를 발견한 정부는 통제력을 강화하고 정부의 여러 조치와 행동에 대한 비밀성을 증가시키는데 반테러리즘을 이용하고 있다.
반미주의론의 영향은 간단히 민주주의를 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워싱턴은 시민사회 관계자들에게 부패한 정부가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문제회피를 시도하는 정부들에게 반부패 의제를 촉진시킴에 있어 더 높은 측면에서의 대응을 채택했다. 워싱턴은 신뢰 받지 못하는 정부들에게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 내부의 반대자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이도록 허락하였다. 반미주의의 경우 정부는 실망한 국민들에게 미국이 문제라고 설득을 시도하고 있다. 반부패론 진행은 자본주의와 확산과 더 깊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디자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실패했다. 반테러주의론은 전 세계에 걸쳐 반미주의 시위를 만들어냈고, 반미주의는 미국의 영향력 확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확산과 전 세계 시장체제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불행히도,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반미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
9·11 사태 직후에, 미국은 공개적인 외교를 고조되는 반미주의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간주하였다. 외교관계자문위원회 보고서는 공개적인 외교를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국가안전요구에 직결된다고 밝혔다. 이제는 전략이 바뀌었다. 공격적인 민주주의 증진(추구)은 테러리즘과 반미주의 양쪽 모두에 대한 미국의 응답이다. 그것이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미국이 그 자신을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대의와 결합시켰을 때에 가장 인기 있고 강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이 그 자신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증진(추구)은 오늘날의 세계를 빚어낸 반부패, 반테러리즘 그리고 반미주의 담화 사이의 악전고투로부터 손상을 입을 수 있다. 테러리즘의 위협은 이미 민주주의 사회를 시민의 자유와 공공 안전 사이의 경계를 재협상해야 할 필요에 직면시켰다. 각 사회는 세계적인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직면하여 그 자신을 방어할 보다 나은 기회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유를 희생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 답이 사회가 아닌 비민주적인 정부에 의해 주어질 때 생겨난다.
미국 외교 정책의 새로운 안보 초점은 중앙아시아에서의 독재정치를 비롯한 수많은 폭정에 민주주의 자격증을 남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 정부가 민주적 실행과 안보 협력 사이의 거래를 다루는 방식은 일부 지역에서 민주주의 운동에 역행하고 민주주의 의제를 증진시킴에 있어 실제적인 장애가 될 수 있다. 냉전시대에 미국 정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런 정책들의 대가를 치렀고, 오늘날은 중동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위협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선택지 안에 들어있지 않다. 군사·경찰 협력을 통한 테러와의 전쟁이나 민주주의 확산의 목표는 긴장감 속에 때로는 눈에 드러나는 충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반미주의의 고조는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미국과 그 정책에 대한 새로운 의혹의 맥락 안에서 많은 비민주국가와 반민주국가, 심지어는 근민주국가 정권들까지도 민주주의에 대한 내적인 압력을 “미국이 원조한 불안정화 책략”이라는 딱지를 붙여 범죄시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구소련의 그루지야 공화국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은 이런 관점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루지야인들이 공정한 선거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길에 나선 바로 그 순간, 대통령인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이런 대중적인 움직임을 미국이 촉발시킨 음모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권위주의 정부의 전략은 민주주의 운동이 스스로를 미국과 분리시켜 생각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들을 고립시키고 국제적인 지원을 박탈하는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민주주의 증진이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반미주의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압력을 “미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관한 전망을 침식해 들어갈 것이다.
미국과 유럽간의 불화는 이런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 고조되고 있는 반미주의 흐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납득할만한 욕망에 이끌리는 많은 유럽 정부와 협회들은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미국의 민주주의 증진 노력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런 자세는 세계 곳곳의 민주주의 약진 기회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민주화 의제를 민주적으로 추진하는 것; 많은 지역에서 그들(유렵인들)의 민주주의 증진은 국제적으로 후원받는 민주화 노력이라는 바로 그 생각을 부식(침식)시킨다.
