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역사란 것이 필연에 의하여 흘러가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우연과 착각에 의하여 역사란 것이 때론 그 흐름이 바뀐다는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있으니까요. 나폴레옹도 그 유명한 워터루 전투에서 고지식한 부하장군때문에 영국과 프로이센에 패했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도 정작 죽을때까지 자기가 신대륙을 발견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바스코 누녜즈 데 발보아" 1513년 서구인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도 아주 우연히 태평양을 발견했으니까요.16세기엔 유럽의 탐험가들이 전부 그러하듯이 발보아도 채권자의 빛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탐험행렬에 가담했습니다. 물론 그 중 몇몇은 신대륙을, 또 몇몇은 바다 위의 섬들을 발견했습니다. 발보아는 파나마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 사이에서 파나마 지협 남쪽으로 며칠만 항해하면 황금이 많은 나라에 닿는다는 소문을 듣고 갖은 고초끝에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서구인 최초로 남아메리카의 밀림를 가로질러 탐험한 끝에 서구인 최초로 태평양을 보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고 조국 에스파냐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지만 세력다툼에 밀려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한명의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정복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 는 사생아로 태어나 신대륙으로 건너가 발보아와 함께 태평양을 발견한 27명의 에스파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발보아의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되어 파나마를 건설하고 콜롬비아를 탐험하였으며, 잉카제국의 정보를 입수하여 비라코차(바다로부터 상륙한 신)행세를 하면서 잉카의 황제 아타왈파를 죽이고 또한 수도 쿠스코를 점령하여 잉카제국의 기능과 부를 모두 에스파냐왕에게 바쳤지만 그도 결국 동료와의 싸움에서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피사로를 피해 잉카인들은 안데스 산맥의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마추픽추를 건설합니다. 이 마추픽추는 20세기 초에 미국인 하이람 빙엄에 의해 발견되어 그들의 슬픈 제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포르투칼과 마찬가지로 보기드문 카톨릭국가에다 어느 나라보다 빨리 통일을 이룩한 국가입니다. 당시의 에스파냐는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서유럽 국가들처럼 주종관게는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정복하여 획득한 토지는 봉토가 아닌 군역의 보수로 간주되었기에 따라서 신하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해도 토지는 몰수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에스파냐의 국토회복 운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국토회복 운동은 종교 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종교적,문화적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열광적인 신앙이 육성되고 그 결과 교회의 거대한 영향력이 형성된 것이죠.
앞서 언급했듯이 14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5세기 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을 아내로 맞이함에 따라 에스파냐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이들 두 왕이 에스파냐에 남아 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시킴으로써 에스파냐는 절대주의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700년 넘게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어인들은 에스파냐에게 그 너무나도 유명한 알함브라궁전을 물려주었습니다.
한편 이사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으로 에스파냐는 남북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독점하게 되면서 에스파냐제국 즉 대항해 제국 시대를 탄생시킵니다. 16세기 초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카를로스 1세(독일 황제로는 카를 5세)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통치하에서 에스파냐 본국, 식민지, 독일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이탈리아령이 통괄되어 태양이 지지 않는 에스파냐 제국이 출현하였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시민의회인 코르테스를 억압하였으며, 공동체적 권리 유지를 주장하고 왕권과 도시 상층부에 반대하는 시민반란을 진압하여 절대주의를 완성시켰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참 많이 외운 사실이지요.
하지만 16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펠리페 2세 시대는 에스파냐의 최대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지만, 동시에 몰락의 원인을 잉태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에스파냐의 위세는 신대륙(서인도) 무역의 독점 위에 구축되었고 그 무역의 기초는 모직물에 있었는데, 국내 모직물 공업이 특권무역상 길드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산업으로서의 발전이 억제되었고 그 결과 근세 농촌의 자유생산체제에서 발전한 네덜란드,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에스파냐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부가 집중되어 있는 네덜란드를 통제와 징세로써 강화하였으나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하게 되어 에스파냐의 독주에 도전하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하여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펠리페가 파견한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격파되어 에스파냐는 몰락하기 시작하였고 대신 영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0년전쟁, 부르봉 왕조의 에스파냐 지배에 따른 에스파냐 계승전쟁 등으로 신흥 해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번성하였고 에스파냐는 점차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닐하게도 이러한 국가적 쇠퇴기에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16세기 말부터 세르반테스, 로페 데 베가 등의 문학자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무리요 등의 화가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무어인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참고로 무어인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로마제국 멸망후 히스파니아 지방에는 북해의 고틀란드 섬에서 파생된 고트족이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은 동쪽으로 간 동고트 족과 구분하여 서고트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톨레도(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바로 옆) 수도로 서고트 왕국을 세웁니다. 그런데 7~8세기경 북아프리카의 무어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입을 시도합니다. 결국 서고트 왕국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은 전편에 언급했습니다.
