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통의 정치를 영도예술로 받아들이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좌우를 막론하고 朝三暮四라며 다들 불쾌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下野'라는 극단의 표현까지 심심찮게 나오는데...
아래는 그 중의 압권인 글입니다.
'평양의 자주와 안위'를 늘 고뇌하는 이들마저
이젠 노통을 敵으로 돌리고 저주하고 있다는 증좌입니다.
그나저나 이것 참 마음이 괴롭습니다.
당사자인 노통과 그 측근들은 심각한 나르시즘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그렇다고 누구처럼 돌팔매질 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막연히 지나면 나아질 거란 기대로 허송세월하기엔
나라의 안보와 살림살이에 너무도 주름이 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집단도 가을까지는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정치꽁트]
나도 “긴급체포”하고 싶다.
어느 긴급조치 세대의 그날 일기(日記)
김민웅 2003년 6월 24일 <시대소리> (증보수정판)
2004년 6월 25일 맑음
아침부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6.25 한국전쟁 54주년의 날이 밝았다. 긴장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TV를 켰다. 모든 채널이 오전 7시 15분 중대 발표 기자회견 생중계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른 시각의 기자회견은 이례적이었다.
어제 일과 관련된 것이리라는 짐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론 끝에 “제2 반민특위(反民特委)”가 드디어 소집되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상황을 그간 어렵게 만든 주요 책임자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지 않으면 역사가 바로 설 수 없다는 성난 여론이 집약된 결과였다. 상황이 매우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반민특위” 소집은 이미 막을 길 없는 대세였다.
돌아보면 지난 1년간의 정세는 실로 한 치의 전망도 허용하지 않는 숨 막히는 우여곡절의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 정세의 최종 마무리는 “반민특위”의 가동과 정국 주도권이 의회로 넘어간 사태로 나타났다.
- 2004년 총선 결과, 반민특위 가동과 의회의 정국 주도
지난 총선에서 최대의 의석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민주햇볕당>의 김구태(金九太) 대표는 6월 10일 광화문 광장에서 오후 9시부터 밤새껏 열린 <만민(萬民) 민주회의> 석상을 통해 정국의 혼란을 막고 새로운 대통령 선출을 위한 대선을 8월 15일 이전에 하자고 제안했다. 이의(異意)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발언 말미에 “백범(白凡) 김 구 선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우리의 가슴, 우리의 역사에서 거대하게 부활하고 계시다”라고 외쳐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평소 웅변조가 아닌 그가 이 대목만큼은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었고,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NBC <100분 토론>의 스타 손석(孫錫) 사회자가 사회를 본 이날 회의는 시청률 32퍼센트를 상회, TV 중계 방송사상 세계적 기록을 남겼다. 전 국민 거의 모두가 꼬박 밤을 샜던 것이다. 말 그대로 <만민 민주회의>였던 셈이다. 시간제한 없는 끝장토론을 몇 번 해보더니 손석 사회자도 이젠 더욱 완숙해진 여유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었다. 이런 경우 흔히 격정으로만 흐르기 쉬운 토론도 저렇게 풀어갈 수 있구나하는 인상을 모두에게 깊게 남겼다.
2004년 4월 총선은 노무해(盧無海)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개혁자유당>에게 대패(大敗)를 안겼고, 영남에서 단 두석을 얻는데 그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동진(東進)정책의 참담한 실패였다. 10석을 얻어도 전국적 지지를 얻으면 지역주의를 극복한 전국당(全國黨)이 된다고 했던 호언(豪言)은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 포용력을 갖지 못한 채 선거를 치루었으니 그 결과는 자명했다. <영남패권당>이라고 우기기에도 우습게 되어 버렸다.
