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빛고을 역사기행 (무등산-금남로-망월동)

by KG posted May 14, 2013

無等의 꿈
홍익인간의 뜻
공존공영의 길
코리아글로브

계사년 5월 팬코리안 공동산행
<무등산-금남로-망월동 역사기행>



때: 4346년 5월11~12일(토~일), 1박2일
곳: 무등산-금남로-망월동-나노바이오센터

좌장: 양승태 코리아글로브 고문 (이대 정외과 교수)
모심: 조 민 코리아글로브 이사장 (통일연구원)
       이재의 코리아글로브 이사 (전남 나노바이오센터 소장)
       박현정 코리아글로브 회원 (광주 망월동 한옥 주인장, 교사)
앞장: 강성룡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국회 보좌진)
       임한필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24반무예 사무총장)

<일정- 5/11 토요일>

07:30   용산 및 동대구 출발
12:00   무등산 아래에서 점심 / 전북식당 보리밥
13:00   무등산에 서다
         앞장- 이재의 이사 (증심사 주차장 오르내림 4시간 거리)
         들머리> 증심사☞중머리재☞
         그림&비나리> 장불재☞입석대☞꼭대기☞서석대☞
         내리막> 중봉☞동화사터☞토끼등☞
18:00   무등산 떠나 금남로와 도청 순례
         앞장- 강성룡 집행위원 &임한필 집행위원
19:30   달맞이 잔치- 망월동 한옥
         앞장- 박현정 회원 &강성룡 집행위원
23:00   달 따러 꿈나라로!




<일정- 5/12 일요일>

07:00   씻고 먹고 닦고
09:00   망월동 묘역 참배
10:30   나노바이오센터 탐방
12:00   점심
14:00   올라오기

회비: 어른 8만원, 아이 5만원 / 총무- 박효정 집행위원
교통: KTX 가족석 & 고속버스 & 개인차량

<함께 하는 이>
모두 열여덟. 어른 열한 이와 아이 일곱. 위에 적은 분 빼고
박현정 회원의 신랑과 명준 하진, 박미화 집행위원과 한백 한울
나병옥 여사와 준구 상구, 박효정 집행위원과 승협, 김석규 상임이사



☞ 6월 뒤. 계사년 팬코리안 산행의 얼개 ☜
  
6월8일- 청계산  
7월11~14일- 동간도-두만강-백두산(북파)  
8월10~11일- 태백산 / 현지 교통편  
9월14일- 남한산성  
10월12일- 안산~인왕산 / 호랑이 어디에 있을까  
11월9일- 마니산 / 강화군 협조



< 동간도-두만강-백두산 기행 가실 분 모십니다 >


지난 해 코리아글로브는 처음으로 거룩한 뫼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반만년 역사공동체의 옛 자취를 좇아 서간도-압록강-백두산(서파)에 이르렀으며
그 기록은 KoreaGlobe.org “푸른 웃음 푸른 설움, 압록에 서다.” 실었습니다.

천지에 올랐으되 어른 일곱과 아이 일곱이 모여 49齋의 꼴을 갖추었지만
저희가 꿈이 아직 간절하지 않고 뜻이 여물지 않으며 길 닦기 게을리 한 탓에
물에 빠진 생쥐마냥 흠씬 젖기만 했습니다. 태백산 천제단에서도 매를 맞다가
겨우 마니산에 이르러 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철부지에게 봉변을 겪었습니다.

단기 4346년 계사년은 코리아 역사공동체가 즈믄 해의 이무기에서 벗어나
제대로 하늘 길을 타는 첫 해입니다. 그 때를 맞아 지난해의 숙제를 부둥켜안고
동간도-두만강-백두산(북파)으로 다시 오르려 합니다. 매초성에서 되새겼듯이
후고구려 발해와 백두산 폭발 뒤로 코리아 역사공동체의 한이 맺힌 곳입니다.

하여 지난해와 같은 7월11일에 갑니다. 배로 다녀올 때는 엿새였지만
비행기로 다녀오니 목금토일 나흘입니다. 삯은 70에서 1백으로 올랐습니다.
진월 고문, 양승태 고문, 조 민 이사장 세 분께서 앞장서시니
조희문 교수 부부와 김석규 상임이사가 답을 하여 이미 여덟 분이 간답니다.
앞으로 보름 안에 어른아이 열 분을 더 모셔서 즈믄 해의 숙제를 풀겠습니다.

