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알림> 10/12, 어라하의 꿈을 찾아서

by KG posted Sep 06, 2013
안타깝습니다.
임진년 1월14일 불암산 첫 개산제부터 어느덧 이태가 되어가는
코리아글로브 남북공동-팬코리안 산행과 역사기행 처음으로
흩뿌리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한 달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담았던 보름달을 제대로 보라고
뭇 거룩하신 어른들께서 그리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미리 알려드린 <어라하의 꿈을 찾아서> 남한산성 둘레길,
계사년 9월 코리아글로브 역사기행을 10월12일로 미룹니다.

곧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라하의 꿈을 찾아서>

코리아글로브 [백두비나리] 계사년 10월 역사기행
4346년 10월12일(토) / 남한산성 둘레길



두물머리 내려다보는 운길산에서 예봉산을 지나 팔당을 건너면
거룩한 검단산 아래 동으로 용마산, 서로 남한산이 있다.
그 옆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 남한산성이 이어져 있다.
곧 하남 위례 황성의 위용이다. 남부여 백제는 어디로 갔나.
그 오랜 세월 무진주에만 매달린 동교동의 역사인식이 안타깝다.

여기서 암군 인조는 47일간 농성을 하며 제살길만 찾았다.
그도 모자라 삼전도에서 머리를 짓찧으며 희대의 쇼를 벌인다.
기가 막힌 청태종 홍타이지는 돌아가서도 결코 부모의 나라
조선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죽어도 오랑캐라 능멸하는
조선의 기운을 빼놓으려 왕실의 볼모와 60만 포로를 잡아갔으나
돌아온 소현세자는 죽임을 당하고 아낙들은 환향녀로 분풀이 과녁이 되었다.

변발은커녕 내놓고 북벌을 주장해도 귀를 틀어막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1882년 임오군란까지 2백년
데면데면 소 닭 보듯 지낸다. 그 열매가 곧 백두산정계비다.
대신 대륙에선 원나라에 이어 다시 만몽의 혼인동맹과
티벳과의 종교동맹이 꽃핀다. 지금 China가 꿈꾸는 중화민족의 부흥이다.
1907년 망국 코앞 마지막 정미의병을 학살하며 폐허가 된 남한산성.

너르고 기름진 하남과 광주를 터 잡아 요서에서 열도까지
바다를 다스린 근초고 어라하의 꿈을 보아라.
소중화의 그늘 아래 대륙의 길을 스스로 걷어차 버리고
순혈의 망상에 빠졌던 3백년 조선의 어둠을 보아라.

오늘 다시 우리가 그 역사의 갈림길에 섰다.
한강은 발해만과 황해와 대한해협으로 나아가는 젖줄이다.
아니라면 제 잘난 맛에 젖는 나르시시즘의 우물이다.
코리아글로브 단골들이여. 어디로 가시리이까!

10시 만남- 남한산성 남문매표소 (시청역기준 90분)
             8호선 남한산성역 2출구, 52번 버스 타고(5정거장) 종점
~12시 남문 ☞1km,수어장대 ☞600m,숭열전
          ☞600m,북문 ☞1.7km,동장대-동문
~3시 점심 ☞만해기념관 ☞집으로!

<회비> 밥값+곡차값+기념관 입장료








[전설로 보는 남한산성]


병자호란은 한마디로 인조로 상징되는
조선의 소중화주의 사대부들이 부른 난이다.

임진년에서 무술년까지 일곱 해 동안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지만
그래도 조선 백성들은 왜군에게 체면은 지켰다고 믿었다.
그러나 겨우 서른 해가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정묘호란에서
‘부모의 나라’를 떠받들던 野人 건주여진에 치욕을 겪고
그 아홉 해 뒤 끝내 임금이 무릎을 꿇은 병자호란에서는
아예 조선은 껍데기만 남은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위로는 임금부터 아래로는 말단 관료까지
한마음으로 조선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尊明義理를 지켰다.

이 무렵 동아시아는 태풍에 휩싸이고 있었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西勢東漸은 이미 현실이 되었으며
(1712년 백두산정계비는 그 상황 아래 나온 것이다.)
1858~1860년 아이훈 조약과 북경 조약으로
청나라가 아무르 강 이북과 연해주를 러시아에 내어줄 때
벌써 조선의 운명은 결정 난 것에 진배없었다.