확산중인 민주주의에 관한 미국의 새로운 방침은 또 다른 결정적인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1989년의 기적은 되풀이될 수 없다. 동유럽에서는, 민주화는 친미정권과 친미사회를 탄생시켰다. 중동이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와 비슷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라크는 또 다른 폴란드가 아니다. 미국에 대한 안보위협을 가져온 반-미국식민주화의 출현이 가져올 전망에 직면하여, 미 정부는 자신의 민주화 의제를 억지로 가다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반응은 민주화 정책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안보에 민감한” 민주화-성립 책략의 수용을 낳을 수도 있고, 그런 곳에서는 민주화가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데 실패한다 할지라도 지방의 갈등들을 통제하고 재조정할 수 있는 그런 정치적 정권’으로 오인된다. 인종적으로 나눠진 사회에 자유선거를 도입하는 것이 그 사회를 민주화화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약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는 그것이 대체한 압제적인 정부만큼이나 자유와 인권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중동에서 미국의 민주화 책략은 ‘민주화는 열린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원칙에 합당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를 가리는 엄중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미국이 지금까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세계 각처에서 고조되고 있는 반미주의는 반-반미주의 진영의 출현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국의 정책에 동의하지 못할 때조차도 이런 진영의 사람들은 미국의 영향력이 적다는 것은 곧 자유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미주의가 만연하고 있으며 이는 반민주주의와 반자본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드러난 반-반미주의는 반미주의 정책을 반격할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원하고 그것을 국외로 내보낼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 있어 최고의 전략적 선택을 구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반 크라스티브(Ivan Krastev)
이반 크라스티브는 소피아에 위치한 종합연구소인 자유전략을 위한 불가리아 센터의 의장이고, 뉴욕대학 레마르크연구소와 부다폐스트에 위치한 중앙 유럽대학의 반미주의 정치에 대한 프로젝트 연구위원이다.
20세기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한 미국의 시대였고,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으며 군사적으로나, 경제, 기술, 문화부분에까지 전 세계에 걸쳐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영어의 전파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원하는 전 세계 수백만명의 지속적인 욕구는 미국의 지배라는 현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미래는 곧 미국의 시대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지만 2001년 9월 11일의 테러공격은 미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현재 들어선 시대는 반미의 시대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반미주의는 9월 11일 뉴욕테러 이후 세계의 독특한 형태로 나타났다. 반미주의의 표현은 미국과 그 지배에 대한 전세계적민의 부정적 태도를 극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한 미국시민과 재산에 대한 테러행위와는 차이가 있다. 미국국기를 불태우고, 미국상품을 보이콧하며, 억제되지 않는 반미의 매력을 통해 선거후원을 결집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많은 지역에서 보편화되어있다. 오늘날 반미주의는 살인적인 형태의 반미주의와 그보다 좀 약한 형태의 반미주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첫 번째는 미국의 힘과 가치 그리고 정책을 싫어하고 미국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 기꺼이 살인을 저지르거나 죽을 수 있는, 반미주의에 광적인 테러리스트 이고, 두 번째는 길거리에서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반미운동을 하지만 미국의 파멸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형태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만 다루어 질수 있지만 두 번째 형태는 이것에 반대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을 고안하기위해 더 많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반미주의는 감성적으로 흐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즉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감과 부시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판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증가하고 있는 반미 여론은 광범위하고 유동성 있는 호소로 주 뼈대를 이루고 있다. 즉 그 현상을 분석하려는 중요한 시도는 세계 구석구석의 반미주의에 대한 다양한 원인뿐만 아니라 반미주의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목적을 포함해야 한다.