준 비 사 항

▶ 여권과 세면도구 (면도기, 드라이 등)
▶ 옷: 백두산 갈 때 긴팔옷과 비옷과 등산화, 나머지는 서울과 다르지 않음.
▶ 상비약: 감기약, 소화제, 우황청심환, 멀미약, 반창고 등
▶ 음식: 입맛 맞쟎으면 김, 고추장, 마른반찬, 팩소주, 커피 등 준비
▶ 돈: 인민페 또는 우리 돈 (달러환전 필요 없음)
▶ 그리고: 손목시계, 사진기, 장갑, 샌달, 화장지, 볼펜과 종이 등




빛고을 기행 旅程 遠近圖> 도심☞ 東☞ 北東☞ 北西☞ 도심





광주의 鎭山 무등산


                               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택리지』에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은 산 위에 긴 바위가 가지처럼 뻗은 것이 수십 개나 공중에 배열되어 있어 훌륭한 笏 같고(입석대를 말함), 산세가 지극히 준엄하여 온 도를 위압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북구와 화순군 이서면 및 담양군 남면의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1187미터에 달한다. 무등산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기고 싶어도 매길 수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무등산의 무등은 불교와 인연이 있는 말인데, 『반야심경』에서 부처가 절대평등의 깨달음, 곧 ‘무등등(無等等)’을 말한 대목에서 유래한 듯하다. 절대평등의 무등은 평등이란 말을 쓸모없게 하는 완전한 평등을 뜻한다.

무등산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그저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듯하지만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큰 골짜기들이 여러 갈래로 나 있다. 무등산에는 증심사계곡, 동조골, 큰골, 용추계곡, 곰적골, 원효계곡, 석곡계곡 등이 있으며 계곡마다 폭포와 암반들이 절경을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35권 「광산」현 ‘산천’조에는 “일명 武珍岳 또는 瑞石山이라고 한다. 이 산 서쪽 양지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100척이나 된다. 산 이름 서석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그 유래를 밝혔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도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하였다. (이 밖에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권극화는 기문(記文)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광산(光山)의 진산을 무등산 혹은 서석산이라고 하는데, 그 형세가 웅장하여 모든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규암(圭庵)이라 하고 그 곁에 서석(瑞石)이 겹겹이 서 있는데 우러러 보는 자, 굽어보는 자, 누운 자, 일어난 자가 있고 또 무더기로 있는 자와 혼자 서 있는 자가 있어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고 사면이 옥을 깎은 듯하다. 그 서석이니, 규봉이니 한 것은 뜻이 대개 이것을 취한 것이리라. 물이 잔잔하게 돌 눈에서 쏟아져 나와 마르지 않는다. 옛날 의상대사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정사(精舍)를 세웠고, 계속하여 보조와 진각이 공부하여 도를 얻어 그 꽃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삼존석(三尊石)과 십이대(十二臺)를 보면 대개 이를 생각할 수가 있다.

무등산이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알려진 이유는 무등산이 펑퍼짐한 육산이면서도 산등성이 곳곳에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천왕봉 남동쪽의 규봉과 남쪽의 입석과 서석, 이 세 암봉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경이다. 장불재 북쪽 약 800미터 지점에 솟아 있는 서석은 저녁노을이 물들 때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하여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린다. 장불재 북동쪽 약 400미터 지점에 위치한 입석대는 선돌을 수백 개 모아놓은 듯 오묘한 모습이다. 특히 입석대는 옛날부터 제천단으로서 가뭄이나 전염병이 극심할 때 제를 지내던 신령스러운 곳이다. 천왕봉 남동쪽에 위치한 규봉은 큰 바위가 세 개 솟아 있다고 하여 삼존석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등산 입석대 약 4500만~8500만 년 전에 벌어진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주상절리. 제봉 고경명은 벼슬 높은 신하가 관을 쓰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다고 하였다.]


무등산 정상은 ‘정상 3대’라 불리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세 개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진다. 천왕봉에 올라서면 무등산의 최고봉답게 전라북도 순창뿐 아니라 광주, 담양, 영암, 나주 등 호남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며 맑은 날엔 지리산까지도 조망된다. 비로봉이라고도 불리는 지왕봉 꼭대기의 뜀바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뜀바위를 건너뛰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반야봉이라고도 불리는 인왕봉은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장 낮다.

산세는 웅대하지만 산정 부근의 암석 노출지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식생의 밀도가 높은 토산(土山)이어서 믿음직하고 덕이 있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무등산은 동부의 산악 지대와 서부의 평야 지대의 결절점에 위치하고 있다. 북서·남동의 능선은 무등산 천왕봉에서 중봉(915m)·향로봉(367m)·장원봉(386m)에서 망월동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로 규모가 크다. 동서 방향의 능선은 무등산 천왕봉에서 중봉·중머리재(608m)·새인봉(490m)에서 학동으로 뻗어 있다. 무등산 천왕봉에서 남서 방향으로는 장불재(910m)·만연산(665m)·수레바위산(363m)·정광산·죽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뚜렷하다. 이 산줄기는 북쪽의 극락강 수계와 남쪽의 지석천의 분수계를 이룬다.

