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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글로브 다섯 번째 개소식을 맞이하며…

by 永樂 posted Dec 26, 2008
코리아글로브 다섯 번째 개소식을 맞이하며…

                                                                2008년 10월21일


어느덧 만 다섯 해가 흘렀습니다.

사무실이란 豪奢는 바랄 수도 없고
그저 東家食 西家宿 하면서 눈치에 익숙하던 준비기간 한 해…
某 사무실을 하룻밤 잠시 빌렸다가 바로 다음 날 출입금지 되던 슬픈 추억.
그 이전의 野史까지 말한다면 오늘 밤은 오히려 짧을 터…

2003년 이맘 때…
마치 장래를 예견하듯 하필 문화일보와 경향신문 사이의 건물 한쪽 모퉁이에서
자원봉사협회와 아무 상관도 없었던 우리는 코리아글로브라는 이름을 정하자마자
다행스럽게도 진월 대표의 주선으로, 그렇게 충정로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밥 사먹을 엄두도 못 내고
걸핏 하면 블루스타에 라면 끓여 밥 말아먹던 그 무렵,
경비원들과 숨바꼭질은 숙명이었습니다.

공동회의실 하나 놓고 갓 시작한 화요대화마당
그 날짜를 지키기 위해 여러 터줏대감 단체들과 신경전을 벌였던 그 때,
복합기 하나 들여놓고 디지털 녹음기 마련하면서도 환호작약 했습니다.

그나마 홀로 있다가
牛音 선생께서 끼친 음덕 탓에 상근이 두 사람으로 늘어났답니다.
그 뒤로 다시 나오지 않은 코리아글로브 이름의 소책자도 찍어냈고
홈페이지도 아기자기하게 꾸려보고…

그러다 덜컥 홈페이지가 멎어버려
한 달 넘도록 몸살을 앓았습니다.
공짜 좋아 하다가 그리 되었습니다.

2004년 벽두, 창립대회를 엿새 앞두고
마니산 참성단에 올라 천제를 올렸습니다.
백년결사를 반드시 이루겠노라고 저마다 결기가 서렸습니다.

드디어 1월10일 감격의 창립대회장…
“뜻도 좋고 뭘 하자는 지도 알겠는데 그래서 무엇이 되겠다는 건가”
정치의 계절에 그렇게 코리아글로브는 별나게 충정로에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다시 한 해가 흐르고 2004년 이맘 때…
가회동부터 옥인동을 거쳐 광화문까지 두루 다녔습니다.
그새 눈은 한없이 높아져서 덜컥 ‘경희궁의 아침’을 계약했습니다.

마음은 들뜨고 입은 가벼워졌습니다.
두 번째 개소식 고사를 올리면서
다음에는 경희궁에서 경복궁으로 나아가겠노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곡차 한 잔에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舊副心에서 新都心으로 나오니
품위를 갖춰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중고에서 신품으로 맞춰 놓았습니다.
지금 이 탁자부터 그 날의 흔적은 지금껏 이어져옵니다.

사람들도 들끓고 장사 잘 되었습니다.
심할 때는 한 주에 서너 번씩 사무실서 회합을 갖고
“우리 마누라보다 더 자주 본다”고 희희낙락 하던 시절…

공부 많이 했습니다.
회원은 지금의 절반인데 토론은 두 배요,
겹치기 출연하면서도 다섯 개 분과가 모두 팽팽 돌아갔습니다.
어찌 보면 그 당시 배우고 익힌 걸로 지금도 버티나 봅니다.

일 많이 했습니다.
국회의원들과 유명인사들을 수시로 불러대고
단 한 주도 쉬지 않고 화요대화마당과 집담회를 연거푸 열어나가고
전국은 물론 한반도가 멀다 하고 해외까지 들락거렸습니다.

돈 많이 썼습니다.
세 사람도 일하고 네 사람도 일하고
밥 사먹고 술 사먹고 없는 벗들 활동비 생활비까지 대주고
그렇게 두 해를 신나게 살다가 갑자기 멎어버렸습니다.

