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매초산성에서 동아시아를 보다

by KG posted May 14, 2013
아직 기행문을 못 올려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녀온 분들 말씀도 무척 좋고 다시 또 가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매질을 겪기 앞서 먼저 자료집부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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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글로브 계사년 4월
팬코리안 산행

주제☞ <매초산성에서 동아시아를 보다>



때: 4346년 4월13일(토)
차: 25인승 버스
떠남: 오전8시30분, 시청역 9출구
거침: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산성 / 62km, 2시간
       파주시 적성면 칠중성 / 20km, 40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37번지, 북-중군 묘지 / 6km, 19분
       서울 시청역 / 75km, 75분

길잡이: 노영구 국방대 교수
좌장: 양승태 코리아글로브 고문
앞장: 조 민 코리아글로브 이사장
사관: 김석규 코리아글로브 상임이사




고려회가 - 高麗回家(까오리회쟈)

不怕五洋圖中華 : 뿌파우양투쫑화
只怕高麗回家來 : 즈파까오리회쟈라이


오대양이 중화를 도모하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오직 고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이 두려울 따름이다.





아래 지도 설명>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산성에서 파주시 적성면 칠중성에 이르는 세 장의 지도는,
지금은 Daum Sky View 옮겼고 150년 앞서는 바는 대동여지도의 12첩 3면
그 왼쪽을 옮겼다. 이기봉 선생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임진강의 본류는 왼쪽 위에서 흘러와 서쪽으로 흘러가는 하천이며, 오른쪽 위에서 흘러와 임진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현재의 한탄강이다. 한탄강의 명칭이 유래된 지명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지점에 ‘大灘’이라고 적혀 있다. 대탄은 우리말로 ‘한여울’이라고 부르며, ‘큰 여울’이라는 뜻이다. 漢灘江에서의 ‘漢’은 ‘크다’는 우리말 ‘한’의 소리를 표시한 것이고, ‘灘’은 우리말 ‘여울’의 뜻을 따서 만들어졌다. 임진강 본류와 한탄강 변에는 江, 川, 灘, 津, 淵 등의 어미를 가진 명칭이 많이 보이고 있으며, 모두 해당구간의 하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임진강이란 명칭은 파주의 臨津渡(임진나루) 근처에서 사용되던 명칭이다.

임진강에서 배가 운행될 수 있는 종점은 보통 漣川縣의 읍치 왼쪽에 있는 澄波江 근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큰 배가 올라올 수 있는 곳은 적성 부근의 高浪里로서 이 지역에서 가장 발달한 포구가 있었다. 본 지도에서 古山城이 가장 많이 표시된 지역은 왼쪽의 積城縣 근처이다. 대부분 삼국시대의 유적으로서 고구려와 신라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을 때의 방어진지였다. 이 지역의 임진강에 표시된 戌灘은 임진강에서 도보로 渡河할 수 있는 가장 하류의 여울이라고 한다. 대규모의 군대가 남하하거나 북진할 때 술탄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대한 방어는 고구려와 신라 모두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국경선이 대동강으로 바뀌자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나당전쟁을 기억하라
출처> http://theplace2012.tistory.com/m/140

나당연합을 맺으며 당나라는 김춘추와 약속했다. 우선 백제 의자왕을 신라에게 내주어 김춘추가 가지고 있었던 복수심을 충족시켜 주겠다는 것이고 청천강 이남의 땅은 신라가 영유하고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사라지고 당나라는 승전국이자 점령국으로서 드러내놓고 신라군을 적대하게 된다.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1만 명의 당군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2만 명의 당군을 주둔시켜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더욱이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 멸망 때까지 기다렸다.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군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각각 군사 1만 명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당나라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은 시작된다. 신라는 670년 8월, 고구려 부흥군을 금마저(金馬渚: 益山)로 옮겨 소고구려국(뒤의 報德國)으로 인정, 보호함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였다. 또 670년 7월부터 대병력을 동원해 백제지역을 정복하였다. 즉, 품일(品日)의 군대가 63성을 공략해 그 곳 백성을 신라로 옮겼고, 천존(天存)·죽지(竹旨)의 군대가 7성, 군관(軍官)의 군대가 12성을 함락시켜 총 82성을 장악함으로써 백제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수군을 거느린 설인귀(薛仁貴)를 파견하였다. 설인귀는 신라왕에게 글을 보내어 신라가 당나라를 배반했다고 비난하면서 당나라의 대병력이 오고 있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맞서 문무왕은 ‘답설인귀서’를 보낸다. 신라는 648년부터 670년까지 대당관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온 국력을 쏟았으나 끝내 당나라에 배신당했다 강조한, 신라의 대당선전포고문(對唐宣戰布告文)이다. 671년 10월 급찬인 당천(當千) 등 신라 수군이 당나라 조선(漕船) 70여 척을 서해에서 격파하고, 무수한 당군을 죽이고 포로로 사로잡았다.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하던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은 남하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한시성과 평양 근처로 추정되는 마읍성에서 당군을 크게 무찌르고 백수성까지 진격했으며, 후퇴하는 고간의 군사와 석문에서 싸우다가 대아찬 효천(曉川) 등 7명의 신라 장군이 전사하였다. 패배한 신라군은 우잠성(牛岑城 : 지금의 金川市)을 거쳐 칠중하(七重河 : 지금의 臨津江)에 이르고, 673년 윤5월 이 지역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나당전쟁은 675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당나라의 대병력이 침입한다는 정보를 듣고 신라는 9개 군단을 배치, 대기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설인귀는 신라의 숙위학생이었던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수군·육군을 거느리고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반격해 당군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을 빼앗고 말 1천필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설인귀가 패퇴하자, 유인궤 등은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積城)에서 돌아가고, 이근행이 당나라군을 총수했는데 20만명의 대군이었다.