먹구름이 끼면 곧 닥쳐올 벼락을 헤아릴 수 있다.
백성들의 그 마음이 아래 세 가지 전설로 남한산성을 맴돈다.
매바위에 아로새긴 이회는 임경업의 전편이다.
그리고 임경업은 그 이회의 후편이다.
(조선에서 무인이란 집 지키는 개와 마찬가지다.)
벌바우 전설로까지 가면, 백성들의 체념이 읽힌다.  

코리아글로브 단골들이 남한산성에 다시 이르렀으니
이제 새로운 전설을 만들 때가 되지 않았는가.


<매바위와 쌀섬여울, 부부의 전설>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마당 한쪽 모퉁이에 '매바위'가 있으니,
남한산성의 축성 책임을 맡았던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다.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산성 동남쪽 지역의 공사에 완벽을 기하려
하나하나 철저히 점검하다 보니 그만 정해진 날짜를 넘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까닭이 주색잡기에 빠진 탓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에 나라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서장대 앞뜰에서 그는 죽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 말을 남겼다.
그의 목을 베자, 그 목에서 매 한마리가 튀어나와
가까이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이 그 매가 앉았던 바위를 보니 매 발톱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이회 장군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라 믿게 되었다.
또한 그가 맡았던 성곽을 살펴보니, 아주 튼튼하여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뒤 사람들은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신성시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그 매 발자국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네모의 자취만 남아 있다.

송파구 삼전동 잠실유수지 부군당의 한강 여울을 한자로 米䄷灘이라고 하였다.
이는, 장군의 부인이 축성의 모자라는 비용을 돕기 위해
삼남으로 돌아다니며 구걸하여 마침내 쌀을 싣고 오다가 삼전도에 이르러
그 남편이 참소 당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통곡하다가
쌀을 모두 한강에 던지고 또한 몸을 던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부부를 기리는 사당이 서장대(西將臺) 옆의 청량당[淸凉堂]이다.


<임경업 장군을 낳게 한 매화나무 터의 무덤>

남한산성 서쪽 등성이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
이 무덤에는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장군은 충주 달촌에서 태어나고 그곳에 묻혔다.
그런데 이 무덤이 주목받는 것은 장군을 태어나게 한 선조의 무덤인데다
다음과 같이 장군의 출생을 예견한 이야기까지 함께 전해지기 때문이다.

먼 옛날 한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가난한 총각이
광주 친척집에 식량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날이 저물어
산 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바람까지 몰아쳤다.
한참이나 헤매다가 멀리 불빛을 따라가니 웬 집이 하나 나타났다.
그 집에는 어여쁜 처녀가 홀로 살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이끄는 대로 방에 들어가 밥을 먹고 총각은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굶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해 서둘러 광주 친척집으로 떠났다.
그러나 처녀를 잊지 못했던 총각은 마침내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다시 어제 묵었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온 산을 울리는 큰 소리가 들렸다.
“듣거라! 나는 이산의 산신령이다. 너는 지금 마음을 돌이키고 어서 돌아가라.
어제 밤을 함께 보낸 그 처녀는 오백년 묵은 암구렁이니라.”
총각은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았으나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총각은 어제 묵었던 집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다.
그러나 집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한 그루의 고목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나무 위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앉아있었다.
“저는 산신령의 말대로 오백년 묵은 암구렁입니다.
세상 사내 가운데 사내인 당신을 만나 이제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모두가 당신의 덕입니다. 아무쪼록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제가 올라가면 이 자리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를 당신의 묘 자리로 쓰십시오.
당신의 자손 가운데 나라를 구할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오게 될 것입니다."

처녀는 곧 사라지자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졌고,
그 비늘은 매화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임 총각은 죽어 그 자리에 묻혔다.
세월이 흘러 그 자손 가운데 병자호란의 명장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


<벌바우에 깃든 정기를 날려버린 청태종>



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틈이 나있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이라
불렀다 하며 암문 밖에서 보면 생김새가 마치 벌과 비슷하다.
벌바우는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제단까지 따로 있을 만큼 사람이 끊이지 않는 벌바우에는 청 태종의 전설이 있다.

