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대구정서를 꿰뚠 글...

by 永樂 posted Apr 03, 2003
[주간조선] "대구는 죽었다" 여론 폭발직전




[주간조선 최신호] 2ㆍ18 대구지하철 참사의 현장인 대구 중앙로역 구내는 지금도 역겨운 유독가스 냄새가 남아있다. 벽면 가득한 시커먼 그을음 속에는 그날 아침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죽어간 이들의 피끓는 절규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꽃다운 나이에 숨진 이들의 사진, 국화꽃, 가족이나 친구를 잃고 통곡하는 이들이 남긴 글들이 보는 이의 애간장을 끓게 한다. 중앙로역 구내를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대구 시민들이 과연 이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중앙로역 구내 곳곳에는 사고를 일으킨 당국과 사고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당국의 태도에 분노하는 낙서들이 보였다. 주 타깃은 조해녕(曺海寧) 대구시장. 조해녕 XXX, 조해녕 구속하라, 조해녕 사표 써, 은폐축소 조해녕 구속수사하라, 조해녕ㆍ윤진태ㆍ정재완 XXX, ….
조해녕 시장과 함께 비난의 대상이 된 정재완씨는 매일신문 사장이다. 정재완 사장은 최근 지하철참사 사고수습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행동과 관련, 사석에서 “지나친 행동은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이것이 지역언론에 보도되어 대책위와 시민단체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매일신문 임원들은 대책위를 찾아가 사과를 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사석에서 언론 보도를 전제로 말하지 않은 것이 과연 보도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유가족ㆍ부상자ㆍ실종자 가족들의 감정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조그마한 불기만 있으면 폭발하는 인화성 물질 같은 게 이들의 정서다.


“대구 일을 대구 사람이 왜 해결 못하죠?”

2월 18일 이후 대구 중앙로 도로는 폐쇄되었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지나다니는 시민도 줄어들었고 상인들은 장사가 안된다고 울상이다. 급기야 3월 27일에는 상가번영회원 700여명이 중앙로 차량 통행 재개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중앙로변 대우서적 여주인은 그날 아침 버스를 타고 서점으로 출근을 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화재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50대 여주인은 그날 이후 대구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말했다.
“그냥 살아요.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대구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여주인이 기자에게 반문했다.
“근데 대구에서 생긴 일을 왜 대구 사람들이 해결하지 못하죠. 왜 중앙에서 내려와야 하는 겁니까? 대구 사람들은 그렇게 힘이 없는 건가요?”
2ㆍ18 대구지하철 참사는 16대 대선이 있은 지 꼭 2개월 만에 일어났다. 대구시민들은 지난해 12월 19일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 77.8%라는 지지를 보냈다. 경북지역(73.5%)보다도 높은 전국 최고의 지지율이었다. 15대 대선에 이어 두 번째로 압도적 지지를 보낸 것이다. 대구 시민들은 ‘이회창 후보’가 영남 정서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한나라당 후보였기 때문에 무조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또다시 패배했고 대구 시민들의 좌절감이 깊어진 가운데 이번에는 어처구니없는 대구지하철 참사가 터졌다. 지하철 참사는 대구 시민들을 정신적으로 초토화시켰다. 그래서 일부 시민들은 대구를 ‘죽은 도시’라고 규정한다. 일부 상인들은 ‘죽은 도시’에서 무슨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하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대구시민들은 사고 자체보다는 사고 수습을 하는 지방정부의 태도에 격앙한다. 중앙로역과 거리 곳곳에는 대구시장, 대구지하철공사, 대구지방경찰청, 대구소방서, 선출직 공직자 등을 규탄하는 글이나 현수막이 많이 붙어 있다. 그들의 분노는 시장을 비롯한 지방정부 관계자들의 권위주의, 관료주의와 구태의연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구 서문시장에서 주단포목가게를 운영하는 50대 여성은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은폐하려고 드느냐”고 말했다.

