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십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
코리아글로브 [백두비나리] 역사기행
4347. 2.8~9(토일)
고부-두승산-죽산-황토현-백산-전주성-삼례-우금치
반만년 코리아 역사공동체가 셋째 갑자에 들었습니다.
첫 갑자(1894-1953)엔 죽었다 되살아났고,
두 갑자(1954-2013)엔
우물안 개구리에서 지구마을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세 갑자(2014~) 들어 비로소 공존공영의 하늘겨레로
홍익인간의 선비로 무등의 단골로 제 얼굴을 되찾을 것입니다.
갑오년 정월 대보름을 대엿새 앞두고
녹두장군의 봉기 120주년을 하루이틀 앞두고,
마지막 횃불이 거세게 타올랐던 그 역사의 터에 서겠습니다.
우금치부터 섬마을까지 피로 적신 일제는
그도 모자라 고부를 세 조각 내었습니다.
남산 국사당처럼 되돌릴 이가 나타날 때가 되었으니
호남의 삼신산 두승산 444m 마루에서 그 비나리를 바치겠습니다.
함께 하소서.
아직도 저승 문턱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사무친
님들의 노래를 이제 우리가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두 갑자가 지났으니 이제 이름도 제대로 붙여야 겠습니다.
동학농민운동 /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이나 농민은 너무 좁습니다.
그리고 운동이라니 참으로 한가한 말입니다.
임진왜란처럼 갑오왜란으로 부르고 싶지만 너무 나간 이야기고
딱 6.25전쟁처럼 갑오전쟁으로 부름이 좋겠다 싶습니다.
앞장> 이재선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동학민족통일회 말뚝이)
도움>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국중길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흐름☞
< 2/8 >
09:00 떠남- 판교역 신분당선
12:00 사라진 고부- 고부 관아터
12:30 점심
13:30 두승산- 비나리
16:30 사발통문의 죽산마을(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황토현과 기념관
18:30 짐풀고 저녁
송참봉조선마을.정읍
063-532-0054 folkvillage.co.kr
20:00 뒤풀이
22:00 꿈나라
< 2/9 >
08:00 아침
09:00 만석보와 부안 백산(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12:00 점심. 콩나물국밥
13:00 용머리고개-전주성 풍남문-
전주관아(첫 집강소)-삼례(2차 신원)
17:00 막걸리 한상
19:00 우금치 그리고 집으로!
코리아글로브 [백두비나리]
갑오전쟁 120해 역사기행
<비나리>
반만년 코리아 역사공동체가
단기 4347년 근현대의 물길에서
셋째 갑자에 들었습니다.
첫 갑자(1894-1953)엔
죽었다 되살아났고
두 갑자(1954-2013)엔
우물 안 개구리에서
지구마을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세 갑자(2014~) 들어 비로소
공존공영의 하늘겨레로
홍익인간의 선비로
무등의 단골로
제 얼굴을 되찾을 것입니다.
갑오년 정월 대보름을
대엿새 앞두고
녹두장군이 일어선 120해를
하루 이틀 앞두고
마지막 횃불이 거세게 타올랐던
그 역사의 터에 섰습니다.
우금치부터 섬마을까지
피로 적신 일제는 그도 모자라
고부를 세 조각을 내었습니다.
마뫼의 국사당처럼
되돌릴 이가 나타날 때가 되었으니
호남의 삼신산 두승산 444m 마루에서
이제야 비나리를 바칩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피맺힌 울음이
고부 벌판을 넘어 온나라에 사무칩니다,
여러 즈믄 해 그리도 잘 먹고 잘 살던
앗사 가오리가 어쩌다 이리 굶주림에
몸부림쳐야 했는지 서러움이 북받칩니다.
청나라를 불러 제 백성을 베고자 했던
이들이 있어 갑오의 왜란이라 말을 못합니다.
그를 틈타 요시다 쇼인의 칼을 뻗치던 이들
갑오전쟁의 씨알은 조선의 백성 모두입니다.
