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남북 공동산행> 9/8, 수락산 (물 듣는 터)

by KG posted Aug 31, 2012
코리아글로브 안팎 2천여 님들께서 마음쓰신 터에
새로운 십년공부의 씨앗을 잘 뿌리고 왔습니다.

푸른 웃음 푸른 설움 어우러진 압록강 따라 천지까지
49재의 서간도 길을 다녀왔으며, 곧이어 아홉 선무당들이
세 갈래 물줄기의 뿌리 태백에 서서 거듭 났습니다.
그를 모아 11차 헌정사기행으로 코리아글로브는
"코리아에서 글로브로" 다음 길을 떠납니다.

두 차례 흠뻑 젖게 하시다 마지막 길 떠날 때
환하고 드높은 하늘을 보여주신 어른들의 뜻을 새기며,
(그에 따라 '물 듣는 터' 수락에서 통바위길 도봉으로,
나아가 갓바위뫼 관악에서 불길을 피울 것입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9월 남북 공동산행에 모십니다.

'불-수-사-도-북'의 끄트머리입니다.
이번에 수락산 그리고 시월에 도봉산을 매듭지으면,
11월은 '나라 연 날'(개천절)맞이 마니산 하늘굿,
12월에 '불-수-사-도-북'의 기운을 이어
반골이 아닌 통뼈로 살아날 관악산에서
임진년 남북 공동산행의 한 해를 갈음합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들이닥칠
계사년의 남북 공동산행 그 흐름을
슬기로운 코리아글로브 님들께서 미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면 아래와 같이 수락산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일정을 밝힙니다.

~~~~~~~~~~~~~~~~~~~~~~~~~~~~~~~~~~~

해발 637미터인 水落山은 ‘물이 떨어지는 산’이라는 이름 그대로 폭포가 많다.
이 산 동쪽의 깊은 계곡에 걸쳐 있는 금류, 은류, 옥류폭포가 대표인데,
화강암 벼랑을 적시며 수락산의 얼굴인 양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밖에 비록 물이 적어 이름을 얻지는 못했으나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릴 때
한때 폭포를 이루는 벼랑이 곳곳에 널려 있다.

한때 수락산은 도봉산 삼각산 그늘에 가려 있는 존재였다.
두 산이 일찍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산림청이 뽑은 한국 100명산의
반열에 오를 때도 별 이름을 얻지 못한 채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이 산을 에워싸듯 아파트 단지가 도시를 이루고, 전철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은 달라졌다.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 종주산행은 물론이고
사패산, 도봉산, 삼각산까지 하루에 주파하는 ‘불수사도삼(북)’ 종주가
인기를 모은 것도 수락산을 도봉이나 삼각산과 대등한 반열로
괄목상대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왕궁터로도 꼽혔던 수락산 아래 마들평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는 데 깊숙이 관여한
무학대사가 일찍이 왕궁터를 고르기 위해 삼각산에 오른 적이 있다.
그가 고른 네 군데의 왕궁터는 연세대학교에서 망원동을 잇는 지역,
수락산과 불암산의 서쪽인 창동 일대, 삼각산과 남산 사이,
지금 종로통이라 할 청계천 언저리, 한강변 동쪽인 현재의 왕십리 일대였다.
지금처럼 고층아파트가 마들평야를 빼곡히 메우지 않았던 시절,
창동에서 보면 수락산과 도봉산은 마치 사이좋게 손잡고 있는
한 쌍의 연인처럼 다정해 보이곤 했다.

수락산보다 백여 미터쯤 높은 도봉산은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의 총각이고,
선인봉이며 만장봉 자운봉의 늠름함을 늘 흠모하면서 다소곳이 고개 숙인
수락산은 영락없이 부끄럼 많이 타는 처녀다. 중랑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지내온 오랜 세월 만큼이나 둘 사이의 정은 깊어 보이기만 한다.