어떤 관찰자들은 반미주의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적절한 논쟁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종종 반미주의의 현재 재출현에 대한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반미주의 담론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 세계는 어떤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국의 인기가 갑자기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 사이에서도 미국을 비난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미주의에서 무엇이 새로운 길인가가 냉전이후의 세계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 공산주의로부터의 분리는 반미주의에 대한 새로운 길의 모색에 어떤 힘을 주었지만, 그러나 또한 이것의 호소에 제한을 가져다주었고, 반미주의는 그 이전 보다 훨씬 더 세계정치의 주류가 되었다. 어떤 점에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오늘날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라이벌이 없어져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말’ 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도착했을 때 반미주의가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염원 그리고 정치적 전략의 조각들은 마치 마술사의 모자에 들어 온 것처럼 새로운 삶을 위해 서로 함께 재생산되고 재결합되었다. 반미주의에 대한 호소는 좌우의 분열을 능가하였고, 성난 대중과 걱정스런 정부에 똑같이 작용되었고, 모든 이데올로기의 목적에 맞아 떨어졌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복합적인 반미주의의 증가에 따른 단순한 반미주의의 소극적 증가이다. 반미주의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또 다른 구실로 가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터키에서처럼 심지어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힘이 되었지만, 더욱 자주 중부 ,동부유럽에서처럼 반민주주의를 규합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반미주의 정서의 전 지구적 설명을 찾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반감을 갖는다는 널리 보급된 견해는 중동에서 그 해석상의 힘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슬람인과 알바니아인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적개심의 대상이 된 발칸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그룹에서, 미국은 현대성의 구체적 실현 때문에 혹평되어지고 있지만, 유럽인들은 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사형제도의 존속을 이유로 현대성 혹은 포스트모던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미국을 비난한다. 미국은 세계화와 일방적인 세계화에 대한 저항 양측면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로의 회귀와 반미주의 증가와의 상호관계는 다른 방법으로 해석되어 진다. 미국의 견해는 대체로 이스라엘의 견해를 반영한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미국의 견해를 반영한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의 우파가 미국이 친유대주의, 친이스라엘이라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반미주의자라고 쉽게 믿고 있다. 유럽 좌파들에게 있어 반유대주의자가 반미주의자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증오가 좌파들을 반시온주의, 반유대주의자로 변하게 만들어 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설명은 더욱 문제가 있다.
명확하지 않은 정의(Definition)
반미주의에 대한 정의는 항상 불명확할 것이다. 이런 꼬리표는 미국의 가치 혹은 정책을 비난하는 어떤 목소리에도 적용할 수도 없고, 적용해서도 안 된다. 미국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반미주의가 적합하지는 않다. 그러나 단순히 미국정부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이유로 어떤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반미주의의 정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트릭은 때때로 실제 삶과 시간에서 두 가지 자세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한다. 반미주의는 미국의 모든 것에 대한 조직적 반대이다. 미국에 대한 비판은 정부결정 혹은 특정한 정책문제에 대한 단순한 논쟁을 넘어서는 것이다.
반미주의를 정의하는 가장 분명하고 논리적인 방법은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 반대에 서는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아메리카니즘에 대해 구글이나 아마존에서 검색을 했을 때, James W.Ceaser의 “반미주의의 계보” 나 Jean-Francois Revel의 책 “ 반미주의”가 첫 번째로 보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현재 견해는 반미주의론이 폭넓게 확장된 형태이다. 어떤 특정한 정치적 배경과 정치론이 그 자신만의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미국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반미주의에 참을 수 없는 매력을 주고 있다.
미국시민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 비호의적인 여론조사, 상업적인 보이콧, 적대적인 유세발언과 미디어보도 그리고 현재 현안에 대해 써있는 온 도시벽의 낙서와 같은 반미주의의 표현형식의 다양성은 반주의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미국을 반대하는 다양한 형식의 정책적 결과는 무엇인가? 미국은 반미주의 태도가 넓게 퍼진 나라나 또는 대중은 기본적으로 친근하나, 정부가 공공연히 반미국인인 나라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테러리스트들은 미국시민을 목표로 하기위해 대량의 반미정서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론조사에 근거한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가진다는 확신도 없다.
역사적으로, 반미주의 분석은 우파의 일이었고, 그 주제에 대한 모든 토론에 정치적 색체를 띠게 했다. 좌파의 대부분의 견해에서 반미주의에 대한 초점은 단지 미국정책에 대한 비평을 무시하거나 혹은 신용하지 않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반미주의는 미국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상 실천에 있어 분명한 실패에 대한 항의이다. Chalmers Johnson 은 2001년 9월 11일의 자살테러는 미국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외정책을 공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반미주의를 분석하는 의미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 대외정책 비평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많은 미국의 우파들은 “ 그들은 우리의 정책이 아니라, 가치를 증오 한다 ” 고 말하며 반미주의의 증가는 미국 문명과 삶의 방식에 대한 거부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아랍의 증오는 미국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미국이 무엇이고 무엇을 대표 하느냐에 의해 증오하기 때문에 중동에서의 미국의 더한 친 아랍정책도 아랍세계에서 반미주의의 현재수준을 줄일 수 없을 것이다. 좌파와 우파는 또한 미국의 군사력이 반미주의 증가에 어떤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가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취하고 있다. 우파는 미국이 자신의 강력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반미주의 상승을 더욱 고취하고 있다고 본다.