제 뿌리를 잊고 요순을 그리워하고
제 역사를 없애고 주자의 제자이기 청하며
끝내는 망한 나라 明의 번국임을 자랑하던
회칠한 무덤 썩은 사대부들의 나라
임진 병자 난리에 무너져야 할 나라를
온몸으로 지켜내다 마침내 삭아버린
조선의 백성들이 앉아 竹山 서서 白山을
이루던 저 아래 벌을 내려다봅니다.
그 아픔이 나라 잃은 서른다섯 해로
스탈린의 졸개들이 칼질한 나라로
굶어죽은 3백만 이북동포들의 핏발로
나아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스러진
1억의 이름 없는 넋으로 떠돕니다.
통일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에서
그 어떤 죽음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 모두의 목숨을 값지게 되살리겠습니다.
水雲에서 海月을 거친 피내림은
義菴에 이르러 기어이 제 종교를 죽이고
나라를 살리며 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모자라 오늘 이 자리에
동학에 이어 제 몸을 불사른 대종교 그리고
불제자와 예수의 제자들을 못 모셨습니다.
화룡의 세 종사들께 드린 약속이
아직도 시퍼렇습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동학민족통일회와 코리아글로브의 말뚝이인
이재선이 그 마음을 다하여 여기 왔습니다.
천지의 기운을 내려 받은
백두비나리의 말뚝이 국중길 최연화 국예림
역사기행의 말뚝이 김석규 박미화 김한울도
더불어 함께 했습니다.
무등의 한어버이시여.
홍익인간의 한스승이시여.
하늘겨레의 한임금이시여.
지난 두 갑자의 모든
거룩한 어른들이시여.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비나리의 사람으로 거듭 나도록 지켜주소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이다.
참고 글☞
http://m.blog.daum.net/crane43/15876808
갑오년에 있었던 일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갑오년 5월 7일(음력), 서기로는 1894년 6월 10일(양력). 농민군과 관군은 전주에서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날 청국 군대가 서해안 아산만에 상륙했다. 이틀 후에는 일본 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이에 앞서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걸고 봉기했다. “벼슬아치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시들면 국가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국가의 봉록만 없애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랴.”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군을 불러들여
봉기할 때 3천여 명이었던 농민군은 고창을 지나 백산에 이르니 8천 명이 되었고, 백산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인천에서 청국의 배를 타고 이동하여 군산에 상륙했던 서울의 관군도 황토현에서 격파했다. 농민군은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무안-나주를 거치는 동안 세력이 더욱 불었다.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농민군이 또 승리했다.
관군은 전주성으로 후퇴했고, 농민군이 들이닥치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제 전주성은 농민군이 점령하고, 관군이 공격하는 형국이 되었다. 안팎의 정세를 고려한 전봉준이 화해를 요청하고 관군이 받아들였다. 농민군은 탐관오리 응징 등의 개혁을 요구하고 해산하면서, 53곳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청국은 임오군란 때(1882년) 병사들이 모시려던 대원군을 끌고 가는 등 조선에 대해 패권을 행사했고, 대원군과 맞서던 명성왕후는 청국에 의존했다. 2년 후 청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김옥균 일파가 일으켰던 갑신정변 때(1884년) 일본은 아직 청국에 대적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때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그 때가 왔다. 조선의 조정은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 즉 청국의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이를 구실로 일본도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대궐에 침입하여 친청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을 수립했다. 왕실과 정권의 안전을 위해 강대국의 우열을 저울질하며 강대국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결국은 승자의 요구에 농락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군대는 아산만에 있던 청국 군대를 공격했다. 청국이 패퇴했다. 평양까지 후퇴한 청국 군대는 평양성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압록강 너머까지 쫓겨 갔다. 청일의 지위는 역전되었다.
친일 갑오정권은 갑오경장을 추진했다. 내용이야 오랫동안 논의된 필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모양내기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갑오정권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와 탄압의 양면정책을 본격적 토벌정책으로 전환했다. 농민군 지도자는 이런 안팎의 정세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일본이 개화라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백성들에게 발표하고, 격서도 없이 군대를 도성에 끌어들이고 밤중에 왕궁을 깨부숴 왕을 놀라게 했다. 초야에 있는 사람이라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분함을 견디지 못할 일이다.”
