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타-우마 만화의 미학
우스타 쿄스케의 [멋지다 마사루],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 [크레이지 군단],
유타카 타카하시의 [골때리는 연극부],
아카츠카 후지오의 [천재 바카본],
야마가미 다츠히코의 [개구장이 데카]
여기에 거론된 만화들은 장르와 스타일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통점을 일본에서는 헤타-우마 스타일의 만화라고 부른다.
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헤타-우마 스타일의 만화를 본다면 아마도 기절초풍할 것이다. 시각적으로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인물묘사와 극단적으로 폭력적이며 현실에서 불가능한 그로테스크한 웃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두 번 다시 펼쳐 보기조차 싫은 변태성 악취미의 만화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헤타-우마의 만화들 속에서 만화가 지니는 동양미학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재현은 헤타-우마의 만화 중에서 [멋지다 마사루], [이나중 탁구부] 같은 개그 쟝르의 만화를 ‘악취미 개그만화’로 부른다.
헤타란 하수라는 뜻이고 우마는 고수라는 뜻으로 ‘일부러 하수같이 못 그린 고수의 그림(만화)’로 볼 수 있다. 헤타 우마 만화는 인물의 묘사에 있어 아주 극단적이며 얼른 봐서는 아주 서투르게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꼼꼼히 뜯어본다면 이런 식으로 그리기가 아주 어렵겠구나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재현은 이러한 만화를 미학적으로 추(醜)와 유머의 결합이 악취미 개그만화의 원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추와 유머의 미학으로 넘기기에는 헤타-우마 속에 숨은 동양의 무의식적 미학의 씨앗이 너무나 아깝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서 동양 미학의 근본문제를 설명하면서 헤타-우마의 미학적 씨앗을 좀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려 한다.
동양미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巧)와 졸(拙)인데, 이는 추사의 예술세계를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봉은사’라는 사찰의 전각 중 대장경의 목판을 보관했던 판전(板殿)에는 추사의 절필(絶筆)이 걸려있다. 그 글씨의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본다면 그토록 칭송받던 세계적인 예술작품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보이는 어린아이 수준 정도로밖에 안보인다. 바로 여기서 교와 졸이라는 동양미학의 핵심을 우리는 들여다볼 수 있다. 먼저 동양미학의 핵심을 노래한 도덕경 45장의 전구절을 인용해보겠다.
大成若缺, 其用不敝, 大盈若沖, 其用無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邊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淨, 爲天下正.
(크게 이룸은 모자란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끝남이 없고,
크게 찬 것은 비어 있는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크게 곧음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 잘함은 말더듬이 같다.
움직임이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이 더위를 이기니,
큰 고요함이 세상을 바르게 한다.)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것 같다는 ‘대교약졸’의 가르침이야말로 동양미학의 핵심이 아니라고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다시 추사 김정희 선생으로 돌아가자. 그는 당대에 전승되고 유행한 모든 서법을 섭렵하여 능숙하고 세련된 필치로 썼는데, 점차 재구성을 통하여 파격을 실험하게 된다. 바로 그 파격에 졸미(拙美)가 드러난 것이다.
본래 동양의 예술은 서구와는 달리 반항-분석하는 태도가 아니고 포용-종합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서(書)에 있어서도 추상성을 획득하고 세계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와 졸의 미학이 꼭 동양의 작가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미학은 아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과거의 역사와 기법을 철저히 익혀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으며, 현재 살아 있는 토인의 원초적 감성과 표현방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놀라운 재구성을 통하여 세계를 바꾸었고, 우리의 보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피카소의 그림 또한 졸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졸(拙)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설명한다면 부득이 ‘어린이의 세계’에 빗댈 수밖에 없다. 어린이의 그림을 보면 순수한 기쁨이 있고 의외의 상상과 변형에 놀라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적이고 유치한 졸 즉 ‘치졸(稚拙)’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동심의 부정적인 유치한 면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동심의 긍정적인 면인 순수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되찾아야할 당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졸은 자연자체가 아닌 극단의 기교를 넘어선 후 자연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이를 치졸이 아닌 ‘고졸(古拙)’이라고 부른다. 고졸에는 자연적인 고졸과 의식적인 고졸이 있는데, 자연적인 고졸은 민족적이며 시대적인 표현양식이고 의식적인 고졸의 미학은 시대적, 민족적 고졸양식에 개인이 경탄하고 부러워하여 인격적인 면에서 동심의 세계를 회복하여 표현되는 개인적인 성취이다. 하지만 대교를 거치지 않았다고 자연적인 졸미를 들어내는 작품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헤타-우마 만화는 ‘대교약졸’의 미학을 성립해 가는 과정의 작품들이라고 바라보고 싶다. 아직도 이러한 만화들에서 보이는 ‘치졸’한 맛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극단의 교를 넘어선 후 자연으로 돌아간 ‘고졸’의 맛을 내는 작품은 보이지 않으나, 졸미의 맛을 간간히 느끼게하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안목과 만화에 대한 취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 우리만화에서 일본의 헤타-우마 만화들이 가지고 있는 졸미(拙美)를 맛 볼 수 있는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이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만화 탄압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 편견’에 공격당해 현재는 아직까지 대중문화의 하위문화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한들 미학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만화에 애정 깊은 작가와 독자들이 우리만화 속에서 ‘고졸(古拙)’한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맛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우스타 쿄스케의 [멋지다 마사루],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 [크레이지 군단],
유타카 타카하시의 [골때리는 연극부],
아카츠카 후지오의 [천재 바카본],
야마가미 다츠히코의 [개구장이 데카]
여기에 거론된 만화들은 장르와 스타일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통점을 일본에서는 헤타-우마 스타일의 만화라고 부른다.