병자호란에 앞서 청 태종이 용골대를 조선에 몰래 보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그가 보니 남한산성이 하잘 것 없어
대강 그려 돌아갔다.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이 낱낱이 물어보니,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 하였다.
곧 크게 화내며 꾸짖기를, “강과 도성이 서쪽이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거꾸로 그려왔는가.
다시 제대로 그려 오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다시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은 벌바우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인데 남극성이 범하면 망한다.
내 주성이 곧 남극성이다. 조선 왕이 벌바우를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가 쉽게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허나 다행히 벌바우가 밖에 있다.
곧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가 벌바우를 먼저 깨뜨려 정기를 없애면 산성을 쉽게 무너뜨릴 것이다.“

마침내 조선에 쳐들어가 남한산성의 벌바우를 깨뜨리니 안개가 피어오르며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뒷날 나라에서 벌바우의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 부끄러움을 겪지 않으려
벌바우 밖에다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지금 벌바우가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진 것은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깨뜨린 자국이라고 한다.



[사람으로 보는 남한산성]


<근초고 어라하>



삼국시대 3대 정복군주를 꼽는다면 고구려 광개토태왕, 신라 진흥왕 그리고 백제에서는 단연코 근초고왕이다. 근초고왕은 백제 13대 임금으로 서기 346년에 즉위하여 375년까지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의 폭을 넓히고 역사서 편찬, 수도의 확장, 왕권 강화, 해상 무역 등을 발전시키는 등 여러모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또한 백제 초기 불완전했던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한층 강화시켜 백제를 고대국가로 완성한 임금이라고 평가받는다. 근초고왕의 활약 탓에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근초고왕의 이름은 여구(餘句)다. 여는 왕의 성씨이며, 구가 이름이다. 그는 체격이 매우 뛰어나며 원대한 식견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백제사를 대표하는 임금이지만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기록은 극히 부족하다. 일례로 그가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지조차 기록이 부족하다. 왕호인 근초고왕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의 경우는 5대 초고왕과 6대 구수왕에서 왕호를 따온 것이다. 이처럼 왕호가 닮은 것에는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 백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온조(溫祚)와 비류(沸流) 두 사람이 있다. 백제 왕실은 1대부터 7대 사반왕까지는 온조왕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사반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쫓겨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른다. 고이왕은 4대 개루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개루왕은 166년, 고이왕은 286년에 죽는다. 그가 무려 120살 이상 살았다는 것은 너무도 어색하다. 고이왕의 성씨는 여씨가 아닌 우(優)씨였다. 백제 건국이야기에 등장하는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였다. 고이왕은 온조의 후손이 아니라, 비류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9대 책계왕과 10대 분서왕, 12대 계왕이 모두 고이왕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11대 임금인 비류왕(比流王)은 고이왕의 후손이 아니라, 온조계 인물이었다. 초기 백제는 온조와 비류 두 사람의 후손이 서로 왕위를 교대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비류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계왕은 단지 임금이 된 후, 3년 만에 죽었다. 그리고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이 13대 임금이 된다. 근구수왕 이후 백제 왕위는 모두 그의 후손이 차지했다. 백제 왕실은 온조의 후손이 이때부터 독점하게 된 것이다.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류계 후손을 완전히 제압하고 단일한 왕통을 확립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근초고왕은 진(眞)씨 귀족과 혼인을 맺고, 진씨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삼국사기] 등에는 그가 즉위한 후 20년간의 행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그가 백제의 내실을 다지고 외부로 팽창할 준비를 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의 활약을 기다린 시대 환경

4세기 동아시아는 혼란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격변의 시대였다. 황하 유역의 북중국을 다스리던 진(晉)은 5호(胡)라 불린 갈, 저, 강, 흉노, 선비 등 여러 종족에 의해 316년 양자강 유역으로 쫓겨났다. 북중국은 여러 종족들의 세력 각축장이 되어, 수시로 나라가 세워졌다가 망하기를 거듭하였다. 남중국으로 쫓겨난 동진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북중국의 나라들과 대립하며, 잦은 전쟁을 했다. 이러한 혼란은 중국 주변의 많은 나라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는 세력 확장에 뛰어들어 313년과 314년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는 한편, 서방으로 진출을 서둘렀다. 
 