“왜와 청나라가 싸우고 한쪽이 이기면 반드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우리는 숫자는 많으나 훈련이 안된 오합지중이어서 승산이 없소. 해산한다는 명분으로 고을로 돌아가 사태의 변화를 살펴보는 게 낫겠소.”
“맞소,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많은 호응이 있었지만, 아직 양반이나 선비들이 따르지 않고 있으니 아직 일을 이루기는 어렵소.”
“아니오. 이렇게 모인 무리가 일단 헤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소. 이번에 반드시 결단을 내야하오.”
우리의 갑오년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오랜 고심 끝에 싸우자는 쪽으로 결정했다. 농민군들은 진격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보세[갑오세] 가보세[갑오세] / 을미적 을미적 / 병신 되면 못 가리” 갑오년(1984년)에 미적거려 을미년(1985년)이 지나고 병신년(1986년)에 이르면, 일이 회복할 수 없도록 그르치게 될 것이니 갑오년에 승부를 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삼례에서 4천 명이었던 농민군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관군은 3천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600여 명이었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병사로 미제 슈나이더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북진하는 전봉준의 1차 목표는 공주였다. 일본군도 공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본군이 공주를 먼저 점령해버렸다.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은 온 힘을 다해 공격했지만 전투를 할 때마다 절반이 죽어 힘이 빠지고 사기가 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민군 같은 비정규군이 잘 훈련된 정규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무모한 것이었다. 최후의 격전을 벌인 7일간의 우금치 전투가 끝나고 나니, 농민군은 죽거나 달아나 겨우 500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일대에는 수많은 시체가 나뒹굴었다.
일본군은 단순히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앞으로 병탄할 조선에서 미리 저항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과제였다. 농민군은 저항의 불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농민군을 평야인 호남 쪽으로 몰아 토끼몰이 하듯 섬멸작전에 나섰다. 들판의 풀들이 짓밟히고 녹두꽃도 떨어졌다.
120년 전 갑오년의 장면이다. 우리의 갑오년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코리아글로브 [백두비나리] 역사기행
4347. 2.8~9(토일)
고부-두승산-죽산-황토현-백산-전주성-삼례-우금치
반만년 코리아 역사공동체가 셋째 갑자에 들었습니다.
첫 갑자(1894-1953)엔 죽었다 되살아났고,
두 갑자(1954-2013)엔
우물안 개구리에서 지구마을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세 갑자(2014~) 들어 비로소 공존공영의 하늘겨레로
홍익인간의 선비로 무등의 단골로 제 얼굴을 되찾을 것입니다.
갑오년 정월 대보름을 대엿새 앞두고
녹두장군의 봉기 120주년을 하루이틀 앞두고,
마지막 횃불이 거세게 타올랐던 그 역사의 터에 서겠습니다.
우금치부터 섬마을까지 피로 적신 일제는
그도 모자라 고부를 세 조각 내었습니다.
남산 국사당처럼 되돌릴 이가 나타날 때가 되었으니
호남의 삼신산 두승산 444m 마루에서 그 비나리를 바치겠습니다.
함께 하소서.
아직도 저승 문턱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사무친
님들의 노래를 이제 우리가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두 갑자가 지났으니 이제 이름도 제대로 붙여야 겠습니다.
동학농민운동 / 갑오농민전쟁에서 동학이나 농민은 너무 좁습니다.
그리고 운동이라니 참으로 한가한 말입니다.
임진왜란처럼 갑오왜란으로 부르고 싶지만 너무 나간 이야기고
딱 6.25전쟁처럼 갑오전쟁으로 부름이 좋겠다 싶습니다.
앞장> 이재선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동학민족통일회 말뚝이)
도움> 동학혁명기념관 관장
국중길 코리아글로브 집행위원
흐름☞
< 2/8 >
09:00 떠남- 판교역 신분당선
12:00 사라진 고부- 고부 관아터
12:30 점심
13:30 두승산- 비나리
16:30 사발통문의 죽산마을(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황토현과 기념관
18:30 짐풀고 저녁
송참봉조선마을.정읍
063-532-0054 folkvillage.co.kr
20:00 뒤풀이
22:00 꿈나라
< 2/9 >
08:00 아침
09:00 만석보와 부안 백산(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12:00 점심. 콩나물국밥
13:00 용머리고개-전주성 풍남문-
전주관아(첫 집강소)-삼례(2차 신원)
17:00 막걸리 한상
19:00 우금치 그리고 집으로!