극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시각이 공유하는 것은 반미주의가 미국에 대한 것이라는 평범한 확신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생각에는 가장 의문스러운 점이다. 반미주의와 지역에서의 반미주의 대한 반응 양쪽 다 미국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향후 정치 이데올로기의 본질적인 모순에 의해 확장되고 있다. 반미주의는 정치의 부재가 아니라 선거에서의 고전으로부터 고통 받는 세상의 정치적 이슈로 정의되고 있다. 현재의 민주주의는 보이지 않는 적들과 말하지 않는 꿈들의 공존하는 사회이다. 그들의 경제는 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사람들은 더욱 행복해 하지는 않는다. 세계 많은 곳에서, 투표자들은 함정에 걸린 느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유로이 정권을 쫒아 버릴 수도 있지만,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느낌을 갖지는 못한다. 결과적으로, 대중의 숙고에 바탕이 되는 상식을 음모론적 상상이 대신하고 있다. 포스트 이데올로기의 와 정치의 부재, 이것들의 파괴적인 우둔함이 반미론이라는 유혹적인 힘의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반대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무엇에 반대하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미국에 반대하고 있다.
서유럽의 가장최근의 조사는 반미주의성향의 유권자들의 태도에 중요한 변화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프랑스의 오래된 전형적인 패턴이 서유럽 곳곳의 평범한 현상이 되었다. 엘리트들은 일반대중보다 더욱 미국에 부정적이고, 젋은이들은 연장자들보다 더욱 비판적이다. 합리성을 찾는 정치 엘리트들과 이유를 찾는 젊은 세대들이 반미를 주장하는 새로운 유럽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얼굴들이다.
9.11 테러이후 미국은 아랍세계가 자신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리고 아랍의 반미국인주의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특별한 관심사가 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다시 부활한 반미국인주의는 세계정치에서 이러한 자세를 주요 원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라크문제에 관한 미국과 E. U 간의 이해차이가 반미주의의 정치적 잠재력 분석에 중요하다. 이라크에 관한 논쟁의 재실행은 서부유럽의 새로운 반미주의와 미국과 아주 약간의 관련이 있을 뿐 이라크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반미주의를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밝혀 내는대 도움이 되었다.
유럽 그리고 반미국인주의의 유혹
정치는 종종 유용한 진부한 표현을 꾸며내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토니블레어 영국수상은 미국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 전 연설에서 편안한 친근감은 아니지만, 그들의 상처가 최근의 것이고, 그들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고, 그들의 자유와의 친근 관계가 아직 열정적이기 때문에, 유럽연합의 새로운 회원국들은 유럽화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를 잘 실행했다. 그러나 좋은 정치는 항상 정상적인 설명을 만들지 않는다. 어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동부유럽의 이라크에 관한 미국과의 동맹 결정에서 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블레어 보다 훨씬 더 완고하다. 이러 분석의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이 투표에 의해 옹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경험한 모든 국가에서 여론조사는 강한 반전 여론(70 -75%)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의지의 연합’ 은 사실 껄끄러운 연합이다. 소피아와 베를린의 유일한 차이는 소피아에서의 대다수의 반전여론이 거리가 아닌 여론조사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보수주의자들의 사건읽기는 동부유럽 엘리트들의 동기에 관하여 공통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자유서약 논쟁은 Vaclav Havel 와 Adam Michnik 같은 이전의 반체제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미국의 원조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유럽의 절반을 움직이는 구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의 행동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자유서약은 결코 그들의 등록된 상표나 특징이 아니다.