백제는 3세기 중엽부터 대방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대방군을 통해 중원지역의 문물을 수입하고 이를 주변국가에 나눠줌으로써 이득을 챙겼다. 대방군이 사라지자, 백제는 중원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적극 해양 활동에 나서야만 했다. 백제는 옛 낙랑인과 대방인을 적극 포섭했다. 이들이 가진 기술력을 적극 수용했다. 이는 곧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했다. 또한 대륙의 여러 나라들과 직접 교역을 함에 있어서 보다 강한 국력이 필요해졌다. 변화하는 국제 환경은 백제로 하여금 보다 통합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으며 근초고왕은 이에 응했다.
 
가야와 마한을 정복하다

그는 다져진 국력과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낙동강 유역의 작은 소국들을 정벌해갔다. [일본서기]에는 366년 백제가 소백산맥을 넘어 가야, 탁순국, 안라 등 가야연맹의 7개 소국을 정벌하고, 남쪽으로 침미다례를 무찌르고, 비리 등 4읍의 항복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 백제는 마한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키고, 전남 해안까지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가야연맹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행사하게 되었다.
 
근초고왕은 아들 근구수 태자와 함께 직접 전쟁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왜국 용병의 도움도 받았다. 백제는 가야에 속한 탁순국을 매개로 왜국과 만난 바 있었다. 근초고왕은 왜국의 사신을 궁성으로 초대하여,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 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백제의 부강함을 과시했다. 백제는 비단, 쇠뿔로 만든 활, 철 등 왜국이 필요로 하는 물건과 앞선 기술력을 많이 갖고 있었다. 백제 장군 목라근자는 왜병을 지휘하여 신라군도 격파하고, 가야 지역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한다.
 
백제는 369년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는데, 그 실물이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발견된 바 있다. 74.9㎝의 칠지도에는 61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태화 4년(369년) 5월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제후 왕에게 줄 만하다. 앞선 시대 이래로 아무도 이런 신성한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제왕 치세에 기이하게 이 칼을 얻게 된 성스러운 소식이 생겼으므로, 왜왕을 위하여 만든 뜻을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여라.”
이 명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왜국은 백제의 앞선 문물을 얻기 위해 백제에 용병을 제공해주는 나라였다.
 
고구려 정벌에 나선 근초고왕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 황해도 배천군) 지역으로 진격해왔다. 그러자 근초고왕은 큰 전략을 꾸미고, 근구수 태자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 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시도하게 하여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인구나 국토나 병력 규모에서 백제는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백제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근초고왕의 탁월한 지휘능력, 첩자의 활약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지휘하는 통일된 군 명령 체계를 가진 군대 때문이었다. 백제군은 모두 황색 깃발을 사용할 정도로 일사불란했다. 반면 고구려 군은 왕이 지휘하는 적색 깃발 부대를 제외하면 오합지졸이었다. 백제군은 먼저 고구려의 정예군인 적색 깃발 군을 집중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그러자 나머지는 저절로 무너졌다.
 
고구려가 371년 다시 공격해오자, 근초고왕은 예성강변에 군사를 숨겨두고 기다리는 작전을 펼쳤다. 매복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다시금 고구려 군을 격퇴시켰다. 근초고왕은 그해 겨울 마침내 정예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고구려 고국원왕을 활로 쏘아 맞혔다. 비록 고구려 평양성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백제는 고구려왕을 죽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백제는 고구려에 큰 수모를 안기며, 강성함을 과시할 수 있었다.
 
대륙으로 세력을 넓혀라.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 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해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했다.’ – [송서(宋書)]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해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 진평 2군을 빼앗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梁書)]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고구려, 마한, 가야를 제압할 정도로 국력이 크게 강해져 있었다. 또한 직접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해양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근초고왕 시기에 충분히 백제가 이곳에 영토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일본열도로 진출할 때의 상황 등을 봐도 거리는 큰 문제가 아니다. 현재로서는 이때 백제가 요서 지역을 지배했는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지만 근초고왕 시기 어떤 방식으로든 요서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백제를 백제답게 만든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 박사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를 기록하게 했으며,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옮겨 평지에 위치한 기존의 궁성과 함께 거대한 수도권을 만들었고, 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다. 무엇보다 그는 백제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업적을 남겼다. 고구려, 신라, 가야가 모두 두려워했던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던 점은 백제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으로 남았다. 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백제가 화려하고도 개방적인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근초고왕이 이룩한 업적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는 백제사에 큰 길을 열어준 임금이었다.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宣祖와 仁祖>

                                                      서울경제신문 토요산책(2013년 7월13일)