다시 한 해가 흐르고 2005년 이맘 때…
계절보다 일찍 우리들은 추위를 탔습니다.
어찌 빚을 갚고 자립의 기반을 만들까 고심하던 차에
5%라는 겸손한 命名의 準정치조직에서 공동사무실을 제안했습니다.

내수동에서 당주동으로 옮겼습니다.
內需에 입맛들이다가 幢主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으니
모든 게 팍팍했습니다. 비즈니스 모임이 수시로 열렸습니다.
여전히 제 버릇 뭐 못 준다고 돈 벌 건수도 없이 늘 궁리만으로 배가 불렀습니다.

비상체제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익숙한 오늘의 코리아글로브가 외형을 잡았습니다.
뒤늦게 한 주일을 사무실서 먹고 자면서
화요대화마당 100회 백서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퇴각은 했지만 그래도 사기충천하던 나날이었습니다.

다섯 개 분과가 멈춘 자리에는
꾸준히 기획 화요대화마당의 씨앗을 뿌리며 外延을 넓혔습니다.
늘 하던 이북문제와 헌정사에서 벗어나
역사전쟁으로 아시아로 과학으로 문화예술로 지역으로
달마다 숨 가쁘게 새로이 지평을 열어 나갔습니다.

회원모임도 자주 가졌습니다.
난리 치면서 봄가을로 마라톤을 뛰었고
야유회니 경조사니 끊임없이 만났습니다.
自費로 자체 가이드로 스무 명 가까이 간사이도 다녀오고
회원들 소개로 각계각층이 코리아글로브 구성원이 되어갔습니다.

우리끼리 雅號를 쓰고 각별히 의리를 챙기면서도
각자의 식구를 벗어난 코리아글로브 가족모임의 탄생은
단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이슬 밟고 다니며 무얼 바라겠습니까.
그런데 마나님들이 했습니다. 신랑이 보이지 않으니 同病相憐으로 뭉쳤습니다.
그 덕택에 3주년 기념총회는 杜門洞이 아닌 幢主洞 72인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 해가 지나고 2006년 이맘 때…
이번에는 천만 뜻밖에도 이사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不可近 不可遠 如履薄氷 하던 여의도의 계절풍이
국가경영의 고뇌로 우리 심장과 머리에 동시에 파고들었습니다.

‘나눔과 미래’를 시집보내고
간신히 Wfocus.Net을 굴리며 근근히 KP Report도 내고 하다가
순식간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습니다. 손발보다 가슴이 더욱 시렸습니다.
사무실에서는 매사가 두렵고 벅차기 짝이 없었는데
그를 지켜보면서 豪言壯談을 믿었던 님들의 좌절도 커져갔습니다.

참으로 송구한 나날이었습니다.
參戰을 결정했으면서도 승패의 여부를 저울질하느라
우리 선봉대는 전장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 하고 동맹군도 지리멸렬했습니다.
陣中에서 그저 바라만 보던 우리 모두는 무기력했습니다. 패전했습니다.

글쎄 대충 반 년…
당주동 사무실은 코리아글로브였다가 5%였다가
때로는 전진코리아였다가 박현채 선생 출판기획사였다가
나름대로 분주하면서도 무언가 매듭도 풀지 못하고 흘러갔습니다.

