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을러서 이제야 올립니다.
오는 7월11일 두 번째 백두산 기행을 떠납니다.
이번에는 비행기 타고 나흘(목금토일)입니다.
지난해가 서간도-압록강-백두산(서파)이었다면
올해는 동간도-두만강-백두산(북파)의 길입니다.
회비는 1백만원, 진월 고문과 조 민 이사장을 비롯한
여덟 분이 신청하셨습니다. 딱 열 분 더 모시겠습니다.
가실 분은 5월 말까지 꼭 신청하시길 바랍니다.
여권 영문 이름과 함께 계약금 20만원 보내시면 됩니다.
아래 글을 읽으시고 (아직 못 보셨다면) 기행문도 보시길.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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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꿈
홍익인간의 뜻
공존공영의 길
(사)코리아글로브
< 임진년 코리아글로브 남북 공동산행 >
씨앗1) 탈북동포를 비롯한 팬코리안 산행
씨앗2) 달마다 둘째 토요일은 산에서 산다
씨앗3) 서울의 북동에서 남서로 훑는다
씨앗4) 때마다 주제와 길잡이를 세운다
1.14- 불암산 시산제, 집사자 박기성, 불수사도북의 처음
2.11- 아차산, 강철환 앞장, 고구려의 숨결
3.10- 삼성산, 조영진 좌장, 어른 구순잔치
4.14- 검단산, 도명학 좌장, 부여의 숨결
5.12- 사패산, 조 민 좌장, 회룡의 터
6. 9- 북한산, 김종운 좌장, 봉황각 백주년
<7.11~16>- 백두산, 진월 좌장, “동북3성/ 만주/ 서간도&북간도”
8.11- 태백산, 광복맞이 하늘굿
9. 8- 수락산
10.13- 도봉산
11.10- 마니산, 음력 개천절 하늘굿
12. 8- 관악산
* 길잡이와 주제가 잡히지 않은, 8월 뒤는 백두산기행에서 채워 나가겠습니다.
코리아글로브 남북 공동산행 1~6월 참가자 61인 90연인원
매회평균 15인 <주요참가자>
조 민 이사 (통일연구원) / 진월 초대대표 (세계종교연합 이사)
림 일 탈북작가 / 이주도 한반도평화국제연합 대표 / 김연화 관광 안내인
김석규 이사 / 김지호 이사 (사진작가) / 박미화 집행위원 (교사) / 김한울 어린이
안경환 와인대사 / 박소희 사회복지사 / 이병성 미래교육학부모회
전형권 춤꾼 / 함영태 M&A투자협회 이사 / 김한백 여고생
마지막 안내> [코리아글로브 백두산 기행단]
1. 단독기획
주관- 백두여행사 / 14인- 22인승버스 / 안내자- 재중동포
이틀 오후- 오녀산성 등반&조망 / 이틀 저녁- 비나리&하늘굿
나흘 오후- 집안동포마을방문
2. 준비물 꼭!
신발- 운동화&샌들(버스20시간) / 배- 수건&세면도구
백두산- 바람막이옷&우비 / 아이들- 놀이기구&책
3. 준비물 나름
비상약- 멀미약&모기향+약 등등 / 음식- 고추장, 마른밑반찬, 컵라면, 팩소주 등등
또- 우산, 휴대용 화장지, 손톱깎기 등등
4. 참고
환전- 단골은행 미리, 어른 5백 위안 적당(10만원)
면세점- 두 곳(출국장&배) 많기는 출국장, 술담배는 배가 낫다
쇼핑- 두세 번, 현지&이북 / 전화로밍- 보통 자동, 요금 비쌈
데이터로밍- 미리 중단, 요금폭탄, 쓰려면 신청(무제한 하루9천원)
호텔인터넷- 기대마시길 / 현지옵션- 오는 날, 압록강유람선 15$, 발마사지 20$
5. 밥
배 저녁아침- 식판self, 분식점수준 / 이틀점심- 버스 안 도시락
호텔아침- 빵&쌀죽 위주 / 점심저녁- 서울입맛, 현지식 반찬7-8
반주- 1병당 보통 1만원 넘음
6. 백두산 천지
천지- 공안과 부딪힐 까닭 없음
참가자들 말씀&묵념&사진 대체 / 전야제- 객실, 비나리&하늘굿 올림
7. 참가자 14인의 몫
좌장- 진월대표 / 앞장- 전우현교수, 이강일선생
총괄- 김석규 이사 / 기록- 김지호 이사
딸관리- 박효정 위원, 보조 김한백
아들관리- 김영욱 사장, 보조 이승협&박재범
8. 사흘호텔 잠자리배정, 순서대로!
1) 진월 2) 이강일-이하정 3) 전우현-김석규 4) 김지호-김영욱
5) 김한울-강준구-박재범 6) 김한백-김민정 7) 박효정-이승협
9. 반드시!
여권- 목숨걸고 지킨다 / 배 타고 이틀- 아이들 안전위험, 도난분실사고조심
10. 만남
때- 임진년 7월11일 3시 정각
곳- 인천연안부두, 제1국제여객터미널 1층 수협 ☎0328879120
가기- 서울역 기준, 1시 전 출발, 동인천역 내려 맥도날드 앞 타기
버스(꼭24번,10분마다,40분) / 택시(6-7천원,15-20분)


코리아글로브 임진년 남북 공동산행 7월 특별기획
“동북3성/ 만주/ 서간도&북간도”
백두산 가족기행
자료집 본문
<1> 서간도 / 출처: 동아일보 2004. 5. 20
우리땅 우리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7) 서간도를 재발견하자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단둥(丹東)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볜먼(邊門) 마을의 ‘이찬산(一面山)’역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오리먼(高麗門)’역으로 불렸다.

“1962년인가, 류사오치(劉少奇·당시 중국 국가주석)가 평양에서 (조중비밀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열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역명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바꾸라고 했다디요.”
볜먼의 조선족들 사이에는 1961년 중국 방문에 나선 김일성 북한 주석이 이곳을 지나다 역 이름을 보고 조선 땅이라고 할까 봐 중국 정부가 서둘러 개명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 무렵 이찬산역 인근의 ‘가오리먼차오(高麗門橋)’역은 아예 폐쇄됐다. 볜먼 남쪽의 ‘조선촌’도 ‘탕허(湯河)’로 이름이 바뀌었다.》
● 볜먼은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柵門)이 바로 볜먼이다.
책문이란 조선인들이 청(淸)나라에 들어갈 때 거쳐야 하는 국경검문소.
‘고려문’으로 불리기도 한 이 지역엔 일찍이 조선인마을이 형성됐다.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됐던 조선인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책문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다. 청 이전에 명(明)은 랴오둥(遼東)지방 동북쪽 변경에 흙 돌 나무로 울타리를 쳤는데 이를 변장(邊墻)이라고 했다. 이어 청은 1660년대 허물어진 변장 근처에 버드나무를 잇대어 심고 그 바깥에 참호를 판 유조변(柳條邊)을 구축한 뒤 사이사이 사람과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을 20여개 만들었다. 그것이 책문이었다.
“명대에 변장의 동북쪽 지역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명과 형식상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자치를 했다.
변장은 명의 국경선 역할을 한 것이다.”(남의현 강원대 강사)
● ‘압록-두만강이 국경’ 문건 거의 없어
청은 왕조의 발상지인 변장의 동북쪽지역에 대한 관심이 명보다 컸다.
하지만 이 지역에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중국학자들은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유조변이 ‘만주를 보호·관리하기 위한 문화적 구분선’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은 대체로 유조변이 사실상의 국경선이었다고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책문이 청의 국경이 된다.
한국 학자들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과의 국경으로 표현한 문건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 때까지 청의 공식문건에 나타난 가장 바깥쪽 변경은 볜먼 북쪽의 펑청(鳳城)이라는 것.

[‘중국지’(1735년)에 소개된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 레지의 지도(왼쪽).
지도상에 굵은 선으로 표현된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레지선’이 있다.]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에 평안도의 중국어 표기인 ‘PING NGAN’(네모안)이라는 지역명이 적혀 있어 이 지역 전역 혹은 일부에 조선의 지배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19세기 제작된 김대건 신부의 ‘조선지도(가운데)’와 일본인이 제작한 ‘동판조선국 전도(오른쪽)’에도 압록강 북쪽 지역 대부분이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레지선’과 ‘PING-NGAN’
청대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는 “조선의 변경이 선양(瀋陽)∼지린에 접하였다”고 적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펑황청(鳳凰城·지금의 펑청) 부근을 조선과의 경계로 기록했다.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변경 지도를 작성한 프랑스 선교사 레지(R´egis) 또한 “펑황청 동쪽에 조선의 서쪽 국경이 있다”고 밝혔다. 레지의 실측도에는 조선의 북서쪽 국경선인 이른바 ‘레지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다. 펑청 부근을 지나는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엔 평안(平安)도의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PING NGAN’이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손질해 청이 내놓은 황여전람도(1718)엔 레지선과 이 문자가 없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청이 불리한 내용을 지운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1882)나 김대건(1822∼1846) 신부의
‘조선지도’에도 압록강 대안 지역 대부분은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고려 때도 집단이주가 있었다
중국 학계는 간도에 조선인들이 거주한 것은 봉금령이 내려진 1660년대 이후라고 주장한다. 청나라 영토에 불법적으로 넘어왔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고려 때에도 이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8년 중국 옌볜(延邊)에서 발간된 ‘중국조선족력사상식’도
“명 초기에 요동 일대에는 수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명 초기 요동지역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다”고 인정한다.
특히 명말청초에 건너간 이주민의 자손들은 여전히 “나는 조선인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현의 박가보(朴家堡)촌과 허베이(河北)성 칭룽(靑龍)현 박장자(朴杖子)촌은 당시에 형성된 대표적인 조선족 마을.
이곳엔 아직도 동성동본 금혼과 같은 우리의 풍습이 남아있다.
● 조선인 마을 조선관리가 관할
1660년대부터 200여 년간 이어진 청의 봉금 시기에 조선인들의 월강(越江) 이주는
두만강 대안지역 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지역으로도 대거 이뤄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압록강 대안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옌볜지역보다 많았다. 퉁화(通化) 환런(桓仁) 콴뎬(寬甸) 등에 이주한 조선인은 1897년 당시 3만7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은 1903년 양변관리사를 파견해 서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을 묶어 향약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친 것이다. 조선족 학계에서는 ‘동북 농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벼농사가 시작된 곳도 북간도가 아니라 서간도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2000년 옌볜)
“1845년 뗏목을 몰던 평안도 초산 일대 80여 가구의 농민들이 훈(渾)강 유역에 논을 처음 만들었다. 1875년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환런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었다.
130여년 전 훈강 유역에서 시작된 논농사가 간도 전역으로 신속히 퍼졌다.”


[179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 두만강과 토문강원을 뚜렷이 나눠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님을 강조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 ‘東爲土門’에 가려진 서간도문제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문제는 국내 학계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돼 왔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 해석 문제에 집착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장과 유조변에 맞닿아 있는 서간도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분쟁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정계비문 해석 문제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명과 청이 실제로 자국의 영토를 어디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느냐는 시각에서 간도문제를 바라보면 서간도는 동간도 혹은 북간도만큼이나 중요한 지역이다.”(박선영 교수)

[조선 영조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뒤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지도에는 고려시대
윤관이 9성을 개척한 후 경계비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선춘령이 표시돼 있다.
옛 선조들이 개척했던 영토 회복을 주장하며 북방으로 뻗어나가던
조선 영·정조대의 영토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오녀산성 / 자연지형 이용한 천혜의 요새로 위용 자랑

[오녀산성 연못. 천지라고 불리는 연못으로, 한 해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
적군의 침범 어려운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해발 800m) 정상 부분은 둘레가 2 km에 이르는 넓은 평지입니다.
더욱이 산 정상에는 중국 사람들이 ‘천지’로 부르는 연못이 있습니다.
넓은 평지에 물까지 나오니 사람이 지낼 만한 공간이 충분히 되는 셈이지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이곳에 큰 건물들과 창고ㆍ군인 숙소 등을 지었습니다.
여러 기록들을 통해 살펴보면 고구려는 건국 직후 졸본천 근처에 임시로 궁궐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운 지 4 년 만에 골령(또는 성산) 위에 성곽과 궁궐을 짓고 왕이 살았습니다. 서기 3년 유리명왕이 수도를 현재 집안시에 있는 국내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약 40년 정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 바로 오녀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사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서문 주변에만 성벽을 만들고, 정상 주변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습니다.