무등산은 중생대 화상암 산지로서 산지 전체가 부드럽게 풍화되어 있고 곳곳에 주상절리(柱狀節理) 경관이 있다. 이 주상절리는 남한에서는 가장 큰 규모로서 산정상이나 능선을 따라서 이들 주상절리와 관련된 성곽형의 토르(tor: 차별적인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그 지역의 기반암과 연결되어 지표에 노출되어 형성된 독립성이 강한 암괴미지형)가 발달해 있다. 또한 산지사면을 따라 설형(舌形)으로 발달하는 암설의 퇴적지형인 애추(talus)가 발달되어 있다. 애추는 우리말로 너덜겅 또는 너덜지대라고 하고 가장 보편적인 주빙하기후 지형으로서, 기계적 풍화에 의해 단애면(斷崖面)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진 암설이 집적된 지형이다.


<한마디> 옛 전남도청 본관에 서다


주소는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3번지다. (문화전당로 26번길 7)
증심사 길을 따라 4km를 달리다 보면 우리는 33년 앞서 역사의 현장에 들어서게 된다. 조선대 병원과 전남대 병원이 잇달아 나오고 광주민주화운동의 마지막 무대였던 옛 전남도청 본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 피비린내 나는 금남로 충장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30분의 짧은 동안이지만 두 집행위원이 가닥을 잘 잡으리라 믿는다.

‘백년전쟁’ 류의 자해소동도 나오지만 12.12 앞서의 헌정사에 관한 극단의 평가는 차츰 잦아들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80년은 살아서 오늘도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가로막고 있다. 왜 그럴까. 원인 제공자였던 김재규는 옛날에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주역, 전직 대통령들과 학생운동 세력이 한 세대가 지난 오늘도 攻守가 뒤바뀌어 시퍼렇게 여론의 현역으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시해의 역적을 처단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박대통령 때와는 달리 왜 자신들이 굳이 정권을 맡아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했던 헌정사의 ‘사생아 정권’이 있다. 더불어 한 세대가 지나서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서도 아직도 청춘의 적개심으로 가슴이 끓는, 제 나이를 잊어버린 ‘사생아 세대’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광주는 아직도 인질로 잡혀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피 흘린 이들 특히 무지랭이 백성의 바람대로 그 다음 세상이 펼쳐진 경우가 매우 드물다. 참으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과 호국은, 20세기 세계사에서 결코 일반화할 수 없는 기적이다. 그러기에 ‘한강의 기적’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새 세상은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타는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다. 마땅히 한국 ‘민주주의 신화’의 기념비로 우뚝 서야 할 빛고을이 그리 멀지 않은 통일 대한민국의 시대를 눈앞에 두고도 아직도 광주 시민군의 넋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밖에선 <죽음을 넘어~> 영문본 절판
안에선 '교과서 5·18 제외', 참담하다"
광주시 <광주일지> 판권 인수 논의 시작... 재출판 예산 마련이 관건


                                                                     2011.11.16 09:48 Ohmynews



"의식 있는 미국인 또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단순히 이 책이 한국 최근대사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광주의 비극이 워싱턴과 서울에 의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68) 시카고대학 교수가 <광주일지>(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설갑수 옮김, 1999)에 쓴 서문 중 일부다. <광주일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기록, 1985)의 영문 번역서다.

실제 이 책은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대학에서 한국현대사 강의 교재로 채택돼 사용됐으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대표적인 필독서로 꼽혔다. 그러나 더 이상 <광주일지>를 손에 든 미국인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게 됐다. 미국 출판사의 사정으로 책이 절판됐기 때문이다. <죽음을 넘어...>의 실질적인 집필자인 이재의(나노바이오연구센터 소장.55)씨는 지난 8월 광주시에 <광주일지>의  재출판과 안정적인 출판시스템 확립을 위해 공적 기관이 미국 판권을 인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했다.

이재의씨는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새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 5·18 민주화운동을 삭제하기로 한 것을 보면서 분노를 넘어 자괴감이 든다"며 "오늘날 이런 역사를 지켜내지 못한 황당한 사태는 우연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에 대한 국내외에서의 폄훼와 절판으로 이어지는 참담한 현실의 반영"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와 관련 광주시는 <광주일지> 판권 인수 및 재출판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에 착수했으나, 과거 이와 유사한 사례가 없었고, 5.18기념재단과의 협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재출판에 필요한 예산 확보가 미뤄지고 있다.