만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헤타-우마 스타일의 만화를 본다면 아마도 기절초풍할 것이다. 시각적으로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인물묘사와 극단적으로 폭력적이며 현실에서 불가능한 그로테스크한 웃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두 번 다시 펼쳐 보기조차 싫은 변태성 악취미의 만화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헤타-우마의 만화들 속에서 만화가 지니는 동양미학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재현은 헤타-우마의 만화 중에서 [멋지다 마사루], [이나중 탁구부] 같은 개그 쟝르의 만화를 ‘악취미 개그만화’로 부른다.
헤타란 하수라는 뜻이고 우마는 고수라는 뜻으로 ‘일부러 하수같이 못 그린 고수의 그림(만화)’로 볼 수 있다. 헤타 우마 만화는 인물의 묘사에 있어 아주 극단적이며 얼른 봐서는 아주 서투르게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꼼꼼히 뜯어본다면 이런 식으로 그리기가 아주 어렵겠구나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재현은 이러한 만화를 미학적으로 추(醜)와 유머의 결합이 악취미 개그만화의 원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추와 유머의 미학으로 넘기기에는 헤타-우마 속에 숨은 동양의 무의식적 미학의 씨앗이 너무나 아깝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서 동양 미학의 근본문제를 설명하면서 헤타-우마의 미학적 씨앗을 좀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려 한다.
동양미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巧)와 졸(拙)인데, 이는 추사의 예술세계를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봉은사’라는 사찰의 전각 중 대장경의 목판을 보관했던 판전(板殿)에는 추사의 절필(絶筆)이 걸려있다. 그 글씨의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본다면 그토록 칭송받던 세계적인 예술작품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게 보이는 어린아이 수준 정도로밖에 안보인다. 바로 여기서 교와 졸이라는 동양미학의 핵심을 우리는 들여다볼 수 있다. 먼저 동양미학의 핵심을 노래한 도덕경 45장의 전구절을 인용해보겠다.
大成若缺, 其用不敝, 大盈若沖, 其用無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邊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淨, 爲天下正.
(크게 이룸은 모자란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끝남이 없고,
크게 찬 것은 비어 있는 것 같으나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
크게 곧음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 잘함은 말더듬이 같다.
움직임이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이 더위를 이기니,
큰 고요함이 세상을 바르게 한다.)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툰 것 같다는 ‘대교약졸’의 가르침이야말로 동양미학의 핵심이 아니라고 어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다시 추사 김정희 선생으로 돌아가자. 그는 당대에 전승되고 유행한 모든 서법을 섭렵하여 능숙하고 세련된 필치로 썼는데, 점차 재구성을 통하여 파격을 실험하게 된다. 바로 그 파격에 졸미(拙美)가 드러난 것이다.
본래 동양의 예술은 서구와는 달리 반항-분석하는 태도가 아니고 포용-종합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서(書)에 있어서도 추상성을 획득하고 세계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와 졸의 미학이 꼭 동양의 작가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미학은 아니다. 파블로 피카소는 과거의 역사와 기법을 철저히 익혀서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으며, 현재 살아 있는 토인의 원초적 감성과 표현방법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놀라운 재구성을 통하여 세계를 바꾸었고, 우리의 보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피카소의 그림 또한 졸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졸(拙)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설명한다면 부득이 ‘어린이의 세계’에 빗댈 수밖에 없다. 어린이의 그림을 보면 순수한 기쁨이 있고 의외의 상상과 변형에 놀라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자연적이고 유치한 졸 즉 ‘치졸(稚拙)’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동심의 부정적인 유치한 면은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동심의 긍정적인 면인 순수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되찾아야할 당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졸은 자연자체가 아닌 극단의 기교를 넘어선 후 자연으로 돌아감을 뜻한다. 이를 치졸이 아닌 ‘고졸(古拙)’이라고 부른다. 고졸에는 자연적인 고졸과 의식적인 고졸이 있는데, 자연적인 고졸은 민족적이며 시대적인 표현양식이고 의식적인 고졸의 미학은 시대적, 민족적 고졸양식에 개인이 경탄하고 부러워하여 인격적인 면에서 동심의 세계를 회복하여 표현되는 개인적인 성취이다. 하지만 대교를 거치지 않았다고 자연적인 졸미를 들어내는 작품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헤타-우마 만화는 ‘대교약졸’의 미학을 성립해 가는 과정의 작품들이라고 바라보고 싶다. 아직도 이러한 만화들에서 보이는 ‘치졸’한 맛을 떨쳐 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극단의 교를 넘어선 후 자연으로 돌아간 ‘고졸’의 맛을 내는 작품은 보이지 않으나, 졸미의 맛을 간간히 느끼게하는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안목과 만화에 대한 취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 우리만화에서 일본의 헤타-우마 만화들이 가지고 있는 졸미(拙美)를 맛 볼 수 있는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다.
만화는 가장 대중적인 문화이다. 하지만 독재정권의 만화 탄압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 편견’에 공격당해 현재는 아직까지 대중문화의 하위문화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한들 미학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만화에 애정 깊은 작가와 독자들이 우리만화 속에서 ‘고졸(古拙)’한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맛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