2000년 세월의 성벽, 멋진 예술 작품
1998년 고구려 유적 답사 때에는 오녀산성을 개방하지 않았던 중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2004년 7월 발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당시 발굴 결과 고구려 시대에 만든 항아리와 화살촉ㆍ마구ㆍ수레 부속품 등의 유물은 물론 고구려의 특징인 온돌 유적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산에 오르고 내릴 수 있는 계단을 정비하고, 성벽의 보수도 해 놓았습니다. 또 정상에서 동쪽 성벽을 보러 가는 길도 계단을 이용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지요.
필자는 오녀산성 관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끼 낀 동쪽 성벽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여 년 세월을 버텨 온 성벽은 그대로 하나의 멋진 작품이지요.
또 멀리서 오녀산 전체를 바라보는 것도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그 당시 산 아래 살던 산 위에 사는 왕을 우러러 보며 ‘우리 고구려 태왕님은 천신의 아들이야.’라는 생각을 정말로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수도가 국내성으로 옮겨 갔지만, 오녀산성은 그 후에도 고구려의 종교적인 신성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광개토태왕릉비 / 영토 넓히고 백성 사랑한 태왕의 참모습 새겨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큰 비석을 무덤 곁에 세웠습니다. 높이 6.39mㆍ너비 1.3∼2m의 사각 기둥 모양의 돌에 15cm 크기의
글자(한자) 1775 자를 촘촘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석이며, 여기 새겨진 내용이 1600년 전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라 무엇보다 가치가 큽니다. 지금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광개토 대왕릉비는 오랫동안 잊혀져있던 그야말로 버려진 비석이었어요. 비석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글자가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지요. 이렇게 점점 잊혀져 가던 광개토 대왕릉비의 재발견은 1880년대에 시작됩니다. 특히 1883년 일본 첩보 장교 사까와 중위가 비문의 내용을 일본에 소개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답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할 명분을 찾고 있었어요. 아득한 지난날, 일본 천황이 가야의 임나 지역에 ‘일본부’를 두고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는 ‘일본임나부설’이라는 거짓으로 꾸민 역사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일본인들은 비문의 내용을 조작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릉비문은 왜국을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며, 고구려인이 돌아가신 광개토 대왕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광개토 대왕이 탄생하기까지의 간략한 고구려 역사와 생전의 업적, 그리고 그의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법 규정이 적혀져 있습니다.
능비는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내용도 풍부하다. 고대 금석문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장대한 서사시를 노래하듯이 써내려 갔는데, 내용은 대략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고구려 왕실의 유래와 신성성을 노래한 부분이다.
첫머리에는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천제(天帝)와 하백(河伯)의 신성한 권능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세운 건국설화로 장식했다. 그리고 추모왕의 권능이 유류왕(제2대 유리명왕)과 대주류왕(제3대 대무신왕)을 거쳐 광개토왕까지 면면히 이어졌음을 기술하고, 광개토왕의 공적으로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음을 노래했다.
둘째 단락에는 광개토왕의 공적을 연대순에 따라 기술했다. 395년 서요하 일대의 거란(稗麗), 396년 남쪽의 백제, 398년 동만주의 숙신, 400년 신라를 침공한 왜, 404년 대방지역을 침공한 왜, 407년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지역, 410년 동부여 등을 공략했다고 한다. 광개토왕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 곳곳을 차례로 공략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셋째 단락에는 왕릉을 돌볼 묘지기를 어디에서 징발했는지 기록했다. 대왕의 공적을 만세토록 전하기 위해서는 왕릉과 능비의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이에 묘지기 명부를 일일이 새겨 대왕의 공적을 만세토록 전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한 임금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광개토 대왕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은혜와 혜택은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다.
옳지 못한 자들을 없애 치우고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하게 무르익었다.”
광개토 대왕은 흔히 우리 역사 최고의 정복 군주, 넓은 영토를 넓힌 대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식 이름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는 영토를 넓힌 임금(광개토경)이라는 뜻과 함께 백성을 평안하게 한 임금(평안호)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 사람들의 평가지요.
비문에는 또 광개토 대왕이 생전에 한 말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내가 죽은 후 만 년의 이후라도 무덤을 지키는 자는 다만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붙잡아 온 한ㆍ예 사람을 데려다가 청소를 시키도록 준비하게 하라.”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무덤이 영원히 지켜지기를 원했습니다.
장수왕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던 것입니다.
장수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래 광개토 대왕릉비의 진면목인 셈입니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의 소망은 현재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덤은 도굴되었고, 훼손되었으며 한동안 잊혀졌습니다.
그의 소망이 이뤄지는 길은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또 바르게 그를 평가해 줄 수 있는 후손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요?


동방의 피라미드 태왕릉·장군총
돌 쌓아 만든 무덤의 아름다움에 감탄 절로
길이 60 m 넘는 제단 갖춘 태왕릉
광개토태왕이 돌아가신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분을 못 잊어 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무덤과 비석을 세웠으며, 무덤의 동쪽에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대왕이 돌아가신 날과 기념일에 제단에서 성대하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제단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상이 놓여지고, 그 위에는 여러 제기에 음식물이 올려졌습니다. 대왕의 후손인 왕실 가족과 여러 대신이 모두 모여 절을 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수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정성껏 무덤 주변을 청소하고, 경비를 담당하고, 제사 음식을 준비했을 테지요. 대왕은 천신의 후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결코 작은 소홀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태왕릉과 제단. 제단 길이가 60m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2003년 중국은 고구려 왕릉들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여러 왕릉 주변의 민가를 옮기고 발굴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12기의 왕릉 가운데 9기에서 제단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제단은 대체로 무덤의 동쪽에서 많이 발견됐는데, 시신을 넣어 두는 널방 입구가 남서쪽인 경우가 많아 무덤 뒤쪽에 제단이 있는 셈이 됩니다. 특히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태왕릉 동쪽 50∼68m에 있는 제단은 1.5m 간격으로 2개의 제단이 이어져 있습니다. 또 길이만 60m가 넘어 제단이 매우 컸음을 알게 해 줍니다. 제단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금박 입힌 상다리 4 개도 발굴됐는데, 현재 집안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요.
제단에서 다시 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태왕릉비가 우뚝 서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비문을 낭독한 후에 제단에 가서 제의를 올리고,
무덤을 돌아보며 돌아가신 임금님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태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이며, 높이도 14m가 넘습니다. 현재는 원래 모습에서 꽤 허물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마치 산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 산(山)에 묻힌 사람(人)은 곧 신선(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장군총. 널방 규모가 너비 5.5 m로 상당히 넓다]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
한편, 태왕릉과 함께 집안시를 대표하는 유적지는 장군총입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들 가운데 가장 그 형태가 아름다워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립니다. 한 변의 길이 31mㆍ높이 13m 정도로 태왕릉ㆍ천추총 등에 비해 규모가 작습니다. 그렇지만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1000여 개의 돌이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모습을 보면 절로 감탄이 우러나옵니다.
7 단으로 쌓아진 장군총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시신을 넣어 둔 널방입니다. 이 널방은 높이 5.1mㆍ너비 5.4∼5.5m로 대단히 넓습니다. 또 두 개의 시신을 넣은 나무 관을 놓아 둘 돌로 된 관대가 50m 간격으로 놓여졌는데, 폭 1.3∼1.45mㆍ길이 3.2m로 상당히 큽니다. 장군총에 묻힌 임금의 키가 대단히 컸던 것은 아닐까요?
장군총에는 또 거대한 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널방 천장 돌은 폭 9.5 mㆍ너비 7.45 mㆍ두께 80 cm입니다. 50 톤이 넘는 이런 큰 돌을 12 m 높이까지 들어올려서 무덤을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일이지요.
그래서 두 무덤을 가까이서 한 번 보게 되면 ‘아, 정말 고구려가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무덤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소중한 유산이랍니다.
국내성 / 425년 동안 고구려 수도로 견고한 방어 시설 갖춰
고구려 2대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의 일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쓸 제물로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제사 물품을 관장하던 ‘설지’가 돼지를 뒤쫓아가서 국내 위나암에서 잡았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유리명왕에게 아뢰었습니다.
“국내 위나암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이 농사짓기 알맞고,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유리합니다. 대왕께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신다면 백성들이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피해도 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리명왕은 1년 뒤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습니다.
이 때 옮긴 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길림성 집안시 중앙에 남아 있는 성입니다. 위나암성은 이 국내성에서 2.5 km 북쪽에 있는 산성이지요.
국내성은 평지에 만들어진 정사각형 형태의 성으로 그 둘레가 2686m에 이릅니다.
1930년대만 해도 높이 9 m의 성벽이 잘 보존돼 있었어요.
하지만 관리 소홀로 국내성의 동쪽과 남쪽 성벽은 아예 사라져 버렸으며,
서벽은 집들에 둘러싸여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03년부터 중국이 국내성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지요. 이 때 서벽 주변의 300여 가구가 강제로 옮겨지고, 북벽과 서벽이 새로 발굴되면서 국내성은 조금이나마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축성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도성, 국내성]
국내성은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무려 425 년 동안이나 고구려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국내성 안에는 왕궁이 있었을 터인데 아직까지 확실한 왕궁 터로 밝혀진 곳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집안시 청사와 주변 운동장 터에서 돌담장 바닥돌과 건축물의 기단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왕궁 터도 찾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치· 적대 등 안보 장치 탁월
국내성은 2000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역사성과 함께,
견고한 방어력을 갖춘 고구려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소중한 유적입니다.
성문은 원래 성 안팎 사람의 출입을 위해 필요한 시설이지만,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 가장 공격당하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성문을 만들었음이 발굴 결과 드러났습니다.
최근의 발굴로 새롭게 드러난 북벽 서쪽 성문은 문 밖 양 옆에 사각형으로 튀어나온 적대를 만들어 ‘凹’ 자형이 되도록 지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선상의 성벽에 그냥 문을 만들어 놓게 되면
적군이 성문을 공격할 때 방어하는 쪽에서는 정면에서만 방어를 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적대를 양 옆에 만들어 놓게 되면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세 개의 면에서 막을 수가 있게 되고, 적이 성문을 공격하는 범위를 좁혀 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수원 화성의 남문과 북문에서도 볼 수 있어요.
한편, 서벽에서는 어긋문이라고 불리는 성문이 나왔습니다. 즉, 북쪽으로 이어진 성벽이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과 일직선으로 만나지 않고, 성문 앞에서 더 앞쪽으로 나가 뻗어 있습니다. 또 성문은 서쪽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며 열려져 있습니다.
앞쪽으로 뻗은 성벽은 동쪽으로 꺾어졌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져서 성문과 다시 만납니다. 이렇게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자연스럽게 적대가 돼 성문을 방어하게 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지요. 적군이 만약 성문을 공격하려고 해도 툭 튀어나온 부분을 돌아서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성문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성벽에는 또 곳곳에 ‘치’라고 부르는 사각형 형태로 툭 튀어나온 것을 세워 놓았습니다.
치가 설치되면 적을 세 방향에서 방어할 수 있게 됩니다.
환도산성 / 전쟁 때 왕 피신하던 천연의 요새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불과 2.5km 거리에 있는 성으로 둘레가 6951m에 이를 정도로 비교적 큽니다. 당시 환도산성은 전쟁 때 피신한 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 능선 따라 성벽 쌓아
고구려 수도의 성은 평지에 성이 있고, 그 뒤편 산에 산성이 있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첫 수도인 오녀산성은 평지성인 하고성자성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 번째 수도인 안학궁성 역시 대성산성과 짝을 이루고 있지요.
그러다가 평원왕(586년) 때 네 번째 수도가 된 장안성의 경우 궁성 외곽에 튼튼한 성벽을 쌓아 산성과 평지성의 구분이 비로소 없어졌지요.
환도산성은 산(652m)을 배경으로 주위 능선을 따라 성벽이 갖춰져 있습니다.
성 전체가 계곡을 둘러싼 형태로 되어 있지요. 따라서 성 안에 7 개의 문이 있지만, 실제 적이 공격할 수 있는 성문은 땅 높이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남문뿐입니다.
게다가 남문 앞에는 물이 흘러 성의 방어력을 높여 주는 ‘해자’(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 기능을 하고 있답니다.
만약 적군이 국내성까지 쳐들어오면, 고구려의 왕과 백성은 보다 튼튼한 이 성으로 옮겨 와서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랜 기간 대항하려면 성 안에서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 안에 물이 넉넉하고, 성벽ㆍ성문이 튼튼해야 하며, 사람이 거주할 공간도 넓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 환도산성입니다.
● 고구려 성 특징·왕궁 모습 잘 드러나
환도산성 안에는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따라 개천을 만들어 놓았으며,
우물과 연못도 있습니다. 말에게 먹일 물을 모아 두었다는 ‘음마지’도 있지요.
또 크고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배수구가 성벽 아래쪽에 4개나 갖춰져 있어
물이 한꺼번에 불어난다고 해도 끄떡없을 정도랍니다.
여기에다 적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남문은 옹성, 즉 항아리꼴로 되어 있습니다.
남문 자리에 뒤로 움푹 파지게 성벽을 쌓고 그 사이에 성문을 만들어 놓았지요.
이 성문을 공격할 때, 적들은 마치 독 안에 갇힌 것처럼 성문 앞에 모여 바글거리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방어하는 쪽의 조건이 유리합니다.