그래도 주눅 들지 않고 코리아글로브는 진득하게 갔습니다.
무려 여덟 차례, 그것도 밤이 아닌 대낮에 한 달 내내 학교까지 열었습니다.
전 분야에 걸친 ‘대한민국 FTA학교’는 在朝 在野를 막론, 유일했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서 역사전쟁의 해결사 노릇까지 自處 했습니다.
6월 초여름에 풍기까지 오십여 사람들이 가서 한 주일을 무리하다 왔습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의 비즈니스 모임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無名의 작은 후원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언제 실현될지 몰라도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한 술에 배가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게 두 해가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바깥에서 코리아글로브의 우호집단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좌우를 아우르고 함께 술 먹는 아주 드문 집단이 되었고
특정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매주 萬機親覽 하는 현대판 經筵의 마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원들 마음이 다 같을 수 없습니다.
새로 들어온 분들은 몰라도 오래 계신 분들이 볼라치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건만 딱히 눈에 뵈는 성과도 없고 진도 빠졌습니다.
무던한 건 좋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목젖까지 질문이 찬 지도 오래,
더 이상 굳이 묻고 싶지 않은 지도 꽤나 오래 되었습니다. 그 놈의 情만 아니라면…

세월은 흘러흘러 다시 한 해가 흐르고 2007년 이맘 때…
코리아글로브를 아끼던 우호집단 중 미래전략연구원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노래방에서나 보았던 덕수궁 돌담길 네거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서대문이나 진배없는 충정로의 털털한 서민 내음도 아니고
그렇다고 광화문의 화려하면서도 시끌벅적함과도 거리가 먼,
古雅하면서도 단정한 貞洞의 교회당을 바라다보는 서소문서
지나간 백년의 치욕을 매일 되씹으며 더부살이는 시작되었습니다.

화려한 날은 가고
코리아글로브는 제 살고 있는 정동마냥 그저 조용히 흘러갑니다.
더 이상 분과도 없고 집담회도 없고 매체도 없고 책자나 보고서도 없고,
지구촌경당이나 대학생캠프도 없고 FTA학교도 없고 초청간담회도 없고,
가족모임이나 마라톤 그리고 유라시아 기행도 없고 물론 비즈니스 모임도 없고…

그저 시험 초읽기 막판에 몰린 학생마냥
숨소리도 내지 않고 밤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사무실을 나오면서
그래도 매주 매번 어떻게든 열댓 이상씩 모여 화요대화마당을 이어나갔습니다.
創業의 주연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고 守成의 신인들이 그 자리를 부지런히 메워나갔습니다.

연구원의 각별한 배려와 따뜻한 호의에도
주눅이 든 우리에게 魔는 어김없이 찾아들었습니다.
이사 후 무려 백 일에 걸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줄줄이 병원 신세를 지더니만
끝내 올해에 들어와 낙엽을 보기도 전에 망극한 일까지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동을 바라다보는 서소문에서 우리는
차분함과 진득함의 裏面에서 말 못할 고통과 始終一貫 內傷에 시달리며
지독히도 길고긴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日久月深 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모든 시련을 다 이기고 우리는 여기에 모였습니다.
네 번 짐을 싸고 다섯 번째 개소식을 하면서 되돌아봅니다.
서대문 옆 충정로서 간신히 끼니 때우던 엊그제를 잊고
겁도 없이 한달음에 광화문 激戰의 소용돌이로 접어들더니
뼈도 못 추리면서 그래도 허풍은 남아 무려 두 해를 버티다가
끝내 다 털어먹고 정동 근처까지 숨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참 멀리도 돌았습니다.
경복궁을 왼눈으로 흘겨보며 광화문 네거리까지 가서
종각으로 건너가지도 못하고 발목이 묶였다가
시청에 가기는커녕 덕수궁 골목에 숨어들어 苟命徒生하고
이제사 서소문 가는 뒷거리로 나왔습니다.

앞으로는 제발 욕심 부리지 말고 차분히…
언젠가 제 실력으로 여기서 경찰청을 돌아나가면
그 때는 다시금 서대문 네거리로 나아갈 겁니다.
아니면 아예 길 건너 청계천을 끼고 가다 종각을 가로지를 수도 있고…

어느 경우든 지금껏 함께 한
코리아글로브 여러 님들과 미래를 함께 하겠습니다.
다시는 지난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말을 앞세운들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겠습니다. 꿈만 꾸지는 않겠습니다.
더는 지켜보지 말고 이 혼돈의 시대에 코리아글로브의 주역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