<죽음을 넘어...> 읽은 미국 대학생들의 반응은?... "감동"

5·18 민주화운동의 전모를 해외에 본격 소개한 최초의 영문 서적인 <광주일지>가 출판된 것은 지난 199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출판부가 '아시아 태평양 기록 시리즈'(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의 일환으로 제작한 뒤 북미권에 2000여 권이 판매되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대학 출판부의 한계로 인해 특별한 홍보작업이 없었지만, 미국 내 한국학 연구자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대학 교재 등으로 지속적인 판매가 이뤄진 것이다.

<죽음을 넘어...>의 영문 번역서가 출간된 것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재미언론인 설갑수(42)씨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그는 대학원 벗이자 현재 소설가인 닉 마마터스와 함께 미국 현지에서 3년간에 걸쳐 <죽음을 넘어...>를 번역, 재편집했다. 설씨는 물론 함께 작업을 한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광주의 진실을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는" 영문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설씨는 책이 출간될 당시 '기적'이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책이 출판된 후 첫 5년 동안 미전역에 퍼져있는 대학생들로부터 '책이 감동적이었다'는 식의 이메일을 꽤 많이 받았다. 불란서어판이나 서반아어판을 내자는 제안도 받았다. 또한 어떤 마케팅 노력이나 '로비'없이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북리뷰가 실린 건 <광주일지>의 가치가 빚어낼 수 있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UCLA가 존재하는 한 책이 절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출판부 편집장 레슬리 에반스가 은퇴하고, '기록시리즈'에 대한 UCLA의 재정 지원이 끊기면서, 약 1년 뒤인 지난 2007년 책이 절판됐다. 이 책이 절판됐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당시 절판 소식을 접한 설씨는 난감했다. 생활인으로서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컸기 때문이다. 다시 출판사를 찾아 에이전트를 구하고, 제안문을 쓰고, 편집자와 마케팅담당자를 만나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5~10년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등의 문제는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쉽지 않은 부담이었다. 정작 '광주의 유산'을 외면하는 광주에 대한 서운함도 적지 않았다.  

<광주일지> 절판 4년 만에 설씨가 재출판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극우인사인 지만원(68)씨 덕분이었다. 지씨가 지난해 8월 출간한 <솔로몬 앞에 선 5·18>이라는 책에서 <죽음을 넘어...>와 북한 작가가 서술한 일부 광주 관련 서적에 사실관계가 비슷한 여러 대목이 있다면서 황석영씨의 저작과 관련한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설씨가 화가 난 것은 지씨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 그에 대한 광주쪽의 무반응이었다.

"'광주학살 진상규명, 전두환 타도' 외에는 세속의 모든 가치가 무의미해 보이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 생활인으로 살다보니, 참 별일이 다 생기더라. 이에 대해 변변히 대응을 못하는 광주의 모습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결국 책을 번역한 저 역시 책임을 느끼게 됐고, 생활인의 틀을 벗어나서 하던 일이라도 마무리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난 6월 UCLA로부터 판권을 돌려받았지만, 여전히 책을 안정적으로 출판해 줄 곳을 찾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결국 설갑수씨는 광주의 이재의씨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씨는 강정채, 김성종 등 광주지역 재야인사들과 함께 <광주일지> 판권 인수와 재출판 작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재의씨는 13일 <오마이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개인들의 노력과 희생에만 의존해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이제 한계가 명확하다"며 "<죽음을 넘어...> 영문판은 국내판과 더불어 5·18 현장에 대한 가장 소중하고 생생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어떤 기록물보다 공적인 기관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죽음을 넘어...>는 단지 대한민국 특정 지역, 특정 정치상황 하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처절한 투쟁에 대한 인류사의 보편적인 기록물"이라며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세계 도처에서 약탈적인 사태를 노정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광주일지>는 결코 절판되어서는 안 될 세계 인류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광주의 피 묻힌 미국 정책 결정권자들"... '미완의 진실'로 남은 '5·18'

<광주일지>는 <죽음을 넘어...>를 단순 번역만 한 것이 아니다. 우선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한국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장문의 서문을 썼다. 한국 상황에 어두운 외국인들이 5·18 민주화운동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히 그는 5·18 민주화운동을 '한국의 천안문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광주시민 학살에 개입한 미국 정책 결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나에게 한국전쟁 이후 현재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장 구역질나는 위선과 기회주의와 인종주의의 표현이었으며 미국이 표방해 왔던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최대의 배신이었다. 미국인들은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진압 과정에 대한 비판과 달리) 미국이 직접 진압에 관여했던 광주항쟁에 대해서는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커밍스 교수는 또 <저널 오브 커머스> 기자였던 팀 셔록이 1996년 정보공개법에 의해 획득한 광주항쟁 관련 비밀해제 문건을 언급하면서 "미국은 최고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명백히 전두환과 그 일당을 지지하기로 했다"며 "광주에서 살해되거나 고문당한 젊은이들 수백 명의 피를 그들 손에 묻혔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말했다.