[환도산성의 지휘대인 점장대(료망대)]
한편, 성 안에는 고구려군을 지휘하기 위해 점장대(료망대)라 불리는 지휘소가 있습니다. 약간 높은 구릉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올린 인공적으로 만든 점장대에 오르면
적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지요. 이 점장대 뒤쪽에는 병사의 숙소 터로 보이는 주춧돌이 발견됐으며, 최근에는 이 곳 동북쪽에 위치한 계단식 밭에서 11개의 건물 터가 나왔습니다. 앞으로 발굴이 더 이뤄진다면 고구려 왕궁의 실체도 점차 밝혀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집안 산성하고분군
산성하고분군은 환도산성과 통구하 사이의 넓은 들판에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무덤만 1582기로 세계 최대의 무덤군이다.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인 집안 일대의 최대 고분군으로, 왕릉급 기단식 적석총을 비롯한 대형고분만 따져도 수백 기가 떼를 이루어 군집하고 있다. 무덤 떼는 위쪽의 좌우방향 능선을 연결하는 환도산성과 보이진 않지만 아래쪽의 좌우방향 하천인 통구하 사이에 놓인 하안대지에 열을 지어 있다. 지금은 수십 기만이 복원되었으며 그 가까이에는 복원되지 않은 수십 기의 자취가 보인다. 환도산성의 남문 밖 언덕에서 내려다본 산성하고분군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부록I>
백두여행사의 일정표 그리고
[백두산을 오르며 만나는 우리 역사] 이이화 대표집필 (달랑 한 권, 돌려서)
<부록II>
[Why]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
우리 민족의 진정한 主山은 백두산이 아닌 의무려산
| 2011/10/15 03:13

우리 민족의 주산은 고조선의 '의무려산'이다.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이름은 조선이다. '고조선(古朝鮮)'을 말한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땅을 포함한 드넓은 대국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왜 조선이라 하였을까? 국호를 조선이라고 이름 지은 이는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의 창업동지였다. 그가 쓴 '조선경국전'은 조선 최초의 헌법서이다. 이 책에 조선이란 국호가 정해진 내력이 소개된다. 당시 명나라 천자(주원장)는 후보국가명 '화령'과 '조선' 가운데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도 고조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조선의 후예가 바로 조선이다'라는 국사의식을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신화 속으로 사라질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 되살린 것은 정도전과 조선왕조의 덕분이었다. 이와 같이 고조선에서 정통성을 끌어낸 정도전의 영토관은 무엇이었을까?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중국을 제패하여 천자국이 된 변방민족으로 거란족(요), 여진족(금), 몽고족(원)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도전은 군사훈련을 엄격하게 제도화하여 전국적으로 실행케 하였다. 고조선의 옛 땅 요동을 수복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끝이 난다.
고조선이 실존하였음은 일찍이 신채호, 최남선, 정인지 선생 등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그 실체를 구체화한 것은 단국대 윤내현 교수이다. 기존에 고조선을 연구할 때 기초 사료로 활용하는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정된 것뿐이어서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윤 교수는 중국의 다양한 사료들 속에 언급된 고조선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밝혔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고조선은 광대한 제국이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도 만주와 한반도의 고대 옷차림과 장신구 문화를 통해서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인지를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두 학자가 밝힌 고조선 영역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미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고조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괜스레 외교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 아닌가?' 중요한 것은 지금도 북한과 만주 땅에 우리 민족이 거주하면서 고조선 이래 민족의 맥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고조선의 주산은 어디일까? 조선조 이래 많은 학자들이 요령(遼寧)성 북진(北鎭)시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고조선의 주산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의 의무려산은 흰 바위로 되어 있어 백악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명산이다.
'진산(鎭山) 의무려산 아래 고구려 주몽씨 졸본부여에 도읍하다'(허목).
'의무려산은 동이족과 중국족이 만나는 곳으로서 동북의 명산이다'(홍대용).
'북방 영토의 주산이 의무려산인데 그 내맥이 백두산이 되었다'(장지연).
의무려산이 고조선이 활동 무대로 삼은 중심축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주산은 백두산이 아니고 의무려산이다. 이제는 남의 땅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영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수천 년을 헤매었지만 마음의 성전을 쌓을 수 있었기에 돌로 된 성전을 쌓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마음의 성전'이란 다름 아닌 '민족의 주산'을 말한다.
<부록III>
무등의 꿈
홍익인간의 뜻
공존공영의 길
(사)코리아글로브 267차 화요대화마당
주제: "만주와 통일대한민국의 지정학"
때: 4345년(2012년) 7월3일(화) 저녁7~9시
곳: 광화문 신문로빌딩 3층
사회: 양승태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정치사상학회 초대회장)
말씀: 김명섭 연세대 통일연구소 소장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이우백 코리아글로브 이사 (바이칼연구소장)
조 민 코리아글로브 이사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史官: 김지호 코리아글로브 이사 (사진작가)
이주성 한반도평화국제연합 상임대표
지정학 이야기~ 늦었습니다.
만주-바다-우주,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먼저 준비된, 만주 이야기부터 들어갑니다.
유라시아 문명은 빙하기가 끝날 때부터 비롯합니다.
북유럽부터 흘러온 흐름과 인도양을 거쳐온 바닷길이
하나로 겹쳐지는 곳이 바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입니다.
그래서 코리아 역사공동체는 북방문명만의 후손도 아니요
남방문명만의 후손도 아닌, 대륙과 해양을 아우른
복합문명이며 그를 일컫은 이름이 곧 삼한이었습니다.
코리아 역사공동체는 조선 중기 이래 반만 년 동안 처음으로
가난한 때 (그래도 영정조 때는 지금 못쟎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치욕인 망국을 겪으면서 20세기 다시 태어났습니다.
분단과 6.25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62체제와 87체제를 이어
임진년에 이르러 평양정권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의 길로 접어듭니다.
반면 늘 여러 겨레가 뒤엉키며 동아시아 지정학의 주무대였던
만주는 삼전도와 청나라의 봉금을 거쳐 휴화산이 되었습니다.
그를 되살리려는 일제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지금은
유사 아래 한족이 최초로 실효 있는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경에서는 다시 봉금을 하고 있습니다.
6천km의 만리장성이 2만km로 둔갑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며
만주에 살았고 지금도 뿌리내리고 있는 여러 겨레를 억지로
중화대가정이란 이름의 새로운 한족으로 換父易祖하고 있습니다.
그 기세가 하도 등등하여 가까이 극동 러시아까지 겁을 먹습니다.
대한민국이 반역집단과 돈으로 평화를 바꾸는 퇴행을 겪은 뒤
정확히 한 해 지나 China는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엽니다.
大元이 아닌 예케몽골울루스의 再現이요 옵저버 나라들을 더하면
그를 넘어섭니다. 그 와중에 만주의 봉금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세찬 행보는 그리 슬기로와 보이지 않습니다.
一治一亂을 걱정하는 China의 공산당은 맹자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 급하여 韜光養晦의 반세기도 견디지 못합니까.
積德累仁하여 王天下하는, 5백년의 중화문명을 다시 세우려는
큰 꿈을 가진 이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코리아글로브는 학술단체가 아닙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적어도, 서울과 동경과 북경
(더하여 델리와 모스크바, 또 더하여 울란바타르와 하노이)
그리고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정치집단의
주춧돌을 놓고자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목에서
북경의 큰 그릇들과 선의의 경쟁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곧 만주-바다-우주의 지정학을 따지는 까닭입니다.
2012년 7월3일(화) 저녁7시,
코리아글로브 주최 화요대화마당, 통일연구원 광화문센터
통일한국과 만주의 지정학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연구소장)
I. 지정학(geopolitik; geopolitics)
I-1. 고전적 지정학: 지리적 요소와 권력관계의 상관성에 관해 연구
Johan Rudolph Kjellén(1864-1922), Friedrich Ratzel(1844-1904), Alfred Mahan(1840-1914), Halford Mackinder(1861-1947), Nicholas Spykman(1893–1943), 브레진스키, Z. 2000. 김명섭 옮김-해제.『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서울: 삼인.
I-2. 새로운 지정학/ 비판지정학: 공간, 시간, 인간의 삼각관계에 관해 연구
Lacoste 2006; Chauprade 2007. 새로운 지정학은 세계를 “조망(seeing)하는 방법"과 "개체적 주관성이 개입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다룬다(Flint 2006).
김명섭. 2008. “지정학." 한국정치학회 편.『정치학이해의 길잡이』. 서울: 법문사.
콜린 플린트. 2007. 김명섭 외 공역.『지정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길.
(1) 공간: 지리학과 정치학의 통섭. 정치학의 초점인 권력관계는 공간적으로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 동리, 국내적 지역, 국가, 국제적 지역, 그리고 문명권 등 다층적인 동심원적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지정학이 국제적 공간을 주로 다룸으로써 국제정치와 많은 연관성을 지녔다면, 국내적 공간 역시 점점 더 많은 지정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시와 농촌 간의 권력관계, 소도시와 대도시 간의 권력관계, 지역 간의 갈등과 협력 등이 국내적 공간에 관한 지정학적 연구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2) 시간: 역사학과 정치학의 통섭. 지정학은 역사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Lacoste 2006, 17).“역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저술한『역사』(Historiai)나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398?)가 저술한『펠로폰네소스전쟁사』 등은 이미 지정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권력과 달력. 역사와 정치.
(3) 인간: 인문학과의 통섭. 인간연구로서의 지정학은 ‘나’와 타인이라는 개인적 인간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는 철학이나 심리학, 혹은 신학과 통섭하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구한다는 면에서는 사회학과 통섭한다. 지정학은 영토와 같은 공간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했지만, 결국 그 영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특정한 공간의 인간들이 특정한 시간에 대한 기억을 얼마만큼 공유하는가 하는 문제.
역지사지의 지정학. 문명충돌의 지정학. 문화(언어, 종교)의 중요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지정학
천자의 지정학 vs. 천황의 지정학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광활한 우주에서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별은 무의미하다.”
II. 한국/한국인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이전에 존재했던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과의 관계.
양승태.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
허동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통치철학.” 『조선의 통치철학』 (서울: 푸른 역사, 2010).
김명섭. “대한제국의 역사적 종점에 관한 재고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국치 100년, ‘국권상실’의 정치외교사적 재조명』 (서울: 선인, 2012).
김명섭. 2001.『대서양문명사: 팽창, 침탈, 헤게모니』. 서울: 한길사.
김명섭, 김석원. 2008. “독립의 지정학 :대한제국(1897-1910) 시기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과 개신교,”『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제4호 (겨울): 59-86.
김숭배. 김명섭. 2012. “베르사유평화체제의 ‘보편적 표준’과 한국과 일본의 이몽(異夢): 민족자결원칙과 국제연맹 규약을 중심으로.”
Kim, Myongsob et al. “The Geopolitical Perceptions of Kim Ku and Syngman Rhee,”
Korean Social Sciences Review Vol. 1, No. 1 (2011).
김명섭, “분단의 구조화 과정과 한국전쟁,”『해방전후사의 인식』4 (서울: 한길사, 1989), 108-203.
조민.『한반도 평화체제와 통일전망』 (서울: 해남, 2007).
III. 만주
만주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인가?
만주는 인간에 대한 명칭인가? 공간에 대한 명칭인가?
만주라는 공간의 근대적 획정: 1689년 Nerchinsk조약 (나선정벌, 러청전쟁을 끝낸 평화조약).
만주, 티벳(西藏藏族自治區), 그리고 신장위그르(新疆维吾尔自治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1952년 9월 3일 자치구. 1955년 자치주.
현재 연길(延吉)·도문(圖們)·돈화(敦化)·화룡(和龍)·용정(龍井)·훈춘(琿春)의 6개시와 왕칭(汪淸)·안도(安圖) 2개 현으로 구성.
『滿洲源流考』 (遼寧民族出版社). 장진근 역주 (서울: 파워북, 2008).Mark C. Elliott.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IV. 한국의 분단선은 중화문명 vs. 서구문명의 대치선인가?
김명섭, “통일방안으로서의 고려(Corea)문명권,” 한흥수 외, <<한국정치동태론>> (서울: 오름, 1996).
Kim, Myongsob and Horace Jeffery Hodges. 2005. "On Huntington's Civilizational Paradigm: A Reappraisal." Issues & Studies. vol. 41, no. 2 (June).
Kim, Myongsob and Horace Jeffery Hodges. 2006. "Korea as Clashpoint of Civilizations." Korea Observer. vol.37 no.3 (2006): 513-45.
Myongsob Kim, Suzanne L. Parker and Jun Young Choi. 2006.“Increasing Distrust of United States in South Korea.”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Review (October): 427-45.
Hyung-Kook Kim, Myongsob Kim, and Amitav Acharya. 2008. Northeast Asia and the Two Koreas: Metastability, Security, and Community. Yonsei University Press.
Kim, Myongsob and Horace Jeffery Hodges. 2010. "Is the 21st Century an 'Asian Century'? Raising More Reservations than Hopes." Pacific Focus. vol. 25 no. 2.
김명섭. “외교정책과 문화.”『현대 외교정책론』. (서울: 명인문화사, 2012), 117-33.
Myongsob Kim. 2012.“Why No Westphalia-like Peace in Northeast Asia after the Imjin War (1592–1598)? -- A Heterodox Hypothesis”
[Map of Manchuria 1906]