워싱턴의 반대자들은 새로운 유럽이 새로운 행렬에 들어가는 것을 ‘종사자의 행진’ 이라고 빠르게 이름 붙였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정부에 항의하는 이러한 정부들의 의심스러운 충성은 냉전시대에 소련에 대항해 보여주기 위해 이용했던 충성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동기로 움직이는 자유서약과 동떨어진 종속국가들의 본능적인 행동은 동유럽 국가들이 걸아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이 해석 또한 옳다고 증명하기 어렵다. 힘의 정치라는 점에서 보면 유럽의회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보다 훨씬 큰 채찍과 당근을 동유럽국가들에게 휘두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위성국가 정서가 제대로 작용했다면, 새로운 유럽은 옛날로 회귀했었어야 했다.
요컨대, 자유서약과 위성국가 정서 둘 다 모두 워싱턴을 향한 동유럽국가들의 지원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폴란드와 프랑스의 진짜 차이는 반미주의를 조장하는 데에 따르는 이득과 손실에 대한 그들의 다른 판단이다. 파리는 반미주의가 고조되는 것을 보면서 세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기회를 보고 있고, 바르샤바는 같은 현상을 지켜보면서 10년간의 고된 정치 경제 개혁으로부터 얻은 수확에 대한 위협을 보았다.
반미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유럽
이라크전쟁 동안 새로운 유럽과 옛 유럽을 구분하는 진짜요인은 서유럽국가 리더들에게 있어 반미론의 눈길을 끄는 유혹이었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유럽국가들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반미주의를 건드려 보는 것이 단순히 나쁘지 만은 않았다. 공산주의 이후 정부들은 반미주의의 증가를 걱정해야 하는 중요한 국내정치문제를 안고 있다. 동유럽국가들이 지난 10년간 겪어왔던 민주주의와 시장의 변화는 미국의 깃발아래 감싸져왔었다. 민주주의가 동유럽국가들에 들어갔을 때, 민주주의는 영어로 된 노래였으며, 미국헌법에 대한 사랑이었고, 미국의 재정에 의해 촉진되었다. 이전에 공산주의를 경험했던 국가의 개혁주의 엘리트들의 미국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상징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파괴적이었다.
유럽인들을 구분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의 유산과의 싸움이었다. 서유럽에서 1968년의 저항자들은 반미주의자이고 반자본주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아주 구체화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자들의 착취가 있는 ‘미제국주의’ 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 세대들의 상상 속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세계의 상징이었다. 독일의 학생리더였던 Rudi Dutschke가 1968년 프라하에 연대투쟁을 위해 갔을때 시장독점과 자본주의자들의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함께할 것을 제안하자, 체코의 학생들은 그에게 그 문제가 바로 우리가 진짜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유럽의 ‘제 3의길’ 은 자본주의에서 탈피하는 길이었고, 폴란드와 체코에게는 사회주의를 벗어나는 길이었다. 유럽에서 현재 힘을 갖고 있는 많은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들의 사회주의화의 차이가 이라크 위기 동안 증가되는 반미주의에 대해 확산되는 반작용을 이끌었다. 베를린과 바르샤바 모두 1968년 운동의 유산에 여전히 충성했지만, 그 유산이 바로 서부유럽과 동부유럽을 나누었다.
동유럽인들은 그들의 서유럽 이웃들 중 몇몇이 진짜 유럽 국가민으로써 탄생과 동부유럽의 개혁주의 엘리트들의 분명하고 현존하는 위험성을 두드러짐, 그리고 그들의 정책을 바꿈으로써 촉진되고 있는 현재의 반미주의 물결을 금방 알아차렸다. 공산주의체제를 겪었던 유럽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지난 10년간의 변화에 실망하며 동시에 반미주의론이 파리와 베를린에서 그 정당성이 선언되어졌을 때 좌우파 양쪽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당들에게 그 문을 열어 주었다. Ian Buruma 는 유럽국가의 인기영합주의는 역사적으로 거의 항상 반미주의 였다고 말했다.
BBSS Callup International 과 자유전략연구소가 발칸반도의 5개국(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코소보, 루마니아, 세르비아)에서 2004년 6월 실시한 여론조사는 위에 언급한 Ian Burma의 주장에 그 타당성을 뒤받침 하였다. 이번 여론조사의 응답에서 시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에 관련이 있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향한 그들의 적개심이 드러났다. 응답자중 미국에 우호적인 사람들 또한 가장 친 민주주의적이고 E. U.에 가장 호의적인 이었다. 서부유럽과는 반대로 발칸반도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고, 연령이 낮으며 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미국에 가장 자주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새로운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은 미국과 E. U.의 대립을 그들 자신들의 사회개혁 결과에 극도로 부정적 요소로 인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동유럽은 민주주의가 아메리칸드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오늘날 동유럽의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이런 지역적 상황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풍조는 시장과 민주주의를 공격할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편에 섰다.