<광주일지>가 <죽음을 넘어...>와 다른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팀 셔록의 기고문 '워싱턴의 시각'(The view from Washington)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셔록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국 국무성의 비밀문서 '체로키파일'을 집요하게 추적해 미국의 개입 전략을 최초로 알린 인물이다. 특히 셔록은 기고문에서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이 '워싱턴 지하창고'에 묻혀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록 어느 것도 미국 관리들이 특수부대가 광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공수부대가 전두환이 자행한 진압에 사용된 것을 카터 행정부가 인지하지 못했다는 공식입장과 모순된다. 중요한 점은 나의 정보공개 요청을 검토한 미 정부 부처 간 협의체는 국가안보상의 이유로, 광주와 연관된 위컴 주한미사령관과 그 한국 카운터파트와의 회합 내용, 사령관과 미국 정부 간의 통신내용 공개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설갑수씨는 "<광주일지>에 대한 관심이 독립적 연구로 이어져, 미국이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국방성, CIA, DIA(국방부 정보국)의 광주항쟁 자료를 공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미국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역할을 균형적이고, 포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일지>의 한국어 원본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현장보고서다. '광주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의 비밀 프로젝트로 1985년 출간됐다. 기독교계로부터 자료 수집 및 출판 비용 일부를 지원 받고, 대표 집필자인 이재의, 조양훈과 보조자 10여명이 참여, 6개월에 걸쳐 비밀리에 작업이 진행됐다. 200여 명의 항쟁 참가자 등의 인터뷰를 비롯해 광주시민들이 참여한 공동의 결과물인 셈이다. 집필 완료된 기록물을 작가 황석영에게 의뢰하여 감수한 뒤, 그의 이름으로 펴냈다.

출판 당시 당국으로부터 '불온서적'으로 지목돼 수차례 압수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약 1백만 부 이상 읽히는 지하 베스트셀러 서적으로 알려졌다. 이 책이 출간되면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1987년 6월 항쟁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이 책은 원본 그대로 1986년 일본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일어본으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광주일지> 재출판 제안서 참고)






















<비나리>
코리아글로브 빛고을 역사기행

무등의 꿈, 홍익인간의 뜻, 공존공영의 길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코리아글로브가
열두 살이 되어 이제야 무등 자락에 섭니다.

사람의 그릇이 하늘보다 더 큰 미리내이니
부디 날 때부터 주어진 그 자리로 나투길 바라며
천부인권 다음의 천년문명으로 무등을 꿈꿉니다.

사람의 마음이 나라보다 더 넓은 바다이니
그 마음으로 온 누리를 적셔 한 나라마냥 지내자
인도주의 다음의 백년대계로 홍익인간 뜻을 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즈믄 해도 못 되는 하루살이니
어지러이 흰소리를 삼가고 모두 살아 함께 먹도록
정의와 평화보다 지름길인 공존공영의 길을 닦습니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넘나들던 부여의 발자취가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숨결이 예 머문 지 오래입니다.
땅이 갈라짐보다 마음이 부서짐이 더 큰 아픔입니다.

그 마음으로 통일 대한민국의 누리를 열겠습니다.
평양이 무너지는데 지난날 잘잘못만 뒤짐은 미련입니다.
외려 예서 무등의 사람들이 나오도록 돕겠습니다.

어차피 얻어온 말로 버텨온 좌우가 제 이야기를 만들고
쓰린 나날 지구마을에 뿌려진 한인들이 싹을 틔우며
지구마을 이웃들이 코리안 드림으로 꽃피게 하겠습니다.

단기 4346년 음력 4월 초이틀 코리아글로브 사람들이
제 꿈과 뜻과 길을 무등의 자락에서 오롯이 펼치고자
빛고을과 달구벌과 서울에서 한걸음으로 모였습니다.

1만년 인류문명과 반만년 코리아 역사공동체에 나투신
한어버이의 꿈과 한스승의 뜻과 한임금의 길을
어리석은 저희들이 살리도록 굽어 살피소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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