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김]우울한 귀가-구정은

by 이왕재 posted Apr 03, 2003
제가 있는 한 모임에서 이라크전 참전의 득실 또는 이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파병은 노무현의 개혁을 위한 현실적 판단이라는 한 선배의 글에 얼마전에 이라크에 문화일보 기자로 다녀온 구정은이라는 후배가 글을 올렸습니다. 허락없이 옮깁니다.
저는 그의 심정이 윤여진씨가 옮긴 김준섭님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하나의 마음이 다른 의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가슴아프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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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귀가 - 구정은

(전략)

지난주에 요르단-이라크 국경지대에 있는 난민촌에 갔는데
웅성웅성 각국 기자들 대기중이었구요.
그 전날 바그다드 공습 보면서, 다들 무참한 심정들이었습니다.
바그다드가 어떤 도시냐?
거기가 사담 후세인 만의 도시냐.
아니다, 바그다드는 알리바바와 셰라자드의 도시이기도 하고,
수백만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이기도 하다,
까디미야의 황금돔 사원과 알 주베이다의 기묘한 탑이 있는 곳,
시장통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
세계에서 몇 안되는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다.
그걸 다 부숴버리냐. 그건 전쟁범죄다.

요르단의 여기자가 저한테 왔어요.
"어제 당신네 대통령이 미국 지원한다고 하더라."
"너네 왕도 미국 지원하잖아."
햇볕 쬐려고 물통 옆에 앉아있는데 누가 와서 앉더라구요.
"어, 우리 어디서 만났던 것 같애요."
"그러게, 정말. "
그러고보니 작년에 바그다드에서 만났던 일본 기자 시마다였습니다.
"어제 우리 대통령이랑 당신네 총리가 하루종일 CNN에 나오더군요."
"그랬지요. 그런데 당신네 새 대통령은 젊은 사람들이 뽑아준 개혁파 아니었나요."
"맞아요. 나도 그 사람 찍었어요."
"우리 총리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atmosphere'의 문제래요, 글쎄."
시마다가 웃더군요. 저도 웃었습니다. 지금 어떤 심정으로 여기 서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서로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린 국적이 곧 도덕성을 상징하는 곳에 와 있으니까.
난민촌에 가는 길에 택시기사가 암만의 미국대사관 가리키면서
"제국주의자들의 성"이래요.
"미국은 이라크 다음에 북한을 공격하겠다는데 사우스코리아는 왜 미국을 지지해요?"
이 사람들이 북한 얘기를 꺼내면 더이상 할 말이 없어지지요.


바그다드의 황혼은 아주 멋있습니다.
티그리스 강 건너편으로 지는해.
거기 애들은 정말 이뻐요.
꼬질꼬질하고, 얼마나 이쁜지.

저는 지지난주에 바그다드에서 나왔는데요
바그다드는 도시가 정말 너덜너덜해요.
12년간 관리를 못했으니 그럴 수 밖에요.
골목은 너저분하고 건물은 누더기같고.
그런데 너무 좋아요, 그 곳이.
바그다드 들어간 사람은 다 그래요.
아, 여기가 바그다드구나,
바그다드는 바그다드로구나.

독재의 상징 사담타워, 대추야자 가로수,
한강처럼 제방 쌓고 잘 정리해놔서 보기 싫은 티그리스강,
가난한 주제에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들.
시내를 벗어나면 갈대숲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위를 나는 새들, 모래바람.
시장통에서 손 벌리는 이쁜 꼬마애들.

바그다드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어쨌든 사담 후세인은 독재자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질문이죠.
사담 후세인은 죽일 놈 맞습니다.

우리나라도 독재국가였죠.
이승만도 독재했다 그러고, 박정희도 독재 했다 그러고,
전두환 노태우도 독재 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50년 가까이 독재국가였는데
독재한다고 미국이 폭탄 쏟아부었으면
이 정도라도 살고 있겠느냐구요.
독재정권에 붙어 싸워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망명한 사람 감옥간 사람 죽은 사람도 있고
그러면서 또 월드컵도 하고 올림픽도 치르고
세상이 바뀌다보니 대통령 선거도 우리 손으로 해보고
그러면서 세계화인지 뭔지도 하고
회사 다니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렇게 세상 사는거 아니냐구요.
왜 저 사람들에게서만 그럴 기회를 빼앗느냐구요.