갑오전쟁 120해 역사기행
<비나리>
반만년 코리아 역사공동체가
단기 4347년 근현대의 물길에서
셋째 갑자에 들었습니다.
첫 갑자(1894-1953)엔
죽었다 되살아났고
두 갑자(1954-2013)엔
우물 안 개구리에서
지구마을 사람으로 바뀌었으며
세 갑자(2014~) 들어 비로소
공존공영의 하늘겨레로
홍익인간의 선비로
무등의 단골로
제 얼굴을 되찾을 것입니다.
갑오년 정월 대보름을
대엿새 앞두고
녹두장군이 일어선 120해를
하루 이틀 앞두고
마지막 횃불이 거세게 타올랐던
그 역사의 터에 섰습니다.
우금치부터 섬마을까지
피로 적신 일제는 그도 모자라
고부를 세 조각을 내었습니다.
마뫼의 국사당처럼
되돌릴 이가 나타날 때가 되었으니
호남의 삼신산 두승산 444m 마루에서
이제야 비나리를 바칩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피맺힌 울음이
고부 벌판을 넘어 온나라에 사무칩니다,
여러 즈믄 해 그리도 잘 먹고 잘 살던
앗사 가오리가 어쩌다 이리 굶주림에
몸부림쳐야 했는지 서러움이 북받칩니다.
청나라를 불러 제 백성을 베고자 했던
이들이 있어 갑오의 왜란이라 말을 못합니다.
그를 틈타 요시다 쇼인의 칼을 뻗치던 이들
갑오전쟁의 씨알은 조선의 백성 모두입니다.
제 뿌리를 잊고 요순을 그리워하고
제 역사를 없애고 주자의 제자이기 청하며
끝내는 망한 나라 明의 번국임을 자랑하던
회칠한 무덤 썩은 사대부들의 나라
임진 병자 난리에 무너져야 할 나라를
온몸으로 지켜내다 마침내 삭아버린
조선의 백성들이 앉아 竹山 서서 白山을
이루던 저 아래 벌을 내려다봅니다.
그 아픔이 나라 잃은 서른다섯 해로
스탈린의 졸개들이 칼질한 나라로
굶어죽은 3백만 이북동포들의 핏발로
나아가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스러진
1억의 이름 없는 넋으로 떠돕니다.
통일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에서
그 어떤 죽음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 모두의 목숨을 값지게 되살리겠습니다.
水雲에서 海月을 거친 피내림은
義菴에 이르러 기어이 제 종교를 죽이고
나라를 살리며 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모자라 오늘 이 자리에
동학에 이어 제 몸을 불사른 대종교 그리고
불제자와 예수의 제자들을 못 모셨습니다.
화룡의 세 종사들께 드린 약속이
아직도 시퍼렇습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동학민족통일회와 코리아글로브의 말뚝이인
이재선이 그 마음을 다하여 여기 왔습니다.
천지의 기운을 내려 받은
백두비나리의 말뚝이 국중길 최연화 국예림
역사기행의 말뚝이 김석규 박미화 김한울도
더불어 함께 했습니다.
무등의 한어버이시여.
홍익인간의 한스승이시여.
하늘겨레의 한임금이시여.
지난 두 갑자의 모든
거룩한 어른들이시여.
저희를 굽어 살피소서.
비나리의 사람으로 거듭 나도록 지켜주소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이다.
참고 글☞
http://m.blog.daum.net/crane43/15876808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갑오년 5월 7일(음력), 서기로는 1894년 6월 10일(양력). 농민군과 관군은 전주에서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날 청국 군대가 서해안 아산만에 상륙했다. 이틀 후에는 일본 군대가 인천에 상륙했다.
이에 앞서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내걸고 봉기했다. “벼슬아치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시들면 국가는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여 국가의 봉록만 없애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랴.”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군을 불러들여
봉기할 때 3천여 명이었던 농민군은 고창을 지나 백산에 이르니 8천 명이 되었고, 백산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인천에서 청국의 배를 타고 이동하여 군산에 상륙했던 서울의 관군도 황토현에서 격파했다. 농민군은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무안-나주를 거치는 동안 세력이 더욱 불었다.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농민군이 또 승리했다.
