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에 대한 단상(2)

by 이용찬 posted May 26, 2003
통일에 대한 단상(2)

-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얻는 교훈 -

오늘날 신라의 고도인 경주에 견주어 백제의 고도(부여나 공주)와 고구려의 고도(평양)를 살펴보면 삼국통일 이후의 그 철저한 문화적 파괴에 탄식할 수 밖에 없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 패망한 왕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문화와 유적을 계승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이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도 앞선 대략 7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국과 달리 동이계 국가중에서도 그 중심에 있었던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는 분명히 그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오랜 세월 선진 왕조에 대한 정치적 소속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후진약소국으로 믿어왔던 신라로의 복속은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왕조나 주류를 형성했던 기득권층은 비록 패망했을 지라도 그것이 지식이던 무력이던 아니면 정치적 감각이던 현실적 힘을 이루거나 정치적 동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대단히 능한 사람들이다. 또 이런 피정복 국가의 지배계층은 숙명적으로 정복 국가의 지배계층에 대하여 콤플렉스를 느끼기 마련이며 비록 이전과 같거나 좀 못하더라도 피지배계층보다는 나은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생활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다시 틈을 준다는 것은 통일이후의 또다른 내란(반란)을 부추기는 것과 같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있지만 정복과 피정복의 정치적 사건이 끝난 후 그것이 어떤 형태이던 통합된 사회는 매우 불안정하다. 정복자들이 이 불안정을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은 기실 매우 간단하다. 먼저 피정복 국가의 지배계층중 후환이 될만한 세력들은 먼저 철저히 제거한다. 남겨진 자들은 정복국가에 대하여 충성할 것인지 아닌지를 택해야 한다. 비록 입으로는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완전히 이쪽 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람들의 욕구를 모두 만족시켜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다른 평화적인 방법이란 근대에 들어와 어느정도 인문주의가 정착된 다음에 고민했던 것들이며 당대에 있어서 이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사실 어느 선까지는 정복자가 선의의 양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족치 못하는 피정복자의 점점 거세지는 과도한 요구를 이기지 못한 정복자는 다시 힘에 의한 해결을 시도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종종 비극적 결말로 역사에 기록되곤 한다.

신라의 군사력은 사실 삼국중 가장 열세였던 것으로 이야기된다. 따라서 비록 수도가 함락되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호락호락 신라에 복속하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연히 부흥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비록 수뇌부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기마민족 국가였던 고구려나 백제는 당연히 많은 수의 지방호족들이 존재했었고 이들의 군사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신라는 이들을 회유하는데 성공했다. 수도의 함락서부터 줄기차게 시작된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운동은 그 표적이 당나라에 맞춰졌다.
처음에는 당나라와 손잡고 자기들의 나라를 멸망시켜 놓고 이제는 같이 손잡고 당나라를 물리치자고 하면 그야말로 너무나 뻔뻔하기 짝이 노릇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중에 나라를 복구시켜 주겠다는 어린아이도 속지않을 거짓말에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아니 알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별다른 선택이 없지 않았을까?)
670년부터 9년간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군은 신라의 편에 서서 대당 축출전쟁을 수행했다.  

당나라의 세력이 축출된 후 너무도 당연히 신라는 이들 유민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세력은 당연히 격분했겠지만 이미 대당전쟁에 힘을 소진한 그들이 선택할 길을 별로 없었다.    

아무튼 당시의 신라인들은 통일후 당나라 세력의 축출과 고구려 백제 부흥 세력의 진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번에 잡는데 성공한다.

흔히 중국의 위, 촉, 오라는 삼국의 통일과정과 견주어 보면 신라의 통일이 갖는 의미는 대번에 명백해 진다. 중국의 삼국통일은 진나라의 사마소에 의하여 겨우 이루어 졌지만 곧바로 구왕의 난이라는 내란에 빠져들었고 이후 5호16국의 시대라는 어지러울 정도의 이민족 정권의 소용돌이에서 한족의 정체성마저 불투명해지는 암흑시대를 맞게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신라의 통일은 외세의 배격과 내란의 재연방지에 성공한 상당히 의미있는 통일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250년후 민족 최초의 자주적 통일이라는 고려의 통일이 이루어 졌다. (이때 삼국의 통일보다는 비교적 쉽게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 졌다는 데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함부로 폄하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라가 통일 이후 이룬 250년의 세월은 안된 얘기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주류층과 문화의 철저한 흡수와 말살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유지하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그 주류층의 많은 부분이 당나라나 일본으로 끌려가거나 도피하였고 혹은 후일의 발해로 편입되거나 혹은 신라에 남아 그 철저한 말살정책을 견디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당나라나 일본을 택한 사람들은 이미 그 결정의 순간부터 우리의 민족사에서 제외되었지만 발해나 신라에 남아 살길을 모색한 사람들은 그 후손들이 후일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고려의 통일이라는 민족의 대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한반도에 남은 고구려, 백제인들은 일단 자기들의 정치적 욕구를 200년 가까이 잠재울 수 밖에 없었다.

1300년이 지난 지금 신라의 고구려, 백제 유민에 대한 속임과 부흥운동에 대한 약속의 배신을 가지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섣부른 감상주의는 미래의 후환을 예견하는 냉정한 눈을 흐리게 하기 쉽다. 고려의 광종과 조선의 태종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당대만을 위해 일하지 않고 기나긴 왕조의 존속과 안녕을 위하여 비록 당장에는 무자비하다는 욕을 먹더라도 냉정하게 정리할 것을 정리하였다는 데 있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 민족으로서는 당시 신라의 핵심 지도층이었던 김춘추, 김유신을 비롯 그들이 키운 인물들의 능수능란한 정치적 모략과 외교적 술수, 그리고 현실에 바탕을 둔 통치술의 과감한 실행에 감사할 도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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