이들이 남하해 같은 해 9월29일에는 매초성에 주둔하였다. 신라군이 이를 맹공하자 이근행은 달아나고, 신라는 전마 3만 680필을 빼앗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매초성 전투를 고비로 전세는 신라에 유리해 칠중성·적목성·석현성 등지에서 성주나 현령이 전사하기도 했으나 임진강 방면으로 북진하면서 18차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676년 7월 당나라군이 도림성(道臨城)에 침입해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대회전은 같은 해 11월 기벌포 앞바다에서 설인귀 수군과의 접전이었다. 처음은 사찬 시득(施得)이 패했으나, 22차의 접전 끝에 당군 4천여 명을 죽임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나당전쟁을 7년 만에 승리로 끝맺었다. 이로써 신라는 맹약을 배반한 당나라를 응징하고 자주권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676년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웅진도독부는 건안성으로 옮겼다. 신라는 임진강에서 함경도 덕원(德源)을 연결하는 선 이남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735년부터는 대동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매초성 추정지- 고구려식 수성 전략의 거점들>
 
신라는 3차에 걸친 방어선을 구축하고 당나라가 한번에 쓸어버리는 기마군 중심의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산성을 대거 집중적으로 쌓아 성을 하나 넘으면 또 하나 성이 있는 식의 고구려식 수성 전략을 펼치게 된다. 여기 저기 군데군데 역삼각형의 진을 이룬 산성들을 많이 쌓아 적의 최대 전략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전술이었던 셈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의 매성현(買省縣)이 경덕왕 때 내소군(來蘇郡)으로 개명되었는데 고려시대의 견주(見州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가 매초성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대전리산성(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大田里) 산12-2)은 청산면 대전리와 장탄리(長灘里)의 경계지점에 있는 해발 138m 성재산 산기슭의 산성이다. 현재 성의 위치는 뚜렷하지 않으나, 주변의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둘러쌓았으며 둘레는 약 700m이다. 성벽은 군사 시설로 인하여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나 북쪽 면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양주 대모산성은 양주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해발 212m의 대모산 정상에 있다. 분지형을 이루고 있는 대모산의 산꼭대기를 돌아가면서 돌로 성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이곳은 수락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자 양주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5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6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에 속하였고, 그 이후에는 신라 땅이 되었다. 타원형을 이룬 성벽의 둘레는 1,400m 쯤 되며, 북쪽의 문터로 짐작되는 곳에는 성벽이 잘 남아 있지만 다른 곳은 대부분 무너졌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4∼5m 안팎이나, 너비는 주변의 지세에 따라 가파른 남쪽은 6m, 완만한 북서쪽은 8m쯤 된다. 50°정도의 각도로 경사지게 들여쌓기를 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주로 이용된 것이다.

대모산성과 대전리산성 중 어느 곳이 매소성이든 간에 매소성에 있었던 당나라와 신라군 간의 격전은 나당전쟁을 결판내는 전쟁이자 양국의 향후 운명을 가르는 한 판 승부로서 그 전장이 되었던 두 성은 물론 그 일대의 여러 중요 교통로와 군대 이동로는 치열한 나당군인 모두 피를 흘린 수없는 공방전의 터라 할 수 있다. 그 악연은 1275년 뒤에도 이어져 대전리산성에 인접한 3번 국도는 6.25 때 중공군의 남침로가 되기도 하였다.
 
나당전쟁에서 중요한 성을 하나 더 꼽으라면 파주시 적성면의 칠중성이다. 본래 이 지역은 백제의 난은별(難隱別)이었는데 고구려는 낭벽성(娘臂城)이라 하였고, 신라는 칠중성이라 하였으며 경덕왕이 중성현(重城縣)으로 고쳐 내소군(奈蘇郡 : 지금의 양주군)의 영현이 되었다. 적성현 치소의 남쪽에 있었던 성으로 토탄성(吐呑城)이라 하였다가 뒤에 중성이라 하였는데, 둘레가 2,000척이 넘고 성안에 우물이 있었다. 따라서 칠중성은 행정구역의 명칭도 된다. 이 지역은 임진강 중류의 남쪽연안에 자리 잡아 관서지방과 서울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에 많은 전투가 있었다. 신라의 선덕여왕 때 이곳은 신라의 북방영토로 고구려군이 쳐들어오니 주민들이 산속으로 피하였다. 이에 왕은 알천(閼川)을 보내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를 물리쳤다. 무열왕 때는 고구려군이 쳐들어와 군주(軍主) 필부(匹夫)가 전사하여 고구려에게 성이 함락되었다.