코리아글로브 화요대화마당 (2012. 7. 3) 허동현 발표문
1. 대한제국 멸망의 국제적 배경 : 만주를 둘러싼 열강의 쟁투
일본이 한국 병합에 을사보호조약 이후 5년이나 걸린 원인
: 만주를 둘러싸고 일본이 벌인 러·미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
1905.9 :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 러시아가 갖고 있던 남만주 이권을 물려받음.
12 : ‘만주에 관한 청일 협약’ 남만주 이권에 대한 청의 동의.
이는 만주에 대한 사실상의 문호 폐쇄로 일본이 열강에게
거듭 확약해 온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 보장 약속의 전면 위배.
1906.6 : 만주 시장의 경제적 대동맥인 동청 철도 남만 지선 장악
: 니콜라이 2세가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 대표를 초청
1907.6 : 24일 러·일 이미 만주에서 철도를 연결하기로 타결
29일 헤이그 밀사 회의장 입장 거부당함
1907.7 : 17일 고종 폐위
: 24일 정미7조약 한국 내정권 차지했으나, 병합 강행 못함.
: 30일 러일 협약 조인. 러시아의 대일 적의는 잠재움.
미국의 배일 감정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
1907.8 : 18일 군대해산
1908.11 : 30일 루트-다카히라 협약. 미국은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음.
루즈벨트 대통령의 시종 일관된 입장. 일본의 사활적 이익은
만주와 한국에 있지만, 만주에는 일본과 전쟁을 무릅써야 할
미국의 권익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1909.3 : 4일 태프트 정부가 들어선 후 일본에게 만주에 대한
투자상의 문호 개방까지 강요함. 병합의 걸림돌.
7 : 각의(閣議)에서 병합 결정
9 : 4일 일본이 청에 ‘간도에 관한 협약’과 ‘만주5안건에 관한 협약’을
강압함으로써 만주 독점 야욕 드러냄
11 : 18일 러시아 황제 ‘이제 일본과 가장 긴밀한 협화의 길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함.
: 만주제철도 중립화안(Knox' neutralization proposal) 제기함.
(미국 국무장관 녹스) 러·일 양국에 의한 만주 분할을 차단하려는 포석.
철도의 중립화를 통해 만주에서 일본의 손을 묶겠다는 것임.
1910.7 : 4일 제2회 러일 협약. 러일은 대독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영불의 측면 지원을 받아 협동의 강도를 강화하며
이들 협상국과의 유대 속에서 미국의 만주침투를 저지함.
일본은 이 협약으로 만주에 대한 미국의 대일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협상국 러시아에게도 한국 병합에 대한 양해를 받아냄.
8 : 29일 한일합방조약 체결
2. 한국 분단의 국제적 원인 : 만주내전
1945. 7 : 포츠담회담(7.16-8.2) 한반도 분단문제, 즉 38선은 언급되지 않음.
8 : 9일 소련 대일선전포고
: 14일 트루먼(Truman) 대통령 한국에 38선 설치 제의.
: 14일 중소조약 체결. 스탈린은 국민당정부 유일정부로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가 1905년 이전에 갖고 있던 특권을 인정받음.
: 15일 스탈린 미국의 38선 분할 점령 제의 수락.
대신 홋카이도 북반부를 달라는 것이 그의 입장
: 20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국민당군과의 전쟁 중지 지령내림.
9 : 15일 런던 외상회의(9. 12-10. 2)결렬. 미영 소련의 트리폴리타니아
(Tripolitania) 조차 요구 거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침.
미소 간의 관계 급격 냉각.
: 20일 북한에 정부수립 지시
10 : 8일 스탈린 중국 정책 180도 전환.
30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라고 중국 공산당에 명령함.
: 25일 스탈린, 미대사 해리맨에게 “미국이 지중해와 일본에서 소련을
제거하려 하므로 독자적으로 고립정책을 택하기로 했다”고 토로함.
12 :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6. 2 :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수립.
3 : 소련군 만주철수 선언과 함께 팔로군에게 점령지를 넘겨줌.
미국의 영향력이 만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
4 : 사평가(四平街)전투와 장춘(長春)전투에서 팔로군이 승리함.
5 : 장개석 정부는 미군 지원하에 육성한 신 1군과 신 6군을 파병하였고,
우세한 전투력을 보유한 국민당군은 팔로군을 격파함,
스탈린은 팔로군 부대들을 북한지역으로 퇴각토록 함.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것임.
북한은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이 되었는데
국민당군은 국경을 넘어 추적할 수가 없었음.
6.25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던 지역이었던 것처럼,
그때 북한은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성소(聖所, sanctuary)였음.
1948년까지 북한은 팔로군의 군수물자와
병사들의 수송통로이자 보급창이 됨.
1947 : 팔로군 반격에 나섬. 국민당군의 패배.
팔로군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으나 한국분단은 마침표를 찍고 맘.
북한이 스탈린과 미국의 승부를 결정하는 과정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
전략 요충지인 북한을 남한과 통일시킨다는 것은
스탈린이 만주, 나아가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함.
북한이 팔로군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남과 북이 합해서 통일을 이룬다는 소원은 일장춘몽에 다름없음.
만주와 통일 대한민국의 지정학
바이칼 경영철학 아카데미 대표(철학박사) 이 우백
1.유라시아와 만주
정치와 지역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이론이 지정학(geopolitics)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서 내아시아(inner Asia)는 정주문화와 유목문화라는 두 대립적인 문화가 장기간에 걸쳐 상호작용해 온 지역이다. 내아시아와 중국 사이의 생태학적 문화영역은 크게 4가지로, 즉 투르키스탄, 몽골, 만주, 북중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4영역 가운데 만주가 차지하는지정학적 의미는 어떤 것이 있는가? 중세 ‧ 근세의 동아시아 역사를 통해서 만주의 지정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다가올 통일 대한민국을 위해서 만주가 차지하는 위상을 간략히 짚어 보고자 한다.
2. 몽골제국과 만주
중앙 아시아의 위구르제국이 840년에 망한 뒤, 약 400여년이 지난 1206년에 칭기스칸(1162~1227)이 몽골족을 통일하여 대몽골 국가를 세운다. 칭기스칸 이전에 만주 지역에는 요(遼)나라(907~1125)와 금(金)나라(1115~1234)가 차례로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 고원의 몽골족은 금나라가 구사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의해서 끊임없는 종족 간 분열과 갈등 속에 있었다. 이 금의 교묘한 이이제이 정책을 역이용하여 통일 몽골 국가를 세운 사람이 칭기스칸이다. 그러나 1206년 몽골 통일 후 몽골이 만주 지역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데는 약 24년(1211~1234)이라는 긴 기간이 소요된다. 칭기스칸 사후 아들 오고데이 대에 이르러서 만주 정복이 이루어진다.
금나라는 유목문화와 정주문화의 이중구조를 갖춘 국가이기에 몽골이 이 벽을 넘는 데는 그만큼 큰 어려움이 따랐다. 금나라와 조선의 정복 후, 즉 만주지역 점령 후 몽골의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은 어떻게 보면 금 정복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려움의 순서로 따진다면, 몽골 족종 간 통일이 가장 어려웠고, 다음은 만주 정복, 그 다음은 중국 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는 대원(大元)제국 성립의 발판(교두보) 역할을 한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한족화된 거란 · 여진인과 이민족 상인들의 정보제공을 최대한 활용한다.
3. 청제국과 만주
대몽골 국가 성립 후 약 400여년이 지난 1616년에 누르하치(1559~1626)가 만주에서 중국 명(明)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을 역으로 이용하여 분열된 종족들을 하나로 묶어 청(淸)나라를 세운다. 종족을 통일한 후 청나라는 몽골과 조선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 대에 이르러 중국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하여 1637년에 북경을 함락시킨다. 여기서도 만주는 대청(大淸)제국(1616~1912) 성립의 발판 역할을 한다. 만주족이 대청제국을 세우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과정은 역시 종족 통일과정이었다.
이후 몽골과 조선의 복속 과정을 거치면서 순차적으로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은 만주족이 생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 과정이었다. 당시 만주족은 명나라와 교역을 통하여 생존하고 있었다. 만주족과 무역 역조 현상이 이어지자 명나라는 만주족과의 교역을 단절시켜버린다. 중국과 교역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만주족의 입장에서 명나라 진출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교역 상인들이 가진 중국 정보 해독능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통일 대한민국과 만주
1945년 이후 우리나라는 38선에 의해 그어진 남북 분단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동안 세계는 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나 디지털 무한 경제 전쟁 ‧ 정보 전쟁 시대에 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이데올로기 시대의 유산인 38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누르하치가 1616년에 만주족을 통일한지 어언 400여년이 지났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의 이 38선을 걷어내 버릴 방안은 없는가? 몽골제국과 청제국의 성립과 연관하여 만주가 가졌던 맥락을 통일 대한민국과 관련시켜 보는 통일을 위한 시나리오는 없는가.
요 ‧ 금 ‧ 몽골 ‧ 청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치 ‧ 생태학적 이유로 만주 지역은 중국의 토착 왕조가 내분에 직면하여 붕괴할 때 중국 땅에 이민족이 정복왕조를 세우기 위한 ‘배양지(breeding ground)’ 역할을 해 왔다(Thomas Barfield). 이는 만주 지역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유라시아와 동아시아 패권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주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거대 제국이 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심장지대(heartland)’일 수 있다(Halford Mackinder). 만주 지역이 가지는 이 같은 역사적인 의미를 우리의 남북통일이라는 과제와 연관시켜 한 번 생각해 보자.
첫째, 국가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통일 의지를 지닌 집단(지도자)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 집단이 통일 방해 세력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해야 한다. 몽골과 청의 경우 이이제이 정책에 의해 흩어진 각 지역의 종족장 ‧ 부족장들이 국가 통합과정에서 반대 세력으로 등장한다. 우리의 경우도 국내외의 통일 반대 세력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해야 한다. 아마 남북의 반대세력은 각각 현 체제의 유지를 통해 국가의 장기적인 이익 보다 자신들의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일 것이다. 금의 ‘맹안모극제’, 몽골의 ‘종족복합군’과 청의 ‘팔기군’에서 그랬듯이, 기득권 세력을 정리하는 데는 위로부터 아래로(top down) 나아가는 소프트웨어적인 개혁(신조합)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 주변의 강대국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친미 ‧ 반미, 친중 ‧ 반중이 아니라, 언제나 용중(用中) ‧ 용미(用美)라는 태도를 깊이 견지해야 한다. 주변국들은 우리의 통일에 대해서 항상 자기 이익에 따라 이이제이의 태도를 견지한다. 몽골과 청은 주변국들과 결혼동맹 등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안정시켜 왔다. 오늘날 말로 하면 주변국들과 긴밀한 경제적 협력(사업 파트너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통일을 위해 일차적으로 우리는 몽골과 국가 연합을, 그 밖의 오랑캐들(남만 ‧ 북적 ‧ 서융)과는 연맹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북한을 연결해야 한다. 동북 지역 중국인들과는 용중(用中)이라는 입장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면서 이 지역에 대해서 추후 실효적인 지배가 가능해지도록 적극 교류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통일 방안을 위하여 남과 북을 공히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여야 한다. 남북의 대결 구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지간도 풍랑을 만나면 함께 대처해 나가는 ‘오월동주(吳越同舟)’처럼 남북 양쪽이 함께 추구하는 비전(대전략)이 필요하다. 과거 몽골과 청이 국경의 팽창을 추구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국운(國運)이 국경을 넘어서 가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어적인 차원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중국의 팽창정책에 대한 우리의 대응 자세를 새로이 가다듬어야 통일에 대한 적극적인 비전을 던질 수 있다.
넷째, 현재 우리 사회는 실업 ‧ 고령화 ‧ 다문화 가정 등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일대의 전기가 필요하다. 과거 몽고가 중국으로 진출할 당시 1억 중국인에 비해 몽골인은 100만 정도였으며, 청의 경우는 70만 정도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 진출은 이루어졌다. 약 400년 간격으로 우리에게 국운이 성할 기회가 왔다. 우리에겐 조선족의 정보해독 능력이 있다.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를 대망하자!
KG 2012.07.03 조 민)
한반도 통일의 지정학
1. 지정학의 이론적 배경
*국가전략의 공간적 담론
1-1. 20 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 세계대국의 세계패권전략
- heartland 및 해양 제패론
1-2. 냉전체제 해체 후 지정학
- ‘지정학 + 문명론’적 접근
ㅇ S.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 (Foreign Affairs, summer 1993)
ㅇ Zbigniew Brzezinski,
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Its Geopolitics Imperative, 1988)
- 미국 패권에 대한 유라시아의 도전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Clobal of Global Power, 2012
- 중·미 관계 미래에 대한 미국의 세계전략
2. 한국: 통일 지향적 지정학
2-1. 통일 우호적인 국제 및 주변 환경 조성
o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중견강국(Advanced Middle Power)’의 국가상 정립
<전 지구적 차원의 대외전략(Semi-Global Strategy) 수립>
- 한국은 중견국가 위상과 더불어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전 지구적 차원의 대외전략 수립이 필요
- 아세안(ASEAN), 러시아, 인도, 유럽연합(EU), 중앙아시아, 중동 국가와의
전략적 협력관계 구축을 통해 미·중 관계의 대(對) 한반도 규정력 극복
2-2. 한반도 통일과 중국
ㅇ미래 지향적 한·중 관계 구축의 방향
- 대중 포위? 한반도 구심력 강화?
<동양, 동아시아, 동북아>
동양, 동아시아, 동북아 등의 지역 범주에 대한 뚜렷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① ‘동양’은 서양에 대한 대응이다. 동양은 대개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 서양에 대해 일본이 스스로 비서양 지역 또는 비서양 문명의 대표로서 자임하면서 사용되었다. 동양·서양은 이분법적 구분으로 서양 주도의 근대적 세계와 서양의 우월한 물질문명에 대해 정신문명적 가치를 강조하는 경우나 유럽인과 다른 인종적 특성을 지닌 아시아 전 지역을 아우르는 개념을 활용되었다.
② ‘동아시아’는 먼저 일본에서 일본, 한국, 중국 3국을 아우르는 범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동아시아는 문화적 지역 개념으로 한자 문화권, 유교 문화권으로 공통성을 찾기도 한다(고병익, “동아시아 나라들의 상호 소원(疎遠)과 통합,”『창작과 비평』1993년 봄호). 그러나 동아시아 범주는 일찍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서 보듯이 일제에 의해 오염된 측면이 있다. 그와 달리 사방에 많은 국가들과 인접한 중국의 경우, 동아시아 지역 범주에 특별한 가치 부여를 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동남아, 서남아, 중앙아시아 등 아시아 지역 전역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중국은 한국과 일본에서와 같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특별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동아시아를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범주 속에서 접근할 경우, 그리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중국학자 쑨거(孫歌)의 견해처럼 공동의 미래 못지않게 20세기 한·중·일 3국의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의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이 바람직하다(“동아시아 시각의 인식론적 의의,”『아세아연구』제52권 1호(2009년).
③ ‘동북아’는 흥미롭게도 한국이 창안한 지역 개념으로 특히, 노무현 정부 당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동북아 개념은 군사안보적 지역 개념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한반도가 동북아 지역의 중심이 되면서 북한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는 지역 개념이다. 앞의 동아시아가 역사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북한의 존재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동북아는 북한 문제로 야기된 국제정치적 영역이라고 하겠다. 한편 동북아는 미국의 군사안보 차원의 지역 범주인 'North-east'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 당시 ‘동북아 평화와 번영’ 등의 슬로건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한국의 대북 및 대외전략의 ‘키 워드’가 되면서 군사안보 차원의 지역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반도의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동북아 주변 4국을 포함한 6자회담 틀은 동북아 지역 범주를 보다 명확히 하는데 일조했다(조민, 2011).
3. 통일지정학: 국가 중심적 접근을 넘어
3-1. 지정학의 근대적 국가 중심적 사고 극복
ㅇ지정학, 지경학(Goe-economic), 지문학적(Geo-cultural) 접근 전략 필요
- 정치적, 국가 중심적(주권), 군사패권적 접근 지양
* 하토야마(鳩山由紀夫), ‘나의 정치철학’(Voice, 2009.9)
3-2. 문화 영토론 / 역사 회복
ㅇ전 지구적 한민족공동체 형성
- 세계 속의 ‘한’ 문화 네트워크 구축 *유대인 공동체
ㅇ21세기 세계 문명의 허브
[ 끝 ]
오는 7월11일 두 번째 백두산 기행을 떠납니다.
이번에는 비행기 타고 나흘(목금토일)입니다.
지난해가 서간도-압록강-백두산(서파)이었다면
올해는 동간도-두만강-백두산(북파)의 길입니다.
회비는 1백만원, 진월 고문과 조 민 이사장을 비롯한
여덟 분이 신청하셨습니다. 딱 열 분 더 모시겠습니다.
가실 분은 5월 말까지 꼭 신청하시길 바랍니다.
여권 영문 이름과 함께 계약금 20만원 보내시면 됩니다.
아래 글을 읽으시고 (아직 못 보셨다면) 기행문도 보시길.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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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의 뜻
공존공영의 길
(사)코리아글로브
< 임진년 코리아글로브 남북 공동산행 >
씨앗1) 탈북동포를 비롯한 팬코리안 산행
씨앗2) 달마다 둘째 토요일은 산에서 산다
씨앗3) 서울의 북동에서 남서로 훑는다
씨앗4) 때마다 주제와 길잡이를 세운다
1.14- 불암산 시산제, 집사자 박기성, 불수사도북의 처음
2.11- 아차산, 강철환 앞장, 고구려의 숨결
3.10- 삼성산, 조영진 좌장, 어른 구순잔치
4.14- 검단산, 도명학 좌장, 부여의 숨결
5.12- 사패산, 조 민 좌장, 회룡의 터
6. 9- 북한산, 김종운 좌장, 봉황각 백주년
<7.11~16>- 백두산, 진월 좌장, “동북3성/ 만주/ 서간도&북간도”
8.11- 태백산, 광복맞이 하늘굿
9. 8- 수락산
10.13- 도봉산
11.10- 마니산, 음력 개천절 하늘굿
12. 8- 관악산
* 길잡이와 주제가 잡히지 않은, 8월 뒤는 백두산기행에서 채워 나가겠습니다.
코리아글로브 남북 공동산행 1~6월 참가자 61인 90연인원
매회평균 15인 <주요참가자>
조 민 이사 (통일연구원) / 진월 초대대표 (세계종교연합 이사)
림 일 탈북작가 / 이주도 한반도평화국제연합 대표 / 김연화 관광 안내인
김석규 이사 / 김지호 이사 (사진작가) / 박미화 집행위원 (교사) / 김한울 어린이
안경환 와인대사 / 박소희 사회복지사 / 이병성 미래교육학부모회
전형권 춤꾼 / 함영태 M&A투자협회 이사 / 김한백 여고생
1. 단독기획
주관- 백두여행사 / 14인- 22인승버스 / 안내자- 재중동포
이틀 오후- 오녀산성 등반&조망 / 이틀 저녁- 비나리&하늘굿
나흘 오후- 집안동포마을방문
2. 준비물 꼭!
신발- 운동화&샌들(버스20시간) / 배- 수건&세면도구
백두산- 바람막이옷&우비 / 아이들- 놀이기구&책
3. 준비물 나름
비상약- 멀미약&모기향+약 등등 / 음식- 고추장, 마른밑반찬, 컵라면, 팩소주 등등
또- 우산, 휴대용 화장지, 손톱깎기 등등
4. 참고
환전- 단골은행 미리, 어른 5백 위안 적당(10만원)
면세점- 두 곳(출국장&배) 많기는 출국장, 술담배는 배가 낫다
쇼핑- 두세 번, 현지&이북 / 전화로밍- 보통 자동, 요금 비쌈
데이터로밍- 미리 중단, 요금폭탄, 쓰려면 신청(무제한 하루9천원)
호텔인터넷- 기대마시길 / 현지옵션- 오는 날, 압록강유람선 15$, 발마사지 20$
5. 밥
배 저녁아침- 식판self, 분식점수준 / 이틀점심- 버스 안 도시락
호텔아침- 빵&쌀죽 위주 / 점심저녁- 서울입맛, 현지식 반찬7-8
반주- 1병당 보통 1만원 넘음
6. 백두산 천지
천지- 공안과 부딪힐 까닭 없음
참가자들 말씀&묵념&사진 대체 / 전야제- 객실, 비나리&하늘굿 올림
7. 참가자 14인의 몫
좌장- 진월대표 / 앞장- 전우현교수, 이강일선생
총괄- 김석규 이사 / 기록- 김지호 이사
딸관리- 박효정 위원, 보조 김한백
아들관리- 김영욱 사장, 보조 이승협&박재범
8. 사흘호텔 잠자리배정, 순서대로!
1) 진월 2) 이강일-이하정 3) 전우현-김석규 4) 김지호-김영욱
5) 김한울-강준구-박재범 6) 김한백-김민정 7) 박효정-이승협
9. 반드시!
여권- 목숨걸고 지킨다 / 배 타고 이틀- 아이들 안전위험, 도난분실사고조심
10. 만남
때- 임진년 7월11일 3시 정각
곳- 인천연안부두, 제1국제여객터미널 1층 수협 ☎0328879120
가기- 서울역 기준, 1시 전 출발, 동인천역 내려 맥도날드 앞 타기
버스(꼭24번,10분마다,40분) / 택시(6-7천원,15-20분)