관군은 전주성으로 후퇴했고, 농민군이 들이닥치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제 전주성은 농민군이 점령하고, 관군이 공격하는 형국이 되었다. 안팎의 정세를 고려한 전봉준이 화해를 요청하고 관군이 받아들였다. 농민군은 탐관오리 응징 등의 개혁을 요구하고 해산하면서, 53곳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청국은 임오군란 때(1882년) 병사들이 모시려던 대원군을 끌고 가는 등 조선에 대해 패권을 행사했고, 대원군과 맞서던 명성왕후는 청국에 의존했다. 2년 후 청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김옥균 일파가 일으켰던 갑신정변 때(1884년) 일본은 아직 청국에 대적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때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그 때가 왔다. 조선의 조정은 자국의 백성을 진압하고자 외국, 즉 청국의 군대를 불러들인 것이다. 이를 구실로 일본도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대궐에 침입하여 친청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을 수립했다. 왕실과 정권의 안전을 위해 강대국의 우열을 저울질하며 강대국의 힘을 빌리려 했지만, 결국은 승자의 요구에 농락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군대는 아산만에 있던 청국 군대를 공격했다. 청국이 패퇴했다. 평양까지 후퇴한 청국 군대는 평양성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압록강 너머까지 쫓겨 갔다. 청일의 지위는 역전되었다.
친일 갑오정권은 갑오경장을 추진했다. 내용이야 오랫동안 논의된 필요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모양내기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갑오정권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선무와 탄압의 양면정책을 본격적 토벌정책으로 전환했다. 농민군 지도자는 이런 안팎의 정세를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일본이 개화라는 이름으로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백성들에게 발표하고, 격서도 없이 군대를 도성에 끌어들이고 밤중에 왕궁을 깨부숴 왕을 놀라게 했다. 초야에 있는 사람이라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분함을 견디지 못할 일이다.”
“왜와 청나라가 싸우고 한쪽이 이기면 반드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우리는 숫자는 많으나 훈련이 안된 오합지중이어서 승산이 없소. 해산한다는 명분으로 고을로 돌아가 사태의 변화를 살펴보는 게 낫겠소.”
“맞소,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많은 호응이 있었지만, 아직 양반이나 선비들이 따르지 않고 있으니 아직 일을 이루기는 어렵소.”
“아니오. 이렇게 모인 무리가 일단 헤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소. 이번에 반드시 결단을 내야하오.”
우리의 갑오년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오랜 고심 끝에 싸우자는 쪽으로 결정했다. 농민군들은 진격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보세[갑오세] 가보세[갑오세] / 을미적 을미적 / 병신 되면 못 가리” 갑오년(1984년)에 미적거려 을미년(1985년)이 지나고 병신년(1986년)에 이르면, 일이 회복할 수 없도록 그르치게 될 것이니 갑오년에 승부를 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삼례에서 4천 명이었던 농민군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한편 관군은 3천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600여 명이었다. 일본군은 잘 훈련된 병사로 미제 슈나이더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북진하는 전봉준의 1차 목표는 공주였다. 일본군도 공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본군이 공주를 먼저 점령해버렸다. 전봉준이 이끈 농민군은 온 힘을 다해 공격했지만 전투를 할 때마다 절반이 죽어 힘이 빠지고 사기가 떨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농민군 같은 비정규군이 잘 훈련된 정규군과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무모한 것이었다. 최후의 격전을 벌인 7일간의 우금치 전투가 끝나고 나니, 농민군은 죽거나 달아나 겨우 500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일대에는 수많은 시체가 나뒹굴었다.
일본군은 단순히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앞으로 병탄할 조선에서 미리 저항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과제였다. 농민군은 저항의 불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농민군을 평야인 호남 쪽으로 몰아 토끼몰이 하듯 섬멸작전에 나섰다. 들판의 풀들이 짓밟히고 녹두꽃도 떨어졌다.
120년 전 갑오년의 장면이다. 우리의 갑오년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