인구의 50%가 애들인 나라입니다, 이라크는.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미국은 지금
애들한테 크루즈미사일을 쏟아붓고 있는 겁니다.

바그다드에서 저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거기서 만났던 성자같은 신부님이 공습 때문에 돌아가시면 어떡해.
영어 사전 하나 살 돈이 없어서 쥐었다놨다 하던 대학생놈이 죽으면 어떡해.
20달러 줄 것 못 주고 빠져나왔는데.
꼭 다시 가서 5달러 더 얹어서 줘야 하는데.
지금 걔가 내 욕하고 있을 거 아냐,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그 애들, 죽으면 어떡해.
호텔방에 들어와서 매일 울었어요.
티그리스 강 보면서. 갈대밭 보면서, 건너편 대통령궁이랑 아파트숲 보면서.

아는 사람 중에 사진을 멋지게 잘 찍는 사람이 있어서
저도 그렇게 예술사진 좀 찍어보려고
바그다드에서 아이들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호텔방에 앉아서 컴퓨터에 사진들 올려놓고 보면
지금 내가 돌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곧 죽을지 모르는 애들 사진 찍어서 뭘 어쩌려구.

야 꼬맹이들아
너네 그거 아냐?
전쟁 끝나면 너네 대통령 바뀐다.
혹은, 너네 대통령 바뀌어야 이 전쟁이 끝난댄다.
니들 죽을거야.
죽지 않으면, 病身 되거나
혹은 자라서 기형아 낳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이웃나라 가서 불법취업자 되거나
어쩌면 그냥저냥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사람들 만나고 돌아서면서
'저 사람 살아있어야 할텐데' 빌어야 하는 것
너무 비참합니다.
거리에 스쳐지나온 100명의 얼굴들
그 중에 5명이 죽을거라고 생각하면
100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작은지 알게 되지요.


'죄없는 시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9.11 테러로 미국에서 숨져간 수천명의 사람들이 죄없는 시민이었다고?
아니죠, 그들은 절대로 '무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살았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죄입니다.
지금 이라크인들이 '이라크 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숨져가는 것처럼,
재작년 아프가니스탄의 순박한 사람들이 미군의 폭격에서 죽어갔던 것처럼.
지금 이라크인들은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을 몰아내지 못한,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피폐해진 땅, 죽어가는 어린이들, 화염에 휩싸인 바그다드.
그것이 이라크가 '사담 후세인'이라는 지도자를
그동안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죄의 대가입니다.
뉴욕에서 숨진 수천명 또한 죄없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강대국 정부가 멋대로 전세계를 유린하도록 내버려둔 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죄의 대가를 치른 겁니다.

역사는 교훈을 얻는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대가를
불과 2년전에 그토록 혹독하게 경험해놓고서도
지금 똑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라크 땅에 사는 사람들을 마구 죽인데 대한 보복으로
미국에서는 또다시 테러가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정의' 아닌가요.
피는 피를 부른다는 단순한 진리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고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요.
그들은 무의식과 무지, 무책임, 역사의식 부재의 대가를 치르는 겁니다.

"그들이 이라크에 핵무기를 떨어뜨려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을 겁니다. 이라크인들은 다 죽은 뒤일 테니까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우리 손으로 고치게 해달라. 왜 미국이 우리를 공격하는가."
"저기 보이는 게 미국 대사관이예요. 미 제국주의자들의 성 말입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첫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두 번째는 석유를 위한 거예요."
"미국이 당신네 형제인 북한사람들을 죽이려 하는데 왜 그들을 지지합니까?"

한국은 50여년 전에 역시 처참한 전쟁을 경험했다지요.
그러고도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 남북이 서로 미워했고,
베트남에 군인들을 보내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고서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았다"면서 환호했다지요.
베트남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물론,
자신들의 핏줄인 라이따이한들에게조차 지독하게 잔인한 나라.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이라크에 군인들을 보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니고 군인도 아닙니다.
저의 기준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쟁에 반대합니다.
내게 필요한 물건을 저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면?
한국의 이해관계?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해관계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이 '국익'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이라크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옆 사람을 죽이기 전에, 자기 주위를 잘 둘러보세요.
내 친구가 남을 죽이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면,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하십시오.
적어도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함부로 지지한다 반대한다 말할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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