“동북3성/ 만주/ 서간도&북간도”
백두산 가족기행
자료집 본문
<1> 서간도 / 출처: 동아일보 2004. 5. 20
(7) 서간도를 재발견하자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단둥(丹東)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볜먼(邊門) 마을의 ‘이찬산(一面山)’역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오리먼(高麗門)’역으로 불렸다.

“1962년인가, 류사오치(劉少奇·당시 중국 국가주석)가 평양에서 (조중비밀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열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역명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바꾸라고 했다디요.”
볜먼의 조선족들 사이에는 1961년 중국 방문에 나선 김일성 북한 주석이 이곳을 지나다 역 이름을 보고 조선 땅이라고 할까 봐 중국 정부가 서둘러 개명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 무렵 이찬산역 인근의 ‘가오리먼차오(高麗門橋)’역은 아예 폐쇄됐다. 볜먼 남쪽의 ‘조선촌’도 ‘탕허(湯河)’로 이름이 바뀌었다.》
● 볜먼은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柵門)이 바로 볜먼이다.
책문이란 조선인들이 청(淸)나라에 들어갈 때 거쳐야 하는 국경검문소.
‘고려문’으로 불리기도 한 이 지역엔 일찍이 조선인마을이 형성됐다.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됐던 조선인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책문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다. 청 이전에 명(明)은 랴오둥(遼東)지방 동북쪽 변경에 흙 돌 나무로 울타리를 쳤는데 이를 변장(邊墻)이라고 했다. 이어 청은 1660년대 허물어진 변장 근처에 버드나무를 잇대어 심고 그 바깥에 참호를 판 유조변(柳條邊)을 구축한 뒤 사이사이 사람과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을 20여개 만들었다. 그것이 책문이었다.
“명대에 변장의 동북쪽 지역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명과 형식상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자치를 했다.
변장은 명의 국경선 역할을 한 것이다.”(남의현 강원대 강사)
● ‘압록-두만강이 국경’ 문건 거의 없어
청은 왕조의 발상지인 변장의 동북쪽지역에 대한 관심이 명보다 컸다.
하지만 이 지역에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중국학자들은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유조변이 ‘만주를 보호·관리하기 위한 문화적 구분선’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은 대체로 유조변이 사실상의 국경선이었다고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책문이 청의 국경이 된다.
한국 학자들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과의 국경으로 표현한 문건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 때까지 청의 공식문건에 나타난 가장 바깥쪽 변경은 볜먼 북쪽의 펑청(鳳城)이라는 것.

[‘중국지’(1735년)에 소개된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 레지의 지도(왼쪽).
지도상에 굵은 선으로 표현된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레지선’이 있다.]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에 평안도의 중국어 표기인 ‘PING NGAN’(네모안)이라는 지역명이 적혀 있어 이 지역 전역 혹은 일부에 조선의 지배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19세기 제작된 김대건 신부의 ‘조선지도(가운데)’와 일본인이 제작한 ‘동판조선국 전도(오른쪽)’에도 압록강 북쪽 지역 대부분이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레지선’과 ‘PING-NGAN’
청대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는 “조선의 변경이 선양(瀋陽)∼지린에 접하였다”고 적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펑황청(鳳凰城·지금의 펑청) 부근을 조선과의 경계로 기록했다.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변경 지도를 작성한 프랑스 선교사 레지(R´egis) 또한 “펑황청 동쪽에 조선의 서쪽 국경이 있다”고 밝혔다. 레지의 실측도에는 조선의 북서쪽 국경선인 이른바 ‘레지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다. 펑청 부근을 지나는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엔 평안(平安)도의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PING NGAN’이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손질해 청이 내놓은 황여전람도(1718)엔 레지선과 이 문자가 없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청이 불리한 내용을 지운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1882)나 김대건(1822∼1846) 신부의
‘조선지도’에도 압록강 대안 지역 대부분은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고려 때도 집단이주가 있었다
중국 학계는 간도에 조선인들이 거주한 것은 봉금령이 내려진 1660년대 이후라고 주장한다. 청나라 영토에 불법적으로 넘어왔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고려 때에도 이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8년 중국 옌볜(延邊)에서 발간된 ‘중국조선족력사상식’도
“명 초기에 요동 일대에는 수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명 초기 요동지역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다”고 인정한다.
특히 명말청초에 건너간 이주민의 자손들은 여전히 “나는 조선인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현의 박가보(朴家堡)촌과 허베이(河北)성 칭룽(靑龍)현 박장자(朴杖子)촌은 당시에 형성된 대표적인 조선족 마을.
이곳엔 아직도 동성동본 금혼과 같은 우리의 풍습이 남아있다.
● 조선인 마을 조선관리가 관할
1660년대부터 200여 년간 이어진 청의 봉금 시기에 조선인들의 월강(越江) 이주는
두만강 대안지역 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지역으로도 대거 이뤄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압록강 대안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옌볜지역보다 많았다. 퉁화(通化) 환런(桓仁) 콴뎬(寬甸) 등에 이주한 조선인은 1897년 당시 3만7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은 1903년 양변관리사를 파견해 서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을 묶어 향약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친 것이다. 조선족 학계에서는 ‘동북 농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벼농사가 시작된 곳도 북간도가 아니라 서간도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2000년 옌볜)
“1845년 뗏목을 몰던 평안도 초산 일대 80여 가구의 농민들이 훈(渾)강 유역에 논을 처음 만들었다. 1875년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환런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었다.
130여년 전 훈강 유역에서 시작된 논농사가 간도 전역으로 신속히 퍼졌다.”


[179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 두만강과 토문강원을 뚜렷이 나눠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님을 강조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 ‘東爲土門’에 가려진 서간도문제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문제는 국내 학계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돼 왔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 해석 문제에 집착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장과 유조변에 맞닿아 있는 서간도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분쟁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정계비문 해석 문제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명과 청이 실제로 자국의 영토를 어디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느냐는 시각에서 간도문제를 바라보면 서간도는 동간도 혹은 북간도만큼이나 중요한 지역이다.”(박선영 교수)

[조선 영조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 뒤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지도에는 고려시대
윤관이 9성을 개척한 후 경계비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선춘령이 표시돼 있다.
옛 선조들이 개척했던 영토 회복을 주장하며 북방으로 뻗어나가던
조선 영·정조대의 영토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오녀산성 연못. 천지라고 불리는 연못으로, 한 해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
오녀산(해발 800m) 정상 부분은 둘레가 2 km에 이르는 넓은 평지입니다.
더욱이 산 정상에는 중국 사람들이 ‘천지’로 부르는 연못이 있습니다.
넓은 평지에 물까지 나오니 사람이 지낼 만한 공간이 충분히 되는 셈이지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이곳에 큰 건물들과 창고ㆍ군인 숙소 등을 지었습니다.
여러 기록들을 통해 살펴보면 고구려는 건국 직후 졸본천 근처에 임시로 궁궐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운 지 4 년 만에 골령(또는 성산) 위에 성곽과 궁궐을 짓고 왕이 살았습니다. 서기 3년 유리명왕이 수도를 현재 집안시에 있는 국내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약 40년 정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 바로 오녀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사람이 겨우 오를 수 있는 서문 주변에만 성벽을 만들고, 정상 주변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습니다.

