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관해 눈·귀 막고 살 것을 …"
집 부근으로 이감되는 로버트 김

"저로 인해 한국민이 반미 감정을 갖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교도소 생활 초기에는 미국에 대한 원망과 한국 정부에 대한 서운함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보냈지만 지금은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간첩' 혐의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런우드 연방교도소에서 7년4개월째 복역중인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씨가 출감을 6개월 앞둔 30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애시번 자신의 집 주변에 있는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된다.
이감 조치는 마지막 형기를 가족 가까이에서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감을 앞둔 그를 만나러 지난 24일(현지시간) 앨런우드로 갔다. 그러나 가족 이외의 외부인 면회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교도소 규정에 따라 그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인 장명희(61)씨가 기자의 질문서를 들고 면회한 뒤 답변을 들어오는 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출감이 6개월 남았다. 소감이 어떤가.
"석방할 날이 가까워지면서 두려움이 늘었다. 7년여의 사회생활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 지 걱정스럽다. 사회에 나가면 이런저런 제약이 많을텐데 이런 게 스트레스가 돼 병을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장기수의 경우 이런 병으로 일찍 죽는 수가 많다고 한다."
-30일 이감된 후의 생활은 어떠할 것 같은가.
"새로운 곳으로 이감되면 나 같은 장기수들에게는 근로 의무가 주어진다고 한다. 교도소 밖의 사과 농장 등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 사회적응 과정의 일환이라고 한다. 일을 해 버는 돈의 25%는 '먹고 자는 값'으로 납부해야 한다고 한다. 납부금을 착실히 내고 사고칠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으면 주말에는 발에 전자감응장치를 달고 밖에 나가 가족과 함께 지낼 수도 있다고 한다."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버님께는 장남으로서 한번도 효도할 기회를 갖지 못한 데 대해 용서를 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계시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출옥(7월27일로 예정)한 뒤 모든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모시려 한다. 아내에겐 인생의 황혼기에 너무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 아내는 사흘이 멀다 하고 차로 네시간 가까이를 달려와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줬다. "
-한국 정부에 서운함이 많을텐데.
"중국 정부는 미국 시민권자인 중국 동포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한국과 중국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자라지만 이에 앞서 동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정부가 동포를 적극적으로 껴안을 때 모국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출감 후 보호관찰 3년을 사면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 사면받지 못하면 2007년 7월까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출소 뒤의 계획은.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사회에 기여하며 보내고 싶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무조건 미국을 동경하고 흉내내려는 경향이 있다. 조금이라도 이것을 교정하는 데 내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도 하고 싶다."
-기밀을 한국에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취급하는 정보 중 한국에 알려준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이며, 미국의 동맹 국가들과 공유되는 것이어서 이렇게 큰 사건으로 비화될 줄 몰랐다. 한국도 미국의 동맹국이다. 미국에 당당히 요구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다시 똑같은 일을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조국의 정부가 이렇게 약한 줄 알았더라면 한국에 관해 눈과 귀를 막고, 미국 시민으로서 살았을 것이다. 인생은 짧다. 왜 고생을 사서 하겠는가."
앨런우드(미 펜실베이니아)=김동섭 기자
*** 로버트 김은 누구…
로버트 김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경기고(54회)와 한양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퍼듀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67년 부인 장명희씨와 결혼했다. 70년 미 항공우주국(NASA)에 들어가 근무하다 74년 국방관련 회사인 MITRE(주)로 옮겼다.
그는 이 회사 입사를 위해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다시 78년 미 해군정보국(ONI)으로 자리를 옮겼다. 컴퓨터 정보분석관으로 미국 정부의 컴퓨터 시스템인 JMIE의 디자인.개발.유지에 대한 기술적 관리도 했다.
입사 당시 그는 ONI에서 일하는 1천2백여명의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였다. ONI 근무 19년째인 96년 9월 24일 그는 워싱턴 DC 근교의 장교클럽에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부친인 김상영(90)옹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전경련 초대 상근부회장, 8.9대 국회의원(전남 여수-여천)을 지냈다.
*** 로버트 김 사건이란
'로버트 김 사건'은 ONI에서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주미 한국대사관의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미국의 군사기밀을 제공한 사건이다.
FBI는 미국 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국가의 기밀을 빼돌려 모국에 넘겨줌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김은 ▶한국에 제공한 정보들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내용이 아니었고▶한.미 양국이 당연히 공유해야 할 정보였으므로 결코 간첩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고 맞섰지만 결국 10개월 간의 재판 끝에 1백8개월의 징역형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다.
로버트 김과 백대령은 95년 11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해군 정보교류회의'에서 처음 만났다. 백대령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로버트 김은 이를 수락했다. 로버트 김은 이후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백대령에게 건네줬다.
96년 9월 북한 잠수함의 동해안 침투 사건이 벌어지자 백대령은 미국이 파악하고 있는 북 잠수함의 이동로를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로버트 김은 ONI가 사건 3일 전부터 추적한 북 잠수함의 경로 등을 백대령에게 알려줬다. 침투 사건 6일 뒤 그는 FBI에 체포됐다.