반면에, 무엇보다 한국정치의 미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민주노동사회당>의 대약진이었다. 권용길(權龍吉) 대표가 드디어 의회에 진출, 18석을 차지한 당의 지휘부를 구성하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권용길 대표는 <민주햇볕당>과 현안별로 연대할 것은 연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한반도 전체에 걸친 경제적 변혁과 평화정치에 주력하겠다고 밝혀 기대를 모았다. 오랜 세월 고난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던 진보정치가 대중적 기반을 견고하게 마련한 기폭점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해진다고 판단, 겸연쩍어하면서 복귀한 이해창(李海昌) 옹(翁)이 이끌게 된 <나라수구당> 또한 의외의 열세를 면치 못했다.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나라수구당>의 인기가 올라갈 줄 알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옛날 복덕방과 닮은 노인당(老人黨)이라는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나라수구당>은, 말은 정계원로였으나 정치적 고려장(高麗葬) 대상이 되고 만 김중필(金中泌) 총재가 주도한 <수구원조당>과 유사한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총선 전 <나라수구당>에 있던 개혁-진보 인사들이 <민주햇볕당>으로의 결행을 한 것도 패인의 주요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 <민주햇볕당> 절대적 지지 획득
민중들은 놀랍게도 현명해서 햇볕정책의 계승발전을 가장 중요한 선거쟁점으로 부각시킨 <민주햇볕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그 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개혁자유당>의 대표였던 김원응(金元應) 의원은 총선 직전 탈당, “평소의 정치적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서 <민주햇볕당>으로 입당, 총선 드라마 관전에 흥미를 더하였다.
대북 송금문제 특검으로 일정한 상생관계에 있던 <개혁자유당>과 <나라수구당>의 내밀한 연정계획은 총선결과로 파탄이 났고, 선거패배의 충격으로 인해 노무해 정권은 정치적 공황상태에 급속히 빠져들었다. 식물정권(植物政權)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총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5월 15일, 노무해 대통령은 전격적인 사임을 발표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해 정권은, 지난 해 6월 23일 특검기한 만료 이틀을 앞두고 특검 연장 거부 표명으로 일단 정세를 진정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훼손을 가했고 6.15 공동성명의 원칙을 관철해나가는 자세가 불투명했던 까닭에 지지세 재결속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선 이후 <민주햇볕당>의 내분에 노무해 대통령의 오리무중한 태도가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신랄한 비판을 받으면서, 큰 반전을 이루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총선 이전에 이미 북한 핵 위기는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노무해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미국과 일본의 동북아 패권전략을 그대로 추종해왔다는 비판을 받은 노무해 정권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확보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총선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 노무해 대통령 전격 사임, 김대중-클린턴 평양 방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유권자들은 <민주햇볕당>의 논리와 정책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임을 절감했다. 김대중 정권 시기에 누렸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으며, 발전적인 수준으로 추진했어야 할 햇볕정책의 소멸이 한반도의 명운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뒤늦게야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거기간 내내 김구태 <민주햇볕당> 대표는 (1) 대북 송금 관련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석방과 (2) 특검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다시 사법적 책임이 거론되면서 자의반 타의반의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동 자유를 외쳤다. 선거결과는 대북 송금과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의의 정당성을 정치적으로 확인시켰으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던 박지연(朴志嚥)등 관련자들의 즉각 석방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동 재개로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각보다 건강했고, 노년의 나이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반도 사태가 전쟁 직전으로 몰렸던 국면에서, 각기 한국과 미국의 전임 최고 국가수반이었던 김대중-클린턴이 지난 6월 15일 함께 방북, 극적인 돌파구를 만들어 국제여론을 급변시켰던 것이다. 전쟁 일보 직전에 한반도 사태는 평화의 실마리를 잡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평양에 도착한 클린턴은 마치 그가 재임 시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대했던 존경과 예우로 김 전대통령을 대했으며,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클린턴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매우 활기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분위기나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다.