문무왕 때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칠 때 신라군이 칠중성을 쳐서 진격로를 개척하였다.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 때 당군이 칠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 지역에는 수많은 고성(古城)이 산재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양이나 양주에서 이곳을 거쳐 황해도 내륙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었고, 임진강 유역에는 여의진(如意津)이 있었다. 칠중성이 얼마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이었으며 지금도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듯 칠중성에는 아직도 군사시설이 성 곳곳에 숨어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지역에서는 나당 전쟁의 치열한 접전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곳이었다. 때로는 직진하고 때로는 우회하고 기습하고 그 기습을 받아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매복했던 곳이 바로 사진 속에서 보여지는 전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신라군은 상대적으로 열세한 병력으로 어떻게 승리했는가?



이에는 신라의 무기 쇠뇌와 함께 또 하나의 비밀, 육화진법과 장창의 도입이 있었다. 여섯 개의 꽃망울처럼 진을 짜서 빠른 속도로 승부를 내려는 기마군을 수시로 에워싸고 장창으로 끝을 내는 전술이다. 역사의 은밀한 비밀, 소정방 독살 사건도 있다. 그는 당에서 죽어 고향에 묻힌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결사대에 의해 당교라는 곳에서 즘새즙을 탄 술을 마시고 독살되어 부하장졸들과 함께 당교에 묻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당에 매우 부끄러운 것이었고 그래서 대관료가 죽었음에도 당 조정은 이를 쉬쉬하고 숨겼다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당교(唐橋)는 문경시 모전동과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의 경계를 이루는 모전천에 걸쳐 있는 작은 다리로 당과 격전을 벌였다 하여 이름지어졌다. 땅 이름 모전(茅田)도 당군이 묻혀 있다는 의미인 띄밭의 한자 의역이다.



<모십니다>


코리아글로브가 어느덧 열두 살에 접어들었는데
지금껏 단 한번도 광주에 공식 발걸음을 한 적이 없습니다.
'無等의 꿈'을 말하는 곳에서 무등산 또한 가지 않았습니다.
하여 계사년 5월 팬코리안 산행은 [빛고을-무등산 역사기행]



코리아글로브 계사년 5월 팬코리안 공동산행


<무등산-금남로-망월동 역사기행>



때: 4346년 5월11~12일(토~일), 1박2일
곳: 무등산-금남로-망월동-나노바이오센터

좌장: 양승태 코리아글로브 고문 (이대 정외과 교수)
모심: 조 민 코리아글로브 이사장 (통일연구원)
       이재의 코리아글로브 이사 (전남 나노바이오센터 소장)
       박현정 코리아글로브 회원 (광주 망월동 한옥 주인장, 교사)
앞장: 강성룡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국회 보좌진)
       임한필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24반무예 사무총장)


<일정- 5/11 토요일>

07:30   용산 및 동대구 출발
12:00   무등산 아래에서 점심 / 전북식당 보리밥
13:00   무등산에 서다
          앞장- 이재의 이사 (증심사 주차장 오르내림 4시간 거리)
          들머리> 증심사☞중머리재☞
          그림&비나리> 장불재☞입석대☞꼭대기☞서석대☞
          내리막> 중봉☞동화사터☞토끼등☞
18:00   무등산 떠나 금남로와 도청 순례
          앞장- 강성룡 집행위원 & 임한필 집행위원
19:30   달맞이 잔치- 망월동 한옥
          앞장- 박현정 회원 & 강성룡 집행위원
23:00   달 따러 꿈나라로!

<일정- 5/12 일요일>

07:00   씻고 먹고 닦고
09:00   망월동 묘역 참배
10:30   나노바이오센터 탐방
12:00   점심
14:00   올라오기

회비: 어른 8만원, 아이 5만원
교통: KTX 가족석 & 고속버스 & 개인차량
모집: 어른 아이 다해 열다섯 분만 갑니다. 어여 신청을!


* 만만챦은 일정입니다. 광주 연고의 회원만 아니라
  공감하는 분들도 적극 후원과 협력 부탁드리겠습니다.



< 계사년 팬코리안 산행의 얼개 >


  늘 둘째 주 토요일 가니 따로 날을 적지 않습니다.
  곧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6월-
     1안> 이사장께서 일곱 해만에 일본으로 가자십니다. 어떠십니까?
     2안> 사내의 뫼인 관악산을 에두를 아낙의 뫼, 청계산
     3안> 임경업 장군의 한이 서린 천마산
  7월-
     1안> 동간도-두만강-백두산(북파)
     2안> 청계산 또는 천마산

  8월- 태백산 / 현지 교통편
  9월- 남한산성
  10월- 안산~인왕산 / 호랑이 어디에 있을까
  11월- 마니산 / 강화군 협조
  12월- 6~7월에 못 가본 묏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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