1998년 고구려 유적 답사 때에는 오녀산성을 개방하지 않았던 중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2004년 7월 발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당시 발굴 결과 고구려 시대에 만든 항아리와 화살촉ㆍ마구ㆍ수레 부속품 등의 유물은 물론 고구려의 특징인 온돌 유적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산에 오르고 내릴 수 있는 계단을 정비하고, 성벽의 보수도 해 놓았습니다. 또 정상에서 동쪽 성벽을 보러 가는 길도 계단을 이용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지요.
필자는 오녀산성 관람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끼 낀 동쪽 성벽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여 년 세월을 버텨 온 성벽은 그대로 하나의 멋진 작품이지요.
또 멀리서 오녀산 전체를 바라보는 것도 잊지 못할 장면입니다.
그 당시 산 아래 살던 산 위에 사는 왕을 우러러 보며 ‘우리 고구려 태왕님은 천신의 아들이야.’라는 생각을 정말로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수도가 국내성으로 옮겨 갔지만, 오녀산성은 그 후에도 고구려의 종교적인 신성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414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큰 비석을 무덤 곁에 세웠습니다. 높이 6.39mㆍ너비 1.3∼2m의 사각 기둥 모양의 돌에 15cm 크기의
글자(한자) 1775 자를 촘촘하게 새겨 놓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석이며, 여기 새겨진 내용이 1600년 전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라 무엇보다 가치가 큽니다. 지금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지만, 광개토 대왕릉비는 오랫동안 잊혀져있던 그야말로 버려진 비석이었어요. 비석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글자가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지요. 이렇게 점점 잊혀져 가던 광개토 대왕릉비의 재발견은 1880년대에 시작됩니다. 특히 1883년 일본 첩보 장교 사까와 중위가 비문의 내용을 일본에 소개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답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할 명분을 찾고 있었어요. 아득한 지난날, 일본 천황이 가야의 임나 지역에 ‘일본부’를 두고 고대 한국을 지배했다는 ‘일본임나부설’이라는 거짓으로 꾸민 역사를 만드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일본인들은 비문의 내용을 조작하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릉비문은 왜국을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며, 고구려인이 돌아가신 광개토 대왕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광개토 대왕이 탄생하기까지의 간략한 고구려 역사와 생전의 업적, 그리고 그의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법 규정이 적혀져 있습니다.
능비는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내용도 풍부하다. 고대 금석문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장대한 서사시를 노래하듯이 써내려 갔는데, 내용은 대략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고구려 왕실의 유래와 신성성을 노래한 부분이다.
첫머리에는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천제(天帝)와 하백(河伯)의 신성한 권능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세운 건국설화로 장식했다. 그리고 추모왕의 권능이 유류왕(제2대 유리명왕)과 대주류왕(제3대 대무신왕)을 거쳐 광개토왕까지 면면히 이어졌음을 기술하고, 광개토왕의 공적으로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이 풍요롭게 살게 되었음을 노래했다.
둘째 단락에는 광개토왕의 공적을 연대순에 따라 기술했다. 395년 서요하 일대의 거란(稗麗), 396년 남쪽의 백제, 398년 동만주의 숙신, 400년 신라를 침공한 왜, 404년 대방지역을 침공한 왜, 407년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지역, 410년 동부여 등을 공략했다고 한다. 광개토왕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 곳곳을 차례로 공략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셋째 단락에는 왕릉을 돌볼 묘지기를 어디에서 징발했는지 기록했다. 대왕의 공적을 만세토록 전하기 위해서는 왕릉과 능비의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이에 묘지기 명부를 일일이 새겨 대왕의 공적을 만세토록 전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했다.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광개토 대왕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은혜와 혜택은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다.
옳지 못한 자들을 없애 치우고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하게 무르익었다.”
광개토 대왕은 흔히 우리 역사 최고의 정복 군주, 넓은 영토를 넓힌 대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식 이름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는 영토를 넓힌 임금(광개토경)이라는 뜻과 함께 백성을 평안하게 한 임금(평안호)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 사람들의 평가지요.
비문에는 또 광개토 대왕이 생전에 한 말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내가 죽은 후 만 년의 이후라도 무덤을 지키는 자는 다만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붙잡아 온 한ㆍ예 사람을 데려다가 청소를 시키도록 준비하게 하라.”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무덤이 영원히 지켜지기를 원했습니다.
장수왕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던 것입니다.
장수왕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래 광개토 대왕릉비의 진면목인 셈입니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의 소망은 현재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덤은 도굴되었고, 훼손되었으며 한동안 잊혀졌습니다.
그의 소망이 이뤄지는 길은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
또 바르게 그를 평가해 줄 수 있는 후손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요?


동방의 피라미드 태왕릉·장군총
돌 쌓아 만든 무덤의 아름다움에 감탄 절로
길이 60 m 넘는 제단 갖춘 태왕릉
광개토태왕이 돌아가신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분을 못 잊어 했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무덤과 비석을 세웠으며, 무덤의 동쪽에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해마다 대왕이 돌아가신 날과 기념일에 제단에서 성대하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제단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상이 놓여지고, 그 위에는 여러 제기에 음식물이 올려졌습니다. 대왕의 후손인 왕실 가족과 여러 대신이 모두 모여 절을 했습니다. 이 행사를 위해 수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정성껏 무덤 주변을 청소하고, 경비를 담당하고, 제사 음식을 준비했을 테지요. 대왕은 천신의 후예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결코 작은 소홀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태왕릉과 제단. 제단 길이가 60m가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2003년 중국은 고구려 왕릉들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여러 왕릉 주변의 민가를 옮기고 발굴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12기의 왕릉 가운데 9기에서 제단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제단은 대체로 무덤의 동쪽에서 많이 발견됐는데, 시신을 넣어 두는 널방 입구가 남서쪽인 경우가 많아 무덤 뒤쪽에 제단이 있는 셈이 됩니다. 특히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태왕릉 동쪽 50∼68m에 있는 제단은 1.5m 간격으로 2개의 제단이 이어져 있습니다. 또 길이만 60m가 넘어 제단이 매우 컸음을 알게 해 줍니다. 제단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금박 입힌 상다리 4 개도 발굴됐는데, 현재 집안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요.
제단에서 다시 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는 태왕릉비가 우뚝 서있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비문을 낭독한 후에 제단에 가서 제의를 올리고,
무덤을 돌아보며 돌아가신 임금님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태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는 거대한 무덤이며, 높이도 14m가 넘습니다. 현재는 원래 모습에서 꽤 허물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마치 산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 산(山)에 묻힌 사람(人)은 곧 신선(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장군총. 널방 규모가 너비 5.5 m로 상당히 넓다]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
한편, 태왕릉과 함께 집안시를 대표하는 유적지는 장군총입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돌을 쌓아 만든 무덤들 가운데 가장 그 형태가 아름다워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립니다. 한 변의 길이 31mㆍ높이 13m 정도로 태왕릉ㆍ천추총 등에 비해 규모가 작습니다. 그렇지만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1000여 개의 돌이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모습을 보면 절로 감탄이 우러나옵니다.
7 단으로 쌓아진 장군총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시신을 넣어 둔 널방입니다. 이 널방은 높이 5.1mㆍ너비 5.4∼5.5m로 대단히 넓습니다. 또 두 개의 시신을 넣은 나무 관을 놓아 둘 돌로 된 관대가 50m 간격으로 놓여졌는데, 폭 1.3∼1.45mㆍ길이 3.2m로 상당히 큽니다. 장군총에 묻힌 임금의 키가 대단히 컸던 것은 아닐까요?
장군총에는 또 거대한 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널방 천장 돌은 폭 9.5 mㆍ너비 7.45 mㆍ두께 80 cm입니다. 50 톤이 넘는 이런 큰 돌을 12 m 높이까지 들어올려서 무덤을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일이지요.
그래서 두 무덤을 가까이서 한 번 보게 되면 ‘아, 정말 고구려가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무덤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소중한 유산이랍니다.
국내성 / 425년 동안 고구려 수도로 견고한 방어 시설 갖춰
고구려 2대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의 일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쓸 제물로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제사 물품을 관장하던 ‘설지’가 돼지를 뒤쫓아가서 국내 위나암에서 잡았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유리명왕에게 아뢰었습니다.
“국내 위나암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이 농사짓기 알맞고,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유리합니다. 대왕께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신다면 백성들이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피해도 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리명왕은 1년 뒤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습니다.
이 때 옮긴 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길림성 집안시 중앙에 남아 있는 성입니다. 위나암성은 이 국내성에서 2.5 km 북쪽에 있는 산성이지요.
국내성은 평지에 만들어진 정사각형 형태의 성으로 그 둘레가 2686m에 이릅니다.
1930년대만 해도 높이 9 m의 성벽이 잘 보존돼 있었어요.
하지만 관리 소홀로 국내성의 동쪽과 남쪽 성벽은 아예 사라져 버렸으며,
서벽은 집들에 둘러싸여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03년부터 중국이 국내성을 세계 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지요. 이 때 서벽 주변의 300여 가구가 강제로 옮겨지고, 북벽과 서벽이 새로 발굴되면서 국내성은 조금이나마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축성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도성, 국내성]
국내성은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무려 425 년 동안이나 고구려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국내성 안에는 왕궁이 있었을 터인데 아직까지 확실한 왕궁 터로 밝혀진 곳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집안시 청사와 주변 운동장 터에서 돌담장 바닥돌과 건축물의 기단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왕궁 터도 찾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치· 적대 등 안보 장치 탁월
국내성은 2000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역사성과 함께,
견고한 방어력을 갖춘 고구려 성벽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소중한 유적입니다.
성문은 원래 성 안팎 사람의 출입을 위해 필요한 시설이지만,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 가장 공격당하기 쉬운 곳이기도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성문을 만들었음이 발굴 결과 드러났습니다.
최근의 발굴로 새롭게 드러난 북벽 서쪽 성문은 문 밖 양 옆에 사각형으로 튀어나온 적대를 만들어 ‘凹’ 자형이 되도록 지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선상의 성벽에 그냥 문을 만들어 놓게 되면
적군이 성문을 공격할 때 방어하는 쪽에서는 정면에서만 방어를 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적대를 양 옆에 만들어 놓게 되면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세 개의 면에서 막을 수가 있게 되고, 적이 성문을 공격하는 범위를 좁혀 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수원 화성의 남문과 북문에서도 볼 수 있어요.
한편, 서벽에서는 어긋문이라고 불리는 성문이 나왔습니다. 즉, 북쪽으로 이어진 성벽이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과 일직선으로 만나지 않고, 성문 앞에서 더 앞쪽으로 나가 뻗어 있습니다. 또 성문은 서쪽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며 열려져 있습니다.
앞쪽으로 뻗은 성벽은 동쪽으로 꺾어졌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져서 성문과 다시 만납니다. 이렇게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자연스럽게 적대가 돼 성문을 방어하게 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지요. 적군이 만약 성문을 공격하려고 해도 툭 튀어나온 부분을 돌아서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쉽게 성문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성벽에는 또 곳곳에 ‘치’라고 부르는 사각형 형태로 툭 튀어나온 것을 세워 놓았습니다.
치가 설치되면 적을 세 방향에서 방어할 수 있게 됩니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불과 2.5km 거리에 있는 성으로 둘레가 6951m에 이를 정도로 비교적 큽니다. 당시 환도산성은 전쟁 때 피신한 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 능선 따라 성벽 쌓아
고구려 수도의 성은 평지에 성이 있고, 그 뒤편 산에 산성이 있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첫 수도인 오녀산성은 평지성인 하고성자성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 번째 수도인 안학궁성 역시 대성산성과 짝을 이루고 있지요.
그러다가 평원왕(586년) 때 네 번째 수도가 된 장안성의 경우 궁성 외곽에 튼튼한 성벽을 쌓아 산성과 평지성의 구분이 비로소 없어졌지요.
환도산성은 산(652m)을 배경으로 주위 능선을 따라 성벽이 갖춰져 있습니다.
성 전체가 계곡을 둘러싼 형태로 되어 있지요. 따라서 성 안에 7 개의 문이 있지만, 실제 적이 공격할 수 있는 성문은 땅 높이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 남문뿐입니다.
게다가 남문 앞에는 물이 흘러 성의 방어력을 높여 주는 ‘해자’(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 기능을 하고 있답니다.
만약 적군이 국내성까지 쳐들어오면, 고구려의 왕과 백성은 보다 튼튼한 이 성으로 옮겨 와서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랜 기간 대항하려면 성 안에서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 안에 물이 넉넉하고, 성벽ㆍ성문이 튼튼해야 하며, 사람이 거주할 공간도 넓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 환도산성입니다.
● 고구려 성 특징·왕궁 모습 잘 드러나
환도산성 안에는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따라 개천을 만들어 놓았으며,
우물과 연못도 있습니다. 말에게 먹일 물을 모아 두었다는 ‘음마지’도 있지요.
또 크고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배수구가 성벽 아래쪽에 4개나 갖춰져 있어
물이 한꺼번에 불어난다고 해도 끄떡없을 정도랍니다.
여기에다 적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는 남문은 옹성, 즉 항아리꼴로 되어 있습니다.
남문 자리에 뒤로 움푹 파지게 성벽을 쌓고 그 사이에 성문을 만들어 놓았지요.
이 성문을 공격할 때, 적들은 마치 독 안에 갇힌 것처럼 성문 앞에 모여 바글거리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방어하는 쪽의 조건이 유리합니다.

[환도산성의 지휘대인 점장대(료망대)]
한편, 성 안에는 고구려군을 지휘하기 위해 점장대(료망대)라 불리는 지휘소가 있습니다. 약간 높은 구릉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올린 인공적으로 만든 점장대에 오르면
적군의 움직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지요. 이 점장대 뒤쪽에는 병사의 숙소 터로 보이는 주춧돌이 발견됐으며, 최근에는 이 곳 동북쪽에 위치한 계단식 밭에서 11개의 건물 터가 나왔습니다. 앞으로 발굴이 더 이뤄진다면 고구려 왕궁의 실체도 점차 밝혀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산성하고분군은 환도산성과 통구하 사이의 넓은 들판에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무덤만 1582기로 세계 최대의 무덤군이다. 초기 고구려의 중심지인 집안 일대의 최대 고분군으로, 왕릉급 기단식 적석총을 비롯한 대형고분만 따져도 수백 기가 떼를 이루어 군집하고 있다. 무덤 떼는 위쪽의 좌우방향 능선을 연결하는 환도산성과 보이진 않지만 아래쪽의 좌우방향 하천인 통구하 사이에 놓인 하안대지에 열을 지어 있다. 지금은 수십 기만이 복원되었으며 그 가까이에는 복원되지 않은 수십 기의 자취가 보인다. 환도산성의 남문 밖 언덕에서 내려다본 산성하고분군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부록I>
백두여행사의 일정표 그리고
[백두산을 오르며 만나는 우리 역사] 이이화 대표집필 (달랑 한 권, 돌려서)
<부록II>
[Why]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
우리 민족의 진정한 主山은 백두산이 아닌 의무려산
| 2011/10/15 03:13