당시 국제상황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라크 군정이 이라크 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의 위기에 처했고, 이란 정권 교체를 섣불리 시도했다가 중동전체의 반발을 사 부시는 외교적 궁지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을 일거에 돌파하고 국제적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무리한 대북 군사노선을 강행하려 했으나 부시정권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힘을 얻기 시작했으며, 민주당이 대북 정책을 놓고 부시를 맹공하고 나왔던 것이다. 미국 대선의 전초전이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셈이었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클린턴 드림 팀의 방문과 함께, 즉각적인 핵 프로그램 포기 선언을 했으며 해주(海州)지역을 북한 정권과는 철저하게 독립된 “50년 특별 조차지역”(20년 연장 가능)으로 선포,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완전보장하기로 했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클린턴은 자신의 재임 시 북한과 미국 간에 합의했던 공동 코뮤니케를 공개 언급하면서, 북한 체제 보장과 관련한 미 의회의 결의안 통과 및 관계개선에 필요한 최대한의 노력을 약속했다. 또한, 그와 대동한 세계적 투자가 소로스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한이 IMF와 세계은행과의 관계를 맺는 일에 조력하겠다고 밝혔다. 터져 나오는 소식 하나하나가 메가톤급 뉴스였다.
- 부시, “김정일과 어디서든 만나겠다” 선언
이런 상황에서 부시정권의 대북 선제공격 전략은 세계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백악관 내 매파들은 즉각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아들 부시의 군사주의 노선 변화에 아버지 부시도 나섰다. 자칫 아들 부시의 재선에 중대한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노련한 판단을 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김대중-클린턴 팀이 평양을 떠나려는 찰라였던 6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이든 워싱턴이든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정상회담 발표였다. 한반도의 기류는 일순간 달라졌다. 모두가 환호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이를 환영하는 특별담화를 발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작업을 유엔이 적극 지원해나갈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사실 모두가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곤혹스럽게 된 이들이 생겨났다. 대북 송금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한 세력에 대한 척결요구의 여론이 삽시간에 비등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제2 반민특위”였다.
반민특위는 이날 밤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극비에 붙여졌다. 그 사이, 반민특위 사무총장 김승호(金承鎬) 의원은 모처에 연락,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예정된 기자회견 7시 15분,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마른 체격의 한성헌(韓聖憲) 반민특위 위원장은 준비된 원고를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오랫동안 재야 변호사와, 이후 감사원장을 지냈던 풍모가 숨김없이 배어나왔다.
- 긴급체포......
“제2 반민특위는 국민들 앞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음을 보고 드립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반민특위는 대북 송금 문제를 특검을 통해 정략적으로 정치화시키고,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 이를 권력형 비리사건으로 만들어 민족의 장래에 중대한 장애를 조성한 책임을 물어 다음의 인사들을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관계로 어제 새벽 2시를 기해 <긴급 체포>하였음을 밝힙니다.”
“긴급체포!” 긴급조치 세대인 내게 긴급체포는 긴급조치와 같은 말처럼 다가왔다. 머리를 엄청난 크기의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온몸에 전율(戰慄)이 팽팽하게 퍼졌다. “문해상(文海上), 유일태(兪一台), 문재일(文才日), 박희대(朴熙大), 송두완(宋斗完)......” 이름이 계속 열거되는 동안, 지금 환각 속에 있는가 했다. 한 위원장의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노무해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서면조사를 포함하여 한 차례의 의회증언으로 제한합니다.”
- 역사는 긴급체포할 수 없다.
그날 오후, 의회는 6.25 54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에 대한 결의안을 4명 반대, 2명 기권, 나머지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아. 전쟁의 종결과 평화세력의 대세 장악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종전(終戰)과 평화(平和). 특검 시한이 만료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햇볕정책의 주요 담당자들이 모조리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상황과는 전혀 반대되는 사태가 벌어진 시점이다. 역사는 이렇게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 누가 역사를 <긴급체포>할 수 있겠는가? 6월의 열기를 담은 바람이 거친 들판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오히려 좌우를 막론하고 朝三暮四라며 다들 불쾌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下野'라는 극단의 표현까지 심심찮게 나오는데...
아래는 그 중의 압권인 글입니다.