톨레도가 함락됨으로써 서고트 왕국은 멸망했지만, 왕국의 귀족들은 일족을 이끌고 북부 산악지방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10세기가 지나면서 그들이 힘을 길러 군대를 모아 다시 국토회복 운동에 나서게 되고, 결국 톨레도까지 탈환합니다.그리고는 카스티야 왕국을 세웁니다.(현 스페인의 전신) 특히 알폰소라는 장군의 경우는, 아버지가 프랑스 왕으로부터 백작의 칭호를 받게되고 그는 곧 대서양 변의 오포르투라는 도시에서 군사를 일으켜 뛰어난 전술로 무어인을 격파해 나갑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내의 무어인 거점중 하나인 리스본을 함락하고 그곳으로 거점을 옮겨 나라를 세웁니다. 그리고는 알폰소 1세로 등극하여 포르투칼을 탄생시킵니다. 오포르투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포르투갈이라 정했다고 합니다.
한편 서쪽의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로드리고 디아즈라 불리우는 엘 시드의 서사시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무어인들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카스티야 왕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무어인에게 투항하기도 했다가, 다시 카스티야로 돌아온 카스티야 왕국의 국토회복운동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생전에 그가 세운 업적은 북으로는 피레네 산맥 밑의 무어인의 도시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지중해에 접한 이베리아반도 최대의 항구도시 발렌시아를 무어인으로 부터 빼앗았고 이 이야기는 할리웃 영화에 의해 많이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여전히 무어인들이 차지한 가운데 그렇게 중세가 흘러갔지만 결국 무어인들
의 그라나다 왕국의 중요한 거점중의 하나인 코르도바마저 함락 시키고,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라나다 왕국의 수도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는 국명을 에스파냐 왕국(영어로 스페인 왕국)으로 명명합니다.
현재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스페인에서도 이름난 휴양지입니다. 지중해성의 더운 기후인 이 지방은 기후가 워낙 좋고 플라멩고, 투우같은 스페인 특유의 열정이 이쪽 지방에서 가장 잘 살아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 무어인들이 없었더라면 스페인의 문화는 굉장히 후진적이었을거라 고 할만큼 무어인들의 문화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예술, 학술, 건설,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무어인들의 공은 지대했습니다. 이미 12세기에 이미 유럽을 제외한 모든 유라시아 지역을 여행한 전설적인 아랍 여행가 이븐 밧투다가 한말이 생각납니다. "서유럽은 너무 미개해서 가볼 가치가 없다고"
다음편은 스페인 여행기로 대체하겠습니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의 지역색과 아울러 근대 내전을 겪은 그들의 아픈 역사와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스코 누녜즈 데 발보아" 1513년 서구인 최초로 태평양을 발견한 발보아도 아주 우연히 태평양을 발견했으니까요.16세기엔 유럽의 탐험가들이 전부 그러하듯이 발보아도 채권자의 빛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탐험행렬에 가담했습니다. 물론 그 중 몇몇은 신대륙을, 또 몇몇은 바다 위의 섬들을 발견했습니다. 발보아는 파나마에 정착한 에스파냐인들 사이에서 파나마 지협 남쪽으로 며칠만 항해하면 황금이 많은 나라에 닿는다는 소문을 듣고 갖은 고초끝에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서구인 최초로 남아메리카의 밀림를 가로질러 탐험한 끝에 서구인 최초로 태평양을 보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고 조국 에스파냐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지만 세력다툼에 밀려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한명의 에스파냐의 잉카제국 정복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 는 사생아로 태어나 신대륙으로 건너가 발보아와 함께 태평양을 발견한 27명의 에스파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발보아의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되어 파나마를 건설하고 콜롬비아를 탐험하였으며, 잉카제국의 정보를 입수하여 비라코차(바다로부터 상륙한 신)행세를 하면서 잉카의 황제 아타왈파를 죽이고 또한 수도 쿠스코를 점령하여 잉카제국의 기능과 부를 모두 에스파냐왕에게 바쳤지만 그도 결국 동료와의 싸움에서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피사로를 피해 잉카인들은 안데스 산맥의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마추픽추를 건설합니다. 이 마추픽추는 20세기 초에 미국인 하이람 빙엄에 의해 발견되어 그들의 슬픈 제국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유럽국가들 사이에서 포르투칼과 마찬가지로 보기드문 카톨릭국가에다 어느 나라보다 빨리 통일을 이룩한 국가입니다. 당시의 에스파냐는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서유럽 국가들처럼 주종관게는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정복하여 획득한 토지는 봉토가 아닌 군역의 보수로 간주되었기에 따라서 신하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해도 토지는 몰수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에스파냐의 국토회복 운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국토회복 운동은 종교 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의 종교적,문화적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열광적인 신앙이 육성되고 그 결과 교회의 거대한 영향력이 형성된 것이죠.
앞서 언급했듯이 14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5세기 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을 아내로 맞이함에 따라 에스파냐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이들 두 왕이 에스파냐에 남아 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하여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시킴으로써 에스파냐는 절대주의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700년 넘게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무어인들은 에스파냐에게 그 너무나도 유명한 알함브라궁전을 물려주었습니다.