대안적인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인 비전도 갖고 있지 못하면서 현 상태에 대해 증가하는 대중의 비난에 고무된 동유럽의 반 민주주의 세력은 정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반발표를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담아낼 정치적 노선으로써 반미주의를 보았다. 반미주의의 힘은 그 공허함에 있다. 세르비아의 Vojislav Seselj(그는 현재 헤이그에 위치한 UN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와 같은 정치인에게 있어, 세르비아인이 더 이상 코소보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혹은 보스니아를 위해 더 이상의 살인을 각오하지 않았을 때, 반미주의는 국수주의자들의 행동지침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불가리아 같은 국가의 옛 공산주의 엘리트들에게 있어 반미주의는 그들 자신의 시간대에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전망에 그들 자신을 다시 넣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였다. 동유럽의 얼마나 많은 옛 공산주의자들이 반미주의에 대한 유럽의 생각을 이용 하느냐를 관찰하면 놀라움을 금할 수없다. 새로운 신구좌파에게 있어 미국을 비난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함정에 빠트리는 전략이다. 몇몇의 옛 공산주의 정부에게 있어 반미주의는 일반대중의 분노에 초점을 바꾸는 도구이다. 그리고 진실을 깨달은 대중들에게 있어 반미주의는 엘리트들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전달수단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해결책이 ‘역사의 종말(공산주의가 멸망)’ 같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승부에서 반발표가 승리했을 때 반미주의는 그들이 즐겨 찾는 전략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유럽의 반 - 반미주의가 단순히 친미주의로 인식되어지지만, 이 두개의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워싱턴의 몇몇 정치적 그룹들은 E.U를 외교안보정책에 관해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도구로써 새로운 유럽을 사용하는 장난을 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전략은 아주 위험한 비현실적인 추정에 기초해 있을 것이다. 국제범죄재판소에서 E.U의 편에선 거의 모든 새로운 민주주의적 결정은 미국정책입안자들에게 있어 동유럽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중대한 외교정책의 실수라는 신호가 되어야 한다. 동유럽이 이라크위기동안 미국에 편으로 돌아온 것은 지리적 약점을 넘어선 역사적 승리였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장기적으로 봐서는 지리적 강점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럽은 유럽연합의 기초를 반미주의로 만드는 경향에 반대하는,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가 아닌 강한 정치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신-드골주의자와 보수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 유럽은 18세기에 군국주의 유럽에 대항했던 신세계와 같은 방법으로 현재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반미주의는 유럽의 일상적인 정치적 언어가 되어야한다. 하지만 유럽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러한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을 향한 유럽의 도전 문제는 유럽이 이 경쟁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복지적 자본주의 모델을 촉진시키는 기회로 보기보다는 보다 넓게 시장에 기초한 방향으로 그 모델을 크게 전환시키기 위해 대중의 지지를 얻는 전략으로 이 경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현실은 전후 서부유럽에서 개발된 사회복지국가 정책 추구에 있어서 유럽이 점점 더 유럽인화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이 그들의 국경너머 국가들에게 지원한 경재개발 프로젝트을 살펴보면, 이 지원들이 그들이 자국에서 매도하던 신자유주의적 정설과 똑같은 형태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반미주의로 형성된 유럽인의 정체성에 관한 부정적 정의에 대한 새로운 유럽의 거부감은 유럽인들에게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긍정적인 정체성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재 유럽과 미국은 일반적 가치와 이득에 의해 나누어진 동맹인 것이다.