'평양의 자주와 안위'를 늘 고뇌하는 이들마저
이젠 노통을 敵으로 돌리고 저주하고 있다는 증좌입니다.
그나저나 이것 참 마음이 괴롭습니다.
당사자인 노통과 그 측근들은 심각한 나르시즘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그렇다고 누구처럼 돌팔매질 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막연히 지나면 나아질 거란 기대로 허송세월하기엔
나라의 안보와 살림살이에 너무도 주름이 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집단도 가을까지는
판단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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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꽁트]
나도 “긴급체포”하고 싶다.
어느 긴급조치 세대의 그날 일기(日記)
김민웅 2003년 6월 24일 <시대소리> (증보수정판)
2004년 6월 25일 맑음
아침부터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6.25 한국전쟁 54주년의 날이 밝았다. 긴장된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TV를 켰다. 모든 채널이 오전 7시 15분 중대 발표 기자회견 생중계를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른 시각의 기자회견은 이례적이었다.
어제 일과 관련된 것이리라는 짐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론 끝에 “제2 반민특위(反民特委)”가 드디어 소집되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상황을 그간 어렵게 만든 주요 책임자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지 않으면 역사가 바로 설 수 없다는 성난 여론이 집약된 결과였다. 상황이 매우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반민특위” 소집은 이미 막을 길 없는 대세였다.
돌아보면 지난 1년간의 정세는 실로 한 치의 전망도 허용하지 않는 숨 막히는 우여곡절의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 정세의 최종 마무리는 “반민특위”의 가동과 정국 주도권이 의회로 넘어간 사태로 나타났다.
- 2004년 총선 결과, 반민특위 가동과 의회의 정국 주도
지난 총선에서 최대의 의석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민주햇볕당>의 김구태(金九太) 대표는 6월 10일 광화문 광장에서 오후 9시부터 밤새껏 열린 <만민(萬民) 민주회의> 석상을 통해 정국의 혼란을 막고 새로운 대통령 선출을 위한 대선을 8월 15일 이전에 하자고 제안했다. 이의(異意)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발언 말미에 “백범(白凡) 김 구 선생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우리의 가슴, 우리의 역사에서 거대하게 부활하고 계시다”라고 외쳐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평소 웅변조가 아닌 그가 이 대목만큼은 목소리가 한껏 고조되었고, 그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NBC <100분 토론>의 스타 손석(孫錫) 사회자가 사회를 본 이날 회의는 시청률 32퍼센트를 상회, TV 중계 방송사상 세계적 기록을 남겼다. 전 국민 거의 모두가 꼬박 밤을 샜던 것이다. 말 그대로 <만민 민주회의>였던 셈이다. 시간제한 없는 끝장토론을 몇 번 해보더니 손석 사회자도 이젠 더욱 완숙해진 여유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었다. 이런 경우 흔히 격정으로만 흐르기 쉬운 토론도 저렇게 풀어갈 수 있구나하는 인상을 모두에게 깊게 남겼다.
2004년 4월 총선은 노무해(盧無海)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개혁자유당>에게 대패(大敗)를 안겼고, 영남에서 단 두석을 얻는데 그치도록 만들었다. 이른바 동진(東進)정책의 참담한 실패였다. 10석을 얻어도 전국적 지지를 얻으면 지역주의를 극복한 전국당(全國黨)이 된다고 했던 호언(豪言)은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전국적 포용력을 갖지 못한 채 선거를 치루었으니 그 결과는 자명했다. <영남패권당>이라고 우기기에도 우습게 되어 버렸다.