<출처; 중앙일보 '사람 사람'>
집 부근으로 이감되는 로버트 김
"저로 인해 한국민이 반미 감정을 갖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교도소 생활 초기에는 미국에 대한 원망과 한국 정부에 대한 서운함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보냈지만 지금은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간첩' 혐의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런우드 연방교도소에서 7년4개월째 복역중인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씨가 출감을 6개월 앞둔 30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애시번 자신의 집 주변에 있는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된다.
이감 조치는 마지막 형기를 가족 가까이에서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감을 앞둔 그를 만나러 지난 24일(현지시간) 앨런우드로 갔다. 그러나 가족 이외의 외부인 면회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교도소 규정에 따라 그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부인 장명희(61)씨가 기자의 질문서를 들고 면회한 뒤 답변을 들어오는 식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출감이 6개월 남았다. 소감이 어떤가.
"석방할 날이 가까워지면서 두려움이 늘었다. 7년여의 사회생활 공백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 지 걱정스럽다. 사회에 나가면 이런저런 제약이 많을텐데 이런 게 스트레스가 돼 병을 유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장기수의 경우 이런 병으로 일찍 죽는 수가 많다고 한다."
-30일 이감된 후의 생활은 어떠할 것 같은가.
"새로운 곳으로 이감되면 나 같은 장기수들에게는 근로 의무가 주어진다고 한다. 교도소 밖의 사과 농장 등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 사회적응 과정의 일환이라고 한다. 일을 해 버는 돈의 25%는 '먹고 자는 값'으로 납부해야 한다고 한다. 납부금을 착실히 내고 사고칠 사람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으면 주말에는 발에 전자감응장치를 달고 밖에 나가 가족과 함께 지낼 수도 있다고 한다."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버님께는 장남으로서 한번도 효도할 기회를 갖지 못한 데 대해 용서를 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계시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출옥(7월27일로 예정)한 뒤 모든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모시려 한다. 아내에겐 인생의 황혼기에 너무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 아내는 사흘이 멀다 하고 차로 네시간 가까이를 달려와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줬다. "
-한국 정부에 서운함이 많을텐데.
"중국 정부는 미국 시민권자인 중국 동포들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한국과 중국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자라지만 이에 앞서 동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정부가 동포를 적극적으로 껴안을 때 모국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출감 후 보호관찰 3년을 사면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 사면받지 못하면 2007년 7월까지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출소 뒤의 계획은.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사회에 기여하며 보내고 싶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무조건 미국을 동경하고 흉내내려는 경향이 있다. 조금이라도 이것을 교정하는 데 내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경제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도 하고 싶다."
-기밀을 한국에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취급하는 정보 중 한국에 알려준 것은 극히 작은 부분이며, 미국의 동맹 국가들과 공유되는 것이어서 이렇게 큰 사건으로 비화될 줄 몰랐다. 한국도 미국의 동맹국이다. 미국에 당당히 요구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다시 똑같은 일을 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면.
"조국의 정부가 이렇게 약한 줄 알았더라면 한국에 관해 눈과 귀를 막고, 미국 시민으로서 살았을 것이다. 인생은 짧다. 왜 고생을 사서 하겠는가."
앨런우드(미 펜실베이니아)=김동섭 기자
*** 로버트 김은 누구…
로버트 김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경기고(54회)와 한양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퍼듀대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67년 부인 장명희씨와 결혼했다. 70년 미 항공우주국(NASA)에 들어가 근무하다 74년 국방관련 회사인 MITRE(주)로 옮겼다.
그는 이 회사 입사를 위해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다시 78년 미 해군정보국(ONI)으로 자리를 옮겼다. 컴퓨터 정보분석관으로 미국 정부의 컴퓨터 시스템인 JMIE의 디자인.개발.유지에 대한 기술적 관리도 했다.
입사 당시 그는 ONI에서 일하는 1천2백여명의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였다. ONI 근무 19년째인 96년 9월 24일 그는 워싱턴 DC 근교의 장교클럽에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부친인 김상영(90)옹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전경련 초대 상근부회장, 8.9대 국회의원(전남 여수-여천)을 지냈다.
*** 로버트 김 사건이란
'로버트 김 사건'은 ONI에서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주미 한국대사관의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미국의 군사기밀을 제공한 사건이다.
FBI는 미국 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국가의 기밀을 빼돌려 모국에 넘겨줌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김은 ▶한국에 제공한 정보들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내용이 아니었고▶한.미 양국이 당연히 공유해야 할 정보였으므로 결코 간첩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고 맞섰지만 결국 10개월 간의 재판 끝에 1백8개월의 징역형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았다.
로버트 김과 백대령은 95년 11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해군 정보교류회의'에서 처음 만났다. 백대령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로버트 김은 이를 수락했다. 로버트 김은 이후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백대령에게 건네줬다.
96년 9월 북한 잠수함의 동해안 침투 사건이 벌어지자 백대령은 미국이 파악하고 있는 북 잠수함의 이동로를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로버트 김은 ONI가 사건 3일 전부터 추적한 북 잠수함의 경로 등을 백대령에게 알려줬다. 침투 사건 6일 뒤 그는 FBI에 체포됐다.
<출처; 중앙일보 '사람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