반미주의의 위험한 유혹
현재 세계정치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 반테러주의, 반부패, 반미주의 이론 속에는 이상한 기능적 유사성이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어떤 보편적인 대안이 없는 시점에 세 가지 이론이 공산주의 종말 이라는 역사의 끝에서 번성하고 있지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실망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현재 민주주의는 종종 다시 정의되거나 혹은 일그러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반대되지는 않고 있다. 반시장체제와 반자본주의 정서는 수면 속에서 부활을 즐기고 있지만, 수면위에서 이러한 정서는 IMF(국제통화기금)과 Joseph Stiglitz(‘세계화와 그 불만’ 의 저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논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무엇이 교수전용 휴게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대한 말다툼을 현재 줄이고 있는가. 이세가지 이론은 막연한 불안과 냉소적으로 디자인된 정치적 전략으로 쉽게 채워지는 텅빈 박스와 같다. 각각의 이론은 투표하는 대중과 그들이 민주주의적 선거로 선출한 정치적 엘리트들과의 계속 증가하는 간격에 대한 반응이다. 이 모든 세 가지 이론은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을 비판하는 위험을 피하며 현재 상태를 비난하고 있다. 완전히 충돌되는 이러한 목적을 가진 그룹들은 이 세 가지 이론을 그들 자신만의 예정표와 의제를 제공하기 위해 개발하고 있다.
반부패에 대한 이야기가 1990년대 초 전 세계 정치 현장에서 터져 나왔을 때, 반부패는 민주주의적 개혁과 시장을 더 활성화하는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 개념화 되었었다. 반부패 운동은 정부에 압력을 가해 훌륭한 통치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워싱턴정부)에 의한 공동노력으로 조직되었었다. 반부패에 대한 이야기는 지역의 시민사회활동가와 워싱턴정부에 의해 공유된 반부패에 대한 활동은 무엇이 잘못되어져 왔는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의도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중은 그것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부패로 고발된 정부와 아주 적은 부패수준을 요구하는 반대세력사이에 대립을 줄이는 많은 민주주의적 방법 안에서의 정치적 경쟁이었다. 반부패 운동은 전형적인 정부 그리고 충돌하는 생각과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에서 정치적 이해를 손상시켜왔다. 일반대중과 정치적 엘리트들의 사이의 틈을 좁히는 노력과는 상관없이 반부패주의론은 이 틈을 더욱 확장해 왔다.
9.11 테러 이후 테러리즘이 전 세계적 상상력을 붙잡고 있을 때 반테러주의론은 공통적인 위협이 새로운 세계의 요구를 나타 내는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그러나 사실상 많은 세계 각국의 정부들은 그들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파괴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얻기 위해 테러주의 자들의 생각을 빼앗아 왔다. 반테러리즘은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NGO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교묘하게 이용되어 지고 있다. 이러한 정부들은 기회를 붙잡았고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반테러리즘과 반부패론의 성공적인 조합과 온건한 반미주의 그리고 오래된 행정부 정치는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수용가능한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이 모델은 다른 곳에서 되풀이 되어 질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의 상호의존성과 확산되는 민주주의에 의해 약화된 정부자신에 가장 완화된 행동의 자유를 발견한 정부는 통제력을 강화하고 정부의 여러 조치와 행동에 대한 비밀성을 증가시키는데 반테러리즘을 이용하고 있다.
반미주의론의 영향은 간단히 민주주의를 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워싱턴은 시민사회 관계자들에게 부패한 정부가 문제라고 말함으로써 문제회피를 시도하는 정부들에게 반부패 의제를 촉진시킴에 있어 더 높은 측면에서의 대응을 채택했다. 워싱턴은 신뢰 받지 못하는 정부들에게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 지원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 내부의 반대자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이도록 허락하였다. 반미주의의 경우 정부는 실망한 국민들에게 미국이 문제라고 설득을 시도하고 있다. 반부패론 진행은 자본주의와 확산과 더 깊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디자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실패했다. 반테러주의론은 전 세계에 걸쳐 반미주의 시위를 만들어냈고, 반미주의는 미국의 영향력 확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확산과 전 세계 시장체제에 대한 적대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불행히도,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반미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
9·11 사태 직후에, 미국은 공개적인 외교를 고조되는 반미주의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간주하였다. 외교관계자문위원회 보고서는 공개적인 외교를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국가안전요구에 직결된다고 밝혔다. 이제는 전략이 바뀌었다. 공격적인 민주주의 증진(추구)은 테러리즘과 반미주의 양쪽 모두에 대한 미국의 응답이다. 그것이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미국이 그 자신을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대의와 결합시켰을 때에 가장 인기 있고 강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미국이 그 자신의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증진(추구)은 오늘날의 세계를 빚어낸 반부패, 반테러리즘 그리고 반미주의 담화 사이의 악전고투로부터 손상을 입을 수 있다. 테러리즘의 위협은 이미 민주주의 사회를 시민의 자유와 공공 안전 사이의 경계를 재협상해야 할 필요에 직면시켰다. 각 사회는 세계적인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직면하여 그 자신을 방어할 보다 나은 기회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유를 희생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 답이 사회가 아닌 비민주적인 정부에 의해 주어질 때 생겨난다.