반면에, 무엇보다 한국정치의 미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민주노동사회당>의 대약진이었다. 권용길(權龍吉) 대표가 드디어 의회에 진출, 18석을 차지한 당의 지휘부를 구성하고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권용길 대표는 <민주햇볕당>과 현안별로 연대할 것은 연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한반도 전체에 걸친 경제적 변혁과 평화정치에 주력하겠다고 밝혀 기대를 모았다. 오랜 세월 고난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던 진보정치가 대중적 기반을 견고하게 마련한 기폭점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해진다고 판단, 겸연쩍어하면서 복귀한 이해창(李海昌) 옹(翁)이 이끌게 된 <나라수구당> 또한 의외의 열세를 면치 못했다.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나라수구당>의 인기가 올라갈 줄 알았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옛날 복덕방과 닮은 노인당(老人黨)이라는 이미지를 개선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나라수구당>은, 말은 정계원로였으나 정치적 고려장(高麗葬) 대상이 되고 만 김중필(金中泌) 총재가 주도한 <수구원조당>과 유사한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총선 전 <나라수구당>에 있던 개혁-진보 인사들이 <민주햇볕당>으로의 결행을 한 것도 패인의 주요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 <민주햇볕당> 절대적 지지 획득
민중들은 놀랍게도 현명해서 햇볕정책의 계승발전을 가장 중요한 선거쟁점으로 부각시킨 <민주햇볕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그 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개혁자유당>의 대표였던 김원응(金元應) 의원은 총선 직전 탈당, “평소의 정치적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서 <민주햇볕당>으로 입당, 총선 드라마 관전에 흥미를 더하였다.
대북 송금문제 특검으로 일정한 상생관계에 있던 <개혁자유당>과 <나라수구당>의 내밀한 연정계획은 총선결과로 파탄이 났고, 선거패배의 충격으로 인해 노무해 정권은 정치적 공황상태에 급속히 빠져들었다. 식물정권(植物政權)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총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5월 15일, 노무해 대통령은 전격적인 사임을 발표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해 정권은, 지난 해 6월 23일 특검기한 만료 이틀을 앞두고 특검 연장 거부 표명으로 일단 정세를 진정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훼손을 가했고 6.15 공동성명의 원칙을 관철해나가는 자세가 불투명했던 까닭에 지지세 재결속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선 이후 <민주햇볕당>의 내분에 노무해 대통령의 오리무중한 태도가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신랄한 비판을 받으면서, 큰 반전을 이루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총선 이전에 이미 북한 핵 위기는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노무해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미국과 일본의 동북아 패권전략을 그대로 추종해왔다는 비판을 받은 노무해 정권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확보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총선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 노무해 대통령 전격 사임, 김대중-클린턴 평양 방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유권자들은 <민주햇볕당>의 논리와 정책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임을 절감했다. 김대중 정권 시기에 누렸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으며, 발전적인 수준으로 추진했어야 할 햇볕정책의 소멸이 한반도의 명운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뒤늦게야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거기간 내내 김구태 <민주햇볕당> 대표는 (1) 대북 송금 관련으로 투옥된 인사들의 석방과 (2) 특검 이후의 재판과정에서 다시 사법적 책임이 거론되면서 자의반 타의반의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동 자유를 외쳤다. 선거결과는 대북 송금과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의의의 정당성을 정치적으로 확인시켰으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던 박지연(朴志嚥)등 관련자들의 즉각 석방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활동 재개로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각보다 건강했고, 노년의 나이답지 않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반도 사태가 전쟁 직전으로 몰렸던 국면에서, 각기 한국과 미국의 전임 최고 국가수반이었던 김대중-클린턴이 지난 6월 15일 함께 방북, 극적인 돌파구를 만들어 국제여론을 급변시켰던 것이다. 전쟁 일보 직전에 한반도 사태는 평화의 실마리를 잡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평양에 도착한 클린턴은 마치 그가 재임 시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대했던 존경과 예우로 김 전대통령을 대했으며,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은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클린턴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매우 활기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분위기나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다.