한편 이사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으로 에스파냐는 남북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독점하게 되면서 에스파냐제국 즉 대항해 제국 시대를 탄생시킵니다. 16세기 초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카를로스 1세(독일 황제로는 카를 5세)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통치하에서 에스파냐 본국, 식민지, 독일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이탈리아령이 통괄되어 태양이 지지 않는 에스파냐 제국이 출현하였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시민의회인 코르테스를 억압하였으며, 공동체적 권리 유지를 주장하고 왕권과 도시 상층부에 반대하는 시민반란을 진압하여 절대주의를 완성시켰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참 많이 외운 사실이지요.
하지만 16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펠리페 2세 시대는 에스파냐의 최대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지만, 동시에 몰락의 원인을 잉태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에스파냐의 위세는 신대륙(서인도) 무역의 독점 위에 구축되었고 그 무역의 기초는 모직물에 있었는데, 국내 모직물 공업이 특권무역상 길드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산업으로서의 발전이 억제되었고 그 결과 근세 농촌의 자유생산체제에서 발전한 네덜란드,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에스파냐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부가 집중되어 있는 네덜란드를 통제와 징세로써 강화하였으나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하게 되어 에스파냐의 독주에 도전하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하여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펠리페가 파견한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격파되어 에스파냐는 몰락하기 시작하였고 대신 영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0년전쟁, 부르봉 왕조의 에스파냐 지배에 따른 에스파냐 계승전쟁 등으로 신흥 해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번성하였고 에스파냐는 점차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닐하게도 이러한 국가적 쇠퇴기에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16세기 말부터 세르반테스, 로페 데 베가 등의 문학자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무리요 등의 화가들을 배출하였습니다.
무어인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참고로 무어인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로마제국 멸망후 히스파니아 지방에는 북해의 고틀란드 섬에서 파생된 고트족이 이주하게 됩니다. 이들은 동쪽으로 간 동고트 족과 구분하여 서고트족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톨레도(현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바로 옆) 수도로 서고트 왕국을 세웁니다. 그런데 7~8세기경 북아프리카의 무어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입을 시도합니다. 결국 서고트 왕국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은 전편에 언급했습니다.
톨레도가 함락됨으로써 서고트 왕국은 멸망했지만, 왕국의 귀족들은 일족을 이끌고 북부 산악지방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10세기가 지나면서 그들이 힘을 길러 군대를 모아 다시 국토회복 운동에 나서게 되고, 결국 톨레도까지 탈환합니다.그리고는 카스티야 왕국을 세웁니다.(현 스페인의 전신) 특히 알폰소라는 장군의 경우는, 아버지가 프랑스 왕으로부터 백작의 칭호를 받게되고 그는 곧 대서양 변의 오포르투라는 도시에서 군사를 일으켜 뛰어난 전술로 무어인을 격파해 나갑니다. 결국 이베리아 반도내의 무어인 거점중 하나인 리스본을 함락하고 그곳으로 거점을 옮겨 나라를 세웁니다. 그리고는 알폰소 1세로 등극하여 포르투칼을 탄생시킵니다. 오포르투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포르투갈이라 정했다고 합니다.
한편 서쪽의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로드리고 디아즈라 불리우는 엘 시드의 서사시가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무어인들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카스티야 왕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무어인에게 투항하기도 했다가, 다시 카스티야로 돌아온 카스티야 왕국의 국토회복운동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생전에 그가 세운 업적은 북으로는 피레네 산맥 밑의 무어인의 도시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지중해에 접한 이베리아반도 최대의 항구도시 발렌시아를 무어인으로 부터 빼앗았고 이 이야기는 할리웃 영화에 의해 많이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여전히 무어인들이 차지한 가운데 그렇게 중세가 흘러갔지만 결국 무어인들
의 그라나다 왕국의 중요한 거점중의 하나인 코르도바마저 함락 시키고,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라나다 왕국의 수도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는 국명을 에스파냐 왕국(영어로 스페인 왕국)으로 명명합니다.
현재의 안달루시아 지방은 스페인에서도 이름난 휴양지입니다. 지중해성의 더운 기후인 이 지방은 기후가 워낙 좋고 플라멩고, 투우같은 스페인 특유의 열정이 이쪽 지방에서 가장 잘 살아나고 있습니다. 스페인에 무어인들이 없었더라면 스페인의 문화는 굉장히 후진적이었을거라 고 할만큼 무어인들의 문화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예술, 학술, 건설,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무어인들의 공은 지대했습니다. 이미 12세기에 이미 유럽을 제외한 모든 유라시아 지역을 여행한 전설적인 아랍 여행가 이븐 밧투다가 한말이 생각납니다. "서유럽은 너무 미개해서 가볼 가치가 없다고"
다음편은 스페인 여행기로 대체하겠습니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의 지역색과 아울러 근대 내전을 겪은 그들의 아픈 역사와 알함브라 궁전에 대해서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