5천년 오랜 우리 민족사에서 나라를 멸망의 위기로 빠뜨린 임금도 많았는데, 선조(宣祖) 이균(李鈞)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예나 이제나 국가 최고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하고 리더십이 없으면 국정은 표류하게 마련이다. 조선왕조는 27명의 국왕 가운데 선조의 재위 기간만큼 다사다난했던 적도 없었다. 그의 재위 중에 동서당쟁이 시작되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가 재위 41년 내내 부국강병(富國强兵)과 국리민복(國利民福)은 도외시한 채 나라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비정상적 즉위 과정에서 비롯됐다. 선조는 명종이 후사 없이 죽는 바람에 조선왕조 사상 최초로 방계 승통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중종의 서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가 낳은 아홉째아들 덕흥군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니 정상적 상황이었다면 국왕 후보에도 끼지 못할 서열이었다. 그런 까닭에 선조는 재위 내내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이는 결국 신하들과의 불화, 또 아들 광해군과의 불화로도 나타났다.

마치 부정선거로 당선되거나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자들처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던 만큼 선조의 왕권 안보에 대한 집착은 병적이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가면서도 그는 어제는 동인, 오늘은 서인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당쟁을 자신의 왕권 안보에 악용했다. 또한 장수들을 라이벌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죽이고, 이순신(李舜臣)과 곽재우(郭再祐)를 죽이려고 했으니 이는 이적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쟁이 있을 것 같다는 서인 황윤길(黃允吉)의 보고를 무시하고 동인 김성일(金誠一)의 보고를 수용함으로써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재앙을 당했다. 전쟁의 조짐이 조금만 있어도 대비를 하는 것이 국가 안보의 기본 상식이거늘 선조와 동인들은 왜적이 쳐들어오면 자신들은 무사할 줄 알았을까.

선조는 재위 중 10여 차례에 걸쳐 ‘임금 노릇 못해먹겠다’며 마음에도 없는 양위극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물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한 쇼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멸망의 위기를 당했으면서도 유비무환의 교훈을 무시하여 또 병자호란을 당했다. 인조(仁祖) 이종(李倧)은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의 장남으로 태어나 광해군 15년(1623)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시대를 역행한 친명사대주의를 추구하는 서인의 추대로 즉위한 만큼 후금(後金 · 청나라의 전신)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후금은 조선과 명나라가 미개한 오랑캐라고 깔보던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나라였다.

인조 14년(1636) 청 태종 누르하치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청 태종의 즉위식에 마지못해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하늘에는 두 해가 있을 수 없듯이 두 종주국을 섬길 수 없다”면서 절을 거부했다. 측근에서 목을 따야 한다고 펄펄 뛰었지만 청 태종은 두 사신을 돌려보내고, 조선에 용골대를 보내 인조를 책망하는 한편, 이제부터는 형제지국이 아닌 군신지국의 예를 취할 것 등을 요구했다.

조정은 명분론이 우세하여 인조는 청국 사신을 만나주지도, 국서를 받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사신을 죽여 버리자는 말까지 나오자 용골대는 도망쳐 청 태종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화가 치민 청 태종은 그해 12월 1일 몸소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것이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청군은 10일 안주, 13일 평양, 14일 개성 순으로 무인지경을 가듯 남하했다.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남색 군복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나서 한강변 송파나루 삼전도(三田渡)의 항복식장으로 내려갔다. 인조는 100보를 걸어 나가 먼저 맨땅에서 삼배구고두, 즉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며 세 차례 절을 했다.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자에게 하루에 열두 차례나 큰절을 올렸으니 치욕도 그런 치욕이 다시없었다.

그렇게 사상 전례 없는 치욕을 당한 인조는 전쟁이 끝나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를 왕권 안보의 걸림돌, 즉 정적(政敵)으로 여겨 독살했으며, 며느리 강씨와 두 손자까지 죽여 버렸으니 참으로 비정하고 악랄한 아비요 시아비요 할아비요 임금이었다.

나쁜 역사는 되풀이된다. 천성이 잔인하고 교활한 지도자, 무능한 지도자, 사안(事案)마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고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지도자, 존재 자체가 재앙과도 같은 지도자가 끌고 가는 나라의 앞날에 희망은 없다.