산과 물이 모두 수려한 수락산 아래, 창동 일대의 광활한 땅이 왕궁터 중
하나로써 무학의 눈길을 끈 것은 당연한 일.

그로부터 6백여 년이 지나 왕궁터로 꼽혔던 땅에는 ‘아파트 공화국’이
들어섰고, 인구 백만이 모여 사는 공화국의 도읍을 이룸으로써
무학의 혜안을 입증하고 있다.

왕조실록에도 남아 있는 수락산 산사태

도봉산과 수락산을 가르고 있는 것은 중랑천만이 아니다.
폭 7백m, 길이 6km 남짓 좁고 긴 회랑이 골짜리로 둘을 나눈다.
이 회랑으로는 국도 3호선과 의정부시의 동부와 서부 간선도로,
국철 1호선, 전철 7호선이 몰려있다. 최근에는 불암산과 수락산 사패산을
터널로 꿰뚫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까지 이 골짜기를 비스듬히 가로지른다.
서울과 의정부시로 갈라지는 이 일대에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동서로 솟은 수락산과 도봉산은 산자락을 파고든 고층아파트들까지
모두 아우른 채 변함없이 마주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18년과 1429년 1640년에 수락산이 크게 무너졌다 전한다.
특히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 8월26일 수락산에서 ‘높이 23척, 넓이 28척’의
큰 바위가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 11년인 1429년 6월 1일,
“양주 수락산이 무너지니, 지장사의 중 두 사람과 유생 세 사람이 압사했다”
적고 있다. 대략 높이 7m 너비 9m의 3~4층 크기의 건물만한 바위가
무너져 내린 엄청난 사건인데, 그밖에 기록에 남지 않은 크고 작은 사건은
더 많았을 것이다. 2006년 4월12일 수락산 9부능선의 기차바위 가까이에서
약 50톤의 바위가 무너져내리면서 옆의 숲을 쓸어버린 산사태가 있었으니,
산꾼들이 몰리는 수락산 암릉구간은 언제든 대형 사고의 위험이 도사린다.

호랑이가 이 산을 지배했다

수락산과 도봉산 사패산 불곡산 칠봉산 일대 양주 땅은 원래 조선 왕실 소유로
말 목장과 사냥터가 있었다. 특히 수락산과 도봉산 일대에 호랑이가 살았으며,
목장의 말을 물어가는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 사냥을 즐겼던 무골 기질의
세조가 몸소 나서 이 잡듯 뒤지며 벌였던 대규모 호랑이 사냥의 기록이
1463년 3월13일의 왕조실록에 그대로 전한다.

호랑이가 살았던 수락산은 한때 세조의 왕위 찬탈에 격노한
매월당 김시습이 숨어살기도 했다. 불과 열아홉 살에 삼각산 중흥사에서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고른 곳이 벼랑 투성이인 수락산, 속세를 등지고
산으로 향한 그의 절망은 내원암 부근 암벽이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세종 때부터 ‘다섯살 신동’으로 촉망받던 천재의 몰락과 분노 절망이
얼룩진 곳, 수락산은 그래서 한양을 향해 돌아앉은 숱한 벼랑과 봉우리들이
빚어낸 산세와 더불어 ‘반골의 산’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그러나 이 산 역시 조선 왕실의 소유로 당시 세조의 호랑이 사냥터인데다,
내원암은 영조의 계비인 순정왕후가 2백 일 기도해 순조를 얻게 된
왕실의 원찰로서 명성을 얻었으니, 더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왕실 주변에서 맴돈 매월당은 말하자면 체제 내 인물들의 배려 속에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셈이다.

[임진년 코리아글로브 9월 남북 공동산행]

때: 단기4345년 9월8일(토) 10:00~15:00
곳: 수락산 / 석림사계곡-수락산장-철모&치마바위-천상병산길-수락산역
만남: 10시- 7호선 장암역

주제: 물 듣는 터
앞장: 이주성 한반도평화국제연합 대표
        박소희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사회복지사)
도우미: 김석규 코리아글로브 이사 / 010-3245-1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