미국 외교 정책의 새로운 안보 초점은 중앙아시아에서의 독재정치를 비롯한 수많은 폭정에 민주주의 자격증을 남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 정부가 민주적 실행과 안보 협력 사이의 거래를 다루는 방식은 일부 지역에서 민주주의 운동에 역행하고 민주주의 의제를 증진시킴에 있어 실제적인 장애가 될 수 있다. 냉전시대에 미국 정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런 정책들의 대가를 치렀고, 오늘날은 중동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위협이라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은 선택지 안에 들어있지 않다. 군사·경찰 협력을 통한 테러와의 전쟁이나 민주주의 확산의 목표는 긴장감 속에 때로는 눈에 드러나는 충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반미주의의 고조는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미국과 그 정책에 대한 새로운 의혹의 맥락 안에서 많은 비민주국가와 반민주국가, 심지어는 근민주국가 정권들까지도 민주주의에 대한 내적인 압력을 “미국이 원조한 불안정화 책략”이라는 딱지를 붙여 범죄시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구소련의 그루지야 공화국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은 이런 관점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루지야인들이 공정한 선거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길에 나선 바로 그 순간, 대통령인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이런 대중적인 움직임을 미국이 촉발시킨 음모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권위주의 정부의 전략은 민주주의 운동이 스스로를 미국과 분리시켜 생각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들을 고립시키고 국제적인 지원을 박탈하는 것이다. 미국에게 있어서 민주주의 증진이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반미주의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압력을 “미제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관한 전망을 침식해 들어갈 것이다.
미국과 유럽간의 불화는 이런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 고조되고 있는 반미주의 흐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납득할만한 욕망에 이끌리는 많은 유럽 정부와 협회들은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미국의 민주주의 증진 노력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이런 자세는 세계 곳곳의 민주주의 약진 기회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민주화 의제를 민주적으로 추진하는 것; 많은 지역에서 그들(유렵인들)의 민주주의 증진은 국제적으로 후원받는 민주화 노력이라는 바로 그 생각을 부식(침식)시킨다.
확산중인 민주주의에 관한 미국의 새로운 방침은 또 다른 결정적인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1989년의 기적은 되풀이될 수 없다. 동유럽에서는, 민주화는 친미정권과 친미사회를 탄생시켰다. 중동이나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와 비슷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라크는 또 다른 폴란드가 아니다. 미국에 대한 안보위협을 가져온 반-미국식민주화의 출현이 가져올 전망에 직면하여, 미 정부는 자신의 민주화 의제를 억지로 가다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반응은 민주화 정책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안보에 민감한” 민주화-성립 책략의 수용을 낳을 수도 있고, 그런 곳에서는 민주화가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데 실패한다 할지라도 지방의 갈등들을 통제하고 재조정할 수 있는 그런 정치적 정권’으로 오인된다. 인종적으로 나눠진 사회에 자유선거를 도입하는 것이 그 사회를 민주화화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약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는 그것이 대체한 압제적인 정부만큼이나 자유와 인권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중동에서 미국의 민주화 책략은 ‘민주화는 열린사회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원칙에 합당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를 가리는 엄중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미국이 지금까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세계 각처에서 고조되고 있는 반미주의는 반-반미주의 진영의 출현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국의 정책에 동의하지 못할 때조차도 이런 진영의 사람들은 미국의 영향력이 적다는 것은 곧 자유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미주의가 만연하고 있으며 이는 반민주주의와 반자본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드러난 반-반미주의는 반미주의 정책을 반격할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지원하고 그것을 국외로 내보낼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 있어 최고의 전략적 선택을 구성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