<숙종과 정조 그리고 고종>

'근대 조선' 발목 잡은 대보단(大報壇)을 아시나요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 2011.07.13


"임진왜란때 도와준 明에 감사" 1705년 숙종부터 머리 조아려
개혁 군주 정조도 매년 찾아… 대한제국 세우며 환구단으로


1894년 5월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일본의 침탈과 서구 열강들의 각축으로 나라의 지경은 더없이 위태로웠다. 그 무렵 어느 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 후원으로 향했다. 아홉 계단 위 제단에는 중국 황제의 신위(神位)가 적힌 황색 지방(紙榜)이 있었다. 대보단(大報壇). 명나라 황제의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제단이다. 쇠락하던 조선의 국왕은 왜 사라진 제국의 혼령에게 머리를 조아렸을까? 이 대보단의 숨은 뜻을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풀어낸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계승범 서강대 대우교수는 신간 '정지된 시간'(서강대출판부)에서, 조선 후기 200년간 이어진 대보단 제례는 당대 엘리트층의 뿌리 깊은 존명의리(尊明義理) 사상을 담고 있었으며,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 '의식의 족쇄'였다고 주장했다.

◆통치이념의 위기 타개책

대보단은 1705년 숙종 때 처음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구해준 명(明)나라 만력제의 은덕을 기린다는 취지였다. 첫 제례에서 숙종은 직접 술을 올리고 음복했다. 당시 조선은 삼전도 항복(1637·청 태종에 패한 후의 굴욕적인 항복) 이후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새 책봉국이 되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엔 여전히 명이 '아버지의 나라'였다. 유교 질서의 종주국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지배 질서마저 흔들릴 참이었다. 목소리만 높았던 북벌론도 기세가 꺾이자, 왕실로서는 존명의리의 이데올로기를 복구할 '상징'이 필요했다. 숙종은 대보단 제례를 주창하면서 '명과의 특별한 군부·신자 관계와 임란 때 나라를 살려준 재조(再造)의 은혜'를 강조했다.

대보단은 후대로 가면서 더 강화됐다. 영조는 홍무제와 숭정제를 제례 대상에 추가했다. 명을 세운 홍무제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대조(大造)의 은혜를 베푼 왕으로, 숭정제는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군을 보내준 왕으로 추대됐다. 이 세 황제의 기일마다 제례를 행하도록 규정까지 내렸다. 명이 망하면서 끊어진 삼황(三皇)에 대한 제사가 조선에서 이어지는 웃지못할 상황이 됐다.


▲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묘사된 대보단.

◆정조도 "황제 은혜 못 잊어"

'계몽군주' 정조도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주년이 되던 해 제례 후 정조는 이렇게 전교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이 다시 지음을 받은 날이다. 아! (명나라) 황제의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정조의 친행(제례에 직접 행차) 비율은 24년 재위기간 중 23년(96%)으로 역대 최고였다. 정조는 서울의 유생과 무인에게도 제례 참석을 의무화해 불참자는 한시적으로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벌을 주었다.

나라가 기울던 고종에 와서도 제례는 계속됐다.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가 이어지던 1882~86년 고종의 대보단 친행은 더 잦았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기 한 달여 전까지도 홍무제 기일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 제례는 갑오개혁(1894~1895)에 와서야 중단됐다.

◆중화의식 집착…세계질서 못 봐

존명의리의 자취는 조선의 '자주독립' 후에도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환구단(圜丘壇·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을 세우고 천제(天祭)를 지낼 때, 그 근거는 "중화문명의 정통이 명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논리이다.
계승범 교수는 대보단의 질긴 생명력을 조선 사회가 딛고 있던 이데올로기 체계에서 찾는다. 

통상 국가의 권위가 무력과 이념에서 나온다고 가정할 때, 조선은 특히 문(文·이념)을 앞세우며 명에 대한 사대를 국시(國是)로 천명했다. 역대 왕들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은 제후임을 강조했다. 강력한 친위대를 갖지 못한 국왕으로서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존명의리의 가치를 솔선수범하고 제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가 대보단이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질서가 기울던 19세기에도 조선 주류 지배층은 독자적 권위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중화를 더욱 내면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럼으로써 '오랑캐에 더럽혀진 전도된' 국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한 채 국난을 극복하고 통치 질서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저자는 "대보단은 단기적으로 왕조 통치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변국들의 국력·정세 변화를 조선이 따라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고 썼다. 명나라의 정신적 유산에 사로잡혀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조선의 운명에는 '대보단'이란 또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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