당시 국제상황은 미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라크 군정이 이라크 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의 위기에 처했고, 이란 정권 교체를 섣불리 시도했다가 중동전체의 반발을 사 부시는 외교적 궁지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을 일거에 돌파하고 국제적 관심사를 돌리기 위해 무리한 대북 군사노선을 강행하려 했으나 부시정권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힘을 얻기 시작했으며, 민주당이 대북 정책을 놓고 부시를 맹공하고 나왔던 것이다. 미국 대선의 전초전이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셈이었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클린턴 드림 팀의 방문과 함께, 즉각적인 핵 프로그램 포기 선언을 했으며 해주(海州)지역을 북한 정권과는 철저하게 독립된 “50년 특별 조차지역”(20년 연장 가능)으로 선포, 미국을 비롯한 서방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완전보장하기로 했다. 의외의 선택이었다.
클린턴은 자신의 재임 시 북한과 미국 간에 합의했던 공동 코뮤니케를 공개 언급하면서, 북한 체제 보장과 관련한 미 의회의 결의안 통과 및 관계개선에 필요한 최대한의 노력을 약속했다. 또한, 그와 대동한 세계적 투자가 소로스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북한이 IMF와 세계은행과의 관계를 맺는 일에 조력하겠다고 밝혔다. 터져 나오는 소식 하나하나가 메가톤급 뉴스였다.
- 부시, “김정일과 어디서든 만나겠다” 선언
이런 상황에서 부시정권의 대북 선제공격 전략은 세계의 거센 비판을 받았고 백악관 내 매파들은 즉각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아들 부시의 군사주의 노선 변화에 아버지 부시도 나섰다. 자칫 아들 부시의 재선에 중대한 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노련한 판단을 했던 것이다.
급기야는 김대중-클린턴 팀이 평양을 떠나려는 찰라였던 6월 20일,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이든 워싱턴이든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정상회담 발표였다. 한반도의 기류는 일순간 달라졌다. 모두가 환호했다.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이를 환영하는 특별담화를 발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작업을 유엔이 적극 지원해나갈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사실 모두가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곤혹스럽게 된 이들이 생겨났다. 대북 송금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한 세력에 대한 척결요구의 여론이 삽시간에 비등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이 “제2 반민특위”였다.
반민특위는 이날 밤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은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극비에 붙여졌다. 그 사이, 반민특위 사무총장 김승호(金承鎬) 의원은 모처에 연락,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예정된 기자회견 7시 15분,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마른 체격의 한성헌(韓聖憲) 반민특위 위원장은 준비된 원고를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오랫동안 재야 변호사와, 이후 감사원장을 지냈던 풍모가 숨김없이 배어나왔다.
- 긴급체포......
“제2 반민특위는 국민들 앞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음을 보고 드립니다. 그리고 이 결론은 이미 시행되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반민특위는 대북 송금 문제를 특검을 통해 정략적으로 정치화시키고,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 이를 권력형 비리사건으로 만들어 민족의 장래에 중대한 장애를 조성한 책임을 물어 다음의 인사들을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관계로 어제 새벽 2시를 기해 <긴급 체포>하였음을 밝힙니다.”
“긴급체포!” 긴급조치 세대인 내게 긴급체포는 긴급조치와 같은 말처럼 다가왔다. 머리를 엄청난 크기의 쇠뭉치로 얻어맞은 듯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온몸에 전율(戰慄)이 팽팽하게 퍼졌다. “문해상(文海上), 유일태(兪一台), 문재일(文才日), 박희대(朴熙大), 송두완(宋斗完)......” 이름이 계속 열거되는 동안, 지금 환각 속에 있는가 했다. 한 위원장의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노무해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서면조사를 포함하여 한 차례의 의회증언으로 제한합니다.”
- 역사는 긴급체포할 수 없다.
그날 오후, 의회는 6.25 54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에 대한 결의안을 4명 반대, 2명 기권, 나머지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아. 전쟁의 종결과 평화세력의 대세 장악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종전(終戰)과 평화(平和). 특검 시한이 만료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햇볕정책의 주요 담당자들이 모조리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상황과는 전혀 반대되는 사태가 벌어진 시점이다. 역사는 이렇게 예측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 누가 역사를 <긴급체포>할 수 있겠는가? 6월의 열기를 담은 바람이 거친 들판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