우리 민족의 주산은 고조선의 '의무려산'이다.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이름은 조선이다. '고조선(古朝鮮)'을 말한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땅을 포함한 드넓은 대국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왜 조선이라 하였을까? 국호를 조선이라고 이름 지은 이는 이성계가 아니라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의 창업동지였다. 그가 쓴 '조선경국전'은 조선 최초의 헌법서이다. 이 책에 조선이란 국호가 정해진 내력이 소개된다. 당시 명나라 천자(주원장)는 후보국가명 '화령'과 '조선' 가운데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그 이름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도 고조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조선의 후예가 바로 조선이다'라는 국사의식을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신화 속으로 사라질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 되살린 것은 정도전과 조선왕조의 덕분이었다. 이와 같이 고조선에서 정통성을 끌어낸 정도전의 영토관은 무엇이었을까?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중국을 제패하여 천자국이 된 변방민족으로 거란족(요), 여진족(금), 몽고족(원)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도전은 군사훈련을 엄격하게 제도화하여 전국적으로 실행케 하였다. 고조선의 옛 땅 요동을 수복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임으로써 끝이 난다.
고조선이 실존하였음은 일찍이 신채호, 최남선, 정인지 선생 등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그 실체를 구체화한 것은 단국대 윤내현 교수이다. 기존에 고조선을 연구할 때 기초 사료로 활용하는 것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정된 것뿐이어서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반면 윤 교수는 중국의 다양한 사료들 속에 언급된 고조선 관련 기록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고조선의 실체를 밝혔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고조선은 광대한 제국이었다. 박선희 상명대 교수도 만주와 한반도의 고대 옷차림과 장신구 문화를 통해서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인지를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두 학자가 밝힌 고조선 영역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미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고조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괜스레 외교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 아닌가?' 중요한 것은 지금도 북한과 만주 땅에 우리 민족이 거주하면서 고조선 이래 민족의 맥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고조선의 주산은 어디일까? 조선조 이래 많은 학자들이 요령(遼寧)성 북진(北鎭)시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고조선의 주산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란 뜻의 의무려산은 흰 바위로 되어 있어 백악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명산이다.
'진산(鎭山) 의무려산 아래 고구려 주몽씨 졸본부여에 도읍하다'(허목).
'의무려산은 동이족과 중국족이 만나는 곳으로서 동북의 명산이다'(홍대용).
'북방 영토의 주산이 의무려산인데 그 내맥이 백두산이 되었다'(장지연).
의무려산이 고조선이 활동 무대로 삼은 중심축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주산은 백두산이 아니고 의무려산이다. 이제는 남의 땅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영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수천 년을 헤매었지만 마음의 성전을 쌓을 수 있었기에 돌로 된 성전을 쌓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마음의 성전'이란 다름 아닌 '민족의 주산'을 말한다.
<부록III>
홍익인간의 뜻
공존공영의 길
(사)코리아글로브 267차 화요대화마당
주제: "만주와 통일대한민국의 지정학"
곳: 광화문 신문로빌딩 3층
사회: 양승태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정치사상학회 초대회장)
말씀: 김명섭 연세대 통일연구소 소장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이우백 코리아글로브 이사 (바이칼연구소장)
조 민 코리아글로브 이사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史官: 김지호 코리아글로브 이사 (사진작가)
이주성 한반도평화국제연합 상임대표
지정학 이야기~ 늦었습니다.
만주-바다-우주,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먼저 준비된, 만주 이야기부터 들어갑니다.
유라시아 문명은 빙하기가 끝날 때부터 비롯합니다.
북유럽부터 흘러온 흐름과 인도양을 거쳐온 바닷길이
하나로 겹쳐지는 곳이 바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입니다.
그래서 코리아 역사공동체는 북방문명만의 후손도 아니요
남방문명만의 후손도 아닌, 대륙과 해양을 아우른
복합문명이며 그를 일컫은 이름이 곧 삼한이었습니다.
코리아 역사공동체는 조선 중기 이래 반만 년 동안 처음으로
가난한 때 (그래도 영정조 때는 지금 못쟎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치욕인 망국을 겪으면서 20세기 다시 태어났습니다.
분단과 6.25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62체제와 87체제를 이어
임진년에 이르러 평양정권을 넘어 통일 대한민국의 길로 접어듭니다.
반면 늘 여러 겨레가 뒤엉키며 동아시아 지정학의 주무대였던
만주는 삼전도와 청나라의 봉금을 거쳐 휴화산이 되었습니다.
그를 되살리려는 일제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지금은
유사 아래 한족이 최초로 실효 있는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경에서는 다시 봉금을 하고 있습니다.
6천km의 만리장성이 2만km로 둔갑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며
만주에 살았고 지금도 뿌리내리고 있는 여러 겨레를 억지로
중화대가정이란 이름의 새로운 한족으로 換父易祖하고 있습니다.
그 기세가 하도 등등하여 가까이 극동 러시아까지 겁을 먹습니다.
대한민국이 반역집단과 돈으로 평화를 바꾸는 퇴행을 겪은 뒤
정확히 한 해 지나 China는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엽니다.
大元이 아닌 예케몽골울루스의 再現이요 옵저버 나라들을 더하면
그를 넘어섭니다. 그 와중에 만주의 봉금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세찬 행보는 그리 슬기로와 보이지 않습니다.
一治一亂을 걱정하는 China의 공산당은 맹자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 급하여 韜光養晦의 반세기도 견디지 못합니까.
積德累仁하여 王天下하는, 5백년의 중화문명을 다시 세우려는
큰 꿈을 가진 이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나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코리아글로브는 학술단체가 아닙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적어도, 서울과 동경과 북경
(더하여 델리와 모스크바, 또 더하여 울란바타르와 하노이)
그리고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는 유라시아 정치집단의
주춧돌을 놓고자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대목에서
북경의 큰 그릇들과 선의의 경쟁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곧 만주-바다-우주의 지정학을 따지는 까닭입니다.
2012년 7월3일(화) 저녁7시,
코리아글로브 주최 화요대화마당, 통일연구원 광화문센터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연구소장)
I. 지정학(geopolitik; geopolitics)
I-1. 고전적 지정학: 지리적 요소와 권력관계의 상관성에 관해 연구
Johan Rudolph Kjellén(1864-1922), Friedrich Ratzel(1844-1904), Alfred Mahan(1840-1914), Halford Mackinder(1861-1947), Nicholas Spykman(1893–1943), 브레진스키, Z. 2000. 김명섭 옮김-해제.『거대한 체스판: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 서울: 삼인.
I-2. 새로운 지정학/ 비판지정학: 공간, 시간, 인간의 삼각관계에 관해 연구
Lacoste 2006; Chauprade 2007. 새로운 지정학은 세계를 “조망(seeing)하는 방법"과 "개체적 주관성이 개입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을 다룬다(Flint 2006).
김명섭. 2008. “지정학." 한국정치학회 편.『정치학이해의 길잡이』. 서울: 법문사.
콜린 플린트. 2007. 김명섭 외 공역.『지정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길.
(1) 공간: 지리학과 정치학의 통섭. 정치학의 초점인 권력관계는 공간적으로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 동리, 국내적 지역, 국가, 국제적 지역, 그리고 문명권 등 다층적인 동심원적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과거의 지정학이 국제적 공간을 주로 다룸으로써 국제정치와 많은 연관성을 지녔다면, 국내적 공간 역시 점점 더 많은 지정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시와 농촌 간의 권력관계, 소도시와 대도시 간의 권력관계, 지역 간의 갈등과 협력 등이 국내적 공간에 관한 지정학적 연구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2) 시간: 역사학과 정치학의 통섭. 지정학은 역사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Lacoste 2006, 17).“역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저술한『역사』(Historiai)나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398?)가 저술한『펠로폰네소스전쟁사』 등은 이미 지정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권력과 달력. 역사와 정치.
(3) 인간: 인문학과의 통섭. 인간연구로서의 지정학은 ‘나’와 타인이라는 개인적 인간으로 회귀한다는 점에서는 철학이나 심리학, 혹은 신학과 통섭하며,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연구한다는 면에서는 사회학과 통섭한다. 지정학은 영토와 같은 공간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전했지만, 결국 그 영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특정한 공간의 인간들이 특정한 시간에 대한 기억을 얼마만큼 공유하는가 하는 문제.
역지사지의 지정학. 문명충돌의 지정학. 문화(언어, 종교)의 중요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지정학
천자의 지정학 vs. 천황의 지정학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광활한 우주에서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별은 무의미하다.”
II. 한국/한국인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이전에 존재했던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과의 관계.
양승태. 『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0.
허동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통치철학.” 『조선의 통치철학』 (서울: 푸른 역사, 2010).
김명섭. “대한제국의 역사적 종점에 관한 재고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국치 100년, ‘국권상실’의 정치외교사적 재조명』 (서울: 선인, 2012).
김명섭. 2001.『대서양문명사: 팽창, 침탈, 헤게모니』. 서울: 한길사.
김명섭, 김석원. 2008. “독립의 지정학 :대한제국(1897-1910) 시기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과 개신교,”『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제4호 (겨울): 59-86.
김숭배. 김명섭. 2012. “베르사유평화체제의 ‘보편적 표준’과 한국과 일본의 이몽(異夢): 민족자결원칙과 국제연맹 규약을 중심으로.”
Kim, Myongsob et al. “The Geopolitical Perceptions of Kim Ku and Syngman Rhee,”
Korean Social Sciences Review Vol. 1, No. 1 (2011).
김명섭, “분단의 구조화 과정과 한국전쟁,”『해방전후사의 인식』4 (서울: 한길사, 1989), 108-203.
조민.『한반도 평화체제와 통일전망』 (서울: 해남, 2007).
III. 만주
만주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인가?
만주는 인간에 대한 명칭인가? 공간에 대한 명칭인가?
만주라는 공간의 근대적 획정: 1689년 Nerchinsk조약 (나선정벌, 러청전쟁을 끝낸 평화조약).
만주, 티벳(西藏藏族自治區), 그리고 신장위그르(新疆维吾尔自治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1952년 9월 3일 자치구. 1955년 자치주.
현재 연길(延吉)·도문(圖們)·돈화(敦化)·화룡(和龍)·용정(龍井)·훈춘(琿春)의 6개시와 왕칭(汪淸)·안도(安圖) 2개 현으로 구성.
『滿洲源流考』 (遼寧民族出版社). 장진근 역주 (서울: 파워북, 2008).Mark C. Elliott.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IV. 한국의 분단선은 중화문명 vs. 서구문명의 대치선인가?
김명섭, “통일방안으로서의 고려(Corea)문명권,” 한흥수 외, <<한국정치동태론>> (서울: 오름, 1996).
Kim, Myongsob and Horace Jeffery Hodges. 2005. "On Huntington's Civilizational Paradigm: A Reappraisal." Issues & Studies. vol. 41, no. 2 (June).
Kim, Myongsob and Horace Jeffery Hodges. 2006. "Korea as Clashpoint of Civilizations." Korea Observer. vol.37 no.3 (2006): 513-45.
Myongsob Kim, Suzanne L. Parker and Jun Young Choi. 2006.“Increasing Distrust of United States in South Korea.”International Political Science Review (October): 427-45.
Hyung-Kook Kim, Myongsob Kim, and Amitav Acharya. 2008. Northeast Asia and the Two Koreas: Metastability, Security, and Community. Yonsei University Press.
Kim, Myongsob and Horace Jeffery Hodges. 2010. "Is the 21st Century an 'Asian Century'? Raising More Reservations than Hopes." Pacific Focus. vol. 25 no. 2.
김명섭. “외교정책과 문화.”『현대 외교정책론』. (서울: 명인문화사, 2012), 117-33.
Myongsob Kim. 2012.“Why No Westphalia-like Peace in Northeast Asia after the Imjin War (1592–1598)? -- A Heterodox Hypothesis”
[Map of Manchuria 1906]