“물갈이 안하면 한나라 안찍겠다”

한나라당은 대구지하철 참사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나 대구시장과 국회의원 11명 전원, 구청장 전원이 한나라당 소속이다보니 사실상 대구의 지방정부인 한나라당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와 달라졌다. 대구시민회관에는 합동분향소, 유가족ㆍ부상자ㆍ실종자 대책위, 프레스센터, 심리상담소가 설치되어 있다. 시민회관 대강당 1층 로비 한쪽에는 민주당 대책본부가 있어 본부장(안경욱 북갑지구당 위원장)과 대외협력부장이 자질구레한 민원을 해결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당 대책본부는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다 못해 3월 초에 철수했다.
지역의 중견 언론인 P씨는 지하철 참사 이후 대구 민심과 관련 이런 말을 했다.
“민주당이 사건 발생 이후 먼저 도착해 대책회의를 했고 나중에 한나라당이 왔다. 또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조해녕 시장을 보호하려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시민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뽑아줬는데 너희들은 그동안 뭘 했느냐?’고 생각한다. 16대 총선에서처럼 한나라당이기 때문에 무조건 찍어주지는 않겠다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한나라당 임마들은 아니다, 꼴도 보기 싫다, 물갈이 해오면 찍어주지 억지로 찍지는 않겠다’는 게 현재 대구의 정서다.”
중앙 정치권에서는 지금 당장 선거를 하면 대구에서 한나라당이 11개 선거구 중 4개밖에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최악의 분석도 한다. 그만큼 대구 정서가 나쁘다는 뜻이다. 40대 중앙지 기자는 “분위기 탓도 있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대구 출신 한나라당 의원들이 경쟁력이 없다는 점”이라면서 “노무현 정부가 잘하고 민주당이 좋은 인물을 후보로 낸다면 다음 총선에서 해볼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구청장은 “대구 지역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정활동에서도 경쟁심이 없고 결과적으로 경쟁력이 없는 의원들로 전락했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대구 시민들은 더 무력감을 느낀다”고 진단한다.
윤덕흥 교육부총리, 권기홍 노동부장관,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노무현 정부에서 내각과 청와대에 기용된 대구 출신 인사들이다. 이들 세 사람은 대구 지식인 사회의 진보그룹으로 분류되는 ‘대구사회연구소’ 출신이다. 노무현 정부 인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호남의 퇴조와 영남의 약진 현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TK(대구·경북) 출신 요직 기용과 관련, 현재까지는 지역 여론이 호응하는 분위기를 읽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그들은 처음부터 TK 본류와 다른 부류였다”고 평가절하한다. 보편적인 중심세력에서 기용했다면 모를까 워낙 처음부터 성향이 달랐기 때문에 대구 시민들이 특별히 노무현 정부에 대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롭고 건강한 ‘보수’ 갈망

TK 사람들은 대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이 보여준 퇴행적 행태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한나라당 꼬라지도 보기 싫다”며 그동안 외곬로 한나라당에 준 마음을 거둬들이려 한다. ‘야도(野都)’가 아닌 ‘한나라당 도시’로 다른 지역에 각인되는 것을 이제는 씻어보이겠다는 것이다. 중견언론인 P씨는 “지금 지역민들은 새롭고 건강한 보수 정당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P씨는 “다만 15대 때 자민련에 한번 속았던 전력이 있어서 나중에 여당과 합당만 안한다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구을의 안택수(安澤秀) 의원은 최근 “성안 중인 당 개혁안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 당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마음 둘 곳을 잃은 지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강재섭 대구시지부장이 대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 출마를 선언한 강재섭(姜在涉) 의원이 TK지역의 유일한 정치적 희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강 의원에게 기대를 걸면서도 강 의원이 확실하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영남 출신의 한나라당 중진 의원은 현재의 한나라당 기류에 대해 “난파선에서 사과 몇 개를 건지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라고 규정했다.
“당 개혁특위에서 확정한 특위안을 하염없이 시간만 끌고 있다. 5월 중에 ‘노무현 당’이 뜰 텐데 거기에 대비하려면 한나라당이 체제정비라도 해놔야 하는데 우리 당에서는 총선에서의 영향력 행사라는 작은 이익을 취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당내의 꼴통들은 배가 가라앉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선실에 나뒹구는 사과 몇 개를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할 뿐이다.”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중앙당사 외벽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아성이었던 대구에서는 다시 태어나겠다는 한나라당의 약속을 믿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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