코리아글로브 화요대화마당 (2012. 7. 3) 허동현 발표문
1. 대한제국 멸망의 국제적 배경 : 만주를 둘러싼 열강의 쟁투
일본이 한국 병합에 을사보호조약 이후 5년이나 걸린 원인
: 만주를 둘러싸고 일본이 벌인 러·미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
1905.9 :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 러시아가 갖고 있던 남만주 이권을 물려받음.
12 : ‘만주에 관한 청일 협약’ 남만주 이권에 대한 청의 동의.
이는 만주에 대한 사실상의 문호 폐쇄로 일본이 열강에게
거듭 확약해 온 문호 개방과 기회균등 보장 약속의 전면 위배.
1906.6 : 만주 시장의 경제적 대동맥인 동청 철도 남만 지선 장악
: 니콜라이 2세가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 대표를 초청
1907.6 : 24일 러·일 이미 만주에서 철도를 연결하기로 타결
29일 헤이그 밀사 회의장 입장 거부당함
1907.7 : 17일 고종 폐위
: 24일 정미7조약 한국 내정권 차지했으나, 병합 강행 못함.
: 30일 러일 협약 조인. 러시아의 대일 적의는 잠재움.
미국의 배일 감정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
1907.8 : 18일 군대해산
1908.11 : 30일 루트-다카히라 협약. 미국은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음.
루즈벨트 대통령의 시종 일관된 입장. 일본의 사활적 이익은
만주와 한국에 있지만, 만주에는 일본과 전쟁을 무릅써야 할
미국의 권익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1909.3 : 4일 태프트 정부가 들어선 후 일본에게 만주에 대한
투자상의 문호 개방까지 강요함. 병합의 걸림돌.
7 : 각의(閣議)에서 병합 결정
9 : 4일 일본이 청에 ‘간도에 관한 협약’과 ‘만주5안건에 관한 협약’을
강압함으로써 만주 독점 야욕 드러냄
11 : 18일 러시아 황제 ‘이제 일본과 가장 긴밀한 협화의 길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함.
: 만주제철도 중립화안(Knox' neutralization proposal) 제기함.
(미국 국무장관 녹스) 러·일 양국에 의한 만주 분할을 차단하려는 포석.
철도의 중립화를 통해 만주에서 일본의 손을 묶겠다는 것임.
1910.7 : 4일 제2회 러일 협약. 러일은 대독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영불의 측면 지원을 받아 협동의 강도를 강화하며
이들 협상국과의 유대 속에서 미국의 만주침투를 저지함.
일본은 이 협약으로 만주에 대한 미국의 대일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협상국 러시아에게도 한국 병합에 대한 양해를 받아냄.
8 : 29일 한일합방조약 체결
2. 한국 분단의 국제적 원인 : 만주내전
1945. 7 : 포츠담회담(7.16-8.2) 한반도 분단문제, 즉 38선은 언급되지 않음.
8 : 9일 소련 대일선전포고
: 14일 트루먼(Truman) 대통령 한국에 38선 설치 제의.
: 14일 중소조약 체결. 스탈린은 국민당정부 유일정부로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가 1905년 이전에 갖고 있던 특권을 인정받음.
: 15일 스탈린 미국의 38선 분할 점령 제의 수락.
대신 홋카이도 북반부를 달라는 것이 그의 입장
: 20일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국민당군과의 전쟁 중지 지령내림.
9 : 15일 런던 외상회의(9. 12-10. 2)결렬. 미영 소련의 트리폴리타니아
(Tripolitania) 조차 요구 거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침.
미소 간의 관계 급격 냉각.
: 20일 북한에 정부수립 지시
10 : 8일 스탈린 중국 정책 180도 전환.
30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라고 중국 공산당에 명령함.
: 25일 스탈린, 미대사 해리맨에게 “미국이 지중해와 일본에서 소련을
제거하려 하므로 독자적으로 고립정책을 택하기로 했다”고 토로함.
12 :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6. 2 :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수립.
3 : 소련군 만주철수 선언과 함께 팔로군에게 점령지를 넘겨줌.
미국의 영향력이 만주로 확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
4 : 사평가(四平街)전투와 장춘(長春)전투에서 팔로군이 승리함.
5 : 장개석 정부는 미군 지원하에 육성한 신 1군과 신 6군을 파병하였고,
우세한 전투력을 보유한 국민당군은 팔로군을 격파함,
스탈린은 팔로군 부대들을 북한지역으로 퇴각토록 함.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것임.
북한은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이 되었는데
국민당군은 국경을 넘어 추적할 수가 없었음.
6.25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던 지역이었던 것처럼,
그때 북한은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성소(聖所, sanctuary)였음.
1948년까지 북한은 팔로군의 군수물자와
병사들의 수송통로이자 보급창이 됨.
1947 : 팔로군 반격에 나섬. 국민당군의 패배.
팔로군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으나 한국분단은 마침표를 찍고 맘.
북한이 스탈린과 미국의 승부를 결정하는 과정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
전략 요충지인 북한을 남한과 통일시킨다는 것은
스탈린이 만주, 나아가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함.
북한이 팔로군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남과 북이 합해서 통일을 이룬다는 소원은 일장춘몽에 다름없음.
바이칼 경영철학 아카데미 대표(철학박사) 이 우백
1.유라시아와 만주
정치와 지역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는 이론이 지정학(geopolitics)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운데서 내아시아(inner Asia)는 정주문화와 유목문화라는 두 대립적인 문화가 장기간에 걸쳐 상호작용해 온 지역이다. 내아시아와 중국 사이의 생태학적 문화영역은 크게 4가지로, 즉 투르키스탄, 몽골, 만주, 북중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4영역 가운데 만주가 차지하는지정학적 의미는 어떤 것이 있는가? 중세 ‧ 근세의 동아시아 역사를 통해서 만주의 지정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다가올 통일 대한민국을 위해서 만주가 차지하는 위상을 간략히 짚어 보고자 한다.
2. 몽골제국과 만주
중앙 아시아의 위구르제국이 840년에 망한 뒤, 약 400여년이 지난 1206년에 칭기스칸(1162~1227)이 몽골족을 통일하여 대몽골 국가를 세운다. 칭기스칸 이전에 만주 지역에는 요(遼)나라(907~1125)와 금(金)나라(1115~1234)가 차례로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 고원의 몽골족은 금나라가 구사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의해서 끊임없는 종족 간 분열과 갈등 속에 있었다. 이 금의 교묘한 이이제이 정책을 역이용하여 통일 몽골 국가를 세운 사람이 칭기스칸이다. 그러나 1206년 몽골 통일 후 몽골이 만주 지역의 금나라를 정복하는 데는 약 24년(1211~1234)이라는 긴 기간이 소요된다. 칭기스칸 사후 아들 오고데이 대에 이르러서 만주 정복이 이루어진다.
금나라는 유목문화와 정주문화의 이중구조를 갖춘 국가이기에 몽골이 이 벽을 넘는 데는 그만큼 큰 어려움이 따랐다. 금나라와 조선의 정복 후, 즉 만주지역 점령 후 몽골의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은 어떻게 보면 금 정복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려움의 순서로 따진다면, 몽골 족종 간 통일이 가장 어려웠고, 다음은 만주 정복, 그 다음은 중국 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는 대원(大元)제국 성립의 발판(교두보) 역할을 한다. 몽골은 중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한족화된 거란 · 여진인과 이민족 상인들의 정보제공을 최대한 활용한다.
3. 청제국과 만주
대몽골 국가 성립 후 약 400여년이 지난 1616년에 누르하치(1559~1626)가 만주에서 중국 명(明)나라의 이이제이 정책을 역으로 이용하여 분열된 종족들을 하나로 묶어 청(淸)나라를 세운다. 종족을 통일한 후 청나라는 몽골과 조선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 대에 이르러 중국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하여 1637년에 북경을 함락시킨다. 여기서도 만주는 대청(大淸)제국(1616~1912) 성립의 발판 역할을 한다. 만주족이 대청제국을 세우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과정은 역시 종족 통일과정이었다.
이후 몽골과 조선의 복속 과정을 거치면서 순차적으로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은 만주족이 생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 과정이었다. 당시 만주족은 명나라와 교역을 통하여 생존하고 있었다. 만주족과 무역 역조 현상이 이어지자 명나라는 만주족과의 교역을 단절시켜버린다. 중국과 교역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만주족의 입장에서 명나라 진출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교역 상인들이 가진 중국 정보 해독능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 통일 대한민국과 만주
1945년 이후 우리나라는 38선에 의해 그어진 남북 분단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동안 세계는 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나 디지털 무한 경제 전쟁 ‧ 정보 전쟁 시대에 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이데올로기 시대의 유산인 38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누르하치가 1616년에 만주족을 통일한지 어언 400여년이 지났다. 동북아시아에서 우리의 이 38선을 걷어내 버릴 방안은 없는가? 몽골제국과 청제국의 성립과 연관하여 만주가 가졌던 맥락을 통일 대한민국과 관련시켜 보는 통일을 위한 시나리오는 없는가.
요 ‧ 금 ‧ 몽골 ‧ 청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치 ‧ 생태학적 이유로 만주 지역은 중국의 토착 왕조가 내분에 직면하여 붕괴할 때 중국 땅에 이민족이 정복왕조를 세우기 위한 ‘배양지(breeding ground)’ 역할을 해 왔다(Thomas Barfield). 이는 만주 지역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유라시아와 동아시아 패권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주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거대 제국이 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심장지대(heartland)’일 수 있다(Halford Mackinder). 만주 지역이 가지는 이 같은 역사적인 의미를 우리의 남북통일이라는 과제와 연관시켜 한 번 생각해 보자.
첫째, 국가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통일 의지를 지닌 집단(지도자)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이 집단이 통일 방해 세력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해야 한다. 몽골과 청의 경우 이이제이 정책에 의해 흩어진 각 지역의 종족장 ‧ 부족장들이 국가 통합과정에서 반대 세력으로 등장한다. 우리의 경우도 국내외의 통일 반대 세력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해야 한다. 아마 남북의 반대세력은 각각 현 체제의 유지를 통해 국가의 장기적인 이익 보다 자신들의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일 것이다. 금의 ‘맹안모극제’, 몽골의 ‘종족복합군’과 청의 ‘팔기군’에서 그랬듯이, 기득권 세력을 정리하는 데는 위로부터 아래로(top down) 나아가는 소프트웨어적인 개혁(신조합)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 주변의 강대국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친미 ‧ 반미, 친중 ‧ 반중이 아니라, 언제나 용중(用中) ‧ 용미(用美)라는 태도를 깊이 견지해야 한다. 주변국들은 우리의 통일에 대해서 항상 자기 이익에 따라 이이제이의 태도를 견지한다. 몽골과 청은 주변국들과 결혼동맹 등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안정시켜 왔다. 오늘날 말로 하면 주변국들과 긴밀한 경제적 협력(사업 파트너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통일을 위해 일차적으로 우리는 몽골과 국가 연합을, 그 밖의 오랑캐들(남만 ‧ 북적 ‧ 서융)과는 연맹을 추구하면서 만주와 북한을 연결해야 한다. 동북 지역 중국인들과는 용중(用中)이라는 입장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면서 이 지역에 대해서 추후 실효적인 지배가 가능해지도록 적극 교류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통일 방안을 위하여 남과 북을 공히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여야 한다. 남북의 대결 구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원수지간도 풍랑을 만나면 함께 대처해 나가는 ‘오월동주(吳越同舟)’처럼 남북 양쪽이 함께 추구하는 비전(대전략)이 필요하다. 과거 몽골과 청이 국경의 팽창을 추구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국운(國運)이 국경을 넘어서 가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어적인 차원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중국의 팽창정책에 대한 우리의 대응 자세를 새로이 가다듬어야 통일에 대한 적극적인 비전을 던질 수 있다.
넷째, 현재 우리 사회는 실업 ‧ 고령화 ‧ 다문화 가정 등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일대의 전기가 필요하다. 과거 몽고가 중국으로 진출할 당시 1억 중국인에 비해 몽골인은 100만 정도였으며, 청의 경우는 70만 정도에 불과했다.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국 진출은 이루어졌다. 약 400년 간격으로 우리에게 국운이 성할 기회가 왔다. 우리에겐 조선족의 정보해독 능력이 있다.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를 대망하자!
KG 2012.07.03 조 민)
1. 지정학의 이론적 배경
*국가전략의 공간적 담론
1-1. 20 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 세계대국의 세계패권전략
- heartland 및 해양 제패론
1-2. 냉전체제 해체 후 지정학
- ‘지정학 + 문명론’적 접근
ㅇ S. P. Huntington, "The Clash of Civilization" (Foreign Affairs, summer 1993)
ㅇ Zbigniew Brzezinski,
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Its Geopolitics Imperative, 1988)
- 미국 패권에 대한 유라시아의 도전
Strategic Vision: America and Clobal of Global Power, 2012
- 중·미 관계 미래에 대한 미국의 세계전략
2. 한국: 통일 지향적 지정학
2-1. 통일 우호적인 국제 및 주변 환경 조성
o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중견강국(Advanced Middle Power)’의 국가상 정립
<전 지구적 차원의 대외전략(Semi-Global Strategy) 수립>
- 한국은 중견국가 위상과 더불어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전 지구적 차원의 대외전략 수립이 필요
- 아세안(ASEAN), 러시아, 인도, 유럽연합(EU), 중앙아시아, 중동 국가와의
전략적 협력관계 구축을 통해 미·중 관계의 대(對) 한반도 규정력 극복
2-2. 한반도 통일과 중국
ㅇ미래 지향적 한·중 관계 구축의 방향
- 대중 포위? 한반도 구심력 강화?
<동양, 동아시아, 동북아>
동양, 동아시아, 동북아 등의 지역 범주에 대한 뚜렷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① ‘동양’은 서양에 대한 대응이다. 동양은 대개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 서양에 대해 일본이 스스로 비서양 지역 또는 비서양 문명의 대표로서 자임하면서 사용되었다. 동양·서양은 이분법적 구분으로 서양 주도의 근대적 세계와 서양의 우월한 물질문명에 대해 정신문명적 가치를 강조하는 경우나 유럽인과 다른 인종적 특성을 지닌 아시아 전 지역을 아우르는 개념을 활용되었다.
② ‘동아시아’는 먼저 일본에서 일본, 한국, 중국 3국을 아우르는 범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동아시아는 문화적 지역 개념으로 한자 문화권, 유교 문화권으로 공통성을 찾기도 한다(고병익, “동아시아 나라들의 상호 소원(疎遠)과 통합,”『창작과 비평』1993년 봄호). 그러나 동아시아 범주는 일찍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서 보듯이 일제에 의해 오염된 측면이 있다. 그와 달리 사방에 많은 국가들과 인접한 중국의 경우, 동아시아 지역 범주에 특별한 가치 부여를 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동남아, 서남아, 중앙아시아 등 아시아 지역 전역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이해관계를 가진 중국은 한국과 일본에서와 같은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특별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동아시아를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범주 속에서 접근할 경우, 그리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추구한다면, 중국학자 쑨거(孫歌)의 견해처럼 공동의 미래 못지않게 20세기 한·중·일 3국의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의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이 바람직하다(“동아시아 시각의 인식론적 의의,”『아세아연구』제52권 1호(2009년).
③ ‘동북아’는 흥미롭게도 한국이 창안한 지역 개념으로 특히, 노무현 정부 당시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동북아 개념은 군사안보적 지역 개념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한반도가 동북아 지역의 중심이 되면서 북한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는 지역 개념이다. 앞의 동아시아가 역사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여기에는 북한의 존재가 포함되지 않았다면, 동북아는 북한 문제로 야기된 국제정치적 영역이라고 하겠다. 한편 동북아는 미국의 군사안보 차원의 지역 범주인 'North-east'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노무현 정부 당시 ‘동북아 평화와 번영’ 등의 슬로건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한국의 대북 및 대외전략의 ‘키 워드’가 되면서 군사안보 차원의 지역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반도의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동북아 주변 4국을 포함한 6자회담 틀은 동북아 지역 범주를 보다 명확히 하는데 일조했다(조민, 2011).
3. 통일지정학: 국가 중심적 접근을 넘어
3-1. 지정학의 근대적 국가 중심적 사고 극복
ㅇ지정학, 지경학(Goe-economic), 지문학적(Geo-cultural) 접근 전략 필요
- 정치적, 국가 중심적(주권), 군사패권적 접근 지양
* 하토야마(鳩山由紀夫), ‘나의 정치철학’(Voice, 2009.9)
3-2. 문화 영토론 / 역사 회복
ㅇ전 지구적 한민족공동체 형성
- 세계 속의 ‘한’ 문화 네트워크 구축 *유대인 공동체
ㅇ21세기 세계 문명의 허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